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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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단점을 꼽자면 그 또한 끝도 없지만, 그래도 에쿠니 가오리에게는 굉장한 장점이 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상의 미세한 균열을 감지해 내는 감도 좋은 안테나와 그것을 그려 낼 줄 아는 섬세한 필력을 가졌다. 아주 사소한 몇가지의 나열로 그것을 묘사해 낼때는 때때로 감탄이 나온다. 확실히, 지나치게 지리멸렬하고 무기력한 인물들에 잔잔한 것도 좋지만 기승전결을 매길수도 없을만큼 사건이라고 할 것이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소설이라는 혹평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서도 그런 섬세함은 빛을 발한다. 그것이 아마, 에쿠니 가오리를 여전히 일본과 한국에서 인기있는 여류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일 것이다.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 그런 장점이 특히 잘 살아있는 책이다. 아홉명의 등장인물과 네쌍의 부부와 일곱쌍의 불륜 커플들의 이야기. 이 아홉명의 등장인물들, 그 중에서도 기혼자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무기력함이다. 특별히 성격자체가 유약하거나 해서는 아니고. 다들, 일상의 미세한 균열들을 더이상 벌어지지 않게하는데 집착하느라, 또는 그 미세한 균열들을 모른척하며 살아가느라 진이 빠져 또 다른 일을 벌일 기운이 도저히 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다.  

결혼을 해 보면 알게된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을 했습니다, 라는 구절이 이제 행복만이 남아있습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에는 신데렐라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벨도 백설공주도 왕자와의 결혼 장면을 마지막으로 동화책을 덮을때 행복으로 충만함을 느낄수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 왕자에게는 왕자를 낳아준 시부모님도 있고, 아마 왕궁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할 것이며(그렇다, 그는 아직 왕자인 것이다. 왕이 아니라. 실권을 쥔 권력자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책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왕자에겐 여동생 또는 누나가 있을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댁의 문제가 없다고 해도, 그 왕자에겐 백설공주가 알지 못했던 주사가 있을 수도 있고, 야수의 탈을 벗고 사람이 되었지만 야수시절의 폭력성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도 있고, 신데렐라를 찾아 헤매느라 가진 돈을 다 써버린 빈털털이 일수도 있고, 잠든 여자만 보면 매력을 느끼고 덤벼드는 바람끼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명을 구해주었기에, 힘든 하녀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기에, 천년간의 잠을 깨워주었기에 앞 뒤 잴 것 없이 고마움과 사랑을 분간하지 못하고 결혼을 했던 공주들은, 어느날 레드 썬 하고서 자신이 왕자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뿐 전혀 사랑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결혼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를 쓰고 결혼을 유지해 나가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고, 굳이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일수도 있고, 상대방의 치명적인 단점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일수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 구절이 아마, 이 소설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아닐까. 

   
  그냥 그대로 지낼 수도 있었는데. (p. 244)  
   

 

남편 시노하라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해(물론 시노하라는 이혼 당해 마땅한 상황이긴 했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으나.) 결국 이혼을 해 버린 에미코가 하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이 고비에서 삶이 갈라진다.  

사실 생활이라는 건 습관의 연속인 법이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어도 정작 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렇게 굳이 또 못견딜 것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 결혼도 그렇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에미코는 단호하게, 

   
  그냥 그대로라면 뭐 때문에 결혼했다는 말인가. 이미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애당초 사랑하지 않았다고밖에 여기지지 않는 남자와. (p. 244)   
   

 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대로 지낼 수도 있다면, 그냥 그대로 지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에미코는 그냥 그대로 지내지 않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고, 남편 신이치에대해 이미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버린 아야는 그렇지만 그냥 그대로 지내기로 결정을 한다. 어느쪽의 결정도 100%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느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50%의 불만과 불안은 늘 공존을 한다. 이혼을 해도 하지 않아도. 결국은 누구와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도우코는 산책길에서 만난 남자 신이치와 불륜에 빠지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고, 연애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상태다. 남자들이 흔히 말하는, 가정은 깰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냥 연애는 즐기고 싶은 그런 상태. 아, 나 그 기분 뭔지 정말 너무 잘 알겠는 거지. -_-;;;(헉 이건 위험 발언인데.) 

이 이야기에서는 하나의 커플이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두 커플이 정식으로 이혼을 하는 걸로 끝이 난다. 물론 그 안에 불륜으로 맺어지는 커플도 있고, 연애 상태였다가 깨어지는 커플도 있기는 하지만, 법률이라는 한계 안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지.  

딱히 재미있다거나 특별히 기발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이런 소설을 읽는 건 그것 나름대로 또 의미가 있다. 다시한번 뭔가에 대해서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습관이 되어버리는 사랑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쓸쓸한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주니까. 그러니까, 사랑이 습관이 되게 하지는 말으라고, 그냥 그대로 지내지 못할 것도 없어서 같이 사는 그런 관계가 되지는 말자고, 연애때처럼 그렇게 죽자사자 목을 늘이지는 못해도, 그래도 내가 당신과 사는 이유는 내가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굳이 이혼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런 이유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해서라고 느낄수 있게 살아가자고, 그런 생각들을 하게 해준다. 

그래... 이제 알 것 같다.  

일상의 균열이라는 거,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미세하지만 분명 균열은 균열로서 생겨있을때, 사람은 참 쓸쓸해 진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왜 그리 스산했는지 알 것 같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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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7-0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그대로 지낼 수도 있었는데...로 시작해
더 많이, 더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야겠다...끝나는
리뷰, 감명깊게 잘 봤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한번 결정히면 그저 최선을 다해 만족하도록 하면 되는것이란 생각이 다시 드네요.

아시마 2010-07-02 19:31   좋아요 0 | URL
행복도 불행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었는데... ㅎㅎ
타인의 행 불행을 너무도 쉽게 재단해서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스럽다는 건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구요.
열심히, 그냥 말고 행복하게, 그렇게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타인의 행 불행에 대해 내 맘대로 재단해서 말은 물론이고 생각도 하지 말자는 생각도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재단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을거라는. (앗, 이건 공지영 책에서 공지영이 한 말 같기도 하군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노력하려는 태도도 필요하고... 때로는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할줄 아는 용기도 있어야 할테고...
인생에 필요한 것들은 참 많아요, 그쵸?

루체오페르 2010-07-02 22:26   좋아요 0 | URL
아 참 공감가는 말씀들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이를 떠나 삶에 필요한 그런 것들을 체득,체화 시켜나가는 것이 연륜인듯 합니다.

누가 하신말인진 모르겠으나, 불경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으나...
'행복도 내가 짓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짓는 것이네. 아,진정 행복도 불행도 나의 것, 다른 이가 아니네'

마녀고양이 2010-07-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탐독하다시피 했었습니다. 푹 빠져지냈죠.
머랄까... 말이 많지 않음이, 그리고 표현이 과하지 않음이 마음에 들었달까요.
한참 생각하게 만들고 가끔 슬프게도 만들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서,
제 회피 성향에 잘 들어받는 글들이었답니다.

결혼 이후의 이야기들. 절대 공감합니다. ^^

아시마 2010-07-05 11:55   좋아요 0 | URL
그쵸,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약간 회피성향이 있는 사람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그 등장인물들이 사건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삶의 방식이 회피를 기준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건가 싶기도 하구요. 한편으론 또 너무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구요.

결혼 이후의 이야기들은... ㅎㅎㅎㅎ 결혼을 하면 너무 절감을 하는 것들 아닐까 싶어요. 뭐, 남자들도 그렇겠죠,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것들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사실 저도 알고 싶어요. 남자들아, 니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니...

blanca 2010-07-0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과 저가 좋아하는 지점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랍니다. 저는 에쿠니 가오리가 대단하지 않은 얘기들을 그 대단하지 않게 풀어 나가는 그 섬세한 필력이 넘 좋아요..그게 일상의 균열을 감지하는 능력이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아시마 2010-07-07 12:41   좋아요 0 | URL
블랑카 님과 제가 그렇게 접점이 많다니 전 좋기만 한데요. ㅎㅎㅎㅎㅎㅎ

전 그래도 에쿠니 가오리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전 좀 더 열정적인 타입이 좋거든요. 소설도 서사가 강한 쪽을 선호하는 편이구요. 저한테 에쿠니 가오리는 너무 심심해요.

더 중요한 건,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서, 에쿠니 가오리 소설은 죄다 사다 모으고 죄다 읽었다는 거. -_-;;; 뭐냐구요,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