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 지나치게 개인정보를 수집한다는 기사를 한 때 본 적이 있지만 그 이후로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잊고 지냈다. 이 다큐를 보면서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제목처럼 구글이 종이책을 전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룬다. 문제점으로 제기 되는 점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 저작권 침해, 구글의 독점이다. 사실 이용자 입장에서는 전세계 도서관 책을 구글검색으로 볼 수 있다는데 좋은 거 아닌가, 하게 된다. 과거 논문이나 자료를 복사하기 위해 국립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직접 가야했는데 지금은 일정 사용료만 지불하면 PDF파일로 받아서 읽을 수 있으니 시간도 절약되고 편리한 게 사실이다. 모든 일에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라 부수적으로 단점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가령, 안경이 불편해서 콘택트렌즈를 사용해서 편하지만 눈이 점점 건조해져서 나중에는 눈동자에 렌즈가 붙어서 안 떨어지는 일도 감수해야한다. 눈 나쁜 사람한톄 안경인지, 콘택트렌즈인지, 라섹 수술인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데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몇 개의 대안 중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을 각 개인이 하는 것이다.

 

구글지도가 도로 설정을 보여주면서 본의 아니게 자동차 번호판이라든가, 집의 번지를 노출시키는데 악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나는 희박하다고 본다. 너무 안이한 생각인가? 그렇게 따지면 멤버십 카드에 대해서도 걱정해야한다. 멤버십 카드는 loyalty card다. 즉 내 정보를 마케팅에 이용해도 동의하고 그 회사 제품만 사겠다는 충성을 바치겠다는 카드다. 그리고는 눈곱만큼한 캐시백이나 포인트를 적립받는다. 그것도 운영사의 입장에 따라 소멸 되기도하고 얼마 이상을 모아야 쓸 수 있는, 아주 제한이 많다.그런데도 우리는 기꺼이 자기 정보를 팔아 적립금을 받는다. 물론 구글과 멤버십 카드는 다른 점이 있다. 구글은 동의를 구하지 않는 거고 멤버십 카드는 내 동의하에서 이루어진다. 알면 괜찮고 모르면 안 된다는 걸로 비약할 수도 있겠다.

 

구글은 무료 검색엔진을 운영하지만 이익집단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람들이 검색어를 더 세부적으로 입력할 수록 구글의 가치는 높아진다. 책은 지적재산권이 걸려있지만 구글은 각 도서관이나 단체랑 비밀리에 계약을 맺고 헐값에 전자도서 스캔을 한다. 전세계 자료를 구글이란 매체를 통해 하나로 열람하는 기능에 관심있어 보이지만 가장 커다란 위험은, 구글이 지식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구글이 부르는 값을 주고 자료를 사거나 열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전문가들이 걱정한다. 구글은 아직까지 그런 생각까지 실제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럼 이 위험을 누가 가장 크게 감지하는가? 바로 같은 데이터를 구축하려는 아마존같은 회사다. 이 말은 구글이 안 하면 아마존같은 회사가 할 것이다. 아마존도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기에 구글이 무시하고 있는 저작권을 보호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구글에 전쟁 선포를 한 프랑스와 독일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은 구글 검색 자료가 주로 영어로 되는 것에 주목한다. 구글링으로 알 수 있는 것 주로 영어자료일 수 밖에 없는데 접근 자료에 대한 언어는 사람의 의식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문제기도 하다. 당연히 도서관장은 불어 자료를 위해 대통령의 지원을 얻었다고 한다. 즉 프랑스가 구글에 대항하는 궁극의 이유는 헤게모니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언어는 지식과 문화 뿐 아니라 생활 습관까지도 지배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걸, 과거 식민지를 거느렸던 나라들은 잘 알고 있다. 구글링으로 기사를 검색할 경우, 특히 과월호 잡지에 실린 글들은 당연히 영어고 영어권의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작권 침해도 그렇다. 저작권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람한테는 저작권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저자들은 이미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평생 책 한 권 달랑 내고 게다가 절판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 있다고 치자. 그러다가 구글링으로 조회수가 올라가서 구글이 그 사용권을 독점하게 되면 구글은 저자한테 다시 저작권을 돌려줘야하나? 유투브에서 결제를 하고 싸이 뮤직비디오를 봐야한다면 싸이가 세계투어를 할 수 있었을까? 돌맞을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죽어가는 작품이 다시 살아나는 건 어떤 계기가 있어야한다. 바흐의 작품이 잊혀졌다가 한 푸줏간 주인이 바흐의 악보로 고기를 쌌고 손님이 그걸 알아봐서 악보가 발굴되었다. 일단 노출되지 않으면 저작권이 무슨 의미가 있나. 몬세라트 수도원 도서관장은 수도원 자료를 구글에 무료로 게재했다고 한다. 자료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길 원해서다. 그러니까 저작권 운운하는 것도 일부 힘있는 작가와 출판사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시장에서의 헤게모니 싸움이 저작권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구글은 저작권 때문에 소송 중이라고 한다. 그래도 구글 라이브러리는 계속 되고 있고.

 

구글이 봉사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구글한테 선행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글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구글이 아니어도 언제든 구글같은 생각을 가진 기업이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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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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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요즘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읽는데 몸은 잘 안 읽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책이라고나 할까.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통찰력과 성찰력은 있으시다. 초반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본래 사람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다른 나라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더더욱 힘들다.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사람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역, 처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운 아파트나 농가, 어릴 적 하던 놀이,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란 민간 속설들, 먹는 음식, 공부한 학교, 좋아하는 스포츠, 읽은 시들, 믿는 신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그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한다. 이것들은 그저 남에게 전해 들어서는 알 수 없고 직접 경헙해야만 알 수 있다. 스스로 겪고 생활해야만 알 수가 있다. 또한 타국 사람에 대해서는 오로지 관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책에서 그들을 신빙성 있게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11-12쪽)

 

이 구절에 유레카를 외치면 옮겨 적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물들의 일생을 관찰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전적으로 화자(몸)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게다가 영웅주의에 대한 숭배가 깔려있다. <달과 6펜스>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소설은 초반과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단점만 눈에 들어와서 끝까지 못 읽겠다.(387쪽까지 읽다 중단함) 래리란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든 인물은 래리를 중심으로 수렴된다. 근데 이 주인공인 래리란 인물이 수상쩍다. 스트릭랜드의 도플갱어같은데 다른 인물의 심리는 화자가 대체로 단정짓고 묘사하는데 래리만은 수수께끼같은 인물로 남겨둔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십 년 동안 동양을 여행하다가 파리에 다시 돌아와서는 예수같은 행동을 한다. 물론 래리가 거들먹거리거나 하지 않지만 래리를 묘사하는 시선에는 래리를 성자의 위치로 올려놓는 면이 있다. 그리고는 과거 래리를 사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왜 래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하는데 래리한테 보이지 않는 강한 자기장이 흘러 저절로 끌려들어가는 인물들이 열정을 이야기한다. 래리와 함께 하진 않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래리에 대한 열정으로 끓어오르는지. 그러나 래리는 부정한다. 이 작품은 몸이 노년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열정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인다.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280-281쪽)

 

더 오래 살아 본 후에 하는 말이기에 맞는 말이긴 하다. 래리를 사랑하면서도 평범한 안정을 주는 사람과 결혼한 이자벨, 래리와 결혼하려는 순간에 자신의 습관을 버리기 두려워 도망간 소피.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파괴적 열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인생은 흘러가고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 이것도 맞는 말인데 위안이 되기 보다는 늙는 거란, 참 재미없게 세상을 바라보는 거란 걸 알려줘서 서글프네. 나는 언제나 열정이 결핍되어 있는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열정의 옳고 그름보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인물에 격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이 차갑고 갑자기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몸처럼 나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슬프네. 내 노인같은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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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데이먼이 게이로 나온다니, 믿어지지 않으니 직접봤다. 나는 맷 데이먼을 싫어했다. 미국청년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하나. 그러다 뒤 늦게 <굿 윌 헌팅>을 봤다. 벤 애플렉과 공동 시나리오를 썼는데 거기서 맷 데이먼이 하는 대사 중에, 미국역사를 알려면 하워드 진을 읽어라, 가 있다. 하워드 진은 미국 역사를 민중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한 분이다. 보통 역사가 소수 승리자의 기록인데 하워드 진은 패자인 다수의 관점에서 역사를 썼다. 맷 데이먼이 이 대사를 썼는지, 벤 애플렉이 썼는지 확인 할 길 없지만 이 대사를 맷 데이먼이 했다. 나는 이 때부터 맷 데이먼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맷 데이먼보다는 마이클 더글라스가 더 인상적인 영화다. 마초 역할을 해 왔던 이는 더 이상 없고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는 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리버라치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리버라치의 삶을 요약하면 요즘 기획사들이 길러내는 아이돌 시스템의 전신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원래 피아니스트였나본데 1인 뮤지컬처럼 쇼도 하는 그야말로 엔터테이너. 사실, 나는 가수는 콘서트에서 노래를 해야지 퍼포먼스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자다. 리버라치, 혹은 퍼포먼스 중심의 엔터테이너의 쇼를 즐기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의 큰 볼거리 중 하나로 그런 쇼를 살짝 재현하는데 재미는 없다.

 

영화의 포인트는 리버라치의 연인 스캇(맷 데이먼)과의 관계가 피어나고 스러지는 걸 보는 거다. 리버라치는 스캇한테 첫 눈에 반하지만 스캇은 리버라치한테 움찔한다. 스캇은 원래 게이가 아니다. 그런 사람이 게이(본인은 양성애자라고 한다)가 된다. 처음엔 그저 리버라치가 제시하는 안정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서로 취직을 하지만 곧 리버라치의 연인이 된다. 처음에 리버라치는 스캇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만 스캇은 리버라치의 마음이 떠날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는다. 리버라치는 자신의 전부라고. 리버라치는 스캇을 길들였다.

 

제목이랑 작가를 기억해내려고 아무리 애써도 기억이 안나는데,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담은 소설이 있다. 남자를 만나기 전 여자의 머리 속은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맑스를 읽던 시간에 남자한테 만들어줄 스파게티 소스 레시피를 읽고 이데올로기로 가득 했던 머리 속은 남자가 뭘 좋아하는 지로 가득차게 된다. 이렇게 사랑은 상대를 길들인다.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스캇은 리버라치를 만나기 전의 자아를 잊고 리버라치의 취향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는 찾아오는 이별. 사랑에서는 왜 파국이 존재하는가.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상대의 취향대로 살기 때문인데 상대의 취향대로 살아도 행복한 게 사랑이라고 리버라치가 영화 중간 중간에 노래를 한다.

 

두 사람이 동성이라서 그렇지 이성간에 사랑의 생성과 퇴락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랑 후 찾아오는 게 우정이 아닐까. 리버라치는 스캇을 버렸지만 죽음과 친구해야하는 순간에 스캇을 찾는다. 두 사람 사이에 애증은 시간 덕분에 바래고 한 때 서로를 지탱해줬던 우정이 남는다. 그래서 사랑보다 우정이 힘이 세다고 나는 믿는다. 살아남는 게 강한 거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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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등장인물부터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낮도깨비란 떼강도 멤버들 모두 소름끼치게 연기 잘한다. 김윤석은 이 영화에서도 무표정하고 잔인한 캐릭터다. 마지막 씬에서 화이를 눈빛으로 압도하는 장면이 있다. 긴장감은 고조되고 조명은 김윤석 얼굴쪽으로 환하게 비추는데 환한 빛속에서 빛나는 서늘한 눈동자. 눈동자도 제어할 수 있는 연기력이라니!

 

<이웃사람>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나왔던 김성균. 화이가 운전하는 트럭과 낮도깨비가 탄 밴이 추격씬을 벌이는 긴박한 상황에서 나는 김성균 얼굴만 봤다. 김성균은 이 세상 혼이 아니라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기 위해 지옥 어딘가에서 내려보내진 전령 같았다. 차가 어딘가에 부딪치려하는 공포의 순간마다 김성균은 섬뜩한 미소를 짓곤한다. 야비하면서도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순간을 마음껏 즐기는 미소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라스트 시퀀스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죽는 순간에도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고 미소를 짓는다. 이 사람은 이미 죽음 따위엔 관심없고 죽어가는 과정을 스페턱클로 즐기는 로마시대 귀족같다.

 

조진웅. 해품달에서 처음 유심히 봤는데 그 다음에 <범죄와의 전쟁>에서 기름에 사우나하고 나온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어눌하고 말도 더듬고 멤버들 중 가장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물이다. 이 분도 연기 스페트럼이 장난아니시다.

 

그리고 화이 역을 한 여진구. 장준환 감독이 인터뷰하는 걸 잠깐 봤는데 심리치료 받고 잘 일상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정말 심리 치료가 필요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대사 별로 없고 표정과 눈빛으로 분노와 고통을 연기하는 씬이 많은 데 아주 훌륭하다!

 

2.

중반쯤 가면 줄거리가 대충 짐작이 가서 스릴러로서의 가치보다는 장준환 감독이 탐구하고 천착하는 세계관을 좀 더 들여다보자. 낮도깨비란 떼강도가 아이를 유괴해서 키운다. 화이는 그들 모두한테 아빠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는 아빠(들)이 아들을 키우는 이야기를 통해 사회 전반 구조의 알레고리를 접목시킨다. 유괴당한 아이가 유괴범들의 손에서 유괴범들의 특징을 학습하며 자란다. 판단하기, 문 따기, 총쏘기, 곡예 운전하기.  아버지들이 무리를 이룰 수 밖에 없다. 아버지들은 각각 하나의 특기만을 가졌다. 화이는 이 모든 특기를 주입받은 완전체처럼 길러진다. 단 정신적 트라우마도 함께 상속받는다. 보육원 시절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괴물로 괴로웠던 이(김윤석)은 자신이 괴물이 되고서 괴물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화이 역시 괴물을 보는데 김윤석은 화이를 자신과 같은 괴물로 만들려고 한다. 자신이 괴물을 이긴 방법을 아이한테 강요한다.

 

그럼 왜 그는 괴물을 이기는 괴물이 되었나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종의 열등감 탓이다. 부유하고 반듯한 화이의 친부는 절대 선처럼 행동한다. 김윤석은 무의식적으로 계급에 대한 증오로 절대 악으로 돌아서는 선택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이 속할 사회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화이는 상징적 인물이다. 절대 선의 영역에 있을 수 있는 아이를 절대 악으로 만들 수 있는 건 환경이라는. 아이 역시 심한 멘붕현상을 겪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에 적응해간다. 김윤석은 죽지만 화이란 완전체는 김윤석의 승리로 보인다. 화이는 이제 아버지들의 도움없이 혼자 사람을 죽이고 판단을 할 수 있다. 건설사 사장을 죽이는데, 건설사 사장은 보이지 않는 사회악이지만 자본주의에서는 필수요소이다. 화이는 사회의 필요악을 죽였다. 화이는 괴물인가 괴물이 아닌가. 건설회사 사장은 괴물인가 희생자인가.

 

3.

영화가 전반적으로 너무 어둡고 희망도 없다. <지구를 지켜라>보다도 더 어둡다. 김기덕 감독스러운 면도 보이는데 감독은 왜 더 어두워져 가는가. 나이들고 가정도 이루고 아이도 키우는데....

하나 놀라운 건, 내가 피를 눈 뜨고도 봤다는 것! 심지어 멧돼지 머리에 총탄이 날아가 박살나는 과정도 두 눈 똑바로 뜨고 봤다. 어찌된건지 어리둥절하다. 나, 이제 강심장이 된 건가. 물론 이 영화에서 피가 너무 선홍색이어서 가짜라는 인식이 영화 시작부터 지배했다. 나도 피 범벅이 되는 장면들을 이겼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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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10-1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피범벅 장면 못 보는데, 이 영화는 봐지던걸요, 이제부터 볼 수 있게 되었나,가 아니라, 이 영화가 그런 영화였던 것 아닐까요? ㅎㅎ 제가 고개를 돌렸던 장면은 여진구가 풍뎅이 눌러 죽이는 장면 ( 안 봐서 모르겠지만, 아마, 눌러 죽였죠? ) 그 장면이 섬뜩했어요.

이 영화 보면서, 아주 옛날옛적에 본 타란티노 '저수지의 개들'도 생각나고, 오우삼 감독 홍콩느와르들도 생각나고 그러더군요.

김윤석은 ... 여진구는 ...

넙치 2013-10-16 10:5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건가요?! 이 영화보면서 제가 두 눈뜨고 보는 게 너무 기특해서 이게 무슨 일이지, 했는데..하이드님도 그러셨군요.@.@ 풍뎅이한테서도 노란 물이 찍 나왔어요.ㅋ 아마도 죽었겠죠.저는 오히려 칼이 등장해 배를 찌르는 장면들은 여전히 못 보겠더라구요.ㅜ 창고란 공간을 타란티노 감독이 참 잘 사용했죠?^^

여진구는 김윤석에 필적할 정도의 연기력이니 앞으로도 기대되요.

맥거핀 2013-10-1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서재에서 정리해주신 이야기를 다시 읽으니 참 흥미롭네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지 싶을 정도로요. (이거 원작이 있는 건 아니죠?) 볼까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점점 보는 쪽으로 기울어져 갑니다.^^

넙치 2013-10-16 10:52   좋아요 0 | URL
크래딧에서 원작은 못 본 거 같아요. 복수는 나의 것도 좀 생각나는 영화에요. 맥거핀님 왜 안 보려 하셨을까...맥거핀님이 글쓰기 좋은 영화인데.ㅎㅎ 이 영화는 인물들의 행동을 주로 묘사하다보니 사실 서사는 좀 빈약하기도 한데 감독의 주제의식은 선명한 편이에요.
 

 

 

 

 

 

 

 

 

 

 

영화 자체는 지루한데다가 길었다. 런닝 타임을 확인 안 해서 영화보는 동안 몇 번이나 시계를 봤는지 모르겠다. 반 고흐 말년을 다루는 영화다. 오베르 쉬르 와즈 시절인데 영화가 좀 산만하다고 해야하나. 가령 (아마도) 몽마르트에 있었던 유곽 씬인데 고흐를 사랑한 가쉐 박사의 딸이 고흐를 찾아 파리로 밤에 왔다. 둘이 재회한 장소는 바로 이 유곽인데 필요 이상으로 캉캉 춤이라든가 행진춤을 스페터클화 한다. 주요인물을 다락방에 쳐박아두고 흥겨운 장면을 꽤 길게 보여주는 지 의아하다. 등장인물도 너무 많이 등장하고 비중도 엇비슷해서 깊이감이 없다. 영화 초반에 가쉐 박사 가족과 만남을 묘사한 거 보면 피알라는 반 고흐와 가쉐 박사 딸의 로맨스를 다루고 싶은 거 같기도 하다. 하여튼 이 영화, 좀 많이 이상하다. 인물의 정사씬은 단추를 잠그는 걸로 끝내고 테오의 아내가 목욕하는 누드 씬을 내보내고. 맥락이 안 맞는다. 맥락이 꼭 안 맞아도 그럴듯해야 하는데 내키는대로 영화를 만든 거 처럼 보인다.

 

고흐만큼 현재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화가가 또 있을까. 당대에 길에 내놓아도 안 가져가던 그림을, 우리는 감히 소유할 엄두를 못내고 달력으로, 컵으로, 마우스 패드로 소유하려고한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봤으면 고흐는 기뻐했을텐데... 테오의 아내는 인정받지 못한 화가는 생계를 위해서 그림을 그만 그려야한다, 누구나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다, 살아야하니까 좋아하는 걸 포기하고 일한다, 고 한다. 그래 그렇지. 버지니아 울프는, <로마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유산상속자가 아니었더라도 로마 쇠망사를 쓸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던졌다. 삶을 송두리째 잃지 않기 위해서 노동은 필요하다고 했던 까뮈도 있다. 그러니까 밥이냐 예술이냐는 과거에도 현재도 마찬가지 고민이다. 고흐의 편지를 읽으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먹고 그저 한가하게 취미생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자신도 일을 하고 있다는 걸, 테오한테 구구절절하게 이해시키고 싶어하는 대목들에 울컥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모든 이는 예술가라고  일반화해도 되지 않을까. 타협 없는 하나의 목적 의식이 사람을 어두운 고독의 심연으로 이끄는 건 분명하다. 그 고독의 심연이 없이는 예술 또한 없었을 테니. 예술을 감상하는 이는 다른 이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트의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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