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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왜 요즘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읽는데 몸은 잘 안 읽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책이라고나 할까. 당연하지만 기본적으로 통찰력과 성찰력은 있으시다. 초반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본래 사람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다른 나라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더더욱 힘들다.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사람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역, 처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운 아파트나 농가, 어릴 적 하던 놀이,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란 민간 속설들, 먹는 음식, 공부한 학교, 좋아하는 스포츠, 읽은 시들, 믿는 신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그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한다. 이것들은 그저 남에게 전해 들어서는 알 수 없고 직접 경헙해야만 알 수 있다. 스스로 겪고 생활해야만 알 수가 있다. 또한 타국 사람에 대해서는 오로지 관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책에서 그들을 신빙성 있게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11-12쪽)
이 구절에 유레카를 외치면 옮겨 적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인물들의 일생을 관찰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고 그게 전적으로 화자(몸)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게다가 영웅주의에 대한 숭배가 깔려있다. <달과 6펜스>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소설은 초반과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단점만 눈에 들어와서 끝까지 못 읽겠다.(387쪽까지 읽다 중단함) 래리란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든 인물은 래리를 중심으로 수렴된다. 근데 이 주인공인 래리란 인물이 수상쩍다. 스트릭랜드의 도플갱어같은데 다른 인물의 심리는 화자가 대체로 단정짓고 묘사하는데 래리만은 수수께끼같은 인물로 남겨둔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십 년 동안 동양을 여행하다가 파리에 다시 돌아와서는 예수같은 행동을 한다. 물론 래리가 거들먹거리거나 하지 않지만 래리를 묘사하는 시선에는 래리를 성자의 위치로 올려놓는 면이 있다. 그리고는 과거 래리를 사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왜 래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하는데 래리한테 보이지 않는 강한 자기장이 흘러 저절로 끌려들어가는 인물들이 열정을 이야기한다. 래리와 함께 하진 않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래리에 대한 열정으로 끓어오르는지. 그러나 래리는 부정한다. 이 작품은 몸이 노년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열정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인다.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 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280-281쪽)
더 오래 살아 본 후에 하는 말이기에 맞는 말이긴 하다. 래리를 사랑하면서도 평범한 안정을 주는 사람과 결혼한 이자벨, 래리와 결혼하려는 순간에 자신의 습관을 버리기 두려워 도망간 소피.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파괴적 열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인생은 흘러가고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 이것도 맞는 말인데 위안이 되기 보다는 늙는 거란, 참 재미없게 세상을 바라보는 거란 걸 알려줘서 서글프네. 나는 언제나 열정이 결핍되어 있는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열정의 옳고 그름보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인물에 격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이 차갑고 갑자기 재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몸처럼 나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슬프네. 내 노인같은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