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발타자르 펭귄클래식 66
로렌스 더럴 지음, 권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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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독서가 전무한 상태인데 이제 정신을 차리니 좀 살 것 같다. 한 달간은 조금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더불어 독서의지도 불타오른다(?).  

1권 <저스틴>에 실망해서 밀쳐뒀던 책인데 그래도 절반은 읽어야하지 않나, 하는 의무감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2권은 1권 보다는 훨-씬 좋다. 그래서 3,4권도 오늘 오전에 주문했는데 집에 와 보니 도착했다. 간만에 알라딘 당일 배송이다.ㅋ  

1권에서 비춰진 저스틴은 휴지조각처럼 가볍고 버려도 되는 인물이었다. 2권에서 저스틴이란 인물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금사빠'이면서 섹스를 즐기는 저스틴은 아랍권 문화에서는 잔다르크이다. 섹스로 나라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저스틴은 섹스만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근원적 수단이라고 여긴다. 아쉬운 점은 저스틴의 심리가 화자, 즉 작가의 관점에서만 서술된다는 것이다. 저스틴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독자는 화자한테 기댈 수 밖에 없는데 화자는 굉장히 가부장적이다. 작가 혹은 화자는 육체적 사랑의 존엄함을 믿고 정신 영역을 일종의 허상으로 치부한다. 서양문화권에서 젠체하거나 계몽적인 사상에 염증을 느낀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육체만이 해결책인 것처럼 서술하는 건 동의하지 못하겠다.  

이건 작가의 이력과도 관련이 있을 거 같다. 그는 어쩌면 철저한 문명인으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스틴은 그의 유토피아다.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로렌스 더럴은 주변의  시선을 몹시 의식하며 평생을 보냈거나. 

사중주란 제목처럼 이 소설의 윤곽은 빌어먹을 사랑이다. 그것도 엇갈린 운명의 사랑. 네심의 언청이 동생인 나로우즈가 바치는 클레어에 대한 사랑, 네심이 저스틴에게 바치는 사랑, 둘 다 이해 안 된다. 물론 사랑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클레어의 말대로 클레어가 어떤 여지를 만든 것도 아닌데 나로우즈는 왜 클레어를 사랑하는 걸까. 나는 이런 맹목적 또는 운명적 사랑을 믿지 않는 편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는 편이다. 단 한 번의 스침으로 강렬한 해바라기를 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역부족이고 쓸데없는 정보를 너무 많이 주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로우즈와 네심이 겪은 사랑을 동경한다. 그래서 3, 4권을 읽을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다. 소설이나 드라마가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허구 속에서 잠깐이라도 살고픈 바람 때문에 소설이나 드라마가 번성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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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5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06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사중주 : 저스틴 펭귄클래식 65
로렌스 더럴 지음, 권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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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으로 된 연작소설인데 이 책에 끌린 이유는 첫째, 표지가 너무 예뻐서이고 둘째, 알렉산드리아 도시 이야기 때문이다. 두 번째 권인 <발타자르>는 표지 사진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포스가 있다. 이렇게 소설 자체보다는 아무런 정보없이 첫 권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저스틴>을 읽어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숙고(?)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위안하련다. 원문의 문체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글로 번역된 이 작가의 문체는 문체라기 보다는 무라카미류처럼 가벼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벼운 문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가벼운 문장들을 엮어냈을 때 무언가를 담을 정도로 단단함이 있어야하는데 아쉽게도 이 소설은 가볍다는 말만 나온다.  

그러나 가벼운 문장 속에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저스틴>은 맨나이저manizer쯤 되는 여인의 이름이다. 쉽게 남자를 사귀고 헤어지지만 그 뒤에 숨은 아픔이 있을 거라고 추측케하는 인물이다. 독자가 저스틴의 깊은 슬픔에 호기심을 갖게 하기보다 내가 왜 그런 슬픔을 알아야하는 거니, 하고 신경이 곤두선다. 이게 작가의 관점이고 역량이고 또 내 취향일터인데 저스틴에게 매력을 느끼는 두 남자를 통해 바라본 서술법은, 평면적이다. 즉 감상이라고 적을만한 게 별로 없다. 내가 서사 중심의 소설보다는 심리나 현상에 대한 고찰을 다룬 문장들을 선호하는 편이긴 하지만 소설이란 게 이야기를 통해 깊은 고찰이나 그도저도 아니면 읽을 때라도 즐겁게 해 줘야하는 거 아닌가..투덜거려본다.

펭귄 클레식이니, 그래도 2권인 <발타자르>를 참고 읽어보자고 심드렁한 마음을 다독여본다. 무엇보다도 표지가 매력적이잖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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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내마음 - My Burning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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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기 보다는 케이블 에서 방영하는 <남녀탐구생활> 같은 분위기다. 찌질해도 젊으면 싱싱해보인다.ㅋ 젊음은 찌질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과 희망이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2년간 짝사랑만 하던 이병렬이 오로지 미희만을 바라보며 공부만이 살길이라며 고시준비를 하고 취직시험 준비를 한다. 물론 다 떨어지고 머리만 빠져가는 백수다. 미희란 여자는, 수컷을 끄는 페로몬을 자체 발향하는 여인이다.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은 그녀의 남친이 되기위해 열정을 바친다. 그 열정이란 게 일시적이어서 문제지. 사랑을 쟁취하려는 결투의 변주가 몇 번 일어나고 슬랩스틱한 요소가 넘쳐 원초적 웃음을 선사한다. 만화같기도하지만 재기발랄하기도 하다.  

열정적 구애를 하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등을 돌리며 포기할 뿐 아니라 분노하는 수컷들의 가벼움은, 만나고 헤어짐의 가벼움을 다룬다. 뛰다가 벗겨지는 슬리퍼 한 짝처럼 이성에 대한 구애는 절대적인 게 아니지만 병렬만은 끈기가 있다. 벗겨진 슬리퍼를 다시 고쳐 신는 식이라고 할까. 스쳐가는 가벼운 만남 속에서도 '짝' 혹은 콩깎지가 덮인 커플의 운명론적 관계가 리얼리티를 보완한다. 백수 병렬과 모두에게 섹쉬한 미희는 서로의 눈에 안경알이며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알콩달콩하다.   

무수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비슷한 포맷이지만 나올 때마다 관객을 끄는 건 아마도 인간의 망각 때문인 거 같다. 남녀 이야기는 아무리 비슷하고 아무리 반복해서 듣고 봐도 늘 새롭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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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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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박경철 씨 편에서 보고 주문했다. 추천한 책으로 올려 준 책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독서목록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세계관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경제학 서적은 실제로 몇 권 안 되고 대부분 인문학과 예술 관련 책들이다. 경제학 서적만으로는 통찰력을 기를 수 없다, 가 내 주장인데 이 분의 통찰력은 광범위한 독서가 거름이 되는 거 같다.   

제레미 리프킨의 책은 어딘지 2% 부족한 면이 늘 있다. 방대한 구체적 자료와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지지를 보내기가 망설여지게 한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을 비교해가면서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경제, 사회, 종교, 정치 분야까지 총 망라한다. 오백 쪽이나 되는 긴긴 독서로 백 쪽은 줄일 수 있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상기시켜주는 효과도 있지만 지루하기도 하다. 

(나중에 까먹을 걸 위해서) 요점을 정리해보자면,   

아메리칸 드림은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기회균등을 지향하고 개인의 자율의 상징인 사유재산 축적과 보호에 중점을 둔다. 유러피언 드림(이 용어가 학계나 다른 분야에서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은 집단 소속감을 바탕으로 개인의 패권을 희생하더라도 삶의 질을 추구하며 따라서 소득의 재분배에 가치를 둔다. 아메리칸 드림이 성공적으로 보였던 건 미국인들이 낙관주의로 꿈을 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러피언 드림이 성공하려면 유럽인들의 기질 속에 있는 비관주의를 털고 낙관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또 대안으로 "공감" 정치를 주장한다. 이타심으로는 인간 의식의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고 보편적 문제나 이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가 이 책의 골조다.  

사유재산 형성 과정이나 이민 딜레마 등 같은 챕터에는 뛰어난 통찰력이 들어있지만 이 책의 전반적 주장은 "꿈" 같다. 특히 EU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동경은, 유럽인들의 입장이 아니라 미국인의 입장처럼 보인다. 유럽공동체는 경제 공동체다. 주권 국가들의 목소리는 경제라는 공동의 이익 앞에서 낮춰지는 걸 택했다. 공동체 법이 각국의 법 보다 우선시 되는 것 처럼 보이는 건 각국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일 거다. 반면에 미국은 연방국가이다. 연방법은 각주를 통제하려면 강력해야하고 때로는 국제법보다도 미국법이 우선시 한다는 걸 보여줘야한다. 출발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놀랍게도 유럽이 소속감을 우선시한다는데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럽인들은 정작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한 때 유럽의 연대감에 궁금증을 품은 적이 있다. 파리에서 대중교통 파업은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같으면 분통을 터트리며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비난하느라 바쁘다. 언론도 굉장히 감정적이어서 시민들의 분노를 담은 인터뷰를 내보내 시민의 분노는 시민의 권리라고 도와주는 거 같다. 왜 파업을 하는지 근로자들의 목소리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파업을 해도 사람들은 덤덤하다. 어떤 철도 역에 까페에서는 웰컴 투 파업이란 피켓도 본 적이 있다. 이 때 겪은 문화적 충격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다! 대체로 파업에 대해 받아들이지 분노를 표현하는 시민을 본 기억이 없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내 불편함보다 근로자로서의 연대가 더 강했기 때문일터이다. 이런 연대감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지..한국에 살고 있는 나로선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짐작은 가능하다.  

미국이나 한국은 모든 걸 개인이 짊어져야하는 나라다. 유럽은 개인의 가난이나 사회적 문제가 사회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여긴다. 리프킨이 지적했듯이 세계관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처럼 선악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며 선민의식을 고취하고 재산 축적을 신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거다. 교회 밖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기회의 불평등을 체념하는 편이고 결과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입시나 취직이라는 생존경쟁의 성공이나 실패를 개인의 능력으로 보는 편이다. 학벌이 없는 이와 학벌을 가진 이가 받는 차별을 당연시하고 학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학벌이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은 채. 그러니 악순환은 이어진다.  

또 하나, <소유의 종말>에서 접근권access을 강조했는데 이 책에서도 소유권보다는 접근권을 강조한다. 접근권이 유럽식 사고지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가령, 대학등록금만봐도 그렇다. 미국이나 한국은 학비가 비싸다. 유럽의 대부분의 대학이 등록금이 거의 없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무상으로 받았던 교육비를 사회에 환원하려면 소득 중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기꺼이 낸다. 그러나 개인이 전적으로 학비를 책임지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세금을 내기를 꺼린다. 다른 복지제도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접근권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은 소유와 축적이다. 누구나가 자본가가 될 수 있다면 되려고 하지 빌려쓰고 갚을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제레미 리프킨의 글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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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31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트리아에서도 놀랬어요. 한국보다 더 심한 소음을 내면서 빈의 도심 차도 한 차선을 장악하며 걸어가면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데 누구도 빵빵거리지 않는거예요. 그때의 충격을..

유럽과 우리는 많이.. 아주 많은 부분이 다른 것 같았어요.. 넙치님.

넙치 2010-03-31 12:50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에서도 시위가 있다니...픽션처럼 들려요.ㅎㅎ;;
유럽의 연대감에는 물론 깊은 역사와 희생이 바탕이 되겠지요?

반딧불이 2010-03-3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유의 종말>에서 저자는 제품보다는 이미지를 판매하고, 소유보다는 접속을 선호한다고 했었던것 같아요. 그러니까 산업자본주의가 문화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다는 얘기로 이해했었어요. 환경은 다르지만 일정정도 수긍할만했었는데 교육이나 사회환원의 문제에서는 넙치님 말씀처럼 전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것 같기도 하네요.

넙치 2010-03-31 12:54   좋아요 0 | URL
<소유의 종말>에서 access란 단어를 번역자가 접속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용권이나 접근권이 더 적확한 말 같아요. 인터넷으로 시공간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소유권ownership은 죽음을 맞고 사용권access을 추구하는 시대가 온다는 요점이었던 거 같은데 책 읽으면서 격하게 동의하지 않았던 기억이..;;

소유와 축적을 미덕으로 삼는 한국에서는 어쩐지 소유권이나 사용권은 동의어 같기도 하구요..
 
시리어스맨 - A Serious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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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truth is found to be lies
and all the joy within you dies
don't you want somebody to love
don't you need somebody to love
wouldn't you love somebody to love
you better find somebody to love

-Somebody to Love, Jefferson Airplane
  

무언가를 믿는다는 게 뭘까. 내 방 책상은 누군가 일부러 옮기지 않으면 늘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외출해서 돌아온 후에도 책상은 그대로 있다. 내가 외출 중에도 책상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 책상이 정말 그대로 있냐고 물으면 나는 의심하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보지 않았지만 책상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걸까...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요상한 질문들을 던졌다. 코엔 형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질문을 극장편 영화에 옮겨 놓은 거 같다.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과 불확신의 경계를 카메라를 통해 탐구한다.  

삼 년 전에 죽었다는 한 랍비가 어느 부부를 찾아온다. 아내는 소문을 믿고 남편은 소문에 대한 믿음이 없다. 믿음이 확고한 아내는 랍비를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확인차 랍비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른다. 랍비의 가슴은 피로 서서히 물들고 타이틀 롤이 올라간다.  

히브리어 수업을 하는 교실, 병원에서 누워서 엑스레이를 찍고 있는 물리학 교수 래리의 긴장한 모습이 교차한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유태계 소년, 소녀들에게 유태인 공동체의 룰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믿음은, 아이들한테는 믿음이 아니고 암기해야하는 수고를 보태야하는 불확실한 것이다. 세상은 익숙한 것에 대한 믿음과 낯설지만 의무란 영역에 대한 당위성으로 카오스 그 자체다. 질서정연한 거 같아보이지만 확신과 불확신의 경계를 의식하는 순간 진앙지를 알 수 없는 진동을 감지한다.   

래리의 일상은 갑자기 균열이 생기면서 높은 강도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문제 없었던 아내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이혼을 요구하며 F학점에 이의를 제기한 (한국) 학생은 촌지를 두고 간다. 영구교수직은 심사 중인데 동료는 반대하는 편지를 받았다고 하고, 자폐인 줄 알았던 동생은 도박에, 남색이란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될 판이다. 아들은 말도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레코드 클럽에 가입해 회비 연체 중이라 툭하면 독촉 전화를 받는다. 래리가 외치는 말은, "난 아무 것도 안 했어요" 다.  

래리의 심정이 이해되는 게 아무 것도 난 안 했는데 일이 꼬이는 것 같은 때가 정말 있다.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우연과 필연의 차이는 무엇인가. 필연을 의도하고 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필연도 우연이 된다. 또 우연이 때 맞춰 일어나면 필연이 된다. 이럴 때 거대한 우주적 관점에서 미미한 존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래리는 랍비를 찾아간다. 젊은 랍비, 중년 랍비, 연륜만큼 현자라 만나기 힘든 랍비. 랍비들의 조언은 새로운 관점을 가져라, 사소한 우연은 무시해라, 나이든 랍비는 만나주지도 않는다. 결국 래리는 사방에 생긴 균열로 흔들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느라 밤마다 식은 땀을 흘린다. 시간은 흐르고 진동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균열의 틈이 다시 저절로 좁아드는 것 같다.

믿음이 흔들릴 때 흔들림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사랑할 사람을 찾으라고 한다. 명쾌한 결론이다. 코엔 형제도 나이를 드신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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