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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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박경철 씨 편에서 보고 주문했다. 추천한 책으로 올려 준 책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독서목록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세계관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다. 경제학 서적은 실제로 몇 권 안 되고 대부분 인문학과 예술 관련 책들이다. 경제학 서적만으로는 통찰력을 기를 수 없다, 가 내 주장인데 이 분의 통찰력은 광범위한 독서가 거름이 되는 거 같다.   

제레미 리프킨의 책은 어딘지 2% 부족한 면이 늘 있다. 방대한 구체적 자료와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지지를 보내기가 망설여지게 한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을 비교해가면서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경제, 사회, 종교, 정치 분야까지 총 망라한다. 오백 쪽이나 되는 긴긴 독서로 백 쪽은 줄일 수 있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상기시켜주는 효과도 있지만 지루하기도 하다. 

(나중에 까먹을 걸 위해서) 요점을 정리해보자면,   

아메리칸 드림은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기회균등을 지향하고 개인의 자율의 상징인 사유재산 축적과 보호에 중점을 둔다. 유러피언 드림(이 용어가 학계나 다른 분야에서 쓰이는지 모르겠지만) 은 집단 소속감을 바탕으로 개인의 패권을 희생하더라도 삶의 질을 추구하며 따라서 소득의 재분배에 가치를 둔다. 아메리칸 드림이 성공적으로 보였던 건 미국인들이 낙관주의로 꿈을 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러피언 드림이 성공하려면 유럽인들의 기질 속에 있는 비관주의를 털고 낙관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또 대안으로 "공감" 정치를 주장한다. 이타심으로는 인간 의식의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고 보편적 문제나 이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가 이 책의 골조다.  

사유재산 형성 과정이나 이민 딜레마 등 같은 챕터에는 뛰어난 통찰력이 들어있지만 이 책의 전반적 주장은 "꿈" 같다. 특히 EU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동경은, 유럽인들의 입장이 아니라 미국인의 입장처럼 보인다. 유럽공동체는 경제 공동체다. 주권 국가들의 목소리는 경제라는 공동의 이익 앞에서 낮춰지는 걸 택했다. 공동체 법이 각국의 법 보다 우선시 되는 것 처럼 보이는 건 각국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일 거다. 반면에 미국은 연방국가이다. 연방법은 각주를 통제하려면 강력해야하고 때로는 국제법보다도 미국법이 우선시 한다는 걸 보여줘야한다. 출발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놀랍게도 유럽이 소속감을 우선시한다는데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럽인들은 정작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한 때 유럽의 연대감에 궁금증을 품은 적이 있다. 파리에서 대중교통 파업은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같으면 분통을 터트리며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을 비난하느라 바쁘다. 언론도 굉장히 감정적이어서 시민들의 분노를 담은 인터뷰를 내보내 시민의 분노는 시민의 권리라고 도와주는 거 같다. 왜 파업을 하는지 근로자들의 목소리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파리에서는 파업을 해도 사람들은 덤덤하다. 어떤 철도 역에 까페에서는 웰컴 투 파업이란 피켓도 본 적이 있다. 이 때 겪은 문화적 충격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다! 대체로 파업에 대해 받아들이지 분노를 표현하는 시민을 본 기억이 없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내 불편함보다 근로자로서의 연대가 더 강했기 때문일터이다. 이런 연대감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지..한국에 살고 있는 나로선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짐작은 가능하다.  

미국이나 한국은 모든 걸 개인이 짊어져야하는 나라다. 유럽은 개인의 가난이나 사회적 문제가 사회구조적 모순에 있다고 여긴다. 리프킨이 지적했듯이 세계관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식 기독교처럼 선악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며 선민의식을 고취하고 재산 축적을 신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거다. 교회 밖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기회의 불평등을 체념하는 편이고 결과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입시나 취직이라는 생존경쟁의 성공이나 실패를 개인의 능력으로 보는 편이다. 학벌이 없는 이와 학벌을 가진 이가 받는 차별을 당연시하고 학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학벌이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은 채. 그러니 악순환은 이어진다.  

또 하나, <소유의 종말>에서 접근권access을 강조했는데 이 책에서도 소유권보다는 접근권을 강조한다. 접근권이 유럽식 사고지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가령, 대학등록금만봐도 그렇다. 미국이나 한국은 학비가 비싸다. 유럽의 대부분의 대학이 등록금이 거의 없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무상으로 받았던 교육비를 사회에 환원하려면 소득 중 많은 부분을 세금으로 기꺼이 낸다. 그러나 개인이 전적으로 학비를 책임지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세금을 내기를 꺼린다. 다른 복지제도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접근권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은 소유와 축적이다. 누구나가 자본가가 될 수 있다면 되려고 하지 빌려쓰고 갚을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제레미 리프킨의 글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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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31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트리아에서도 놀랬어요. 한국보다 더 심한 소음을 내면서 빈의 도심 차도 한 차선을 장악하며 걸어가면서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데 누구도 빵빵거리지 않는거예요. 그때의 충격을..

유럽과 우리는 많이.. 아주 많은 부분이 다른 것 같았어요.. 넙치님.

넙치 2010-03-31 12:50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오스트리아에서도 시위가 있다니...픽션처럼 들려요.ㅎㅎ;;
유럽의 연대감에는 물론 깊은 역사와 희생이 바탕이 되겠지요?

반딧불이 2010-03-3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유의 종말>에서 저자는 제품보다는 이미지를 판매하고, 소유보다는 접속을 선호한다고 했었던것 같아요. 그러니까 산업자본주의가 문화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다는 얘기로 이해했었어요. 환경은 다르지만 일정정도 수긍할만했었는데 교육이나 사회환원의 문제에서는 넙치님 말씀처럼 전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것 같기도 하네요.

넙치 2010-03-31 12:54   좋아요 0 | URL
<소유의 종말>에서 access란 단어를 번역자가 접속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용권이나 접근권이 더 적확한 말 같아요. 인터넷으로 시공간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소유권ownership은 죽음을 맞고 사용권access을 추구하는 시대가 온다는 요점이었던 거 같은데 책 읽으면서 격하게 동의하지 않았던 기억이..;;

소유와 축적을 미덕으로 삼는 한국에서는 어쩐지 소유권이나 사용권은 동의어 같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