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거칠고 시는 메마르다고
희망은 모래알처럼 버석거린다고
그 물가에 닿을 수가 없다고
너는 모든 것을 버린 자의 미소를 지으며
긴 그림자를 끌고 천천히 멀어진다
상심한 해는 무겁게 내려앉고
바람의 길들은 모두 막혀
나의 노래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데

그래도 여름은 한철
먼 세월이 흐른 후에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림은 내게 고통만은 아니었다고

                                         황경신 | 여름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던 지난 계절,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증세라곤 미열 뿐인
알레르기, 즉 '특정한 무엇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나타내는 과민반응' 에 시달리기 시작했지.
당신의 처음은 낯설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를 듯,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흔적도 없이 달아날 듯  안타까웠어.

당신, 봄의 꽃술을 받아서 가벼운 걸음으로 내달아 고운 가루, 입술로 날리던 그날,
사방에 흩날리던 꽃가루에 끊임없는 재채기를 터트리며 비정상적인 과민반응에 빠진 내 육체는
작은 기쁨과 슬픔에 의해 깊은 절망과 희망 사이를 방황했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사랑에 빠져 간절한 심정으로 두 손을 내미는데,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

당신과 나는 꼭 만나야했어.
우리는 미열에 들떠 서로의 사랑을 갈망했으며,
스쳐지나간 당신 손길에 난 소스라쳐 행복해했지.

그리고 난 생각했어.
당신을 잡을 수 있다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절벽에서 떨어져도 좋다고 ...

당신은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가루일 뿐이라는 걸 알아.
인간은 '비정상적인 과민반응'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쩌면 나도 당신에게 무뎌질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양이처럼 가볍고 사뿐한 걸음으로 봄을 지나온
이 여름에도 애태우던 그때의 미열은 여전하잖아.
아마도 난 이 잔혹한 알레르기를 달고 살아야만 할 거야.
당신 곁에 늘 머무르겠다는 다짐인 거야.
물론 당신도 같은 맘이라며 따스한 온기를 전하지만 말야

당신은 말하겠지.
기다림은 고통만은 아닐거라고.





글 | 황경신의 그림같은 세상 [구스타프클림트; 참을 수 없는 봄의 가벼움] 에서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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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2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1때 겪은 꽃가루 알레르기가 생각나네요. 아주 지독한 놈이었는데...

김여흔 2004-07-22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이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정서와 감성의 변화에 대한 읊조림입니다.
이것은 누군가 떠났다던가 멀어졌다던가 해서 오는 이의 그림움이 아니고,
항상 곁에 있어 행복하지만 그리하여도 그리운 안타까움이지요.
그저그런 이웃의 평상어가 사랑하는 이의 입을 통하면
때론 감미롭기도 하고, 때론 깊은 상처가 되는 일련의 과민반응 말예요.
살 떨리는 특별한 감정의 지속만이 이 달콤한 과민반응을 이어가게 하겠죠.
알레르기 없는 밋밋한 사랑, 그건 그저 친구라 하지요.


비로그인 2004-07-23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레르기...에 담긴 의미...그렇군요.
특정 대상에 대한 과민반응....

김여흔 2004-07-2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도 알레르기가 있으신지요? ^^

비로그인 2004-07-2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김여흔 2004-07-2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라 ... 왠지 강한 여운이 남는군요. ^^
 


7월 7일 09시 40분,
원고를 넘기다.

이제 좀 자야지, 하며
불을 끄고 나니 이상하게도
머리가 맑아진다.
일 할 동안은
미치도록 멍했는데
끝낸 후에야 맑아지다니
내 머리가 고장은 아닐까.

그 사람이 노숙자라 놀리며
좀 씻고 수염도 깍고 하란다.

거울을 보니 .. 훗훗 ... 노숙자 ... 영락없는 노숙자 ...


일 때문에 미뤄 둔 편지를
끄적여 보려는데
영 손에 잡히질 않는다.
너무 오래 전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만 무겁고.

그래도 그 사람에게만은
대충이란 건
스스로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 
그러니 차일피일.

 


랑은,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
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정말 그렇네 ... 음 ...

 

 


 

후배녀석이 누가 가져왔다며
물 건너 온 망고 음료를
건넨다.

있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랑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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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7-1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닿는 말이에요. 여흔님 이제 일을 끝내셨군요. 그동안 궁금했어요.

superfrog 2004-07-1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옆에 있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님, 푹 주무세요..

superfrog 2004-07-18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머에요.. 금붕어 책상과는 비교도 안되잖아요..
게다가 저 두툼하기 그지없는 스프링 노트.. 아.. 갖고 시포요..^^

김여흔 2004-07-18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오랜만이죠. 잘 지내셨나 모르겠네요. ^^
금붕어님, 인간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군요. 그 사랑 영원하시길.. ^^

stella.K 2004-07-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여기가 여흔님 진짜 서재? 뭐에 대해서 쓰시고 원고 남기셨다는 거예요? 제가 알면 안되나요?
저두 저 스프링 노트 탐나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그<사랑> 저와 여흔님을 알고 있는 알라디너들에게도 좀 주세요. 흐흐.

水巖 2004-07-1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궁금합니다.

비로그인 2004-07-1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올리시는 글들 속에서 님의 행복함을 보고 갑니다.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 참 이쁘네요.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고 해요. 일도, 그럼에도 맛있는 사랑도....잘 영글어 가는 여름 보내시길~^^

김여흔 2004-07-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수암님 ... 전 님들이 더 궁금한 걸요. ^^*
냉열사님, 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맛있는 사랑이 늘 함께 하리라 믿어요.
그리고 이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

nugool 2004-07-2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님들이 탐내시는 저 두툼한 스프링 노트는 뭘로 채워지게 될까요? 그게 궁금하네요^^ 모두 연서로 날아가 얄팍해질려나? ^^

김여흔 2004-07-2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굴님, 반가워요. 잘 지내시죠?
음 스프링 노트 ... 글쎄요, 아마도... 아마도... ^^*
 


당신과 함께, 라고 오늘도 조그맣게 소리내어 말해본다.

 

 

 

 
사진 /  김여흔
글 /  김원
노래  /  신예원[First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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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7-1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넘 일만, 공부만 하시지 말고 좋은 글, 좋은 음악들 가지고 서재 발걸음해주세요..^^

김여흔 2004-07-1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금붕어님, 저 지금 놀고 있답니다. ^^

비로그인 2004-07-1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그맣게라 말하시지만... 큰 울림으로 느껴집니다. ^^
오랜만에 글 올리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반갑구요.

잉크냄새 2004-07-14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편지의 내용을 볼수가 없네요.^^
여흔님, 다시 만나니 반가워요.

stella.K 2004-07-1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 뭐라고 써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읽어주세욧! 근데 사진 잘 찍으시네요.^^

김여흔 2004-07-16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 잉크님, 스텔라님, 모두 반갑구요.
음, 내용이 다들 궁금하신게로군요.
편지의 내용은 ... 음, 음, 음 ..
 


래요, 그래서,
좋은 일만 있을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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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7-13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흔님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저도요.

stella.K 2004-07-1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여흔님.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래요.^^

물만두 2004-07-1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좋은 일들이여 몽땅 여흔님께 모여라, 퍼뜩...

superfrog 2004-07-1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나눠주세요..

2004-07-13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여흔 2004-07-1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울타리님, stella님, 물만두님, 금붕어님 ...
다들 오랜만이구요.
님들 모두에게도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
 



이미 원고 마감일을 일주일이나 넘겨버리고 있었다.

주말, 24시간의 하루, 낮과 밤 따위의 의미는
나 같은 족속에겐 별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몹시 불행하거나 그것의 반대일 것이다.

종지부가 어느 때쯤이면 찍히겠거니 하는 막연함만이라도 있다라면
구토 직전의 울렁임이 머리속에서 나를 그토록 멍하게 만들어 놓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 때였다.
그들은 진흙탕에서 나를 끌어내 듯,
그러면서 그런 나를 술 자리에 메뉴판처럼 내놓는 것을
전쟁판의 훈장처럼 여기고 있는 거였다.

"너는 실패한 인생이야"
"왜 되돌아왔니, 응?"

한 방 날리고만 싶었다.
그 녀석, 나 보다 두어살 더 먹었지만
너무 여려 보이던 인생이었다.
한 때 장애인였던 그가 지금 이렇게
자신에 대해 자만하고 있는 꼴을 보자니,
역한 비린내만 전해왔다.

연구실에 돌아와서
나는 그 녀석을 조롱하는 후배 녀석들의
혓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제길, 이런 건 아니었는데...


후배들을 쫒아 버리고,
혼자 남았다.
흠흠, 자유인가?
하지만
다이어리 속에 난 갖혀 있다.

또 내일이다.
또 내일 ...

 
 
   



사진과 글 |  김여흔
노래 |  김현식[가리워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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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2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ika 2004-07-12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첩 가득 빡빡한 일정속에서 또 다시 찾아올 내일의 바쁜 일정을 엿보고, 색색의 글씨에 여흔님의 깔끔함을 느껴봅니다. 오늘도 좋은 음악 선사해주시는군요...^^

김여흔 2004-07-13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죠?
하루 하루, 할 일이 있다는 건, 참 즐거운 기분을 만들게 하는 것 같아요.
비록 일 속에 묻혀 있을 땐 벗어나고 싶기도 하지만요.
무더위가 찾아온다네요. 이 여름 건강 조심하시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