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H.D.F. 키토 지음, 박재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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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은 극단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이 중용을 말할 때면, 조율된 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중용은 긴장의 부재와 정열의 결핍이 아니라, 참되고 맑은 음을 만드는 올바른 긴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p375)

키토의 <The Greeks>는 1951년에 출간된 그리스 입문서이다. 

반 백년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있으니 이 분야에서는 '고전'이라고 해도 크게 나무랄 사람은 없을 듯 싶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이 책은 '그리스 고전을 읽기 위한 고전적 입문서' 인 셈이다. 앞에 인용했던 글은 이 책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글이다. 지난 여름 뜨거운 흥분의 물결이 가라앉은 시점에 다시금 큰 울림을 갖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종말' 내지는 '퇴출'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그 마음의 간절함이야 알겠지만-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것 만큼이나 경솔하다.

<The Greeks>(우리말 긴 제목보다 이 원제목이 더 강렬하다.)는 고대 그리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사를 논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사회문화사책이며 역사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논하는 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철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철학'책이라 말해도 좋다. 키토는 이 얇은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어떤 세계를 살았고,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책은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다. 해당 주제별로 크게 모아본다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장 까지는 고대 그리스의 기초를 만든 그 '이전'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핵심부분은 5장 -9장로 보여진다. 5장의 주제가 '폴리스는 ...이다' 이고 9장의 주제가 '폴리스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토의 <The Greeks>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꼽을 수 있다. 그것은 '폴리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키토는 '그리스인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폴리스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10장에서는 앞선 과정을 통해 살펴본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11장과 12장은 부수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또 가장 논쟁이 많이 되기도 하는 주제들이다. 신들에 대한 해석문제, 여성, 노예 등과 그리스 시민과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키토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를 바라볼 때 조금 더 '다양성'을 갖고 바라봐주길 요구한다. 가끔 우리는 현재의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사슬에 묶여 과거는 이보다 더 단순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광학기술의 발전처럼 현대의 연구가 발전할 수 록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상식'이라는 함정 속에서 생을 마감하느냐의 차이이다.

 키토는 책 첫머리에서 부터 서구 역사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고전 그리스가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작가는 '새로운 르네상스'였다고 말한다. 북방의 헬레네스 문화와 남방의 크레타 문명이 가장 극적으로 융화되어 꽃을 피운 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 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이다.BC 5세기의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그런 시기였다. 이런 그리스 문화의 혼종성은 그리스 예술의 위대성과도 연결된다. 이오니아와 도리스 기둥으로 기억되는 지적긴장감과 예술적 쾌락이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것이다. 흔히들 그리스 미학을 규정하는 '대칭' '균형' 같은 개념들이 이런 하이브라이드의 결과인 셈이다. 그리스인들의 변증법적인 조화의 미덕은 호메로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리아드>는 통일성과 인과성, 도덕법칙의 존재를 밝힌 책이다. 물론 <일리아드>중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르테'이다. 호메로스는 '아르테'를 향한 삶의 열정과 '숙명'이라는 이름의 생의 비극적 틀 사이의 긴장감을 아름다운 글로 남겨놓은 것이다.

키토가 요구하는 '다양성'의 시각에는 '그리스인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도 함께 들어 있다. 그는 '그리스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탈근대적인 감각의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탈근대적 칼럼들에 영향을 받은 개인에 대한 강조가 아무런 철학적 맥락 없이 쓰이고 있다.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로서의 '가벼운'개인에 대한 존중말이다.)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개별 행위의 특수성과 동시에 보편성을 동시에 중요시 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남아 있는 그리스 비극들 모두를 생각해 보면 이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스 비극은 낭만적인 우울감만 주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공동체적인,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인의 '개인성과 보편성의 결합'이라는 주제로 넘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둘이 상호관계를 맺는 장소를 이해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폴리스'이다. 저자 역시 '폴리스'라는 말을 '도시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나쁜 번역이라고 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피에르 아도는 아예 '도시'라고 번역한다. '폴리스'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적절한 번역이 없다. 그러므로 그냥 '폴리스'라고 쓰는 것이 가장 옮은 듯 하다. 폴리스는 기본적으로 작은 공동체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폴리스의 숫자를 시민 5 천명이라고 말했고, 이포다마스는 총 인구기준 10만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몇 몇 폴리스를 제외하고는 이 것보다 작았다. 왜 작아야하는가? 이것은 나중에 폴리스 멸망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폴리스는 친족공동체, 부족 공동체의 한 형식이 발전한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귀족들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물론 중심은 시민이었다. 그들은 농업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자급자족 경제를 유지했다. 요즘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탈주형 공동체'들의 원형은 '폴리스'에 있다. '폴리스'는 정체를 유지하기 위한 각 내부 관계를 파악하기 용이했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직접 참여가 가능했다. 즉 모두가 책임지는 공동체 말이다.

키토는 '폴리스'가 형성되는 몇 가지 지리적,역사적 요인들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키토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폴리스 형성의 원인'은 '그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망, 덕을 고양하려는 소망을  '폴리스'를 통해 이루어 내길 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는 직접투표를 하고, 도편 추방을 했던,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다. 폴리스는 정치적, 문화적,도덕적 삶을 포함하여 공공의 삶 전체였다. 더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그리스인은 폴리스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남겨 놓은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곧 '인간은 폴리스에 산다' 와 같은 문장이다.

책의 중반부 7장쯤에 가면 고전기 그리스의 성쇠가 등장한다. 작은 폴리스였던 아테네가 성장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학교 때 본 <플루타크 영웅전>을 다시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당시에 나는 낯선 그리스 이름들 때문이었는지,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또 다른 것들이 읽히리라.)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자가 되는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이다. 그리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대 아네테 제국'을 꾸려나간다. 그렇지만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역시 '폴리스'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독립성을 깨고 싶지 않았다. 만약 대규모의 통일국가가 된다면 이것은 '폴리스'의 정체성과는 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발생한다. 직접 참여는 대의제에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고, 이는 시민들의 자기통치보다는 참주등을 통한 지배-복종을 뜻하는 것이기때문이다.

키토는 실제 작동하는 폴리스를 근대적인 구분을 통해 말하는데, 이게 아주 적절하기도 하다. '아테네는 아마추어 국가다'라고 말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 말은 짧지만 정확한 표현이고,또 함축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적 결말까지도 암시하고 있다.(이외에도 키토는 본인이 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위트있는 표현을 자주 보여준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말하고 아테네의 당시 상태를 비판 했던 것은 '폴리스'가 내재한 기본적인 모순들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개선과 선을 추구하고, 도덕적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폴리스'가 무지한 사람들-소크라테스적 의미의-에 의해 그 기능이 부여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향한 열망은 시대의 움직임에 떠밀려 간다. 그리고 '폴리스'의 소박한 꿈은 그 자체 모순을 맞딱드리는 순간 붕괴 일로는 걷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과두정을 실시하고 총독통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위대한 알렉산더의 마케네가 들이닥친다. 키토는 아테네가 패하는 계기를 내적인 원인에서 찾고 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전성기 BC5 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와 BC 4세기의 데모스테네스의 시대를 비교한다. 그리스는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로 잦은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힘의 우월성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BC 4세기쯤에 이르면 '폴리스'는 정치적 무력증과 무관심에 빠져든다. 기토는 이 점을 시대적 대전환이라고 파악한다. 즉 삶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출현을 한 것이다. 즉 고전기의 그리스는 이제 지난 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희극 소재를 먼저 예로 든다. 과거 건강한 '폴리스'의 시대에는 희극도 그냥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때가 되면 희극은 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농담거리고 전락한다. 또한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용병지휘관 들이다. 아테네는 전통적으로 시민개병의 전통하에 있었다. 그것이 또 폴리스의 삶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점점 더 많은 전략과 기술을 요하고 이에 따라 용병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것은 비단 군사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폴리스' 자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폴리스'에서 건강한 시민과 강건한 군인은 하나였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효율성'과 '전문화'가 '폴리스' 와 양립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철학사조의 변화를 살펴봐도 폴리스의 붕괴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점은 원인과 결과의 위치를 두고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테모스테네스의 시대는 견유학파와 키레네학파가 두각을 나타낸다. 이들은 '선에 대한 질문'을 한다. 과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절대선'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상정해 놓은데 반해 이들은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이는 과거 '폴리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과거 '폴리스'는 '절대선'을 상정해 두고 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노래했다. 반면 새로운 시대는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들은 이제 '폴리스'라는 개념대신에 '코스모폴리스'라는 제국의 시대에 어울리는 윤리관을 갖는다. 지혜로움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류라는 공동체로 대체되는 것이다.

키토는 그리스적인 것에 대해 책 말미에 정리한다. 풍부한 내용이지만 관심을 자극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단어만을 열거하자. '사물의 전체성에 대한 감각', '건전한 균형',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 '실용적인 단순성', 규칙성과 균형에 대한 강한 감각' '수학의 발견' '변하지 않는 실재와 정신의 위대함' 등이다.

<The Greeks>가 나온 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미 50년을 넘겼다. 키토가 이 책을 낸 이후에 더 많은 인류학적 발견과 그리스에 대한 학문적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토의 책 중 어떤 부분은 미흡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문제나 여성들의 문제 등에 대해서 키토는 비교적 친그리스적인 태도를 취한다. 가끔은 현대와 비교하면서 그리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이 지점들은 다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들이다. 맑스주의 미학자인 하우저같은 이들은 그리스 예술과 민주주의가 노예들의 물적 기반 위에 있음을-물론 그가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상기시킨다. 키토는 이보다는 오히려 삶에 그리스인들의 청빈한 태도와 여가에 대한 욕구등을 강조한다. 그 외에도 키토의 시각들에는 그리스에 대한 많은 애정과 서구 우월주의와도 같은 성격들이 간간히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자의 말처럼 그리스 전문가의 그리스에 대한 깊은 애정의 흠결정도로 봐줄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런 꼬투리로 이 책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역시나 품격 낮은 짓이다. 

'그리스' 하면 무너진 신전의 모래기둥이 떠오르고, '철학의 고향' 같아서 딱딱한 부리의 앞머리를 만지는 느낌을 갖는 이들에게 키토는 말한다.

"그리스인은 남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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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음악 주식은- 현재는- 클래시컬 음악이다. 하지만 '밥만 먹고 사냐?' 는 질문은 밤이 외로운 중년의 여인들만 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 인간이 쥐와 더불어 지구 상에 앞으로도 오래 오래 있게될 존재의 생물학적 특성 중 하나는  '잡식성'이라는데 있다. 내 음악적 취향도 '잡식성'이다. 트로트부터 락음악, 그리고 국악도 듣는다. 내가 한 귀로 흘려듣는 음악은 컴퓨터로 5분 내에 만들 수 있다는- 음악 미학에서 가끔 '진정성'Authenticity이란 이름으로 논쟁이 되기도 하는- TV 쇼프로그램에 나오는 댄스 가수들의 음악이다. 물론 그런 음악도 소용이 있고, 한 번씩 흘려듣는다. 처음부터 따라 부르지는 못해도, 라디오에서 하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어디선가 멜로디가 나오면 '음..소녀시대,빅뱅' 이 정도로만 안다. 

음악가와 관련된 영화 중에서 독특한 영화가 DVD로 출시되었다. 예전에 한번 소개하기도 했었는데 영화관에서 놓쳤다면 이제 합법적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소장도 가능하다.

밥 딜런을 다룬 영화 <I'm not there> 이다. 제목을 밥 딜런의 곡명에서 따왔다. 미셀 푸코가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 라고 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토드 헤인즈의 시선은 그렇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에 대한 강박에서 '분열된 정체성'으로의 해체 내지는 존중을 말한다. 하덕규 식으로 말하자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이다. 그러니까 한 인물을 소개하는데 한 캐릭터의 주인공가지고 하는 것 보다는 다양한 캐릭터로 접근하는 것이 그 인물을 총체적으로 아는데 더 적확하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입체파 인물 그림을 떠 올려보면 금방 이해될 것이다. 이 영화에도 6개의 캐릭터가 나온다. 밥 딜런에게 영향을 미친 우디 거스리, 그리고 이름을 따온 딜런 토마스 등등..

케이트 블랑쳇이 여자지만 가장 밥딜런과 닮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몇 장면들은 밥 딜런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혼자 씩' 하고 웃지만 모르면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베일이 극 중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밥 딜런 앨범 자켓과 똑같은 포즈를 취한다. 또 유명한 <블로잉 윈드>가 들어 있는 음반은 다른 식으로 그려지는데, 밥 딜런이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거리를 걸으며 찍었던 유명한 앨범 자켓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는 앨범과 똑같은 포즈를 찍은 샷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거리를 걷지만 카메라는 부감샷으로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그들을 비춰준다. 연인들이 그냥 거리를 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장면은 유명한 앨범 자켓을 낳은 것이다. 히스레저와 샬롯 갱스부르가 연인이다.

밥 딜런은 포크 운동의 리더(?) 답게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그런 그가 포크 락을 선보이면서 '변절자'라고 몰리기도 한다. 밥 딜런은 그런 대중들을 불편해 했다. 즉 '진보'를 팔아넘겼다는 대중들의 포퓰리즘적인 몰이해들이 밥 딜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밥 딜런을 '정치적 진보주의자'로 만든 것은 사실 '대중'이었지 밥 딜런은 아니었다.  음악가로서 그도 정치적 견해를 노래하고, 동시대의 모순을 예민하게 지적할 수 있다. 대중은 그가 계속 그런 위치로 남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밥 딜런은 '나는 거기에 없다' 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가수'이기 이전에 '예술가'였다. 예를 들어 아방가르드의 전복적인 전위를 그저 '퇴폐 부르주아의 예술적 사치' 로 보는 것과 그런 비판의 토대 마저도 '전복'하는 예술가의 창조적 탈출구로 보는것. 크게보면 그런 문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자 하는 진보적인 예술가와 정치적 진보라는  틀 안에 그를 가두어 놓고 싶은 진보주의적 대중.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다를 비롯해서  당시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적 전위운동들에 대해 그 전복의 아이디어와 단초들에 대해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다. 당시의 주류 좌파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부정한다.  

 영화<존 레논 컨피덴셜> 이다. 이 영화는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다. 앞의 영화에 비하면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기존에 있던 TV화면, 인터뷰, 신문기사들을 영상으로 활용한다. 그와 함께 존 레논을 기억하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함께 했던 이들의 새로운 인터뷰가 추가되었다. 존 레논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오노 요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노암 촘스키, 68혁명의 주도세력이었으며 관련 책들을 많이 낸 타리크 알리, 블랙팬더당의 바비 실....그외에도 월터 크롱카이터, 워터게이트의 칼 번스타인 등등이 나온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원 제목처럼 반전평화운동가 존레논과 미국 FBI와의 대립을 축으로 한다.(우...예찬이가 깨서 컴퓨터를 방해한다..야 비켜...못쓰겟..... ㅇㅇㅇ )

FBI는 존 레논-오노요코의 미국 비자 문제를 걸고 넘어진다. 애국주의와 주권이 결합하여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비호감인물들에 대해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미국에 대한 적대로 받아들이며 보수주의자들의 내적 단결을 도모한다.(예나 지금이나 이런 건 변함이 없다.)

이 영화에는 유명한 존레논의 침대 시위 장면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1969년 존레논은 공식적(?) 신혼여행 대신에 개인적 하니문을 택한다. 암스텔담의 한 호텔방에서 반전평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베트남에 가서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침대에 누워있는 편이 정의롭다는 말이다.


비틀즈의 핵심 멤버이자 반전의 아이콘이 이런 퍼포먼스를 하니 각 종 미디어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다. 그것도 동양의 예쁜 예술가와 함께 하는데 말이다.

세계 각지에서 동조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일종의 연속 이벤트가 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존레논의 멋진 음악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저항세력의 찬가라고 불리웠던 <Give peace a chance>가 자주 들린다. 또 60-70년대 민권운동의 슬로건 같은 <Power to the people>,<Revolution>, 영화<킬링 필드>에 쓰여서 더 유명해진, 아나키즘의 찬가 <Imagine>, 매년 크리스 마스에 맥락도 모르면서 쓰이지만, 모로가나 결국 예수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몰라도 될 <Happy christmas>..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함께 한 TV 토크 쇼에서 그 노래의 부제를 이용해 이렇게 말한다.

"War is over if you want. Peace !"

존 레논은 1980년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데이빗 채프먼이라는 광팬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이 암살에 정치적 이유는 없다는 것이 지배적 중론이지만 여전히 미 정부 개입설이라는 음모론이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존 레논은 살아 있었다면 지금 68세이다. 오늘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멋진 음악영화 <샤인어 라이트>(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주인공들. 롤링 스톤즈의 믹재거가 올해 65세이다. 롤링 스톤스가 음악 비즈니스계에서 범생이 '비틀즈'의 안티 테제였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영화<샤인어 라이트>에서 믹 제거는 펄펄 난다. 세파에 쩐-술과 마약에 쩔었겠지만- 키스 리처드 역시 펄펄 난다.아직 DVD는 나오지 않았고 음반만 나와 있는 듯 하다. 하여간 멋진 공연을 보여준다

. DVD로 나오면 이 영화 <샤인 어 라이트>도 꼭 보시길... 이 공연물을 보면 락을 하고 싶어진다.

 물론 성격은 좀 다르지만 이들 노익장들을 보면서 존 레논이 살아있었다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존 레논이 암살당한 시점은  신보수주의로 무장한 레이건과 대처가 세계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였다. 역사의 아이러니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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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1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리크 알리인데요.

드팀전 2008-10-20 06: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영화 <그 남자의 책 198쪽>에 보면 들녘을 달리는 경운기 위에서 여주인공이 그런 농담을 건넨다.

" 책과 연인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

..

1. 보면 자고만 싶어진다.

2. 침 바르면 잘 넘어온다.

3. 가을이 되면 더 보고 싶다.

최근에 나온 책들 중에는 딱히 끌리는 책이 없다. 밀려 있는 책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10월달은 이것 저것 부가적으로 떠맡은 일 때문에 책을 집중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아침 5시 반. 다시 잠들지 않으면 책을 봤다. (알러지때문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번 달은 수영을 가지 않는다.) 예찬이가 새벽에 깬 날. 아기는 다시 잠들고 나는 잠들지 못할 때도 책을 보러 간다. 그래도 하루에 책 볼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이 않다. 어떤 날은 30분도 어렵게 얻는다. 가을이 되면 더 보고 싶은 '책'이라는데 영 시간이 나지 않는다.

밀린 책들이 워낙 유명하고, 훌륭한 책들이어서 (^^;) 새 책에 눈이 가진 않지만 그래도 최근에 호기심이 가는 책들이 있다.(물론 이 중에는 새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중해 철학기행> 아주 두꺼운 책이다. 서점에서 대충 넘겨봤는데, 서술은 비교적 쉽게 된 듯 하다. 책 값도 두께에 비하면 착하다고 해야 하나...

시국이 더러워서... 이런 책을 본다.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봐도 좋을 듯 하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미학 에세이다. 올해 초에도 같은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이 나왔다. 둘 사이의 차이는 번역의 차이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특히 2부에서 원작들에 대한 사전 독서가 없으면 좀 버거울 듯 보인다. 뭐든지 그렇지만 미학에세이는 작품(텍스트)를 모르고 보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서점에서 봤다. 인터넷에서는 도저히 알수 없는 특징-물론 사진을 찍는다면 가능하겠지만-이 있다. 책 옆면이다. 책 옆 면에는 남자/여자 두자기 얼굴이 그려져 있다. 왼쪽,오른쪽. 각 방향으로 책을 쓸면 다른 얼굴이 나온다. 그래서 책이 화려해보이기도 하고 산만해보이기도 한다.

책 내용을 대충 보니 시각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인 미감의 변화를 살핀 듯 보인다.

2005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작가는 영국의 해롤드 핀터다. 나는 아직 그의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관심이 간다. 김정환 역의 세익스피어 전집을 보고 나면 해롤드 핀터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곡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한 해 한 두 권쯤은 본 듯 하다.

뭐 올해 말이나 내년쯤에는 보겠지.

이 책 역시 로쟈님 서재에서 보고 서점 가서 살펴봤다. 책을 상당히 얇다. 서문을 살펴보니 페이퍼에서 읽었던 비변증법적 네그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국>에서도 네그리의 헤겔 변증법 비판의 내용을 접할 수 있다. 대략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변증법의 '부정'이 결국 '포섭'의 하나의 포장이라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탈주'의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듯 하다. <제국>보다 훨씬 친절하게 씌여진 <다중>(오래전에 사두고 몇 장만 넘겨봤다.)도 올해 안에 볼 생각이어서 조금 더 기다려야 싶을 듯...사실 내가 제대로 공부하며 읽고 싶은 것은 '헤겔'이다.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다. 키토의 <그리스 그리스인>을 보다가 투키디데스를 읽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기회비용을 생각해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거인들의 힘을 좀 빌기로 한 거다. 이 책 역시 4권 분량의 투키디데스 연구서를 다시 한 번 압축한 것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는 이 책 한 권만 사왔다.

 

 인터넷에서는 유명한 이름인가 보다. 굽시니스트... 만화를 자주 보지 않으니까 잘 모른다. 우연히 이 책을 봤는데 그림들이 왠지 일본 오락기에 나오는 아이들이나 어린이놀이용 카드에 나오는 캐릭터들 처럼 생겨서 시시했지만....그래도 관심은 간다. 이런 시도 자체가 재미있다는 생각도 한 몫한 것 같구...

 

 내가 이 책을 사서 과연 볼까는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기부차원에서라도 사야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 심상정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대략..대단하다. 나는 지난번 대선와중에 심상정을 지지했다. 물론 그녀는 민노당 결선투표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분당결정에는 신중을 요구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정치인 중에서 한 명의 선거 캠프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그녀를 택할 것이다. 심상정 역시 이미지정치를 좀 활용할 필요가 있다. 좋은 소재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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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8-10-1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갖고 있는 책은 두 권이네요. 지중해 철학기행이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요. 두 권 다 일단 분량이 튼실해서 믿음직스러워요.(그래봐야 아직 안 읽고 있지만요;;) 그러고보니 키토의 그리스, 그리스인도 갖고 있군요. 저도 조만간에 그 책부터 읽어봐야겠네요.

드팀전 2008-10-16 17:05   좋아요 0 | URL
저는 기본적으로 책을 잘 쌓은 스타일은 아니었는데...언제부턴가 밀립니다. 덜 사던가 더 읽어야 해결되는데..지금 둘 다 잘 안되고 있고 또 역설적이게도 더 읽지 못하니 더 사는 듯 하기도 합니다.

바람돌이 2008-10-1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왜 집에 보고싶은 책을 쌓아놓고도 자꾸 도서관까지 힐긋거리는걸까요? ㅎㅎ

드팀전 2008-10-16 17:05   좋아요 0 | URL
자제심을 발휘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좋은 책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쉽진 않지만요.

mong 2008-10-1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만 읽어봤는데
다른책도 읽어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이 안가네요

드팀전 2008-10-16 17:06   좋아요 0 | URL
몽...은 잘 지내나요?

글샘 2008-10-22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굽시니스트랑 심상정한테 침도 바르고 더 보고 싶고, 자고 싶은데요... ㅠㅜ

드팀전 2008-10-22 13:04   좋아요 0 | URL
^^ 그런데 사실 말씀 하신 두 책은 거의 살 가능성이 없어보여요...많지 않은 시간에 버릴 건 버릴 수 밖에...^^
 

<레디앙>서평에 대한 우석훈의 답변이다...^^

우연히 그런 생각을 했는데,-꼼꼼한 것은 아니다.- 우석훈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녹색'을 이야기하고, 제한적 '탈주'를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물론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쉽게 쓰기 때문이다. 그의 '녹색'과 '탈주'는 논쟁거리가 된다. '탈주'는 복잡한 문제니까 관두고 '녹색'은 '상식'이니까 받아들여야 된다면 나와는 다르다. '당신이 당신의 가치를 상식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닫힌 체계를 선점한 자의 자의적 폭력이 될 수 있다.'  

정치경제학을 넘어 사회경제학으로
[이재영에 답함] 시대의 전위와 한국형 파시즘 성공 시나리오
 
 
 

<레디앙>의 지면을 빌어 개인적으로 내가 한국에서 가장 '믿는' 이재영 선배의 질문에 답하는 몇 가지 얘기를 해볼까 한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직문직답의 형태는 아닐 것 같고, 이래저래 책 뒤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달고 싶었던 얘기들의 일부를 이번 기회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1. 에피소드,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졸저 『괴물의 탄생』은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88만원 세대』에서부터 시작한 4권짜리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마지막 문장이니까, 굉장히 많은 문장들과 표현 중에서 고르고 고른 문장이라는 점을 먼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더 고백을 하자면, 이 표현이 바로 이재영의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시기를 회상하면, 『88만원 세대』를 결국 <레디앙>에서 출간하기로 하고, 이광호 대표가 출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승용차를 팔았던 그 시점 어느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우리는 모두 너무너무 돈이 없었고, 당장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한 차비도 주머니에 없던 일이 종종 있던 그런 시절이다.

나도 예금이 다 떨어져서 누군가가 밤에 잠깐 보자고 할 때에 택시비가 없어서 "오늘은 못 나간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생활을 꾸리기가 어려웠었는데, 그 때 이재영도 당장 하루 살기가 빡빡했다. 그 어느 즈음에 이재영의 통장에 원고비 20만원이 들어왔다.

그때 그 시절

그 때 "난 지는 법이 없다"라고 이재영이 말했었는데, 그 얘기가 참 재밌었다. <레디앙>은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상근하던 기자들을 떠나보내고 있었고, 이광호와 이재영 둘이 겨우 사무실을 지키고, 몇몇 필자들은 원고비를 '후불' 즉 외상으로 하더라도 <레디앙>을 지켜야 한다고 기고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1권 이후의 책들이 <레디앙>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은, 순전히 출판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1, 2권이 동시 출간되었었는데, 1권의 출간비를 대기에도 <레디앙>은 벅찼고, 첫 출간이라서 이래저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느라고 그 뒤에 2권이 나올 때에야 겨우 1권이 나오게 되었다. 1주일 차이지만, 사실은 개마고원의 2권이 1권을 추월해서 먼저 나오게 되는 소소한 사고도 벌어지게 되었다.

그 시절에 "난 지는 법이 없지"라고 하는 이재영의 낙천적인 표현들은 휘발성이 강했던 것 같다. 대선이 끝나고,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몇 개의 독자 모임 같은 곳에서 나는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꽤 오래된 나의 독자들 중에 일부는 다른 곳에서도 그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시리즈의 마지막 결어는 <레디앙> 그리고 이재영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같이 넘어갈 때, 그 때 우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 번 이 표현의 원저작권이 이재영에게 있음을 밝히고 싶고, 다시 한 번 그의 낙천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2. 시대의 전위는 어디에 있는가?


   
 
 
 
졸저 『괴물의 탄생』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학부 대학생용 교재 정도로 수준을 맞추고자 했던 이 책에서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시대의 전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노동자 정당'이 시대의 전위인가, 아니면 다분히 아카니즘적이며 생태주의적인 공동체 혹은 직접 민주주의의 작동 요소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다층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전위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10년 전에 유행했던 표현대로라면 cummunalism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코뮌에 해당하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 보다 더 전위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논의 축보다는, communism-communalism-코뮌적인 것, 그렇게 이어지는 논의의 축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논쟁보다는, 지역-풀뿌리-공동체-생태로 연결되는 논의와 활동들이, 만약 '신좌파'라는 개념을 설정한다면 훨씬 더 전위적이지 않을까라는 것에 내 생각이 더 끌렸다. 아직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하기에 내 스스로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지만, 이 책을 준비하면서 줄곧 후자의 논의 축을 생각했다.

전체 시스템보다 '요소'가 중요 

본문에서는 '제3부문'이라고 표현을 하였는데, 사회경제이든, 시민경제이든, 혹은 최근의 UN 용어대로 NGO(비정부기구)-NPO(비영리단체)가 되었든,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이 어쩌면 경제적인 의미에서든 혹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든 더 전위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다.

스웨덴이든, 스위스든, 아니면 독일형, 프랑스형, 혹은 일본형 생협모델이든, 아니면 이재영이 얘기한 북부 이탈리아든, 중요한 것은 전체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요소'들에 있다고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요소들은 <자본론>에는 나와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계급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공통으로 발을 걸치고 있으며, 반자본 혹은 비자본적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적 축적이 고도화됨에도 불구하고 보존되거나, 재생산되거나, 확대되거나 혹은 '재발견'되는 요소들이 과연 전위적인 것인가, 아니면 계급 사이의 충돌에서 우연히 등장했지만 결국은 사라질 것들이 전위적인가라는 것에 대한 판단이 문제의 핵심일 것 같다.

나는 '재발명(reinvented)'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들은 나라나 문화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인 요소' 그리고 '공공선'의 요소로서 자본 관계에 개입하며, 정치적 결정은 물론 국민경제의 작동에도 개입하며, 점점 더 중요한 요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한국자본주의의 외부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전위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다른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아직 충분히 전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작은 목소리로, 최소한 한국 자본주의의 외부를 볼 필요가 있다고 소곤거리고 있는 셈이다.

자, 상상해보자. 노조가 만약 스웨덴이나 프랑스의 경우에서 종종 발견하듯이, 그 스스로 일종의 생협을 가지고 노동자협동조합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배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경제에 대한 요소를 노조 내에서 스스로 잉태시키는 일인가? 나는 오히려 지금의 민주노총이 스스로 소비자협동조합 같은 것을 잉태시키는 것이 더 전위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녹색당과 정치운동

9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 시민사회와 진보정당 운동 사이에 묘한 협조와 갈등 그리고 질투와 도전 같은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단어를 다시 환기해보면, '정치운동'이라는 단어와 '운동정치'라는 단어가 있었다.

정치 자체가 운동이라는 흐름은 시민사회 내부에서 '정치세력화'와 '녹색당 창당'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두 개 전부 현실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지난 대선 때 열린우리당에 대거 입당하는 정도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어쨌든 그런 흐름 속에서 '운동정치'라는 단어는,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상당한 비판력을 가지고 있던 단어였다.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메이저 시민단체는 사실 운동을 표방하면서도 결국은 준정당의 위상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아무리 학술적이거나 개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노빠'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이다.

운동을 표방하면서도 결국 권력을 만끽하고, 여차하면 '감시와 참여'라는 미사여구를 뒤집어쓰고, 정부 내의 높은 자리나 탐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운동정치'와 '노빠'

이러한 현실 속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는 열린우리당 근처로 수렴하려는 하나의 힘과 훨씬 더 좌파 쪽에서 활동의 영역을 찾으려는 녹색당 흐름, 두 개의 힘으로 분화되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두 개 다 상처만 남은 실패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현실적으로 3~5% 정도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아마 한국에서 녹색당이 창당이 되고, 그 클라이막스에 달한다면, 10% 정도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력과 진보신당 혹은 민주노동당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까? 졸저 『괴물의 탄생』에서 전개되는 세계관은 다분히 녹색당적인 정책 대안이고, 그런 점에서는 현재의 진보정당과는 구분되는 논의의 세계이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힘들이 기계적으로 진보신당에 합류하게 되는 일은 현재로서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국의 녹색당 운동은 많은 활동가 혹은 시민들을 대변하는 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래서 어떤 특정한 인사들이 진보신당의 녹색정치를 지지한다고 표명하여도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녹색의 대안적 정책 틀과 한국경제 대안

원래 녹색의 작동방식이 좀 그렇기는 한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더 대중스타 혹은 많은 활동가들이 인정할 수 있는 인사가 없던 형태였기 때문에 더 그렇다. 즉 '협의' 혹은 '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누구와 얘기하면 될까? 그런 사람은,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령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협상을 한다고 해도, 그 대상이 없다.

두 번째는, 여전히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 녹색을 표명한 사람들과 꿈 그리고 이상을 공유하기에는 그 철학적 틀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녹색당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녹색당이 구현해보고 싶었던 정책적 틀에 관한 논의가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에서 소박하게나마 전개해보고 싶었던 얘기들이다.

이 정도면 이재영의 대부분의 질문에 몇 가지 간접적인 답변은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기회에 '파시즘'과 '중산층'에 관한 내 견해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 답변을 마무리하고 싶다.

4. 우정과 환대

'우정과 환대'라는 표현은, 내년부터 집필할 본 시리즈 중 세 번째 시리즈인 '국가의 기본'과 몇 개의 번외편에서 키워드로 사용하기 위해서 최근 준비 중인 표현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몇 개의 논의그룹에서 '환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몇 개의 논의를 해보았는데, 생각보다는 중요한 개념인 것 같다. 참고로 작년과 올해, 내가 썼던 일련의 책들은 '생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MB 파시즘이라고 원래는 이름붙이고자 했던 그 정치체계는 한국에서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졸저 『괴물의 탄생』의 또 다른 결론 중의 하나이다. 올 가능성은 다분했었는데, 이명박 자신이 파시즘적 인간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치사회구조는 물론 문화적 정치까지도 한국은 파시즘을 향해서 달려가는 중인데, 불행히도 이명박은 '불안한 중산층'을 유혹할 수 있는 아무런 인간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파시즘 시도는 하지만, 정치체계로서의 파시즘은 등장하지 않고, 다만 경찰국가로서의 전환, 즉 폭주하는 경찰 현상 정도를 보게 될 것 같다.

'증오'와 '편가르기'

그렇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는 생각보다 깊고, 향후 2~3년 동안 한국의 사회문화에서 특징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은, '증오'와 '편가르기'가 될 것 같다. 이것은 파시즘의 또 다른 전형적인 요소들인데, 경제는 계속해서 어려워지면서도 중산층은 물론 민중들까지도 '증오'라는 감성적 요소를 특징적으로 가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대단히 매혹적이면서 인간적 매력에 가득 찬 소위 '아름다운 인간'이 등장하면, 대단히 빠르게 한국형 파시즘이 완성될 것이라는 게 내가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파시즘 시나리오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시기가 '불안한 중산층'의 동요에서 시작되어 민중들까지 그 '증오'를 공유하면서 완성되었다고 할 때, 거의 유사한 형국이 2010년에서 시작되어 2012년에 마무리되는 그 정치의 계절이 이런 파시즘의 전개가 극성에 달하게 될 것 같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맞서는 '환대의 경제'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졸저 『괴물의 탄생』에서 '제3 부문'으로 표현된, 자본과 국가에 환원되지 않는 요소를, '환대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세밀하게 그려보고 싶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마무리한 첫 번째 시리즈 이후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리즈에서 이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물론 아직은 뿌옇게 요소들만 볼 정도다. 나는 그렇게 눈이 밝은 사람인 편은 아니다.

'우정과 환대'라는 거울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보면 과연 어떤 모습이 보일까?

그렇게 정치경제학을 넘어 사회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가보고 싶기는 한데, 과연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사회경제학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직은 답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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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페이퍼에 이어진다. <레디앙>에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 서평이 올랐다. 일종의 질문 형식을 띠고 있다. 설령 우석훈을 좋아한다하더라도 이런 '비판'에 직면해야 한다. 우석훈의 대안은 '생태경제학'이다. 거기에 자신의 범주를 일종의 '코뮌'의 선 위에 정치시킨다. '코뮌주의' 자체만으로도 이미 넘쳐나는 범주들과 시각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석훈은 '근대적 범주'에 대한 '탈근대적 범주'로 '코뮌'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대안을 위치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라고 했던 것은 그런 '코뮤니스트'로서의 개념인 셈이다.

이재영의 서평에는 우석훈의 주장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이 들어있다. 우석훈이 인기가 있고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또다른 올바른 이런 비판들도 함께 고민하면서 읽어야된다. 


파시즘 가능성 높지 않다
[서평] 『괴물의 탄생』을 읽고…우석훈에게 보내는 질문
 
 
 


우석훈의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네 번째 책이자 완결인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의 눈으로 살펴 풀어 쓴 경제학사이다. 우석훈은 토마스 홉스,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 경제관료들까지를 칭찬하거나 통박한다.





   
 
1부는 세계경제고, 2부는 한국 자본주의고, 3부는 대안인데, 그 각각의 사회경제 상황을 설명하며 이런저런 학파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어떤 학설을 펼쳤는지 소개하고 자신의 비평과 주장을 곁들인다.



우석훈이 좋아하는 경제학자들



‘경제학자’라는 초점으로 이 책을 읽어보면 우석훈이 좋아하는 외국 경제학자는 하이에크와 폴 로머이고, 주목하는 한국 경제학자는 백남운과 장하준이다.



“하이에크의 매력적이면서도 교양 넘치는 책들을 직접 읽어보시면, 지금 한국의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위에서 ‘747 경제’를 주창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유쾌하지 않고 황당하면서도 잔인한 민족패권론자인지 좀 이해가 가실 겁니다.



… 그에게는 보편주의와 휴머니즘이 가득합니다. 최소한 하이에크만 제대로 읽어도 3~5%의 사람들만을 위하는 한심한 경제 비전을 제시하고, 또 그걸 강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로머의 논문들 몇 개에 남겨진 흔적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걸로 박사가 된 셈이다. … 로머와 나는 학자로서 가는 길이 전혀 다르고, 나는 그보다는 생물학적인 패러다임과 진화 현상과 시스템 이론 쪽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 그러나 시리즈 첫째권의 작업이 어느 정도 완결되어갈 즈음, 로머에게 배운 것들이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에너지와 자원은 덜 쓰고, 지식과 문화는 더 많은 국민경제’, 그야말로 로머의 출발 지점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결론이 아닌가?”



외국이론이나 소개하는 조순, 정운찬



우석훈이 백남운과 장하준을 꼽는 이유는 하이에크나 로머처럼 호오(好惡)의 관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론 없이 외국 이론을 그저 소개하고 적용할 뿐인 조순이나 정운찬, 이한구 같은 한국 경제학자들과 대비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국 경제 위기 온다’는 주장은, 백남운이나 장하준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무식한 극우’ 탓에 크게 기댄다.



“이 시점에서 지금 한국의 우파 혹은 극우파들 역시도 경제적 돌파구를 찾아내기 위한 진지한 논의들이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 그런 논의를 하고 고민을 하는 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 이렇게 3~4년 더 소모적인 논쟁을 하다가 결국 국민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공황을 만나게 되리란 게 지금 우리를 음산하게 기다리는 운명이 아닐까 싶다.”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의 다른 글들처럼 교양이 넘쳐나고, 도전적 문제의식으로 번뜩인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스스로 던진 화두가 그의 산만함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논거 부족, 화두의 실종



아래는 『괴물의 탄생』에서 우석훈이 펼친 주장에 대한 의견이나 질문이다. 우석훈이 당장 보충 설명을 해주어도 좋겠고, 지금 어렵다면 나중에라도 공부하여 알려주길 바라고, 우석훈 아닌 어느 누구라도 『괴물의 탄생』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가장 먼저, 우석훈판 경제 위기론의 전제 중 하나인 이명박 정권이 극우파라는 진단. 한국 우익의 역사적 근원이 좌익과의 격렬한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 이후의 태도 역시 극우 반공이었고, 근래에는 극우 경제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 정치’가 아닌 구체 정책들이 남미나 동남아의 우익들과 많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나 이집트 나세르와는 또 무엇이 다를까? 가장 최신의 우익인 이명박 정부에서조차도 제3세계의 매판 우익들과는 달리 국가주의와 인민주의 전통이 잔존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우’라는 진단으로 인해 현실 정치경제학에서의 섬세함을 잃는 것은 아닐까?



다음, 한국 경제시스템을 ‘건설 파시즘’으로 읽는 문제. “한국 자본주의의 대부분을 사실상 장악한 건설 파시즘이고, 그 수장은 현재 이명박이지만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으며, 그 실체는 해체의 과정을 겪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건설 파시즘'이란 독해의 위험성



우석훈이 비판하는 지방 토호들의 성격, 그리고 생태운동의 대립자로서 ‘건설’을 반정립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현 단계 또는 국면을 ‘건설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건설-부동산이 유한계층의 불로소득원이나 비생산적 투기행위로 치부되었던 데 비해 지금에 이르러 어지간한 소득 가진 사람들의 ‘재테크’인 데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금 한국의 건설-부동산 붐 양상은 지자체와 토건족이 주도했던 일본의 버블보다는 외환위기 전 영국이나 스웨덴, 현재의 미국처럼 금융자본의 움직임에 철저히 연동돼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명박의 대운하 역시 ‘건설’이라는 사업 부문의 문제가 아니라, 거대 자본의 투자와 운용이라는 본질에 따라 언제든지 부문 변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 경제 위기 문제. 책 곳곳에서 약간씩 다르게 서술되고 있지만, 우석훈은 이명박 정권 말기나 다음 정권 초기에 1980년이나 1998년 같은 공황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는데, 논거가 많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 다음번 공황은 조금 앞당겨질 거라고 예측하는 편이다”라는 설명은 너무 불친절하다.



1980년은 중화학공업으로의, 1998년은 정보통신산업과 신자유주의 금융으로의 이행 과정이었는데, 그렇다면 다음 공황은 어떤 것으로의 이행에서 생겨나는 것인지? 주기적 순환을 넘어 1980년과 1998년과 같이 거대한 사회 변동을 불러올 ‘공황 에너지’는 무엇인지?



넷째. 파시즘 문제. “한국에서의 파시즘은 ‘건설자본 + 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을 억압하고, 정치 지도자와 2~3% 정도의 경제 엘리트가 나머지 국민들을 끌고 가는 상황 정도”라면 굳이 ‘파시즘 온다’고 질겁할 일도 없겠지만, 어쨌거나 책 곳곳에서 비감한 비관을 내비치고 있으므로 그 가능성을 짚어 보자.



파시즘 가능성이 크지 않은 이유



파시즘이 되려면 정치적 극단으로 치우칠 만한 경제적 위기와 파시즘을 추진할 사회 계층,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경제 위기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계급 계층 문제에서는 파시즘화의 가능성이 크지 않다.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 같은 중하위 근로계층의 곤궁이야 폭발 직전이고 그들이 좌익을 경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의 지배자인 대자본은 지금 방식으로도 충분히 지배 지속 가능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일당독재’의 가능성이야 높지만, 그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한국판 자민당 시대의 개막이지 않을까?



또, 파시즘은 우익을 위협하는 좌익의 도전 또는 실험이 좌절된 데 이은 반동일 텐데, 그런 위협과 실패가 전혀 실재한 바 없으므로 한국 우익에게는 파시즘이라는 반동의 유혹도 크지 않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권익 유보를 상쇄할 만한 국가주의적 목표에 대한 ‘국민적 합의’인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다섯째, 우석훈이 대안모델로 제시하는 스위스는 많이 흥미롭고 베껴올 게 많을 듯싶다. 나는, 한국이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이므로 분산자치적인 스위스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우석훈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석훈이 스위스의 고졸자 마에스트로 시스템을 거론할 때 조금 멈칫거리게 된다.



섬유산업에서 곧장 거대 장치산업과 정보통신산업으로 넘어간 한국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고숙련 노동자를 실업자로 내모는 현황을 보면 왜 한국에 정밀가공 기계산업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런 건 1970년대의 ‘Made in West Germany’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김나지움-마에스트로에 힘입어 세계 최대 수출국이었던 독일이 지금은 한국 대학보다도 경쟁력이 뒤진다든가, 그래서 스웨덴이나 핀란드만 못하다는 일각의 진단도 그저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제3섹터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들



우석훈이 들고 있는 스위스의 상품 이름들 - 에망탈 치즈, 골드문트, 스마트카 같은 것들이 또 한 번 멈칫하게 한다. 이런 고부가가치 명품들은 사실 스위스보다는 북부 이탈리아가 더 본산이라 할 텐데, ‘좋은’ 스위스와 ‘나쁜’ 이탈리아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고부가치 산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끝으로, 제3부문. 공공부문이나 시장부문의 크거나 작음보다는 제3부문의 과소(寡少) 지표가 더 현격한 한국 경제의 특징이므로, 우석훈의 주장처럼 그 방향에서 여러 활로가 찾아질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석훈이 들고 있는 유럽 선진 나라들의 제3부문이 어떤 사회문화적 전통에서 확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회적 기업’ 육성사업을 펴는 노동부나 ‘제3섹터’를 주창하는 시민단체들은 제3부문을 ‘좋은 일’ 정도로 오해하거나 오해하도록 하며 ‘계도’하고 있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제3부문은 그런 작위적 노력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국민국가 자본주의에 흡수되지 않은 전자본주의 또는 비자본주의적 커뮤니티의 경제활동으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극도의 연방주의-꼼뮨주의를 취하고 있는 스위스나 아직도 분리독립의 꿈을 접지 않고 있는 바스크, 막부에 대항하는 영주-자민당에 대항하는 공산당 지자체의 일본에서 제3부문이 흥하고 있는 사실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특수한 제3부문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두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들 사이에서는 세대를 초월하여 지속되고 있는 부조 조직 계(契)는 무엇인가? 왜, 생협은 도시지식중산층의 전유물로 치부되고 있는가?

 


2008년 10월 06일 (월) 09: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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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3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10-1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레이당의 서평은 인상적으로 잘 봤습니다. 우석훈이 4부작을 썼다면 저도 우석훈 4부작을 써보려고 하는데, 우석훈 비평분석이 4번째 계획입니다. 아직 괴물이 출몰할 분위기는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잠수중인 잠룡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