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H.D.F. 키토 지음, 박재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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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은 극단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이 중용을 말할 때면, 조율된 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중용은 긴장의 부재와 정열의 결핍이 아니라, 참되고 맑은 음을 만드는 올바른 긴장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p375)

키토의 <The Greeks>는 1951년에 출간된 그리스 입문서이다. 

반 백년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있으니 이 분야에서는 '고전'이라고 해도 크게 나무랄 사람은 없을 듯 싶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이 책은 '그리스 고전을 읽기 위한 고전적 입문서' 인 셈이다. 앞에 인용했던 글은 이 책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글이다. 지난 여름 뜨거운 흥분의 물결이 가라앉은 시점에 다시금 큰 울림을 갖을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종말' 내지는 '퇴출'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그 마음의 간절함이야 알겠지만- 후쿠야마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것 만큼이나 경솔하다.

<The Greeks>(우리말 긴 제목보다 이 원제목이 더 강렬하다.)는 고대 그리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철학사를 논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사회문화사책이며 역사책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논하는 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철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철학'책이라 말해도 좋다. 키토는 이 얇은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어떤 세계를 살았고,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책은 모두 12장으로 되어 있다. 해당 주제별로 크게 모아본다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장 까지는 고대 그리스의 기초를 만든 그 '이전'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핵심부분은 5장 -9장로 보여진다. 5장의 주제가 '폴리스는 ...이다' 이고 9장의 주제가 '폴리스의 몰락을 가져온 원인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키토의 <The Greeks>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꼽을 수 있다. 그것은 '폴리스' 이다. 다른 말로 하면 키토는 '그리스인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폴리스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10장에서는 앞선 과정을 통해 살펴본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11장과 12장은 부수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또 가장 논쟁이 많이 되기도 하는 주제들이다. 신들에 대한 해석문제, 여성, 노예 등과 그리스 시민과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키토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를 바라볼 때 조금 더 '다양성'을 갖고 바라봐주길 요구한다. 가끔 우리는 현재의 다양성과 복잡성이라는 사슬에 묶여 과거는 이보다 더 단순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광학기술의 발전처럼 현대의 연구가 발전할 수 록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상식'이라는 함정 속에서 생을 마감하느냐의 차이이다.

 키토는 책 첫머리에서 부터 서구 역사의 시작처럼 느껴지는 고전 그리스가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작가는 '새로운 르네상스'였다고 말한다. 북방의 헬레네스 문화와 남방의 크레타 문명이 가장 극적으로 융화되어 꽃을 피운 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 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이다.BC 5세기의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그런 시기였다. 이런 그리스 문화의 혼종성은 그리스 예술의 위대성과도 연결된다. 이오니아와 도리스 기둥으로 기억되는 지적긴장감과 예술적 쾌락이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어낸 것이다. 흔히들 그리스 미학을 규정하는 '대칭' '균형' 같은 개념들이 이런 하이브라이드의 결과인 셈이다. 그리스인들의 변증법적인 조화의 미덕은 호메로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리아드>는 통일성과 인과성, 도덕법칙의 존재를 밝힌 책이다. 물론 <일리아드>중 단 하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르테'이다. 호메로스는 '아르테'를 향한 삶의 열정과 '숙명'이라는 이름의 생의 비극적 틀 사이의 긴장감을 아름다운 글로 남겨놓은 것이다.

키토가 요구하는 '다양성'의 시각에는 '그리스인들'에 대한 '다양한 시각'도 함께 들어 있다. 그는 '그리스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탈근대적인 감각의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탈근대적 칼럼들에 영향을 받은 개인에 대한 강조가 아무런 철학적 맥락 없이 쓰이고 있다.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로서의 '가벼운'개인에 대한 존중말이다.)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개별 행위의 특수성과 동시에 보편성을 동시에 중요시 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남아 있는 그리스 비극들 모두를 생각해 보면 이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스 비극은 낭만적인 우울감만 주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공동체적인,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인의 '개인성과 보편성의 결합'이라는 주제로 넘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둘이 상호관계를 맺는 장소를 이해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폴리스'이다. 저자 역시 '폴리스'라는 말을 '도시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나쁜 번역이라고 말한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피에르 아도는 아예 '도시'라고 번역한다. '폴리스'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에 적절한 번역이 없다. 그러므로 그냥 '폴리스'라고 쓰는 것이 가장 옮은 듯 하다. 폴리스는 기본적으로 작은 공동체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폴리스의 숫자를 시민 5 천명이라고 말했고, 이포다마스는 총 인구기준 10만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몇 몇 폴리스를 제외하고는 이 것보다 작았다. 왜 작아야하는가? 이것은 나중에 폴리스 멸망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폴리스는 친족공동체, 부족 공동체의 한 형식이 발전한 것이다. 그 안에는 물론 귀족들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물론 중심은 시민이었다. 그들은 농업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자급자족 경제를 유지했다. 요즘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탈주형 공동체'들의 원형은 '폴리스'에 있다. '폴리스'는 정체를 유지하기 위한 각 내부 관계를 파악하기 용이했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직접 참여가 가능했다. 즉 모두가 책임지는 공동체 말이다.

키토는 '폴리스'가 형성되는 몇 가지 지리적,역사적 요인들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키토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폴리스 형성의 원인'은 '그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망, 덕을 고양하려는 소망을  '폴리스'를 통해 이루어 내길 원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는 직접투표를 하고, 도편 추방을 했던, 단순한 '정치체제'가 아니다. 폴리스는 정치적, 문화적,도덕적 삶을 포함하여 공공의 삶 전체였다. 더 단순하게 도식화하자면 '그리스인은 폴리스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남겨 놓은 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곧 '인간은 폴리스에 산다' 와 같은 문장이다.

책의 중반부 7장쯤에 가면 고전기 그리스의 성쇠가 등장한다. 작은 폴리스였던 아테네가 성장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대학교 때 본 <플루타크 영웅전>을 다시 찾아보고 싶게끔 만든다.당시에 나는 낯선 그리스 이름들 때문이었는지,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또 다른 것들이 읽히리라.)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자가 되는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이다. 그리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대 아네테 제국'을 꾸려나간다. 그렇지만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역시 '폴리스'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폴리스의 독립성을 깨고 싶지 않았다. 만약 대규모의 통일국가가 된다면 이것은 '폴리스'의 정체성과는 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발생한다. 직접 참여는 대의제에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고, 이는 시민들의 자기통치보다는 참주등을 통한 지배-복종을 뜻하는 것이기때문이다.

키토는 실제 작동하는 폴리스를 근대적인 구분을 통해 말하는데, 이게 아주 적절하기도 하다. '아테네는 아마추어 국가다'라고 말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 말은 짧지만 정확한 표현이고,또 함축적이다. 그리고 그 비극적 결말까지도 암시하고 있다.(이외에도 키토는 본인이 살던 영국을 배경으로 하긴 하지만 위트있는 표현을 자주 보여준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말하고 아테네의 당시 상태를 비판 했던 것은 '폴리스'가 내재한 기본적인 모순들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개선과 선을 추구하고, 도덕적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폴리스'가 무지한 사람들-소크라테스적 의미의-에 의해 그 기능이 부여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정체성'을 향한 열망은 시대의 움직임에 떠밀려 간다. 그리고 '폴리스'의 소박한 꿈은 그 자체 모순을 맞딱드리는 순간 붕괴 일로는 걷는다. 직접적인 계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과두정을 실시하고 총독통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위대한 알렉산더의 마케네가 들이닥친다. 키토는 아테네가 패하는 계기를 내적인 원인에서 찾고 있다. 그는 고전 그리스 전성기 BC5 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와 BC 4세기의 데모스테네스의 시대를 비교한다. 그리스는 페리클레스 시대 이후로 잦은 전쟁을 통해 진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힘의 우월성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BC 4세기쯤에 이르면 '폴리스'는 정치적 무력증과 무관심에 빠져든다. 기토는 이 점을 시대적 대전환이라고 파악한다. 즉 삶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출현을 한 것이다. 즉 고전기의 그리스는 이제 지난 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희극 소재를 먼저 예로 든다. 과거 건강한 '폴리스'의 시대에는 희극도 그냥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때가 되면 희극은 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농담거리고 전락한다. 또한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용병지휘관 들이다. 아테네는 전통적으로 시민개병의 전통하에 있었다. 그것이 또 폴리스의 삶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점점 더 많은 전략과 기술을 요하고 이에 따라 용병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것은 비단 군사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폴리스' 자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폴리스'에서 건강한 시민과 강건한 군인은 하나였다. 이것은 전쟁에서의 '효율성'과 '전문화'가 '폴리스' 와 양립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철학사조의 변화를 살펴봐도 폴리스의 붕괴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점은 원인과 결과의 위치를 두고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테모스테네스의 시대는 견유학파와 키레네학파가 두각을 나타낸다. 이들은 '선에 대한 질문'을 한다. 과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절대선'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상정해 놓은데 반해 이들은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이는 과거 '폴리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과거 '폴리스'는 '절대선'을 상정해 두고 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노래했다. 반면 새로운 시대는 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들은 이제 '폴리스'라는 개념대신에 '코스모폴리스'라는 제국의 시대에 어울리는 윤리관을 갖는다. 지혜로움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인류라는 공동체로 대체되는 것이다.

키토는 그리스적인 것에 대해 책 말미에 정리한다. 풍부한 내용이지만 관심을 자극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단어만을 열거하자. '사물의 전체성에 대한 감각', '건전한 균형',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 '실용적인 단순성', 규칙성과 균형에 대한 강한 감각' '수학의 발견' '변하지 않는 실재와 정신의 위대함' 등이다.

<The Greeks>가 나온 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미 50년을 넘겼다. 키토가 이 책을 낸 이후에 더 많은 인류학적 발견과 그리스에 대한 학문적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토의 책 중 어떤 부분은 미흡하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문제나 여성들의 문제 등에 대해서 키토는 비교적 친그리스적인 태도를 취한다. 가끔은 현대와 비교하면서 그리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이 지점들은 다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들이다. 맑스주의 미학자인 하우저같은 이들은 그리스 예술과 민주주의가 노예들의 물적 기반 위에 있음을-물론 그가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상기시킨다. 키토는 이보다는 오히려 삶에 그리스인들의 청빈한 태도와 여가에 대한 욕구등을 강조한다. 그 외에도 키토의 시각들에는 그리스에 대한 많은 애정과 서구 우월주의와도 같은 성격들이 간간히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자의 말처럼 그리스 전문가의 그리스에 대한 깊은 애정의 흠결정도로 봐줄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런 꼬투리로 이 책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역시나 품격 낮은 짓이다. 

'그리스' 하면 무너진 신전의 모래기둥이 떠오르고, '철학의 고향' 같아서 딱딱한 부리의 앞머리를 만지는 느낌을 갖는 이들에게 키토는 말한다.

"그리스인은 남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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