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가방에서 하루를 재워 놓았던<시사인>300호. 오늘 아침 설렁 설렁 넘긴다. 언론계의 스파르트답게 300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커버스토리는 '철수,호남을 얻다' 이다. 여자들이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남자 '군대'이야기,'축구'이야기,,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고 한다. 이젠 별로 감흥도 없는 신석기 시대 유머이긴 하다. 철수나 영희가 땅따먹는 이야기가 내게 그렇다.
특집은 '삼성경제연구소'이다. SERI는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그람시를 인용하는 스튜어트 홀의 문화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적 쟁투이다. 실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정치적 권력의 쟁투이지만 그 이면에 담론의 투쟁은 정치적 권력의 지반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쟁투과정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된다. 신자유주의와 그것을 지지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은 어느날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항권력도 '우리 합시다'해서 튀어 나오는게 아니다. 담론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하다.
<뉴스타파>의 김용진 대표,최승호 PD와 인터뷰했다. <뉴스타파>는 요즘 인터뷰하기 힘든 인튜뷰어들(^^ ?)이다. '조세피난처'라는 말 대신 '조세 은닉처'란 표현이 어울리는데 하여간 이 뉴스보도 이후 <뉴스타파>는 가급적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는 걸로 알고 있다. 후속보도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다른 인터뷰로는 <한국일보> 해직 편집국장과의 인터뷰도 있다.
문화면에서 <진격의 거인>현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진격의 거인>을 일본 사회의 무기력의 은유로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의 은유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싸우는 자 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영화<에브리데이>에 대한 평은- 미안하지만-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칼럼이었다. 평화연구자 임재성씨가 쓴 글인데 <공동체와 회사>라는 제목이다. '그린비' 출판사와 노조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문사회학 책을 취미로 읽는 내게 '그린비'는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출판사이다. 글쓴이는 '진보적 인문학 공동체'와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회사'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어서 '공동체라는 이름 속에서도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인정' 그리고 '동일함을 강요하는 공동체의 배타성을 넘어 직원을 회사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학문하는 사람들, 또는 문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 특징 중에 하나가 인간적 유대의 강조이다. 특히 진보적 문화연대의 특징은 그런 끈끈한(?) 연대같은 것이다. 이건 일반 회사에서도 목격되곤 한다. 서류적 인간이 아닌 동지 또는 가식적이긴 하지만 상징적인 또하나의 가족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싹튼 동지의식은 매우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고 힘든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침묵과 외면 또는 봉합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연대의 정에 대해 다른 접근을 하는 아랫사람을 만날 때는 더욱 그렇다. 결국 그건 평등이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껍질을 쓴 하방식 권력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배나 권력자는 그런다.'너네들 내가 이런 좋은 생각으로 해주잖아.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하면 어떡해. 이 나쁜'
시선의 위치는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동지의식의 카르텔은 스스로 권력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기형적인 착각을 한다. 우리는 평등한 동지, 불편이나 어려움은 함께 참는 것. 위계나 서열, 또는 비민주적 토의구조 같은 것은 보수적인 녀석들이나 또는 적들의 것일 뿐이다. 어려운 말 끼워넣지 않아도, 착각 중에서도 상착각이다.
최초의 어떤 모임들이 발기되는 과정은 소규모의 의기투합일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정체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과의 관계 역시 그럴진대 사람이 모인 집단이라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아..시사인 300 축하해요.ㅎㅎ 인증샷 찍으면 추첨을 통해 상품 준다는데 혹한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