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제목만큼이나 멜랑콜리하진 않다. 오히려 블랙 커피의 남은 찌꺼기를 혀로 핥는 듯 진한 씁쓸함이 있다. 그 입맛이 기억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메모를 남겨 놓는게 좋을 듯 하다.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블랙 코미디다. 그로테스크한 정치우화다. '슬픈 광대는 아이들을 웃기지 않는다.'는 영화 속 주인공 하비에의 말처럼 박장대소 할 수 있는 장면은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외형상 사랑의 삼각관계를 중심 축으로 한다.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군에 아버지를 잃은 '슬픈 광대' 하비에와 서커스단의 주역인 '웃긴 광대' 세르지오, 그리고 세르지오의 연인인 줄타기 하는 나탈리. 영화 중반부 이후 서사는 질투와 광기의 두 광대 사이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띤다. 이들의 사랑은 광기와 폭력의 화염에 뒤섞인 뒤틀린 사랑이다. 영화는 결국 삼각관계라는 캐릭터의 배치를 이용할 뿐 사랑의 의미따위를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사랑이 극단적으로 놓이게 되는 시대적 멘탈리티 같은 것에 의미를 둔다. 전체적인 영상은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특히 사건의 변화와 흐름,그리고 시대적 알레고리와의 연결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적인 화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영상의 이중적 활용 방식은 관객을 극과 사실 사이에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게끔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 거리는 영화를 단순한 치정행위로 소급시키지 않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이 유효한 거리를 통해 광대들의 이야기와 프랑코 독재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직조할 수 있게 된다. 뉴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시기는 성장하는 소비사회의 과실을 향유하는 낭만의 시대로 묘사된다. 그 화면 속의 스페인은 정열과 사랑의 나라일 뿐이다. 아무런 일도 없다. 그러나 광대들의 사랑을 둘러싼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런 단면에 빗금을 긋는다.안락하게까지 보이는 독재시대와 파국으로 향하는 광기 어린 사건들은 사이의 간극은 전자의 포획된 정체가 일종의 마약과 같은 판타지에 지나지 않음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앞서 말한 대로 '슬픈 광대' 하비에다. 그런데 하베에르는 왜 슬픈광대가 되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말이다. 감옥을 방문한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광대가 되려면 슬픈 광대가 되라.'라고 말한다. 그는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어린아이인 적이 없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는 어린 하비에에게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으로 '복수' 를 말한다. 
 영화 초반 도입부는 주인공의 멘털리티를 형성하고 이해하는 첫번째 단초로 작동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수'를 요청한다고- 마치 무협 영화를 연상시키듯- 몇 몇 영화 기사에서 쓰고 있는데, 완벽한 오독이다. 최소한 사적 복수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기하는 길은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나갈수 있는 극단적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개인적 복수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시대적 무능을 이겨낼 수 있는 분노를 요청하는 것이다. 파르티잔의 '복수'를 말한다. 이것은 하비에의 구명 계획의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몰고오면서 개인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실재계의 트라우마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온순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던 하비에르가 미친광대가 되어가는 과정은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복귀로 볼 수 있다. 하비에르가 갖는 트라우마는 스페인 사회가 무의식 속에 담고 있는 트라우마의 은유이기도 하다. 

 


 서커스단은 역사적으로 축소된 작은 스페인 사회가 된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교실로 압축된 한국 사회의 폭력과 위계구조였듯이.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그런 역할을 한다. 서커스단의 '웃는 광대'는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있다. 하비에가 사랑하게 될 나탈리라는 여인은 폭력과 성적 비하를 당하면서도 그에게 복종한다. 서커스단의 당원들 역시 생계를 위해 그에 순종한다. 하비에가 '슬픈 광대'가 된 것은 아버지의 유언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시대적 메저키즘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들뢰즈에 따르면 메저키즘은 사디즘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디즘과 유사한 정서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슬픈 광대'를 택한 것은 스페인의 대중 정서 구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을 제압할 수 없을 때,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공포를 느낄 때, 대중이 취하는 방식은 스스로 폭력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메저키즘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즉 알아서 기는 방식으로 폭력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비에가 서커스단에서 첫번째 공연을 했을 때, '웃는 광대'는 그의 연기를 높게 평가한다. 하비에는 적극적으로 메저키즘의 매커니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코 시대의 스페인 사람들 역시 그와 같지 않았을까? 성향은 달랐겠지만 오랜 독재 시절을 경험했던 우리에게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감독은 그 시대를 관통했던 대중들을 연민하면서도 풍자와 독설을 아끼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이런 장면들이다. 미친 광대가 된 하비에르가 거리로 총을 들고 나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위협하듯 '당신들 때문이야' 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하비에에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협박당하게 되는 일가 역시 휴게소에서 무얼 먹을까로 실랑이하는 소시민적 주체들이다. 그들은 하비에의 총구 앞에 도망가기 바빠서 화장실간 막내 아들을 놓고 온다.  '대중독재'에 대한 공모에 대한 풍자적인 자기비판이자 항고이다. 이런 장면들도 있다. 주인공 하비에가 어린 시절 악연을 맺게된 대령의 집에 잡혀왔을 때 일이다. 대령은 숲에서 그를 잡아서 사냥개처럼 부린다. 문자 그대로 '사냥개'로 취급한다. 하베에는 군벌들의 사냥터에서 잡은 새를 입으로 물고 주인에게 가져온다. 이 때 둘 사이의 악연을 모르는 프랑코가 이를 나무라다가 하비에게 물린다. 하비에는 '무는-기계'가 되어 정말 개처럼 프랑코의 손을 물어 뜯는다. 이 장면은 우습기도 하지만 또한 매우 조롱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 집의 집사가 '어쨋거나 프랑코의 손을 물어 뜯다니 대단해.'라고 하는 대목에서 질문은 매우 선명해진다. '하비에=무는 기계;  개' 가 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코를 물어 뜯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한 '개-기계' 가 되지 않고는  물어 뜯을 수 조차 없는 정치권력은 어떤 존재의미를 갖는가? 


 




영화속에서 내성적인 하비에르가 숨겨진 광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일종의 환타지적 사건을 통해서다. 하비에르에게 나탈리는 성모의 모습으로 수호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영화에서는 이장면을 포함하여 영화 후반부에 카톨릭과 관련되어 두 번 정도 종교적 이미지가 사용된다.프랑코 독재와 카톨릭과의 연계를 생각한다면 이 것이 괜한 배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종교의 신비주의와 파시즘이 연동되는 방식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실제 프랑코 정권 역시 정적들을 제거하고 독재 정권이 안정적 단계에 들어서자 카톨릭 세력들을 영입하여 국민적 지지를 확보해 나간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탈리의 성모 현신'은 사건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나탈리는 '성과 속'이라는 부르주아 남성의 성적 이데올로기 재현방식이 전형적으로 투영된 인물이다. 공포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은 정상적인 형태를 띨 수 없다.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었던 즉 오이디푸스적인 하비에르는 '복수'라는 법의 이름으로 상징계 속에 봉합되어 삶을 유지해 왔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의 내적 실재가 폭발하는 공간은 자기투영적 짝패라 볼 수 있는 '웃긴광대'의 폭력성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궁극적으로 '웃긴 광대'와 '슬픈 광대'는 거울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비에의 폭력성을 깨운 것은 세르지오의 폭력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비에는 세르지오에 대해 일종의 거세 공포에 시달린다. 영화 초반부까지 하비에는 세르지오에 공개적으로 무섭다고 할만큼 주눅들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비에르는 영화 속에서 성적 무능력자처럼 그려진다. 그는 나탈리라는 여인을 성녀화하면서 또한 마초적 유희의 대상으로서 염원한다. '웃는광대'와 나탈리의 거친 성교장면을 피치못할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비에르는 마치 부모의 성교행위를 목격한 자식의 경험상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 모욕감과 동시에 오디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전치된 형태는 당연히 '성녀 마리아'일 수 밖에 없다. 하비에르의 불시의 공격으로 자상을 입은 '웃는광대'가 영화 후반부 자학을 통해 일그러진 '우는 광대'의 얼굴을 보고 '너도 나처럼 되려고'라는 뉘앙스의 말을 뱉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비에의 오이디푸스적 혼란은 극장씬에서도 드러난다. 슬픈광대의 발라드를 부르는 라파엘의 노래에 몰입해 있던 하비에에게 또 다른 판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수와 폭력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며 영화 속 영화의 라파엘은 그런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길 종용한다. 하지만 하비에의 내적 갈등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미 하비에는 이미 부서진 상징질서 속에 드러난 실재의 영역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최후의 격전지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광기를 드러내고 죽음의 욕동을 향유하는 길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통과한 두 명의 서로 다른 광대가 조우한다. 관객은 파국적 비극의 결말에 와서 서로의 거울로써 공명하고 있었던 등장 인물을 확인한다. 무릎을 맞댈만한 거리에서 이 둘은 공통으로 경험한 상실과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비극의 몫을 상기하며 웃음과 울음을 교차한다. 짧지만 강력한 두 광대의 클로즈업은 누가 울고 누구 우는지, 또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마치 어린 시절 본 작은 광대 장신구처럼 위에서 보면 웃고 있고 돌려보면 우는 그런 형상을 닮아 있다. 광대들의 비극은 그렇게 시대적 비극을 소환시키며 웃음과 울음의 기묘한 이중주 속에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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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네 : 타이스 [한글 자막] -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오페라하우스 명연시리즈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 오페라하우스 명연 시리즈 9
라도 아타넬리 외 / 아울로스 (Aulos Media)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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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몇 장면에서 타셈 싱의 미장센이 떠오른다. 시각연출로 보자면 초현실주의와 고전미를 절충하는 중도적 방식이다. 무용단의 안무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독창자의 연기몰입도에는 작은 불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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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신 DIEU DIEU - 어느 날, 이름도 성도 神이라는 그가 나타났다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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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대한 역사적 질문들이 응축되어 있다. 아도르노가 우려한 대중문화를 통한 `관리 사회`의 측면까지도 말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존재와 신의 문제를 넘어 소비 자본주의와 신의 문제를 우화적으로 이야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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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강설 사서삼경강설 시리즈 2
이기동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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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열풍이 불어 혹하고 다시 논어를 봤다. 다시금 논어에 큰 감응을 받지 못한다. 내겐 대학이나 중용이 임팩트 있다. 왜 유독 논어가 인기 있을까? 논어의 경세성이 주체의 자기관리와 어떤 관련이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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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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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은˝인간의 무늬를 만드는 것이 인문이다.˝라고 한다.영화라는 텍스트 속에 들어간 '타자'와'관계성'이 어떤 무늬를 만드는지 앞으로도 기대할만하다.오래전 그의 책에서 본영화와 얽힌 개인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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