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설국열차>에 대한 스포일있습니다. 리뷰는 아닙니다. 아내랑 나눈 대화를 거의 가감없이 정리한 형식. 영화적 사실 관계가 다를 수 도 있지만, 남의 부부 대화 엿듣는 느낌으로 보시면 됩니다. ㅋㅋㅋ

 

 

 

 영화<설국열차>를 휴가 마지막 날 밤 9시 넘어 봤다.  늦은 밤이었으나 극장은 만석이었다. 천만 관객 돌파는 최소 3주 이상이 걸리는 일이어서 초반 흥행 성곡이 천만 벽을 단언해 주진 않는다. 물론 천만이 무슨 염라대왕의 살생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올 상반기 최대 히트작이었던 <아이언맨3>과 비교해 본다면 초반 스타트는 <아이언맨3> 그 이상이 아닐까 싶다. 향후 방향은 좀 다를 수 있는데, <아이언맨>은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인데 반해, <설국열차>는 조금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관객 평들이 이후 영화 흥행 성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설국열차> 입장에서 다행이라는 것은, 최소한 <아이언맨3>은 두번 볼 마음이 없는 나같은 관객이 <설국열차>는 두 번 볼 계획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영화 흥행에는 도움이 되질 않겠나. 그래봐야 손바닥으로 바닷물 퍼담는 것정도 겠지만.

 

<설국열차>를 먼저 보고 온 것은 아내였다. 휴가 기간 중 둘째가 아파서 함께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래서 여행 돌아온 후로는 개인적으로 룰루랄라 거릴 수 있는 시간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둘은 내 몫이었다.

 

오늘 낮에 아내가 회사 근처에 왔다. 요즘 시험 준비하는게 있어서 공부하다가 햄버거 하나 사가지고 위로방문하라기에 들렀다. 아내가 영화<설국열차>에 대해 물었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 보는 동안 스쳤던  생각 몇 개를 이야기했다.(긴 리뷰는 쓰지 않을 것 같다. 영화 <설국열차>는 내게 약간의 분석적 작업을 요하는 텍스트가 될 것이라서)

 

아내)영화 어땟어?

나) 음..나쁘지 않았어. 한국 SF영화의 정치적 아이디어를 일정 수준 높인 것 같아.

 

아내) 마지막에 북극곰, 이상하지 않았어.

나) 그렇지. 그런데 왜 봉준호가 북극곰을 롱샷으로 제시하지 않고 돌아보는 미디움 샷을 넣었는지 생각해봐야해. 내가 보기에 그건 봉준호가 웃기려는 거야. 그냥 이제 힘 빼라고 넣어주는 농담같은 것. 사실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으로서의 상징이라면 산기슭을 올라가는 곰샷이면 충분했다구. 근데 굳이 미디움 샷을 넣었단 말이지. 내가 보기에...그런거 있잖아...우리가 뭐 한참 진지하게 말하다가...이야기 끝낼 쯤 되면....그러니까 말이 그렇단 거지요 뭐! ㅎㅎ 아니면 말구요..하는 식으로 어깨를 가볍게 하는 화법을 쓰잖아. 그런거야. 곰이 왜 나왔는지, 곰이 식인곰인지 아닌지 뭐 이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구. 중요한 과정은 그 전에 모두 끝났잖아.

 

아내)그런가? 하긴 언젠가 TV에서 신성우가 왜 뮤지컬 배우들이 공연 끝나고 나면 커튼콜 할 때 우스꽝스런 포즈를 취하는지 이야기 한 적이 있었거든. 그게 관객들에게 '이제 연극은 끝났어요. 각자 자기의 현실로 돌아가세요.'라고 빠져 나오는 시간을 주는 거라데.

나) 음. 좋은 비유같네. 봉준호도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여간 곰이 북극곰인지, 시베리아 곰인지 그거 별로 중요한거 아닌거고, 그게 현실적이네 아니네도 전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 웃기려고 한거야 봉준호가...ㅎㅎㅎ

 

아내)자긴 어떤 점이 좋았는데?

나) 일단 몇 가지 패러디들이 귀여웠어. 예를 들자면 <올드보이>의 장도리씬 있지. 봉준호가 기차에서 하데. 물론 귀여운 오마주인데, 생각해보면 장도리씬의 공간과 기차의 공간이 비슷한 부분이 있어. 앞으로 가아가야 하는 절박함. 뒤는 죽음이지.ㅎㅎ 그 기차의 현자있잖아. 그 사람이 팔을 내주었더니, 나중에 다른 기차 안 사람들도 팔을 내었다는 대사 같은 거 있지. 그거 기독교의 산상수훈에서 '오병이어'에 대한 공동체적 해석과 유사해. 어떻게 그 작은 음식으로 모든 사람을 먹였겠어. 예수가 솔선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은거야. 그러니까 저마다 하나 씩 나중에 먹으려고 숨겨놓았던 것을 내놓게 되었고 결국 무리 전체가 떡과 물고기로 먹을 수 있었지. 성경은 그걸 상징적으로 '오병이어'로 먹었다고 말하는건데,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리고 커티스 반란팀의 첫번째 위기. 진짜 조마조마 하던데, 적외선 살육씬 있잖아. 거기서 성냥으로 횃불로 대응하잖아.

 

아내)그래.아이가 성냥을 켜지

나) 그래, 그리고 어른들에게로 이어져. 그 장면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랑 거의 유사해. 그리고 마지막에 아이들만 남지. 영화적으로는 그 촛불을 건넨 아이와 마지막에 살아남은 아이가 같은 아이라구..

 

아내) 영화적으로는 그렇겠네. 영화 <괴물>의 끝보다는 낙관적이긴 하지.

나) 그게 봉준호가 가진 현재의 정치적 포지셔닝인 것 같아. 기본적으로 봉준호는 현세대를 믿지 않아. 즉 우리와 봉준호를 포함하는 모든 기성세대 말이지. 거기에는 별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 같아. 사실 나도 좀 그래서, 봉준호를 끌어들이려는 것 같기도 한데.ㅋㅋㅋ 하지만 아이들은 좀 다르지. 최소한 그 아이들은 두 개의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론 그아이들도 늘 희망이 될 수는 없어. 단지 아직 카드를 펴지 않았으니, 우리보다 낫잖아.

 

아내) 그래, 우리 아이들 잘키워야겠어

나) 어제 예찬이에게 화를 세번 내었는데, 마지막에는 예찬이가 나를 바라 보던 표정이 ...하 뭐라고 해야할까. 좀 서글퍼보이기도 하고 하여간 맘에 남아.

아내) 그래, 자기는 바깥에 나가서 남들에게 뭔 피해주는 일 하면 너무 곧바로 화를 내더라.

나) 좀 그래.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건..좀. 하여간 그래도 예찬이에게 잘해야 하는데...

 

어쨋거나, 봉준호가 보기에 새로운 세상에 어른들은 들어갈 수 없어. 아니 들어가서도 안돼. 그만큼 기성의 것에 부정적이지. 물론 기성세대들도 할 일은 있어. 그 아이들을 폭발로 부터 지키는 것. 거기까지가 끝이야. 이거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여호수와 관계 같은 거 잖아.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유대인을 이끌고 고생 고생하며 도망쳐 나오긴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을 밟을 영광을 주지 않지. 모세의 역할은 가나안이 보이는 그곳까지야. 그리고 여호수아가 결국 입성해.

영화에서도 봐바... 마지막에 살아 남은 아이들...그 아이들은 흙을 밟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구. 걔네들 모두 기차에서 태어났잖아. 고아성이 영화 마지막에 밟는 눈길은 ...마치 우주비행사 암스트롱이 달에 내려서 작은 발걸음이나 인류를 위한 거대한 발자취다...뭐 이랬던 거랑 비슷하다구. 즉 그 아이들에게 그 땅은 완전히 새로운 가치이고 새로운 땅이야. 그들이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구.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은 모두 사라져야해. 봉준호는 그런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공식을 따르고 있어. 나는 영화가 절망으로 끝난 것은 아니라고 봐. 즉 아까 말했던 것을 연결시키면 횃불을 이어 받은 새로운 희망이구 인류니까.

 

아내)그런데 결국 커티스는 다 속은 건가?

나) 글쎄. 거기는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 봉준호는 앞뒤 인과관계를 잘 맞추려는 노력을 많이 하거든. 봉준호의 디테일이란게 결국은 거기서 나오는 거겠지. 길리엄이 그러잖아. 앞칸에 가면 윌포드의 이야기에 속지마라. 혀를 뽑으라 그러나...하여간...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윌포드의 말을 100% 수용할 수는 없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커티스는 윌포드가 말한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아. 사실 대단히 설득력있거든. 아마 그랬을 거야...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발생하는데...성냥 달라는 고아성을 첨에는 뿌리치는데 커티스가 다시 재정신 돌아오는 계기가 대단히 휴머니즘적인 사건에 의해서야. 뭐랄까...혁명에서의 이론과 신념같은 것 중요하겠지만 어떤 결정적 사건을 만드는 힘은 그게 아닌 것일 수도 있지. 봉준호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아내) 자기는 어떤 장면이 좋았어.

나) 글쎄.윌포드와의 대화도 좋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정치적 색깔을 드리운건, 송강호와 커티스가 문앞에서 나눈 대화야. 커티스가 문을 열라고 하지. 그런데 송강호가 그래 나도 열구 싶다구...그 문 말고...기차 바깥문 말이야라고 하지

아내) 그래, 그 장면 좋더라.

나) 사실 좌파 정치에서 아직까지 논쟁하고 재논쟁하는 그런 주제이기도 해.  커티스의 반응이 흥미롭지. 커티스 역시 '바깥에 나가면 죽어'를 반복한다구. 커티스는 보면, 일종의 레닌처럼 비쳐지거든. 거기서 그가 레닌의 제스처를 끝까지 취하진 못하는구나 싶기도 하고...하여간 반란군의 리더 역시 학교의 학생들에게 주입된 것같은 담론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있다구. 아랫칸에서도 그런 담론의 유포는 계속되지. 아랫칸 사람들 역시 현재의 물질적 상황과 인정투쟁 욕구는 강했지만 그 체제 외부를 생각하지는 않는다구. 즉 바깥의 사유를 염두해 두지 못하는 거야. 니체나 들뢰즈등에 영향을 받은거겠지만... 소수자운동 등등 뭐 한방에 무슨 전복을 꿈꾸는 그런거 말고, 체제의 움직임에 자체에 제동을 거는 다양한 운동들이 그런 사유에 기대어있어. 그렇게 바깥의 사유를 염두해 두지 못하면 결국 윌포드의 제안, 내 대신 이 자리를 대신해서 기차를 유지해주게 라는 요청에 허걱하게 된다는거지...혁명이라는게 그렇게 권좌만 바꾸는 건가? 물론 그런 의미도 크겠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쉽게 말해 못가진 자들의 질투, 욕심 정도로, 너희가 돼도 다 똑같다라는 정도로 머물 수 밖에 없는거거든.  다행히 커티스에겐 아직 윤리적 선택의 길이 있었지만. 근데 실제로 우리 노조나 그외 기타 정치조직이나 보면 실제 여기서 대입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아내) 자기 이야기들으니까...뭐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나) 몰라 나도. 그냥 영화 보면서 그 정도 생각했구. 다시 한 번 봐야돼. 이거 원래 만화가 있었잖아. 2008년에 봤거든. 집에 가면 책 있어. 어제 영화 보고 와서 잠시 화장실에서 넘겨봤거든 만화에서는 기차가 순환하고, 앞 칸 뒤 칸 구분이 있고, 뭐 그 정도 설정만 빌려왔어. 뒤에 이야기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구. 봉준호보다 훨씬 디스토피아적이지. 만화 속에서는 실제 열차가 1001량이나 돼. 그리고 2부인가 하여간 그 설국 열차가 또 있어서 충돌이 예상된다는 상황도 나오고...스윽 봐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 영화는 아무래도 캐릭터나 스토리를 좀 더 단순화하고 집중화 시켰야했겠지. 하여간 만화랑은 완전 달라.

 

아내) 그렇구나. 자기 이제 들어가봐야지.

나) 어...공부 열심히 하고. ㅎㅎ 공부하는거 보니 귀엽네.ㅋㅋㅋ 저녁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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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6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06 15:5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네요.ㅎㅎ 텍스트에서 저자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으니 훨씬 다채롭게 상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관심은 정치철학이나 이데올로기론 같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 부분이 더 눈에 들어온 셈이구요. 실제 한국 SF영화에서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외국의 경우, SF의 역사와 저변이 영화 소재에 충분한 공급처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만, 한국은 이제 슬슬 시작인 셈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SF영화에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부터 텍스트성까지 어떤 변곡점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겠지요.ㅎㅎ)

맥거핀 2013-08-0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데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아무래도 킵해두어야겠군요. 나중에 보고와서 꼭 읽겠습니다. 설국열차에 꼬리칸이라도 탑승하기가 쉽지 않군요.^^

드팀전 2013-08-07 11:40   좋아요 0 | URL
ㅎㅎ 뭐 그냥 스치는 생각 정도 였는데요. 맥거핀 님의 영화 리뷰도 틈틈이 잘 보고 있습니다. 만화에서는 꼬리칸 탑승의 용도가 명확하게 그려져 있긴 합니다. 그냥 예뻐서 태운 것이 아니라는 것. 일요일 밤9시30분 영화를 봤는데, 극장에 자리가 2-3개 밖에 안 비었더군요. 혼자간지라 커플 사이의 이빠진 자리에서 봤습니다. 그렇게라도 보시면.ㅎㅎ

맥거핀 2013-08-1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결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인류는 또 무엇인가를 반복할텐데, 그것은 열차 안에서의 (혁명과 조절이라는) 반복의 또다른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저는 마지막의 곰돌이가 유머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조금 더 냉소적인 걸로 느껴졌습니다.^^; 뭐 근데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여러 겹의 텍스트를 담고 있는 영화라서 확실히 여러 다양한 얘기들이 많이 나올 영화겠구나 싶기는 했습니다.

아..근데 만화에서 얘기하는 꼬리칸 탑승의 이유는 뭔가요? 물론 윌포드님의 자비는 아닐 것이고..역시 조절과 균형과 관계된 것인가요?

암튼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13-08-19 09:01   좋아요 0 | URL
네.ㅎㅎ 희망을 이야기하지만-상대적으로 괴물에 비해 조금 더 희망적인 것일 뿐이라고 보입니다. 시작과 반복을 말씀 하셨는데...그것 때문인 듯 합니다. 이런게 보이던데요....남궁민수의 딸 요나가 무기를 드는 장면 한 번은 기차 중간에서 아빠를 돕기 위해 칼을...그리고 엔진 칸 앞에서 총을 들지요. 첫 번째 칼을 들었을 때, 남궁민수가 '안돼'라고 크게 저지합니다. 그리고 엔진 칸 앞에서 총을 들 때도 남궁민수는 '그만'을 외치지요...그 때 요나의 반응이...(첫 번째 볼 때 지나쳤던 장면이었습니다.)...요나는 '싫어'라고 하며 방아쇠를 당깁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인 셈이구 인류학적으로 봐도 인류는 '희생제의'를 통해 -희생 제의의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않아야 상징질서에 기입될 수 있었던 - 원초적 살해를 자행했던 사람들의 후예이지요. 유전학적으로도 그렇다더군요. 현생 인류는 모든 살아남은 것들의 자손인셈이지요.

결국 봉준호가 요나를 세상에 다시 내려 보내는 희망에는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인류 역시 '카인의 후예'가 되어버리는 반복으로 돌아가는 걸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희망은 희망이지만 회색빛 희망.

대신 전 알랭 바디우가 말한 희망의 의미를 통해 조금 위로를 받아 봅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주체적 차원은 극복된 시련이지, 우리가 그것의 이름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어떤 것이 아니다. 희망은 시련을 이겨내는 충실성이다.... 희망은 결국 보상되는 이상적 정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시련을 통해 진리에 대한 인내를 동반하는 것 또는 사랑의 실천적 보편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알랭바디우, <사도 바울> p183-184

아...만화에서 꼬리칸은 필요에 의해 태워집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치 생산은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의 그 노동 말이지요. 앞 칸을 먹여 살리려면 반드시 생산력이 필요하거든요...봉준호는 이 부분을 좀 친철하게 그리지는 않습니다.
 

** 스포일이 걱정된다면 보지마세요. 길기까지 하니까. 제발. 그냥 영화관 가서 맘에 드는 제목 있으면 들어가서 아무런 인포메이션 없이 보고 오는 방식이 스포일의 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장 지적인 방식이며, 또한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스포일 가이드 라인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순간 자기가 정말 행복한지 돌아보게 한다. 그럭저럭 나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혀끝을 살짝 건드릴 때쯤, '아니 그런데, 저 인간이 묻는 행복이란게 뭐지?' 라는 생각이 뇌신경을 건드린다.  이어서 '아니, 왜 저런 걸 묻는거야? 뭘 얻자고, 뭐 하자는 거지?'라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친다. 질문에 묘한 악취가 난다고 느껴지는 순간  몸속의 아드레날린은 별의별 거지 같은 위악의 제스처를 요구한다.

 

 영화<마지막 사중주>도 한가운데로 직구를 던진다.

 

 푸가 사중자단의 연장자이며 첼로연주자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 역)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며 영화는 시작된다. 25년 이상 서로 이해하며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온 푸가 사중주단. 드디어 위기를 맞는다. 시작은 제2바이올린을 맡던 로버트(필립 세이 무어 호프만 역) 부터이다. 팀의 위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상황에서  제1바이올린과 역할을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왜 자신은 늘 배경이 되어는 제2바이올린에 만족해야만 하냐는 것이다. 조화의 이름으로, 삶의 이름으로 덮어 두었던 크고 작은 욕망과 불만들이 하나씩 움을 틔운다.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대가로 치루었을까?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주체가 자기 욕망의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욕망하지 않는 것들을 욕망(하는 척)한다. 그래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얻는 일은 결국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된다. 그래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다."

 

즉 푸가 사중주단의 명성과 행복은 지젝의 입을 빌자면, 모든 욕망의 배반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멤버 교체 또는 팀 해체의 위기 앞에서 유령처럼 돌아온다.

 

먼저, 영화 속 사중주단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푸가 사중주단'. 영화 속에서는 뉴요커들이 '푸규어 쿼텟'이라고 발음한다. '쿼텟'이라는 발음이 매력적이다. 미끄러지는듯 하면서도, 살짝 당겨주는 그 느낌. '푸가'란 쉽게 말하자면, 여러 개의 성부가 주선율과 일정한 규칙적 관계를 두고 전체 화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합창단으로 예를 들자면, 소프라노가 주 멜로디를 한다면 알토와 테너,베이스등이 화음을 만드는데, 이 화음이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멜로디의 모방,변형, 또는 확산의 관계를 통해 전체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다. 영화 속 연주팀의 이름이 푸가인 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푸가라는 형식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원칙적으로 각 성부는 독립적인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리더 악기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원론적 차원에서의 평등을 말하지만, 그 안에 순수한 의미의 평등은 존재하기 어렵다. 내재적으로 힘의 관계,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힘은 물론 상호적인 것이긴 하다. 푸가 사중주단 역시 그런 권력관계의 발현이 문제의 시작이된다. 

 

 

 영화<마지막사중주>를 이끌어가는 양날개는 중견의 연기파 배우들과 베토벤의 음악이다. 주요 배우들은 과르네리나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귀에 찰싹찰싹 달라붙는 연기를 한다.  그들의 연기에 실밥이 없다. 크리스토퍼 월켄,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케서린 키너, 마크 아이반니가 그들이다.  사중주의 생명은 악기 간의 완벽한 호흡과 밸런스듯이, 이 영화<마지막 사중주>에서 4명의 배우들은 최상의 연기 조합을 만들어 낸다. 화려한 제스처나 극단적 캐릭터는 없다. 그들의 연기는 잘 지은 흰색 쌀밥 같은 연기이다.윤기가 흐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식감을 자극하는 밥 향기가 난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을 보자. 인물들은 현악사중주에 쓰이는 악기들의 보편적 특성과 동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딸이 엄마인 줄리엣에 대해 말할 때, '비올라는 두 개의 바이올린이 가지고 있지 못한 깊이를 더해준다.'라고 말한다. 실제 현악 사중주에서 비올라의 역할이 그렇고, 극중 비올라 주자 줄리엣의 성격이 그렇다.

 

 첼로 주자인 피터는 파킨스 병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연주 생활도 곧 끝날 것이며, 자신의 삶 자체가 흔적으로만 남을 것이다. 지난해 먼저 떠난 아내의 그림자-피터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성악가 안나 소피 폰 오토였다-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피터는 첼로의 굵고 깊은 소리처럼 삶의 심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유영한다. 모든 시간에는 추억이 있고, 또 멈춤이 있고, 그리고 잊힘이 있다는 것을 그만이 안다.  제1바이올린의 대니얼은 음악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구도자적인 삶을 산다. 그는 러시아의 자작나무처럼 냉정함의 외피 속에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음악에 대한 헌심을 담았다. 그에게는 이민자의 정서적 고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이 다가온다. 그의 흔들림은  중년의 객기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 열정을 쉽사리 놓치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의 바람이 한순간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늘 하던 데로 활대를 다듬는다. 그의 숨결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한과 그것 없이 살아가야하는 시간에 대한 고통이 묻어있다. 그의 반복되는 기계적 움직임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비올라의 줄리엣은 사중주단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고정점이다. 피터는 그녀의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이다. 이제 그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제2 바이올린 로버트는 그녀의 남편이고, 제1 바이올린 대니얼은 한때 애인이었던 사람이다. 로버트는 그녀가 자신을 진정 사랑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원했던 것은 제2 바이올린의 역할처럼 안정감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젊은 시절 연인은 대니얼이었지만, 그 둘은 이제 동료일 뿐이다. 그녀는 로버트를 이해하려 하지만, 문제는 점점 그릇되어 나가고 이 둘은 별거에 들어간다. 또한 그녀의 딸 역시 다른 이름의 상처를 맛보게 한다.

 

로버트에겐 자신을 입증하려는, 즉 인정투쟁에 대한 욕구가 있다. 모두들 최고의 제2 바이올린이라고 칭찬하고, 본인 역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더 높이 샀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욕구가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대로 멈추며 안주할 것인가, 파괴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할 것인가의 위치에서 로버트는 자기를 드러내는 방향을 택한다. 그가 보기에 팀은 지나치게 제1바이올린과 멘토인 첼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 있었던 음악적 이견차이와 이를 좁히기 위한 열정적 소통마저도 희끗한 머릿결처럼 회색빛이 되어 버렸다. 그의 선택은 팀 내 균열을 만들어내지만, 사실 이런 '폭력'-하이데거가 존재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했던-이 없었다면 그는 그의 욕망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현실적인 흡입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사건 앞에서 파국적으로 보이지만, 유연한 애도 과정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의에서든, 욕망의 대면을 통해서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임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들이 이것들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온건하다. 고통스러우나, 파괴적이지 않고, 병적이지 않은 방식인 셈이다. 또한 단시간적이다. 그들은 뉴요커니까

 

 

 

영화 속 또 하나의 중심축은 첼리스트 피터의 고별 공연 레퍼토리인 '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 작품131'이다. 많은 베토벤 추종자들이 그의 최고 작품으로 후기 현악사중주를 꼽는다.  후기 현악사중주는12번부터 16,그리고 대푸가까지 포함하여 총 6곡의 작품이다. 흔히 베토벤의 일대기를 세시기로 나눌 때,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나온 작품들이다. 잘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그리고 애호가들에게 일종의 그노시스적 영감을 준다는 후기 피아노소나타 같은 곡들과 함께 작곡되었다. 특히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는 매우 독창적인 면 때문에,그리고 일종의 현학성(?) 때문에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 음악은 과거 베토벤 음악과도 차이가 있으며, 이후 등장하는 후배 작곡가들 것과도 다르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현악사중주 14번의 1악장은 아다지오로 시작된다. 베토벤의 작품 중 아다지오로 시작되는 작품은 이것을 포함하여 오로지 2곡 뿐이다.

 

 1악장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푸가풍이다.  곡은 진행되면서 전형적인 푸가의 틀을 벗어나기 때문에 학자들은 푸가라고 지칭하 보다는 '푸가풍'이라고 말한다. 제1바이올린의 주선율에 이어 5도 차이로 다른 악기들이 등장한다. 푸가 사중주단의 마지막 곡이 '푸가풍'이란 점, 그리고 애도의 느낌을 자아내는 아다지오 악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에서 슈베르트가 임종을 이 음악이 지켰다는 말에 미루어 볼 때, 이 음악의 1악장은 그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도의 느낌을 자아내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극 초반부에 피터는 학생들이게 이 현악사중주의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모두 7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쉴 수 없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악기 조율을 할 물리적 시간이 없다. 불협화음이 발생해도 그냥 가야 하는가? 아니면 멈추고 조율해야 하는가? 그렇다. 이 곡은 끊김이 없다. 마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얹혀 흘러가는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멈추어야 하는가? 아니 멈출 수 있는가? 아니 그냥 가야 하는가? 아니 그냥 갈 수 있을까?

 

 딜레마를 해결하는  한가지 방법으로,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화해에 반대하여 아도르노는  '말년성'이라고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말년성'의 특징을 조화와 해결이 아닌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정체성을 규정해내는 총체적 개념을 거부하고 부유하는 상태, 모순을 그대로 그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 모순은 파국과 생성의 가치를 배양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느껴진다. 앞서 말했던 피터의 딜레마와 아도르노가 말한 '말년성'의 특징은 결국 공명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가 담고 있는 의미의 일부이며, 영화 <마지막 사중주>는 이 생의 말년성을(이것을 연대기적으로 수용하면 절대 안된다.) 음악영화의 이름으로 영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모순의 스펙터클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완벽한 봉합의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도 아니다. 사중주단의 조화를 파괴하지 않는- 즉 상징질서를 전복시키지는 않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는 마무리된다. 물론 '사중주단은 과거와 같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얼이 꼼꼼히 적혀 있는 악보를 덮는 장면이 그런 변화를 예시한다. 불안하고, 불확실하지만 자발성과 즉흥성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믿음으로 중단된 나머지 악장이 시작된다.  그들의 이들의 삶 속에서 타자에게 노출되어 버린 욕망의 흔적 역시 금세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해결의 기미를 희미한 낙관을 담아 영화는 보여준다.  즉 영화는 삶의 표면 아래 가라 앉은 타오르는 얼음의 그림자를 일정부분 추출해내지만, 개량적인 방식으로 재봉합 시키는 안정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쾌도난마다. 이것은 영화적으로 급속한 제동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이 현실적이긴 하다. 늘 봉합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마치 벌어진 살이 순간 오므라들 듯이 어긋남 속에서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후기로 갈수록 꼼꼼한 연주 지시를 악보에 명기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연속적 연주 지시는 삶과 음악이 포개지는 자리에서 깨어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푸가사중주단의 멈춤은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기준으로 보자면 어긋난 연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급작스러운 단절이 없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도약의 가능성들이 남아 있을지 반문해보게 된다. 새로운 멤버와 함께 연주는 재개되고, 관객들은 그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고, 삶도 여전히 지속된다.

 

 

 

 

 

 

 

 

 

 

 

 

 

 

 

 

 

 

 

 

 

 

상단 왼쪽부터 부다페스트사중주단, 과르네리사중주단, 이탈리아사중주단

하단 왼쪽부터 에머슨사중주단, 타카시사중주단, 브렌타노사중주단.

p.s) 

 

1.영화사 보도자료를 보니 감독이 어려서부터 실내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속 푸가 사중주단을 만들어내면서 과르네리 사중주단, 이탈리아 사중주단, 에머슨 사중주단을 모델로 생각했다고 한다. 과르네리는 40년 이상 유지된 사중주단이었다. 1,2 바이올린의 구분이 당대 다른 사중주단에 비해 좀 약했다. 이탈리아 사중주단은 여성멤버가 있었다. 에머슨은 1,2바이올린이 곡에 따라 서로 임무를 바꾸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 팀이 모두 베토벤 후기 사중주 음반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추가하자면 타카시 사중주단과 알반베르크사중주단. 그리고 오래되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부다페스트사중주단과 부슈사중주단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훌륭하다.

 

2.영화 속에서 피터의 후임으로 오는 나니 리는 실제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첼리스트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원이 나니 리가 속해 있는 브렌타노 사중주단의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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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06 06:43   좋아요 0 | URL
^^ 오타지적을 원하지 않는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다 할려면 ...ㅎㅎ 그렇네요. 젠킨스는 뭐람
 

 알라딘은 종종 독창적인 상품들을 만든다. 다행히 날개 없는 선풍기나 아이패드 같은 것은 아니다.  기껏 해야 이사갈 때  '이 참에 버릴까, 아니야 그래도 한 때 좋아했는데' 라는 3초간의 고민을 안겨주는 소소한 물건들이다. 머그컵, 티셔츠, 에코 백 등등

 

사실 작가 김승옥의 얼굴에서 멈칫 거리지만 않았던들 몇 번의 물질에 숨 죽은 고사리처럼 되어 버린 검은 티셔츠도 사진 않았을 것이다. 김승옥에서 걸려 버린게 외상이 되어 그 셔츠를 두고 두고 곱씹기 위해 산 셈이다. 하여간 내게는 여름철  햇빛을 쏙쏙 흡수해줄 검은 셔츠가 서너장이 있었다. 특히 아는 사람은 탐내는, 셔츠 배꼽 언저리에서 '시쉬쉿' 하고 sheet of sound를 들려 줄 존 콜트레인이 새겨진 멋진 반소매 티셔츠. 수년 전에 배우 모씨가 우연히 그 셔츠를 보더니 "어...이건 그대랑 잘 안 어울리는 듯 한데. 나 주지?" 라고 했지만, 절대 사수하여 지금도 존은 옷장에서 순번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심야 라디오도 틀어 놓지 않은  깊은 밤. 바람은 시원하게 쌩쌩 부는 이 밤에,

'앗' 하고 스타카토의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녀석이 등장했다.   

 

그렇다. 이것은 PKD(필립 K- '왜 이건 늘 '케이'라고 하지 않고 K라고 하는지, 존 F 케네디도 그렇구.'- 딕)의 '유빅컵'이다.

 

하악 하악....

 

살짝 걱정도 된다.

 

마치 약 먹는 기분이 날 것 같다.

한편으로 보면 비이커가 떠오르기도 한다.

화학공학도도 아닌데 맥주를 비이커에 따라 마실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그래도 저거 하나 있어야 겠다.

 맥주 한번 따라 마셔보고

역시 맥주는

'하이네켄 잔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연필 꽂이로 쓰던지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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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13-07-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받았는데 꽤 괜찮아요. 히죽.

드팀전 2013-08-01 02:16   좋아요 0 | URL
휴가 다녀와서....저도 다음날 받았어요. ㅎㅎ
 
파국의 지형학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6
문강형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지금 누가 세계의 파국을 말하는가?  파국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대중문화의 이미지 속에서만 존재한다. 극장은 파국을 스릴로 즐기는 '재미의 성전'이 될 뿐이다. '고도'는 극이 끝나도 무대 뒤에서 발만 비비꼬고 있을 뿐이며 '유토피아'는 '달의 어두운 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달은 언제나 달아나는 달, 잡히지 않는 달이다.

 

 현실 세계에서 파국은 부분적 공모자들이 돌리는 술 잔 속에 자기 연민과 함께 순회한다. 지긋 지긋한 세상이 확 한 번 엎어지길 바라는 소시민의 소회를 담아 숯불 위에서 몸을 재빨리도 뒤집는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욕망은 입냄새를 풍기며 거부할 수 없는 눈짓을 보낸다. 그 매력적 눈웃음을 거절할 수 있는자는 누구인가?  적은 아름답고, 향기롭고, 교양 있으며, 세련되었다. 차라리 적이 뱀의 머리를 달고 있는 메두사이거나, 외눈박이 퀴클립스 였다면. 우리 대다수는 그 욕망의 수액을 받으며, 눈치를 받으며, 애교를 섞으며,사랑을 염원하며, 원만한 관계를 희망하며 하루를 산다. 어느덧  옷깃 목덜미깨 누런 때는 옥시크린과 유한락스를 환상비율로 섞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허리 띠를 졸라맨 배에서 누린내가 난다.

 

번개 구름은 급속히 멀어져 간다.

남겨진 것은 무겁고 축축한 8월의 더위다.

..

온 마을에 소독약 냄새가 감돌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달에 울다>(p.33)

 

 인류는 오랜 시간 전부터 디스토피아를 상상했다. 성경에 의하면 파국은 아담과 이브가 유토피아를 잃어버린 순간 부터 존재했다. 잃어버린 에덴의 반대편에는 징벌로서의 영원한 노동과 탄생 그리고 죽음이 연결되는 반-유토피아로서의 현재가 있다. 기독교의 진보 서사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파국을 통해, 천년왕국이라는 유토피아로 돌아간다.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땅 위에서 춤을 추는 인간을 칭송하기 전까지 이 땅은 여전히 버려진, 부끄러운 대지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피를 먹고 자라나는 역사라는 나무들이 있었다.

 

 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들,  역사의 나무 앞에 파국이라는 글자로 제의를 치르고 허공으로 불사르 자들은 누구인가?  감옥에 쳐넣고, 재산을 빼앗고, 몽둥이 찜질을 가하고, 때로는 이름 없는 산 속에 묻어도 괜찮았던, 그들이다. 하층계급, 민중, 서발턴 그들이다. 세상의 족쇄가 깨지기를 원하는 파국의 상상은 늘 그 언제나 '너머'를 바란다. 그리하여 파국의 정치성은 유토피아적 급진성과  신발 코를 맞대고 있다. 중세의 뮌처의 '천년왕국 운동' 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정치철학들까지 이런 지도 위에 있다고 <파국의 지형학>은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파국의 역사학이 아니다. 지형학은 과거와 현재를 현 공간 위에서 파악한다. 우리의 역사는 그런 지층의 무늬 위에 있는 것이며, 동시대는 비동시대적 요소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즉 파국의 상상을 현시대에 재복원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하여 포스트 -정치 시대의 무기력증 극복하고 새로운 유토피아의 맹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담론적 단초를 기획해 보는 것이다. 즉 현재의 급박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파국의 지형학>은 이를 위해 두더쥐 처럼 땅을 헤집는다. 굴착 작업에는 역사적 사실들, 영화, 문학 등이 보조적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저자가 먼저 대결해야하는 현실의 무늬를 살펴보자. 읽지 않아도 알아 버린 것 같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하나의 담론적 분기점으로 등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는 헤겔의 절대정신의 완성을 공산주의와 장벽의 무너짐 속에서 본 것이다. 판결은 끝났다. 탕탕탕... 앞으로의 세계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유토피아' 만이 있다.  즉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합의 최종적 성공으로 '자본의 전체주의화'가 이루어지는 단계. <파국의 지형학>이 처음 대결하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자본주의의 유토피아'라고 말해지는 가짜 유토피아. 또는 세계의 일부를 위한 유토피아.  저자는 보드리야르를 인용하여 이런 사회를 오히려 '완벽하게 해방되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노예화된 사회'를 말한다. 이 '적 그리스도적 유토피아'는 궁극적으로 자기-노예사회의 등장을 예견한다. 이 지점은 푸코의 규율권력이 통치권력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자기를 자발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호모 이코노미코스의 통치전략 말이다.  <파국의 지형학>이 지적하고 있는 또 다른 대결점은 포스트 모던 담론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의 초월적 속성이 '방대한 스케일 만큼이나 비현실적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실재하는 억압에 대한 싸움이 아닌 것들을 통해 무기력증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 시대의  주체는 결국 '그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는 냉소적 주체인 셈이다. <파국의 지형학> 속에서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냉소적 주체는 니체의 '최후의 인간'과 만나게 된다.

 

 이제는 그 어떤 역사의 전망도 발견하지 못하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체제 안의 ' 스릴들(선거,소비,대중문화,폭력'이 주는 쾌락을 그저 즐기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녕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최후의 인간'이 가진 가치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회의와 냉소 그리고 무기력이다.  (문강형준,<파국의 지형학>,P132)

 

 결국 저자는 현재의 불능적인 지층을 뚫고 인류의 시간층 속에 늘 잠재해 있는 유토피아의 기획을 다시 꺼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시대의 궤를 달리하면서도 이어져온 유토피아의 공시적 특징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플라톤, 아우구스투스, 모어의 예를 들어 그 중심에는 '공통의 것이 낳는 선'에 대한 동경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통의 것은 시민사회의 담론적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자원의 분배 문제를 주요한 과제로 하는 정치경제적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공허할 것이다. 탈이념화 시대라는 곳이 정작 탈각시키고 있는 것은 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숙의민주주의적 개념으로서의 '공동선' 같은 것들은 비-정치경제적 요소를 조건으로 하는 것인 양 보일 때가 많다. 파국과 유토피아로 이어지는 상상을 거부하는 이들은 단지 예수를 핍박한 빌라도만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또한 수많은 바리새인들과도 대결해야만 한다.  합의제적 민주주의의 장치들은 이런 상상을 불허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파국을 현실화의 이름으로 제어하고 예비함으로써 체제의 연착륙을 위한 대표적인 장치일 수 있다는 점은 늘 예의주시해야 한다.  저자는 '정치적 종교'의 위험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존 그레이의 현실주의를 예로 들어 이를 비판하고 있다. 전체주의화를 지적하다가 정치 자체가 갖는 '근본적인 미래에 대한 믿음'같은 것까지 종교의 유사형태로 비판한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목욕물을 버리다가 대야물 속에 아이까지 버린다는 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가 유토피아 정치를 위한 조건들이 궁금해진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어긋난 시간' 이다. 일종의 시대와의 불협화음. 일종의'열정'과 '과잉' 그리고 '결단' 같은 '비합리적 요소'들이다. 조르주 아감벤이 니체-푸코를 경유하여 말하는 시대에 들러붙으면서도,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볼 줄 아는 그런 '동시대성'을 의미한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니체적 세계관이다. 기독교의 노예적 상태를 혁파 하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의 죽음'은 '초인'을 예비한다. 합리성과 도구적 이성의 결합으로 평평하게 된 세계. 자본주의의 최종적 유토피아를 잠재적 현실태로 인정한다면 결국 바위 같은 현실의 층위를 뚫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힘, 이교도의 힘일 수 있다. 주체는 계몽주의 시대 이래 역사의 병원에서 오랜 기간 중성화 수술을 받아온 셈이다. 열정, 반-합리성, 반-이성은  체제가 삭제 시키려고 했으나 늘 실패하고만 '야수성이다. 체제는 이것이 세계를 교란시키고, 구멍을 내고, 폭발시킬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파국의 상상을 통해 저자는 '야수'를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반-이성,반-합리를 토스카노의 '광신'이 가진 열정의 급진성을 통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사회 변혁의 근본적 요청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들을 만날 수 있고, 주어진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저자는 현실의 모순이 있다면 유토피아적 열정도 사라질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프레드릭 제임스의 말이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수 없을 때에도 가장 진정한 것이다. ... 유토피아의 기능은 오히려 우리가 어쨋든 갇히고 묶여 있는 시스템의 이데올로기적 폐쇄를 드러내기 위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전적으로 무력함을 천명하는 데 있다. 만일 우리가 역사 또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비유토피아적 현재에 감금되고 말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스,<유토피아의 정치학>, 뉴레프트리뷰2 ,p367)

 

 흔히들 유토피아주의를 뜬구름잡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한다. 실제 유토피아적 염원이 발전 시킨 부분은 빌려온 500원 짜리 정도 취급받는다.  유토피아주의는 이중감금의 해체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첫번째는 유토피아가 가진 더 나은 세상으로의 진보, 그를 위한 세계와의 투쟁. 두번째는 우리가 이성과 합리성 또는 이것을 장치로 사용하는 시스템에 갖혀 있다는 각성을, 충격을 요청함으로써 내부적 폐색에 갖혀있는 주체를 분쇄하는 것이다.

 

 

  이제 마무리로 들어가자. <파국의 지형학>은 정치 비평이자 텍스트 비평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포스트모던 정치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보편성을 강조한 지젝이나 바디우의 주장과  맥락 속에서 씌여졌다.  지젝도 자주 인용하는 SF문학, 디스토피아 소설 등이 보론의 장에서 텍스트로 등장한다. 결국 모든 파국은 텍스트 속에서의 파국으로, 앞서 말한 대중문화 속으로의 파국이다. 이 책의 구성이 그런 혐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역사가 말소된 상태에서는 텍스트 속의 혁명에 대한 상상 만이 유일하게 시스템이 허락해 준 것일 수도 있다.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공포영화의 스펙터클화가 공포를 훈련시키 부드럽게 해준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저자가 전제 했듯이 상상력 마저 소거된 소비 자본주의 속에서 상상력의 부활을 도모하는 것은 1차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꿈조차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는 '꿈'을 꾸는 것은 대단히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치킨런> 속의 주인공을 여전히 기억한다.)이 책<파국의 지형학>이 가르키고 있는 곳은 엄밀하게 그곳까지이고,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늘 멀어지는 달에 대한 고민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파국의 지형학>이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실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정치는 일종의 안타까운 징후이다. 무기력한 세상, 즉 우리는 전체주의적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곳까지 후퇴한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 마저 잃지 않기 위해, 그곳만 지키면 그래도 도약의 발판은 만들어진다는 소망까지 밀린 것이다. 결국 <진격의 거인>들이 월마리아, 월로제를 지나 마지막 월시나까지 온것일까? 

 

 우리는 다시 지식인의 과제, 확대된 독자의 과제로까지 질문을 옮겨와야 한다. 새로운 윤리적 정초를 구성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아주 오래 전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던 '유기적 지식인'은 이제 논어나 맹자에 나오는 지루하게 옳은 소리정도로 들리는 것 같다. 이런 폐색 상황을 지식인은 어떤 실천 전략으로 헤쳐 나아갈 것인가? 상상력의 정치가 불러 일으키는 가능성 영역이 어떻게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낼 지, 그리고 설득력을 갖추어야 할 지 많은 실천적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라는 도매업자나 취하는 방식은 분리와 안주의 콘트리트벽에 모르타르를 바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니체를 인용했듯이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한 인간의 혼돈' 에의 동참을 위한 떨림의 방식들이 동시에 고민되어져야만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다. 그 떨림의 방식에 대한 책임까지도 이 시대의 지식인은 안아야만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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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맨서 환상문학전집 21
윌리엄 깁슨 지음, 김창규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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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를 생각하면 졸리가 떠올라서..까만 비닐슈트를 입은 졸리!아니 몰리!! 첫번째 배경은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같은 디스토피아이고, 케이스의 활동 영역은 <매트릭스>의 매끄러운 공간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배치된 존재의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마지막 싸움은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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