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폴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이랑에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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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쓰려고 했다....그런데 부산에는 오늘 아침 봄 눈이 온다.겨우내 한 번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니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는 듯 눈이 온다.어제 황사때문에 초등학교는 오늘 입학식이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첫 걸음에 흰 눈은 어떤 의미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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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이 노래집에 있다.

이원수 선생의 노랫말에 백창우가 곡을 붙였다.

이 책은 몽당연필님이 예찬이를 위해 선물해주신 책이다.좀 인사가 늦은 감이 있지만...(몽당연필님!! 너무 감사합니다.아이도 엄마도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저도 다른 엄마 아빠들에게 선물할 때 이 아이템을 선정해야겠어요.)

 
이 책 중에 <석죽>이라는 곡이 있는데 한 번 만 듣고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로 쉽다.이 곡이 참 마음에 든다.

석죽은 패랭이꽃이라고 한다.정확히는 패랭이꽃이 석죽과이겠지만

 

눈 더미 얼음판 바로 그밑에
네가 살아있었구나 어린 석죽아

긴 겨울 지나면서 멀리간 해를
얼마나 기다렸니 추워떨었니

 

 

해 님이 이제야 네 곁에 와서
얼음박힌 네 손을 녹여주신다

뜨거운 사랑에 네 몸이 녹아
잎사귀에 파아랗게 핏기가 돈다

어린 석죽 작은 풀잎아
이제는 네 속에서 꽃이 피겠네

빠알간 꽃 예쁜 꽃 내 맘 같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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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08-03-0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신랑도 오늘 아침에 출근하다가 다시 들와선 자는 큰아이를 깨우더군요.
"일어나, 얼른. 눈온다. 눈!!"
아이는 아침밥 먹는 내내 학교가서 눈가지고 장난칠거라고 했는데...
눈은 살짝 날리고 말았더군요. 아이가 얼마나 실망하던지....^^;;

그리고 시디, 맘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제가 백창우의 시디를 워낙 좋아해서 나오는 족족 구입했답니다.
선물도 자연히.... ^^

2008-03-11 0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6-22 09:32   댓글달기 | URL

 
아...아이슬란드다...ㅜㅜ
30대 초반 우울모드에 접어들때 궁시렁 궁시렁 "아이슬란드에 가서 살고 싶어" 라고 했습니다.옆에 있는 사람들이 '왜?' 냐고 물었지요.
글쓴이도 썼듯이..왠지 제가 아이슬란드는 세상의 끝처럼 여겨졌습니다.왕가위의 영화<해피투게더>의 마지막 등대장면 처럼.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뉴스를 봐도 신문을 봐다 아이슬란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미국도 나오고 프랑스도 나오고 가끔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나오는데..
아이슬란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아마 알라딘의 페이퍼 중에서도 아이슬란드에 관련된 기사는 오늘 처음 보는 듯 합니다.아이슬란드는 어떤 말을 쓰는지 어떤 역사가 있는지..한국 사람들은 몇 명이나 사는지... 아이슬란드는 제게 사라진 아틀란티스 같은 상징이었습니다...^^ 왜 그곳에 가고 싶었을까요.제가 스스로를 수증기라고 착각해서 그랫나봅니다.죽지 않고 소멸할 수 있는 장소로 그곳이 낭만적으로 보였겠지요...청춘 나 참...

죽기 전에 꼭 갈 수 있겠지요.

위의 페이퍼는 지난 6월달에 로쟈님의 <아이슬란드>페이퍼에 댓글로 단 것이다... 아이슬란드

시규어 로즈.....번역하면 '승리의 장미'이다.아이스란드출신 락 그룹이다.장르적으로 좀 애매한데..사운드는 몽환적이다.즉 결코 따라부를 수 있는 부류의 노래가 아니다.또한 노래도 자국어와 자기가 만든 언어라나...뭐 그런 걸로 부른다.

알라딘을 검색하다 우연히 이 그룹의 음악다큐멘터리가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확 땡긴다.포스트락이라고 하기도 하고 스페이스락 계열로 분류하기도 한다.어떤 이름으로 넣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이런 음악이 나오고 그걸 분류 목록에 넣는 것이 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바닐라스카이>사운드 트랙에 R.E.M 이나 라디오헤트같은 그룹과 함께 한 곡을 집어 넣었다.영화를 떠올리면 대략 분위기가 어떤지 잡힐 듯 하다.

아이슬란드에 갈 수 있을까?

1.이번에 나온 DVD예고편이다.알라딘에 실린것과 다른 버전이다.

알라딘에 실린 홍보문구..극찬일색이다.

Q Magazine - "마법과도 같으며 감동적... 시규어 로스는 록 필름을 재정의했다" (★★★★★ 만점)
The Observer - “도저히 종잡을 수 없으나...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Top 10 Greatest Ever Concert Movies)
Empire - "너무도 아름답고 빨려드는 느낌... 단연 올해 최고의 아름다운 시청각 경험 중 하나" (★★★★)
The Times - "사람을 홀리는 공간과 장소, 음악 이 세 가지의 종합 방향제 같은 작품" (★★★★)
Pitchfork Media - "바보스러울 만큼 훌륭하다... 혹여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극장을 비틀거리며 나오게 된다 해도 스스로 너무 놀라지 말 것"

2.GLOSOLI 라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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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03-0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위에 뮤직비디오 참 좋죠
Staralfur는
가끔 아주 지친 하루를 보내고 들으면 관조적인 느낌도 들고 흐흐

드팀전 2008-03-04 09:46   좋아요 0 | URL
^^ 요즘 밴드들이 나오면 댓글을 달아주시는 건 오직 '몽'뿐.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최유준 옮김 / 이다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출근길에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를 들었다.자동차 앞 유리에 어두컴컴한 교실 안의 풍경이 맺혔다.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했던 스타일리쉬한 음악 선생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한 음대 지망생인 친구도 떠올랐다..

오늘은 4년 마다 한 번 찾아오는 겨울의 꼬리.봄의 앞섶이다.남쪽에도 아직 꽃 소식은 멀다.하지만 곧 아가의 입김같은 따뜻한 바람이 스칠 것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봄이 온다..."아름답고 즐거우 ..운..으 으 마 악 이여"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음악통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그가 한 때 줄리어드에서 공부를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음악을 하기에 자신이 너무 이성적이었다는 퇴교 사유가 웃음을 자아낸다.탈식민주의의 사도 바울쯤에 해당할만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이 책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선험적'이라고 믿는 '음악예술'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먼저 사이드가 다루고 있는 음악이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의 음악 임을 전제해야 한다.그것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서구 고전음악이다.(그러므로 이하에 나오는 '음악'은 모두 그 '클래식'음악이다.)

음악은 사회와 무관한 자율적 존재라고 하는 견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대중들에게 이같은 '예술 지상주의','순수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잘 먹힌다.그런데 음악은 조금 더 심하다.예를 들어 문학이나 영화 만 해도 텍스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접근,정신분석학적 접근 등등 이리 찢고 저리 찢어 본다.그런데 음악은 이런 텍스트 분석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다.여기에는 음악이 예술 장르로 갖는 특성도 한 몫한다.음악은 가장 절대적 형식의 기표예술이며 시간 예술이다.음표 하나 하나는 사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이런 기표들의 연쇄가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추상의 순수'가 있다.베토벤의 '합창'에서 '인류애'를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딴딴딴 따아" 하는 4음표가 과연 운명의 노크소리인가? 아예 표제 조차 없으면 도대체 그 음표들이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 어떡게 알까? 절대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도 이런 말도 했다. "음악이 내게 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이 미학적으로 갖고 있는 특수성은 흔히 음악을 사회와 분리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여기에 사이드는 '전문성'이란 것이 더해져 음악의 자기충족성을 만족시켜 버린다고 말한다.고전 음악의 작곡가,연주가,음악학자들은 클래식이란 음악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포섭해버렸다.음악은 그렇게 저 멀리 북극성처럼 찬연하게 빛나는 무엇으로 남아있게 된다.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마추어음악학자로서 '인문학'이라는 사다리로 음악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려고 애쓴다.그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는 음악을 마치 선험적인 신처럼 숭배하는 태도이다.(불행하게도 음악에 미친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음악 안에 온 우주가 있다고 믿는 광신도들 말이다.)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악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사이드는 '세련'이라는 말로 이 과정을 설명한다.그가 보기에 지난 세기 동안 음악과 사회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가장 예리하게 들어낸 사람은 아도르노이다.그는 아도르노의 음악론을 수용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한다.아도르노의 비관적 음악관과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종족음악의 분석을 지지한다거나 대중음악 또는 음악의 산업적 측면까지 내포하는 작업들을 긍정한다.대표적인 사람이 토스카니니와 글렌 굴드이다.1장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1장은 주로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특이한 경험으로서의 콘서트를 다루고 있다.퍼포먼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공적 영역에 속한 부분이다.이것은 이미 일상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경험을 포함한다.글렌 굴드는 이런 한계 속에 있는 음악과 음악가의 정체성을 외부로 끌어 내는 작업을 기이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그는 피아노 콘서트를 일찌감치 접고 다른 매체를 통한 음악만들기 작업에 전념한다.레코딩이나 영화 등 비극장적이고 반미학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급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와의 복원을 꾀한다.주어진 것만 붙들고 연마하는 수도자적인 연주가를 스스로 거부하고 예술의 지평을 전복하는 예술가로의 실험을 죽는 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2장에서는 '순수/정치'사이의 케케묵은 논쟁이 재현된다.폴 드망이라는 학자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과거 친나치 전력이 있었던 학자였다.이런 논쟁은 해방 이후 우리 예술계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다.(물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해방이후 거의 논의되지 않다가 최근 몇 십년 사이에 많이 논의된것이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 작곡가가 바로 바그너이다.히틀러는 바그너 매니아였다. 또한 그의 음악은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송으로 제3제국에서 즐겨 사용되었다.바그너라는 인물은 아주 복잡한 인간이라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다.이런 것 저런 것 다 떼어내고 분명 인류가 만들어낸 천재 중에 한 명일 것이다.예술가로서 그의 포부도 한 시대의 흐름을 뒤흔들 만큼 거창한 것이었다.사이드의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다.어느 한 쪽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의 예술적인 측면만 살펴도 곤란하고 또한 정치적인 모습만 봐도 안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사이드는 바그너의 음악과 텍스트가 담고 있는-그는 주로 <반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언급한다- 반유대주의,반외국주의,제국주의의 맹아가 있음을 명백히 지적한다.사이드는 '음악의 침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즉 음악이 관련되는 여러 영역-가족,국가.계급,남녀관계,민족문제 등 공적 영역-에 끊임없이 넘나들었다는 것이다.앞에 예를 든 바그너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 역시 바그너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에 복속되어 있었다.)사이드는 바그너를 통해 서구의 전체화 경향에 대해 말한다.이는 궁극적으로 그의 본영역인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는 의지이다.바그너의 반외국주의는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그리고 지배를 숨기고 있다.이것은 그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마이클 p 스타인버그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의미>를 재인용하는 사이드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독일 문화를 독일 이외의 세계에서도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잘츠부르크 민족주의적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인용한다.물론 이에 전적으로 동의할수는 없다.모든 문화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성이라는 토대에 바탕을 둔 '민족문화'이기 때문이다.이것이 확산되는 과정에 분명히 부정적의미의 '민족주의'라는 혐의도 들어갈 수 있다.하지만 이것 자체를 강조하다 보면 '문화변동''문화이동'이라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물론 저자가 말한바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가진 사회적인 의미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한다.우리도 80년대 초반에 '국풍81'이라는 행사가 있지 않았던가.잘츠부르크페스티벌의 기획자 역시 애초에 그런 정치적 의미를 담았을 가능성은 농후하다.물론 이런 계보적인 접근이 현재 페스티벌의 의미와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사이드는 여기서 슬쩍 푸코의 권력담론에 일침을 가한다.푸코의 이론이 담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와 자기 반성적인 자기중심성,미적 허무주의까지 아울러 비판하게 된다.

3장은 조금 읽기가 불편하다.악보가 몇 장 등장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좀 더 많다.음악을 개인의 연상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브람스의 이야기로 부터 끌어내는 음악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다.즉 브람스를 듣는 다는 것은 그 안에 누적된 베토벤을 연상하고 또 슈만을 그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일종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악감상이다.사이드는 프루스트를 참고해서 '선율'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선율이라는 것은 작곡가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무엇이며,미적 진술의 형성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도된 무엇이다.사이드는 이를 '음악의 음악'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말년에 이 '음악의 음악'을 말하고자 했던 비범한 작곡가로 베토벤,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든다.그는 소나타형식과 변주곡 형식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음악의 세련을 설명한다.물론 그가 관심을 갖는 스타일은 '대위와 변주'이다.베토벤의 푸가와 변주에 대한 관심,브루크너의 동일한 반복성의 반성적이고 명상적 요소,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으로 상징되는 변주와 다양성의 종합화되는 과정들이 그것이다.처음부터 음악과 사회와의 상호연계성을 주제로 이끌어온 사이드의 강의는 이제 마지막 역에 닿는다.그것은 여러문화 실천의 통합적 다양성을 통해 세련되어지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적  상황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사이드의 강의록을 보강해서 만든 책이다.전문적인 음악학자들의 책보다는 읽을 만 할지 모르지만 서양 고전음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막막할지도 모른다.도대체 글렌 굴드가 누군데...이러면 읽는데 피곤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입체감도 떨어지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또한 사이드의 글쓰기 방식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한번에 때려 잡는게 아니라 포위해서 잡는 방식이어서 논점을 잡으려면 집중도도 좀 필요하다.그리고 그의 글쓰기 탓인지 번역의 탓인지 문맥이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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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 <반 고흐 효과>이 내게 뛰어들었다.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 책은 내게 아주 시의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번 서울 출장에서 나는 -주말 오후 덕분이기도 하겠지만-시립미술관 '반 고흐전' 앞에 1시간 가량 늘어선 대열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날씨가 차가왔는데 딱히 할 것도 없어서 기다렸다.거의 '고흐 신드롬'이다.가족과 연인이 대부분이었고 혼자 온 사람은 나와 외국인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 정도였다

이런 현상에 대한 분석?

좀 인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분명 이런 댓글 달거다.

"한국 문화의 얄팍함.천민 자본주의의 패거리 근성.(좀 더 나아가서)획일주의,군사주의,전체주의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이제 이런 분석.좀 지루하지 않나?

박노자,진중권,강준만 등등의 맹활약으로 이런 비판을 위한 용어들이 마치 '전가의 보도'가 된 듯한 느낌도 든다.나는 그들의 분석과 비판에 동의하지만...늘 그 정도에서 멈추고 그런 생각에서 마침표 찍는 형태가 가끔은 아쉽다.

강준만이 이번 한겨레 21에서 그랬던가...'울분을 토로하고 마는' 진보에 대해 반성하자고.

그러니까...반 고흐 열광 현상에 대해 그저 '천민자본주의의 문화적 종속성''패거리문화' 댓글은 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강준만이 이번 한겨레 21에서 '중산층'문제를 뜨거운 감자 취급한 것(-물론 그도 답이 없다)과 아울러 이 책 서문에 담긴 엘리아데의 <성과 속>인용을 한번 생각해보자.

낯선 행동 양식이나 이국의 가치쳬계를 이해하려 할때에는 그것들의 신화를 부정하는 태도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그렇게나 많은 원시인들의 믿음에 대하여,그들의 마음이나 집이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공언해봐야 소용없다.우리가 그들의 믿음을 받아들이고,세계의 중심이 지닌 상징성과 고대 사회의 삶에서 그 상징성이 담당한 역할을 이해하는 한에서만 어떤 존재의 차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존재는 스스로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이루어진다.

책은 평전도 작품집도 아니다.이 책을 애써 장르 구분하면 '문화사회학'책이다.

'반 고흐 효과' 밑에 있는 노란 글씨....

"무명 화가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저자 나탈리 에니히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이고 사회학자이다.이제 서문만 읽었는데 그녀는 이 책에서 사후 100년 뒤에 불고 있는 고흐 현상에 대해 '인류학적' 접근을 취한다고 밝힌다.

서문에 담긴 그녀의 이야기를 몇 개 인용한다.

특정한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좀 더 일반적으로 독보적인 위인들의 위상에 작용하는 이 효과는 고흐에게서 시작되었고 고흐로 요약된다.

이 책이 독자나 연구자가 선험적으로 친숙하게 겪고 있는 우리 사회 고유의 현상들에 관련된 주제를 다룸에도....

숭배와 거리를 두는 유일한 방식은 숭배하는 대상보다 숭배 자체의 성격에 관심을 갖는 것 뿐이다.이는 곧 일종의 물러나기,초연,단순화 피하기를 뜻한다.숭배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태도가 숭배를 거부하거나 숭배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비판하거나 규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인기있는 화가는 고흐일게다.최근에 젊은 층에 떠오른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이고 클림트가 에어컨 그림으로도 쓰이자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에곤 쉴레'도 인기가 좋다.

이런 연쇄을 단순히 '나는 좋으니까 클림트가 좋아.그림이 예쁘니까 고흐가 좋아'라고 말해버리면 너무 썰렁하지 않은가.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라고? ^^    결코 아니다.

 손오공을 생각해보자.

머리카락을 불면 수 천개의 손오공이 나온다.그들은 각자 움직인다.그 중 어떤 녀석은 예술을 예술로,미학적으로 분석하려한다.그 중 어떤 녀석은 사회학적으로 예술을 파헤치고 싶어한다.그 중 어떤 녀석은 그냥 폼나게 감상하고 즐기려고 한다.어떤 녀석은 그냥 몰입해서 작품과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지난 번 미술관에서 나는 고흐의 자화상과 10분간 눈맞춤 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계급적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걸 싫어한다.

그런데..더 싫은게 있다.

예술은 지고지순한 예술일뿐...이라는 걸 더더욱 싫어한다.

십장생처럼 보이겠지만..난 그걸 무식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다른 책들을 무찌르고 바로 손에 들어왔다.제길 페이퍼가 또 리뷰처럼 길어졌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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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9 2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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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니 호사아니의 소설<연을 쫓는 아이>가 곧 개봉한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이니 이미 내용을 아는 분들은 많을게다.

서비스 차원에서...영화사 홈페이지의 시놉시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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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을 뛰어넘은 둘의 특별한 우정!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아미르와 집안 하인의 아들인 하산. 입는 옷도, 하는 일도 모두 다르지만 둘은 모든 것을 뛰어 넘어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다. 특히 약한 아미르와는 달리 운동을 곧잘 했던 하산은 아미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지켜 주는데…

가장 행복한 날 일어난 가슴 아픈 배신!
12살이 되던 해 겨울, 둘이 손꼽아 기다리던 연 싸움대회가 열린다. 대회에서 우승해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던 아미르는 하산의 도움으로 우승을 하게 되고, 하산은 “네가 원하면 천 번이라도 연을 찾아올 수 있다”며 떨어진 연을 쫓아 거리로 뛰어 나간다. 하지만 최고로 행복했던 이날, 두 소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었던 하산과 달리, 자신은 친구를 모른 척 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아미르는 하산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결국 그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집에서 내쫓아 버린다.

잃어버린 친구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세월이 흘러 성공한 소설가로 인정을 받은 아미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하산과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산은 언제나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며 뒤에서 지켜봐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미르. 아미르는 하산과의 우정을 되찾기 위해, 화해와 용서를 구하기 위해 놀랄만한 용기를 발휘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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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리얼 아프간은 없다.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영화<칸다하르>처럼 직접적으로 아픔을 보여주진도 않는다.아프간의 특수성을 헐리우드의 보편성으로 껴안은 영화다.조금 더 비난투로 이야기하자면 '헐리우드의 렌즈'로 만들어진 영화이다.나는 굳이 이것을 비판 하고자 하지는 않는다.최소한 이런 멜로 드라마성 구조가 아프간의 실제를 보여주진 못할지라도-사실 무엇이 그걸 보여주겠는가?-그것으로 아프간을 미화한다거나 시뮬라르크만 양산한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이미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빗금쳐져 있기 때문이다.이미 시뮬라르크된 세상이 인식의 토대이다.






 

 

 

 

 

 

 

 

 

아프간은 우리처럼 달력이 두 개다.아프간력이 있다고 한다.연날리기는 아프간의 구정에 행하는 민속 행사이다.부잣집 아들 아미르는 이 행사에서 우승한다.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인정 받아서 더 우쭐하다.

연 장면은 CG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잘 찍었다.하늘을 나는 연들 사이로 보이는 아프간의 모습과 설산이 그럴싸하다.

위의 장면은 하산이 아미르의 연을 주우러 가는 장면이다.하산은 여기서 "너를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더 다녀올께" 라고 말한다.(이 말은 뒤에 다시 한번 반복된다.) 하인의 아들 하산....그에게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

연을 찾은 하산.사고가 발생한다.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외상' 그리고 죄책감....

영화의 아역 배우들은 전문 연기자들이 아니다.하산 역을 맡은 소년의 눈빛이 참 마음에 든다.감독은 '청년의 마음을 가진 소년'이라고 표현했다.하산은 하인의 자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그에게는 아미르와의 우정만이 소중하다.하지만 하인의 아들이라고 마음 속에 아무것도 없겠는가..

석류밭 장면이었던가....

주인집 아들 아미르가 모든 것을 따르는 하산에게 화가 났다.그래서 바닥의 석류를 주워 하산에게 던진다.하산의 누런 옷에 석류의 붉은 빛 터진다.아미르는 "내가 네게 이렇게 던지면..가만 있지 말고 너도 똑같이 나에게 던져!" 라고 화를 낸다.

옷이 불게 물든 하산은....조심스럽게 일어난다.그리고 석류를 들어 자기의 머리통에 찟이긴다.그리고 아미르를 지나쳐간다.

나는 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헐리우드 문법으로 만든 영화여서 쉽다.이국적인 풍경과 아이들....그리고 희망.

'잘 만들어진' 감동의 공식 요소 아니겠는가...부채감마저 털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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