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최유준 옮김 / 이다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출근길에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를 들었다.자동차 앞 유리에 어두컴컴한 교실 안의 풍경이 맺혔다.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했던 스타일리쉬한 음악 선생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한 음대 지망생인 친구도 떠올랐다..

오늘은 4년 마다 한 번 찾아오는 겨울의 꼬리.봄의 앞섶이다.남쪽에도 아직 꽃 소식은 멀다.하지만 곧 아가의 입김같은 따뜻한 바람이 스칠 것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봄이 온다..."아름답고 즐거우 ..운..으 으 마 악 이여"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음악통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그가 한 때 줄리어드에서 공부를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음악을 하기에 자신이 너무 이성적이었다는 퇴교 사유가 웃음을 자아낸다.탈식민주의의 사도 바울쯤에 해당할만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이 책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선험적'이라고 믿는 '음악예술'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먼저 사이드가 다루고 있는 음악이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의 음악 임을 전제해야 한다.그것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서구 고전음악이다.(그러므로 이하에 나오는 '음악'은 모두 그 '클래식'음악이다.)

음악은 사회와 무관한 자율적 존재라고 하는 견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대중들에게 이같은 '예술 지상주의','순수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잘 먹힌다.그런데 음악은 조금 더 심하다.예를 들어 문학이나 영화 만 해도 텍스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접근,정신분석학적 접근 등등 이리 찢고 저리 찢어 본다.그런데 음악은 이런 텍스트 분석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다.여기에는 음악이 예술 장르로 갖는 특성도 한 몫한다.음악은 가장 절대적 형식의 기표예술이며 시간 예술이다.음표 하나 하나는 사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이런 기표들의 연쇄가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추상의 순수'가 있다.베토벤의 '합창'에서 '인류애'를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딴딴딴 따아" 하는 4음표가 과연 운명의 노크소리인가? 아예 표제 조차 없으면 도대체 그 음표들이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 어떡게 알까? 절대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도 이런 말도 했다. "음악이 내게 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이 미학적으로 갖고 있는 특수성은 흔히 음악을 사회와 분리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여기에 사이드는 '전문성'이란 것이 더해져 음악의 자기충족성을 만족시켜 버린다고 말한다.고전 음악의 작곡가,연주가,음악학자들은 클래식이란 음악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포섭해버렸다.음악은 그렇게 저 멀리 북극성처럼 찬연하게 빛나는 무엇으로 남아있게 된다.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마추어음악학자로서 '인문학'이라는 사다리로 음악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려고 애쓴다.그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는 음악을 마치 선험적인 신처럼 숭배하는 태도이다.(불행하게도 음악에 미친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음악 안에 온 우주가 있다고 믿는 광신도들 말이다.)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악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사이드는 '세련'이라는 말로 이 과정을 설명한다.그가 보기에 지난 세기 동안 음악과 사회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가장 예리하게 들어낸 사람은 아도르노이다.그는 아도르노의 음악론을 수용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한다.아도르노의 비관적 음악관과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종족음악의 분석을 지지한다거나 대중음악 또는 음악의 산업적 측면까지 내포하는 작업들을 긍정한다.대표적인 사람이 토스카니니와 글렌 굴드이다.1장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1장은 주로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특이한 경험으로서의 콘서트를 다루고 있다.퍼포먼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공적 영역에 속한 부분이다.이것은 이미 일상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경험을 포함한다.글렌 굴드는 이런 한계 속에 있는 음악과 음악가의 정체성을 외부로 끌어 내는 작업을 기이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그는 피아노 콘서트를 일찌감치 접고 다른 매체를 통한 음악만들기 작업에 전념한다.레코딩이나 영화 등 비극장적이고 반미학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급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와의 복원을 꾀한다.주어진 것만 붙들고 연마하는 수도자적인 연주가를 스스로 거부하고 예술의 지평을 전복하는 예술가로의 실험을 죽는 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2장에서는 '순수/정치'사이의 케케묵은 논쟁이 재현된다.폴 드망이라는 학자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과거 친나치 전력이 있었던 학자였다.이런 논쟁은 해방 이후 우리 예술계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다.(물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해방이후 거의 논의되지 않다가 최근 몇 십년 사이에 많이 논의된것이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 작곡가가 바로 바그너이다.히틀러는 바그너 매니아였다. 또한 그의 음악은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송으로 제3제국에서 즐겨 사용되었다.바그너라는 인물은 아주 복잡한 인간이라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다.이런 것 저런 것 다 떼어내고 분명 인류가 만들어낸 천재 중에 한 명일 것이다.예술가로서 그의 포부도 한 시대의 흐름을 뒤흔들 만큼 거창한 것이었다.사이드의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다.어느 한 쪽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의 예술적인 측면만 살펴도 곤란하고 또한 정치적인 모습만 봐도 안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사이드는 바그너의 음악과 텍스트가 담고 있는-그는 주로 <반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언급한다- 반유대주의,반외국주의,제국주의의 맹아가 있음을 명백히 지적한다.사이드는 '음악의 침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즉 음악이 관련되는 여러 영역-가족,국가.계급,남녀관계,민족문제 등 공적 영역-에 끊임없이 넘나들었다는 것이다.앞에 예를 든 바그너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 역시 바그너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에 복속되어 있었다.)사이드는 바그너를 통해 서구의 전체화 경향에 대해 말한다.이는 궁극적으로 그의 본영역인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는 의지이다.바그너의 반외국주의는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그리고 지배를 숨기고 있다.이것은 그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마이클 p 스타인버그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의미>를 재인용하는 사이드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독일 문화를 독일 이외의 세계에서도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잘츠부르크 민족주의적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인용한다.물론 이에 전적으로 동의할수는 없다.모든 문화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성이라는 토대에 바탕을 둔 '민족문화'이기 때문이다.이것이 확산되는 과정에 분명히 부정적의미의 '민족주의'라는 혐의도 들어갈 수 있다.하지만 이것 자체를 강조하다 보면 '문화변동''문화이동'이라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물론 저자가 말한바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가진 사회적인 의미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한다.우리도 80년대 초반에 '국풍81'이라는 행사가 있지 않았던가.잘츠부르크페스티벌의 기획자 역시 애초에 그런 정치적 의미를 담았을 가능성은 농후하다.물론 이런 계보적인 접근이 현재 페스티벌의 의미와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사이드는 여기서 슬쩍 푸코의 권력담론에 일침을 가한다.푸코의 이론이 담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와 자기 반성적인 자기중심성,미적 허무주의까지 아울러 비판하게 된다.

3장은 조금 읽기가 불편하다.악보가 몇 장 등장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좀 더 많다.음악을 개인의 연상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브람스의 이야기로 부터 끌어내는 음악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다.즉 브람스를 듣는 다는 것은 그 안에 누적된 베토벤을 연상하고 또 슈만을 그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일종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악감상이다.사이드는 프루스트를 참고해서 '선율'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선율이라는 것은 작곡가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무엇이며,미적 진술의 형성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도된 무엇이다.사이드는 이를 '음악의 음악'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말년에 이 '음악의 음악'을 말하고자 했던 비범한 작곡가로 베토벤,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든다.그는 소나타형식과 변주곡 형식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음악의 세련을 설명한다.물론 그가 관심을 갖는 스타일은 '대위와 변주'이다.베토벤의 푸가와 변주에 대한 관심,브루크너의 동일한 반복성의 반성적이고 명상적 요소,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으로 상징되는 변주와 다양성의 종합화되는 과정들이 그것이다.처음부터 음악과 사회와의 상호연계성을 주제로 이끌어온 사이드의 강의는 이제 마지막 역에 닿는다.그것은 여러문화 실천의 통합적 다양성을 통해 세련되어지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적  상황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사이드의 강의록을 보강해서 만든 책이다.전문적인 음악학자들의 책보다는 읽을 만 할지 모르지만 서양 고전음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막막할지도 모른다.도대체 글렌 굴드가 누군데...이러면 읽는데 피곤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입체감도 떨어지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또한 사이드의 글쓰기 방식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한번에 때려 잡는게 아니라 포위해서 잡는 방식이어서 논점을 잡으려면 집중도도 좀 필요하다.그리고 그의 글쓰기 탓인지 번역의 탓인지 문맥이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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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1 22: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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