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졌다. 금요일 퇴근해서 보니 컴퓨터가 사라졌다. 지난 주 부터 전원을 켜도 화면이 뜨지 않더니 결국 실려가고 말았다. 사흘 간의 연휴동안 나는 금단 증상에 고통스러웠다. 요즘처럼 시국이 팔팔 끓고 있을 때는 아이들 처럼 뚜껑을 자주 열어보고 싶어진다. TV 뉴스로는 채워지지 않는 답답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같은 상황에서는 제도권 올드 미디어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하여간 인터넷을 할 수 없었던 사흘은 담배를 끊었던 첫 사흘과 상당히 비슷했다. 결국 마지막 날인 어제 낮에는 예찬이가 자는 틈을 이용하여 PC방에 가고 말았다. 아내로 부터 주어진 시간은 1시간 30분. 집 근처에 제일 가까운 PC방을 갔으나 문을 닫았다. 결국 자동차를 타고 나갔다. 벌써 시간을 얼마나 잡아먹었는지 안타까와하면서 말이다. 나는 허겁지겁<잡식동물의 딜레마>의 리뷰를 썻다. 그리고 대충 알라딘에 올라온 글을 봤고 네이버 뉴스의 타이틀을 봤다. 이미 약속했던 시간은 지나있었다.

연휴 첫 날은 참 많은 일을 했다.

오전에 금정산 자락 만덕터널 위쪽에 있는 '석불사'를 다녀왔다. 반짝거리는 6월의 공기가 좋았다. 예찬이의 손을 잡고 비탈길을 오르는 재미도 좋았고 아이가 신기해 하는 '뱀딸기'와 '버찌'를 이야기해주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석불사'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점심 공양이었다. 시간이 대략 공양시간과 맞아 떨어졌다. 목욕탕 의자에 아내와 나, 그리고 예찬이가 앉아서 함께 절밥을 먹었다. 예찬이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푹푹 잘도 먹었다. 앞에 앉은 예찬이 또래의 아이를 둔 엄마는 " 우리 애가 저렇게 밥 먹는 것 한 번만 봐도 소원이 없겠다' 라고 부러워했다. 예찬이는 후식으로 나온 떡과 과일도 야무지게 처리했다.

저녁 때는 예찬이를 데리고 서면 촛불집회에 나갔다. 아이와 함께 나가려니 조금 시간이 걸렸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서면에서 시청방면으로 행진이 시작되었다. 예찬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대열에 합류했다. 예찬이는 상황이 어색했는지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아이는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행진 중에 뒤에서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약간 피했다가 다시가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찬이는 모든 상황이 낯설었나보다. 약간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예찬이를 포내기에 엎었다. 엄마의 등이 주는 안락함과 익숙함이 예찬이의 불안감을 줄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건 아내가 뒤에 설명해주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아내는 씩씩하게 지하철 3구간 거리를 걸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구호도 외치면서 말이다. 예찬이 또래의 아이들을 몇 명 있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하는 구호들을 따라 외쳤다.

 등에 엎혀 있던 예찬이도 "물러가라"를 따라했다. ^^ 나는 잘 못 들었지만 아내가 그랬다.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집 컴퓨터가 병가중이라 올릴 수는 없다.그리고 사실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았다.무슨 관광지에서 기록이라도 남기듯 '여기 있었어요'라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동 중에 예찬이 사진은 한 장 찍었던게 전부다. 사진 모니터로 보니 별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사흘 동안 나는 오전에는 예찬이와 놀이터가서 놀고 오후에는 집에서 놀고 늦은 오후가 되면 밖으로 나가고를 반복했다. 어제도 서면에 나갔는데 집회 참가를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부산에서는 백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다함께 멤버들이 주를 이룬 듯 했다. 다들 내일 (6.10)의 대규모 집회를 위해서 잠시 체력을 안배하는 시간으로 생각된다. 

시위대를 잠시 보고 북카페에 가서 잠시 놀았다. 그리고 서점도 가고 예찬이와 복국도 나누어 먹었다. 사흘의 연휴가 끝나고 회사에 와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쓰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런데 팀장은 자기일을 내게 시킨다. 사람이 없다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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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6-0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팀장 명박스런 놈이군요. ㅋㅋ
내일은 자습 당번인데... 바꾸더라도... 학교 선생님들 손에 손잡고 한번 가 봐야겠네요.
내일은 무조건 쪽수로 밀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부산에서도 한나라당까지 갔다더군요. 토욜에...
 
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제주도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서쪽으로 돌았던 우리들은 여행 마지막 날, 함덕 해수욕장에 다다랐다. 일행은 푸른 잉크빛 바다에 몸과 기억을 염색하려는 듯 바다를 즐겼다. 동네 아이들에게 물장난도 치면서 말이다. 물놀이에 숨이 차질 무렵이었다. 소년 하나가 바윗가 근처에서 손바닥 절반쯤 되는 게를 한마리 잡았다. 집에서 먹던 꽃게에 비하면 흉칙하게 생긴 것이었다. 이것이 식탁에 오르던 게와 같은 종이라는 것이 의심스럽게 생겼다. 우리는 바닷가의 장난감을 톡톡 건드리며 놀았다. 그때 게를 발견했던 제주 소년이 한마디 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안됀데요."

우리는 조금은 흉칙하게 털이 난  볼품 없는 게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그래서 도시인의 무감각한 자신감으로 " 야...이걸 먹는 건지 못먹는 건지 니가 어떡게 아냐? " 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 때 제주도의 태양과 바람덕분에 까맣고도 건강한 피부를 갖고 있던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 음...음....몰라요. 근데 조상때 부터 먹었어요"

우리는 제주 소년이 쓴 '조상' 이란 말에 박장대소했다.

그 제주 소년은 마이클 폴란이 말한 '잡식동물의 딜레마' 를 해결하는 인류학적 방법을 이미 알고고 있었던 것이다. 조상이나 주변 어른에게 직접 배운 것은 책이나 도감보다 더 확실하다.버섯을 따 놓고 식용인지 식용을 가장한 가짜 버섯인지 고민하던 폴란도 이 말에에 공감을 표한다.그는 도감과 책을 펴놓고도 우왕좌왕한다.결국 생명과 관련된 먹을 거리의 선택문제에서 '도감'과 '책'은 무용지물이었고 주변의 전문가의 한마디가 더 큰 신뢰를 준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란  음식에 대한 선택의 다양성이 이중의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버섯은 먹어도 되고 어떤 버섯은 먹으면 배가 아픈지 고민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먹을 때 마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면 정말 머리가 아플 것이다.하지만 인간은 '문화'라는 장치를 통해서 매번 식탁 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놓았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했다. 또 다양한 요리법을 통해서 먹기 불편할 것들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동물 살해라는 윤리적 함정을 살짝 망각하게끔 해주는 방식들도 장치들도 제공해 놓았다.그런데 마이클 폴란은 이런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풍요로와진 세기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구석기 인간들의 고민보다 한결 세련되게도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끌면서 현대인들은 같은 종류의 고민에 빠진다. '유기농? 무농약? 칠레산? 중국산? 아니 한국산? '

마이클 폴란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먹을 거리들의 계보학을 추구한다. 이를 '음식 사슬'이라고 한다. 즉 아침 식사에 오른 닭가슴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육,도축,포장,유통되어 오르는지를 거꾸로 찾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답게 '음식사슬의 로드무비'를 찍는다. 좀 더 성찰적인 '체험 삶의 현장'인셈이다. 그는 '산업적' '전원적' '수렵 채취'의 음식사슬의 한 쪽 끝을 직접 체험한다. 산업적 생산물의 경우 오하이오의 대규모 옥수수 공장을 탐방한다. 이 과정에서 신대륙에 옥수수가 퍼지는 과정과 산업농에 맞춰 옥수수가 진화하는 과정, 한 알의 옥수수가 옥수수 바다에 들어가고 이것이 어떤 어떤 곳에 씌여지는 지를 재미발랄하게 묘사한다. 정말 재기발랄하다. 환워론적인 오류가 있겠으니 미디어적으로는 충분히 재미 있는 '옥수수인간' 같은 개념은 우리가 대규모 단일재배되는 옥수수에게 얼마나 의존적인지 보여준다.

또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소와 관련해서 윤리적으로 위생학적으로 가장 건강한 육식의 공급방식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그것은 가축 내장을 먹이거나 옥수수를 먹여서 공장에서 소고기로 키운 소가 아니다. 권정생 선생의 말로 하자면 '가장 소답게 키운 소'를 먹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말한다. 즉 소답게 풀을 먹고소답게 풀 위에 똥을 싸면서 큰 소 말이다. 마이클 폴란도 사육과 도축이란 딜레마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위해 희생되지만 가장 그 종의 본성과  어울리게 키워진 방식을 권장한다. 즉 소는 소 답게 닭은 닭 답게 키우고 그렇게 키운 것들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고기로 키운 소나  닭고기로 키운 닭. 계란을 낳게하기 위한 제품처럼 키워진 닭과 그 생산품은 닭에게도 인간에게도 비윤리적이다. (불행히도 한 동네에 대 여섯군데씩있는 닭집은 모두 양계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불운한 닭들이다.)

마이클 폴란은 폴리페이스 유기농 농장에서 흥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의 가장 부가가치 높은 산업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산업적 유기농'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과연 산업적 유기농이 유기농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산업적 유기농'이 유기농이 의미가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유기농의 지속가능한 순환론적 세계관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그는 유기농 운동의 세가지 철학적 조건을 말한다.즉 대안적 생산방식,대안적인 유통시스템,그리고 대안적인 소비방식이다.그는 이 세가지가 유기농 운동이라는 혁명적 프로그램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단지 '생산방식' 만을 유기농화한 기업형 유기농 공장은 결코 유기농운동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할 수 없다.

흔히들 유기농 운동같은 것을 하는 단체에서는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의 세계관이다' 라는 말을 한다. 내가 처음으로 한살림 강의를 들었을 때도 담당자는 그 이야기로 첫문을 열었다. 마이클 폴란도 말하지만 유기농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 함의가 들어있다. 단지 '웰빙'을 위해 유기농을 먹는 것은 이기적인 선택일 뿐이고 비정치적이다. 유기농 운동은 생태주의 운동의 먹을거리 판본이다. 또한 대규모 생산을 꿈도 꾸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소농과 지역중심의 운동이다.격주로 들어오는 한살림 소식지에는 땅과 소농 그리고 지역을 살리기 위한 한살림 운동의 취지가 적혀있다.나는 먹는 행위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  경남 밀양에서난 고추와 경남 함안에서난 쌀과 경남 남해의 마늘을 먹었다. 나는 거리에서 시위를 하듯 정치를 먹어 삼킨 것이다.(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누가 그 맛있고 싱싱하고 비싼 음식을 먹으며 매번 정치를 염두에 두겠는가.)  내가 먹은 음식들은 모두 비싸고 모두 경남 지역에서 났다. 그리고 농작물을 키운 농부에게서 조합을 거쳐 바로 내 식탁으로 왔다. 나는 마이클 폴란의 글을 읽다가 장일순 선생을 비롯해서 한산림 운동을 시작했던 분들의 혜안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이 책에서 가장 껄끄러운 부분은 결국 잡식성 동물이 피해갈 수 없는 '사육동물의 도축'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담장 너머의 누군가에게 맡기기때문에 뚝뚝 떨어지는 소들의 핏방울이나 향기롭지 못한 내장, 그리고 죽음을 앞둔 동물의 눈망울을 볼 필요가 없다. 거기에 우리는 적당하게 이런 과정을 잊게 만들 풍부한 요리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마이클 폴란은 직접 닭의 목을 따는 용기를 선보인다. 무척이나 주저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채식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육식을 하고 가축을 기른 것은 진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의 윤리적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층위의 윤리가 작용한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동물섭취를 청교도적 윤리로 제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연의 모든 동물은 먹고 먹히는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연은 종 자체를 유지하면서 순환하게끔 한다. 그런데 극단적 채식주의 휴머니즘은 동물 종이 아니라 동물 개체 하나 하나에 윤리를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옳고 박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의 법칙에는 어긋난다. 실제로 야생의 동물들 중에서 편안하게 자기 수명 다 누리고 자식들 보는 앞에서 임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는 어린 동물일 때 또는 늙거나 병들어서 또는 재수가 없어서 더 큰 육식동물들에게 희생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에게 잡혀먹히는 어린 영양이 불쌍하다고 모든 사자와 고양이과 포유류를 우리에 가두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중간 과정의 코미디는 알아서 상상해보고 ....결국 생태계의 흐름은 무너지고 만다.마이클 폴란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동물애호가인 피터 싱어에게 메일을 보내 답을 구한다. 피터 싱어 역시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물섭취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낸다.

폴란의 여정은 수렵 채취 과정까지 간다. 멧돼지 잡기와 곰보 버섯따기가 그것이다. 이 장은 실제로 조금은 실험적인 것이다. 멧돼지를 잡고 버섯을 직접 따러 간다. 여기서는 그 의미보다 책 전체에 걸쳐 있는 폴란의 위트있는 문장력을 칭찬하고 싶다. 앞서서도 그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비유와 구체적인 상황 묘사로 글의 흡입력을 높였다. 난생 처음 총을 쏘아 보는 폴란이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은 오히려 다큐멘터리화면이 묘사하지 못하는 글의 생생함이 담겨있다. 첫 사격을 양보하고 느낀 후회부터 돼지를 잡고나서의 흥분,그리고 죽은 돼지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을 본 뒤 생긴 후회감.돼지를 분해하는 작업에서의 역겨움..그리고 동료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잔머리..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잘만든 다큐멘터리보다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폴란이 가진 흥미있고 감각적인 문장력때문이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지속시킬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정말 훔쳐오고 싶다.

결론에서 폴란은 이 모든 음식사슬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고 직접 식탁을 차린다. 동료들을 불러모아서 '이야기'가 있는 저녁 식사의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음식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을 때 " 까다롭고 때론 역겨운' 과정을 지켜본 후 무슨 즐거움은 즐거움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로드무비를 다 보고 나서 그가 만든 식탁을 보면서 나 역시 그 즐거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무지의 식탁을 성찰하고 앎의 즐거움으로 식탁을 채우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들 예찬이와 그를 힘들게 했던-아직도 숨어있을지 모를-아토피에게 감사했다. 나와 아내는 그전부터 한살림이나 유기농 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아는 것이었다. 아이가 아토피가 생기고 나면서 우리 부부는 음식에 훨씬 많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주저하는 나를 '자연요법과 유기농'으로 설득한 것은 아내의 공이다. 당시 나는 주저주저하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확신범이었다. 그것 때문에 몇 번 충돌도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아내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한살림에 가입했다. 부산의 한살림은 또한 자랑스럽다. 다른 곳은 그저 인터넷으로 가입하고 돈만 내면된다. 그러나 부산 한살림은 사람 귀찮게 한다. 꼭 사무실에 방문해서 1시간 이상 강의를 들어야 한다.강의라는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한살림의 취지-이기적 웰빙만은 아닌-를 듣고 이해시킨다. 우리집은 주로 한살림에서 기본적인 부식거리를 산다. 당연히 마트는 한 달에 한번이나 갈까 말까이다.또 가끔은 예찬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위해 동네 산업유기농 판매하는 유기농점포에서 돌에서 만든 유기농 바나나를 사먹인다. 바나나는 한살림에서 나오지 않는다.그렇다보니 유기농과 산업유기농의 차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예찬이의 아토피는 거의 나은 듯 보인다.하지만 아토피는 낫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도 먹는 것은 관리한다. 아이는 과자도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고 오렌지 주스나 사탕,아이스크림같은 것은 말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는 다른 또래 보다 주먹 하나가 더 크다.그리고 어찌나 밥을 씩씩하게 잘먹는지 어디 가든 칭찬받는다. 아이는 한번도 항생제를 맞지도 바르지도 않았다. 예방주사 역시 마찬가지다.(언젠가는 맞힐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예방주사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모임같은데 가보면 안다. 돌이켜 보면 아토피가 우리 부부에게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한 번 더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준 셈이다. 나와 아내는 가끔 닭을 시켜먹기도 하고 피자도 먹는다. 내가 조금 더 나쁜 음식을 자주 먹는다. 바쁠 때는 햄버거로 때우기도 하고 조미료 마구 들어간 김치찌개도 잘 먹는다. 예찬이도 앞으로 커가면서 그럴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애써 피할 필요는 없다. 대신 알고 나면 조금 더 줄이게 되고 가급적 멀리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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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6-08 15:49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리뷰만 보면 항상 사고싶어 근질근질해져요...ㅎㅎ

드팀전 2008-06-09 10:57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이 들어있습니다.특히 폴란의 웃음담긴 문체는 즐겁게 하지요.

zzanga62 2008-07-16 03:28   좋아요 0 | URL
사실 저자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채식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으며,

피터 싱어를 통해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물섭취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의 답변을 받아냈다는 리뷰를 보고 의견을 올린다.

극단적 채식주의자란 '당신 꼭 채식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말할까요?
그러나 대개의 채식인들은 채식의 좋은 점을 홍보하고 동참하기를 권하거나,
육식을 줄일 것을 권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왜냐면 현실적으로 당장 모든 축산을 금하고 모든 육식을 중단하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먹이사슬을 인정하고 자연에서도 불쌍하고 고통스런 죽음들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나 피터싱어가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이해해보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산업축산은 너무나 반자연적이고 반생명적이며,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상상하기 힘든 고문을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환경파괴외 인류기아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일지라도 평생 가둬키우다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축산이 점차 대형화되며 값싸게 많이 생산하기위해
동물을 생명취급하지 않고 작업속도도 엄청나게 높입니다.
도살장의 경우만 해도 그 업체의 직원들조차 엄청난 신체적,정신적 위험 속에 일하고,
너무 빠른 작업속도로 동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자연스레 동물을 일부러 학대하기까지에 이를 정도이니,
동물학대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고 끔찍하게 일어나는지는 차마 입에 다 담기 어려운 지경이며, 결국 그 생산물을 먹고 인간은 광우병, O-157, 조류독감과 같은 끔찍한 질병에 감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살장> 읽어보세요)

신자유주의 추세 속에 축산업체는 점차 합병되어 대형화되는데,
그럴수록 선진적이고 수준 높은 생산과정과 결과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국 정부와 나아가 전세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세져서
어떤 윤리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이윤 높이고 작업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은막 뒤에서 이뤄지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끔찍하고 잔혹한 학대와 비리들은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다양해지며 그들을 건드리기는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들의 감독자이며 축산과 동물보호법을 관장하는 농림부는 국민건강이나 동물복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축산업체 경영자들의 이윤창출만을 비호해줄 뿐입니다.

축산업체에 대한 규제 완화와 합병의 허용은 레이건, 부시 등 시장주의자,
극우적 대통령 집권기에 더욱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초국적 자본들은 육류 외에 모든 음식에 걸쳐 전세계에 죽음의 밥상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유기농 식물과 로컬푸드를 지향합니다.

자연친화적 축산이 보편화되려면 지금처럼 고기를 싸게 많이 먹으려 해서는 안되고,
가끔씩 제값 주고 먹어야 합니다.
암튼 이런 현실들을 알면서 되도록 고기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내가 한 마리라도 극단적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기, 우유, 다단식 닭장에서 생산된 달걀 등을 먹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꼭 채식해야 합니다라고 말 하지는 않지만,

육식을 줄여가지 바라며 채식은 현재 최선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도 신자유주의에 깊이 쩔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축산에 있어서도 미국과 같이 대형화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한미FTA는 우리가 꼼짝없이 노예화되게 만들 것입니다.
 

<군복>에 대한 어떤 분의 페이퍼에 짧은 댓글을 단적이 있다. 생각난 김에 잠시 쉬어가는 코너삼아...

이번 집회에서 미디어에 집중 플레시를 받은 것은 '유모차부대'와 '예비군부대' 다.  TV 화면을 통해 보았을 때 나는 "왜 군복을 입고 나왔지? " 라는 생각과 "CNN같은걸 보는 외국인들은 군인과 전경이 싸우는 장면으로 오해하고 신기해할수도 있겠다"

그러니까...알라딘의 많은 분들이 환영한 '군복의 재평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봤다는 결론이다. 그것을 무슨 패러디로 보지도 않았고,기표의 재전유로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나는 교련시간이 싫었던 그 맘때부터 '군사주의'가 싫었다. 특히 당시 화두는 '군부종식'이었기 때문에 내 생각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거기에 도련님의 자유주의적 성향과 낭만적 예술 감성은 군대의 획일적 문화, 명령지시체계와는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

대학에서도 나는 선배들의 위계가 싫었다. 그러니 선배들에게 그다지 깍듯하지 않았고 후배들에게도 별 대접을 요구하지도 않았다.그건 지금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군대는 군대 가서도 싫었고 군대를 그만 둔 다음에도 싫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 대부분 다들 그런다.)

하여간 나는 딴따라가 되지 못한 딴따라근성으로 인해 '반권위적' '반군사문화적'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으며 가장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저항할 것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일상화된 군사주의 코드' 다.내가 저항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이번 일도 그래서 내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몇 년 전에 부산대 '월장' 사건이란게 있었다. 예비역과 복학생들의 인터넷 언어 난동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잘 모르는 분들은 포털의 도움을...) 그 때 진중권은 여성주의 입장에 서서 예비역들을 비판했다. 그 중 명언이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고.. 대충 이런 것이다.

" 정체성이란게 있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데는 크고 작은 수 많은 정체성이 있다. 그건 복학생도 예비역도 마찬가지다.그들은 남자일 수 도 , 학생일 수도, 어머니의 아들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고 많은 그 정체성 중 왜 하필 '예비역' 정체성에만 집중하는 가? 왜 예비역 정체성 아래 하나로 단결하는가? "

나는 집회에 나온 예비역 군복을 보면서 그 말을 떠올렸다. 왜 굳이 예비 군복의 정체성 속에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과 열정을 담아 놓으려 하는가? 예비군이란 무엇인가? 계보적으로 보자면 박정희 아저씨의 '전 국토와 국민의 병영화'를 위한 상비군 아니었던가

내게 그것은 '군복'이 일상적으로,아니 최소한 일상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그다지 거부감 없이 느껴지는 것이 한국 사회의 평범한 군사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자유분방한 웹2.0 세대들도 과연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그런 '권위주의'와 '군사주의'에 자유로울까.상대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그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행동들을 본다면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 만은 없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예비역도 시민이고 군복을 입고 저항할 수 있다' 는 패러디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예비역들이 아침에 군복을 갈아입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 패러디는 다분히 상투적이다.나는 오히려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군복을 입었을 것 같다. 거리에서 통제를 맡고 시민들을 최소한 지키기 위해 눈에 띄는 복장이 필요하다는 정도 말이다. 동네 축제마다 가면 교통정리하러 알아서 모여주는 해병대 아저씨들도 똑같이 그런 말을 하신다. 그 분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난 눈에 늘 거슬린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일상적인 경험이다.오해를 막기 위해 조금 더 정확히 말해야하겠다.건강한 성인 남성들만을 중심으로 하는 일상적인 경험이다.여성이나 장애인,기타 고위층들은 자제들 등등은 배제된다. 그럼에도 일상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 남성들이 한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쉽게 농담처럼 일상용어로 '기상','야..머리 박아' '이게 빠져가지구'  이런 말을 쓴다. 나도 가끔 그런 말을 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그런 용어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 도심에서 군복 입은 군인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다지 해외 출타가 잦은 사람은 아니지만 내 경험으로도 그렇다. 나는 호주 시드니에서 1년 가량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1년 동안 딱 한 번 군복입은 사람을 봤다. 도쿄에서 1주일 있었던 적이 있는데 단 한번도 자위대 군인들을 만난적이 없다. 그런데 서울은 그렇지 않다. 기차 역 부터 술집까지 어딜 가든 군인이 있다. 

물론 그렇게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다. 역사적 정황이 다르기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결과는 한국인이 군대나 군사문화에 노출되어 있고 그걸 당연히 여기는 풍토라는 것의 예가 되기도 한다.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국민개병제'가 사라지고 '모병제'가 되는것.그리고 그렇게 군대를 '일상영역'으로 겪은 것이 아니라 '특수영역'으로 겪었던 세대들이 사회 중심이 되는 시점이 되어야 '군복'이 낯선 것이 될 듯 하다. 즉 지금의 세대들은 군대라는 특수 영역을 일상영역으로 겪고 있고 그것이 평생 따라다닌다. 군대를 군대 안에만 가두어 놓는게 '군부종식'이고 그 문화를 '군대'안에만 가두어 놓는게 '군사주의 문화'의 척결이다. 더 쉽게 말하면 '군대를 담장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일상생활의 군사주의문화와의 싸움의 시작이다. 

상상이지만.. 실제로 대한민국 육군이 대한민국 사관학교 생도들이 군복을 입고 시청앞에서 그렇게 행동해 주었다면 나는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낼 것다. 그들은 원래 군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군복은 군대에서 입는 것이다.아니면 집에서 페이트 칠 할 때거나...

나는 촛불집회에 나온 예비역들에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그들이 입고 나온 군복때문이 아니며 군복안에 땀으로 쩔었을 흰 런닝셔츠와 그 안에 있을 뜨거운 심장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이 군복을 자연스럽게 꺼내 입을 수 있는 일상적인 반응과 그 군복이 좋은 의미로 전화만 된다면 별 상관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군대를 제대하면 아무도 군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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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6-05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군사주의와 군대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드팀전님 못지 않을거에요. :) 이번에 제 평생에 유일하게 예비군들을 환영한 이유는, 이런데 있습니다. 예비군 시민들이 나와서 같은 국가 공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상징적인 의미. 그러니까 제가 갖고 있는 강한 거부감은 예비군복을 입은 시민들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있는거죠. 국가, 공권력을 상징하는 예비군복을 입은 이들이 나와서 그들에 맞설 때의 쾌감이란. 그러니까 사실상 예비군이나 예비군복에 긍정적이라기보다는, 그 옷을 입고 같은 무리에 대응한다는 것이 좋았던거죠. 다음달에 예비군 가는데 대학원 졸업해서 3일 짜리입니다. 하루 동안 입어도 미칠 것만 같은데 3일간 그 옷을 입으라니.

라주미힌 2008-06-0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거랑 예비군복은 같은 선상에 있던데요 ㅡ..ㅡ;
예비군들이 보이는 행동에서 질서와 통제, 보호라는 마초적 근성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났고요.
시위대에서 여성들에 대한 배제가 있었다면서요? 보호하겠다믄서...
차라리 부르카를 씌우지...
시위대의 자발성을 억누르는 빠워가 군복에서 나왔잖아요.
권력과 힘의 작용방식이 전경하고 다를거 없다고 봅니다.

상징? 패러디? 그것들은 제 3자의 상상일 뿐. 좋게 생각하면 좋은거고 아니면 아닌거고..

마늘빵 2008-06-05 10:49   좋아요 0 | URL
본래 그들의 취지가 그거였다면 유감인데요. -_- 보호와 질서, 통제를 위하였다면. 국가에 맞서는 군대의 상징,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한 의도는 없었던건가요?

라주미힌 2008-06-05 11:04   좋아요 0 | URL
모르죠 뭐... 그런 상징으로 입고나왔는지 어땠는지.. 흐흐...
드팀전님이 쓰신 페이퍼대로 예비역들의 사고방식이 '군사주의'에서 벗어났을리는 없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나름 자기들은 좋은 의도로 그랬겠죠.. 그것에 대해서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마늘빵 2008-06-05 11:08   좋아요 0 | URL
머 나나 라주미힌님이나 예비역인데요. -_- 난 전혀 안 예비역같은 예비역이지만. 아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어느 세월에 예비군 끝내냐.

이게다예요 2008-06-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티비를 볼 때마다 그 군복이 참 낯설게 느껴졌는데(그 군복때문에 시민들과 전경들과는 또다른 이질적인 느낌, 또다른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랄까), 드팀전님이 꼭 집어주시네요. 아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생각해볼만한 문제네요.

드팀전 2008-06-05 18:08   좋아요 0 | URL
전 예비군도 쫓겨난지 오래되서 군복도 없습니다.있어도 허리가 쫄려서 입지도 못하겠지요

나비80 2008-06-0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명확하게 가시적인 적들의 기표에만 눈이 가게 마련이라 시민과 경찰 사이의 완충 역할, 혹은 저지선 구실을 하는 예비군들의 뚜렷한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처음에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성급히 거리로 몰려나온 기특한 청년들인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5월은 예비군 훈련이 집중되어 있는 시기거든요. 그런데 예비군복은 불가피한 의상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인 상징이었더군요. 집중적인 명령을 하달하고 지휘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라니. 또 이 예비군들은 '시위대와 전경을 동시에 보호한다'는 슬로건을 걸고 거리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내몰린 전경이라는 권력의 최종 하위 심급에 대한 인정적인 동정과 폭력에 노출된 시민들을 동시에 보호한다는 다소 휴머니즘 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폭력을 덜 소유한 시민들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호해주는 결과를 낳고 있지만 다시 명확하게 정의하면 지금의 예비군은 시민 시위대가 아닙니다. 드팀전 님처럼 국가의 폭력이 연장된 형태의 예비군에 반대한다는 논리에도 십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저는 지금 거리의 상황이 명확하게 적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회색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예비군의 필요가 조금 덜 만족스럽습니다. 아프락사스 님처럼 전복적인 퍼포먼스의 차원에서 지금 거리의 예비군을 이해하는 분들이 아주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로 한복판의 해병대전우회의 얼굴이 아닌 좀 더 촛불과 닮은 얼굴을 하고 거리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드팀전 2008-06-05 18:11   좋아요 0 | URL
전 실제로 시위에서 예비군들의 활동을 목격하지 못해서 시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님의 말씀은 그런 절충 영역이 전선을 불분명하게 하고 시위가 어떤 종류의 형태로든 전화되는 것에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동의하는 부분이 있군요.

누에 2008-06-05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의생각과행동들개인적으로응원합니다.(고장난기보드로쓰느라죄송..)비록틀릴때도있고미숙할때도있을지라도전자신의목소리를내고그걸곱씹어생각해보고때론반성하기도하는분들의이야기들참소중하다생각합니다.좀더많은분들이책임있는하나의목소리를낼때사회적합의에까지도달하지않을까생각합니다.전어쩌다가군사용어라도입에서나올라치면몸서리를칠정도로거부감이강합니다.'부대'어쩌구얘기만으로도미칠것같습니다.그냥'유모차를끌고나온사람들'이러면될껄..그리고'밀리터리룩'이라불리우는종류의옷을봐도미칠것같고..에구구고장난기보드로말이길었습니다.

드팀전 2008-06-05 18:13   좋아요 0 | URL
이상의 시를 보는 줄 알았습니다^^ 예술적인 패턴을 보는 듯 하네요.
전 알러지 반응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Koni 2008-06-0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의 글을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미리 알고 가지 못했어서, 시위대 가운데에 등장한 '군복'에 깜짝 놀랐었어요.
 

오늘 읽었던 <한겨레21> <시사IN>에서 관심이 가는 기사...

한겨레에 쓴 한홍구의 글 (흐름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로 끝맺는 무책임한 글이지만 민주화운동 약사를 쓰고 있다.)

 이진경의 글 (현재의 새로운 형식을 네그리의 '다중'으로 보기 힘들다고 말하며, 들뢰즈적 향기를 언뜻 보이며 '흐르고 있는 대중'으로 읽는다.그리고 '이명박 다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가 요즘 제일 생각하는 것도 그 다음이다.)

한겨레 '쓰촨성 보듯 북한을 보자" (북한의 식량난 기사...내가 너무 잘 먹고 잘 쓰고 있다는 생각이들었다. 외식 한 번 더 줄여야 한다.)

시사인에 쓴 경향신문 약진 기사 (몇 년 전 부터 경향의 혁신을 칭찬했던 입장에서 무흣)

시사인에 박권일이 쓴 글.(새로운 형태의 시위이다.중심은 없지만 '전략'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것도 그 다음과 관련되어서 중요하기때문에)

 

옹..이제 보니 한홍구의 글은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요렇게...별 내용은 없다.

당최 촛불을 끌 수가 없다



오늘의 촛불 집회가 6월항쟁·여중생 추모제·탄핵 반대와 다른 점…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 없어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
[표지이야기 1부-타오르는 촛불]
예측불허의 한국 현대사가 또 한 번 예측할 수 없는 국면을 맞고 있다. 촛불이 다 타버리도록 어둠이 물러가지 않을지, 아니면 날이 밝아올지, 그 전에 환한 전기불이 들어와 촛불을 켤 필요가 없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한동안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촛불시위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 어둠이 가시기 전에 촛불이 밝음을 잃는 순간이 하나 또 있다. 집회 현장에서 자주 듣는 것처럼 사람들이 횃불을 드는 경우다.



△ 1987년 6월항쟁 당시 거리의 모습(맨 위)과 2008년 촛불집회. 지금은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로 벌어진 사태를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1987년부터 2008년까지

촛불문화제를 17번 하도록 국민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던 정부는 시민들이 광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서자- 첫날은 청계광장에서 한 50m쯤 벗어나 종로1가로 온 게 전부다- 불법 거리시위를 한다고 난리법석을 쳤다. 그런데 원래 시위는 거리에서 하는 거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를 겪는 동안, 반대라고는 꼴을 보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작자들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그 하수인들이 ‘심기’마저 경호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로 반대세력이 한 뼘 거리에 나서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교내 시위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교내 시위가 1960년대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거리로 나가기 위해 교정을 몇 바퀴 돌며 사람을 모으는, 말하자면 본게임에 앞서 워밍업을 하는 것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거리에 나가면 군부가 나설 수 있는 빌미를 준다고 해서 여러 날 거리에 나가네 마네 논쟁을 했다. 우리 역사에 위화도 회군 이래 최대의-그러나 최악의- 회군이었다는 비판을 듣는 서울역 회군도 이 연장선에서 나왔다. 80년대는 거리 데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 시민들은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다. 재야단체나 각 대학 학생회, 학회 등을 통해 은밀히 ‘택’(영어 ‘tactic’을 줄인 은어로 그날 시위의 장소 및 이동경로 등에 대한 지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몇 명이 ‘만약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 어떻게 알고 나왔냐는 질문에는 이러이러하게 순진한 척 답하라’는 것까지 교육을 받은 뒤 거리 시위에 나왔다.
1987년 6월항쟁은 국민운동본부라는 지도부가 있었지만, 아무도 이 항쟁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변화를 가져오기를 다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런 현실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과 비교한다면 6월항쟁도 처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추모집회 때 처음 모인 인원은 미선이·효순이 촛불추모제 때나 지금에 비한다면 몇십분의 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문치사 은폐·축소 사실이 5월 하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알려지면서 광범한 공분이 일고, 이 분노에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는 사건이 더해져 6·10 국민대회로 이어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과 시민 수백 명이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면서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밤샘을 하면서 시위에 탄력이 붙었다. 특히 6월항쟁 때는 이전과는 달리 전국에서 동시에, 서울도 한 곳만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라고 할 정도로 분산된 장소에서 동시다발 전술을 택한 것이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90년대에는 1991년 이른바 분신 정국과 1996년 말~1997년 초에 걸친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 당시에 사람들이 거리에 많이 나왔다. 91년 강경대가 죽고 김귀정이 죽고… 살벌한 강경 진압과 그에 따른 희생, 그리고 그 억울한 희생에 길동무가 돼준, 끝없이 이어지는 분신과 투신…. 그러나 그 봄은 정원식 총리에 대한 밀가루 투척이 ‘패륜’으로 몰리면서 서럽게 끝이 났다. 97년의 노동법 투쟁은 뜨거운 대중의 열기를 지도부가 잘 받아내지 못하면서 흐지부지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덮쳐왔다.
2002년 월드컵은 시민에게 광장을 되돌려주었다. 그 뜨거운 열기. 같이 하면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구나 하는 것을 시민들이 알아버렸다.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고, 그해 가을 미선이·효순이 두 중학생을 기리는 촛불추모제로 이어졌다. 이 추모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지만, 사실 월드컵 열기에 온 국민이 들떠 있는 동안부터 꾸준히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해온 대책위원회가 있어 집회를 주도했다. 이를테면 이들이 지도부 역할을 했다. 추모제 말미에 가끔 “미대사관으로 가자” 하는 구호가 나오고 실제로 그 앞에 가서 ‘으싸으싸’ 하면서 전경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이는 대개 집회를 마무리하는 수순이기도 했다. 그냥 가기 아쉬운 사람들, 절대로 그냥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도 한번 소리도 지르고 몸도 풀었다고 생각하려면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사실 이런 집회는 준비도 홍보도 어렵지만 해산이 제일 어렵다고 하지 않나?
미선이·효순이 촛불추모제가 좀 비장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면, 탄핵 반대 집회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탄핵을 자행한 수구세력을 심판할 날을 받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회가 민의를 배신해서 거리에 나앉아 촛불을 들었지만, 총선이 한 달도 안 남았으니 초조할 일도 없었고, 구태여 거리시위를 할 이유도 없었다. 시위대 입장에서 이 당시는 경찰도 우리 편 같아 보였다.
2002년의 촛불추모제, 2004년의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 이어 2008년에 시민들이 다시 촛불을 들었다. 시민들이 촛불을 드는 때는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미선이·효순이가 불쌍하게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미군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고 국회도 손 놓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책임이 없다면 그때 거기를 지나간 미선이·효순이의 잘못이란 말인가? 정부가,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할 때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2004년의 탄핵 시도는 국회가 시민들에게 촛불을 나눠주고 불붙여준 것이다. 국회가 ‘탄핵질’을 안 했으면 시민들이 촛불 들 일도 없었다. 탄핵 때는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 못한 정도가 아니라 대차게 오작동을 한 경우다. 그래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고, 선거로 심판했다.

심해지는 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

87년 6월항쟁은 당시 군사정권의 직선제 수용으로, 2002년의 촛불추모제는 바로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반미 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말하는 후보의 당선으로, 그리고 탄핵 정국의 촛불집회는 탄핵을 시도한 의회권력을 한 달 뒤의 총선에서 심판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요컨대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따른 직접민주주의의 한국적 방식으로 촛불이 타올랐지만, 그 촛불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작동 방식과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6개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안 돼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자연스럽게 촛불을 끌 수 있는 카드는 이미 써버린 것이다. 이미 촛불에서 문제의 핵심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넘어섰다. 한 달 동안 촛불집회를 하며 시민들이 그런 식의 쇠고기 수입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 정부는 꿈쩍도 안 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오히려 시민들의 염장을 질렀다. 시민들은 협상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대통령은 협상은 잘못 없고, 소통을 잘못한 것이 문제란다. 6월항쟁 때도 없었던 밤샘시위를 하면서, 그리고 “잡아갈 테면 기꺼이 타주마”라고 제 발로 닭장차에 오르면서까지 안 된다고 하는데도 정부는 막무가내로 장관 고시를 강행했다. 이쯤 되면 확실히 막가자는 거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가? 선거는 다 지나갔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같은 장치도 없는데 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 축산업자의 이익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대통령이나 정부의 알량한 체면을 위해서인가? 국민의 뜻과 이익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복무하는 대통령과 정부를 그냥 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02년이나 2004년과는 달리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로 인해 벌어진 사태를 대의민주주의적 장치를 통해 수습할 길이 보이지 않는 오늘, 한국 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은 더욱 심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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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 다닐때 운동권 선배들에게 가끔 듣던말...

"너 혼자 운동하냐?"

이건 나이트 클럽 다니며 놀맨 놀맨하는 놈들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꼭 권장할 만한 건 아니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단대나 학과의 운동 선배들이 어디 어디 가투에 가자고 하면 어떨 때는 가고, 어떨 때는 안가고...여기에 무슨 기준도 없었다. 총학 문화국에 있던 선배가 한 발 걸치고 도와 달라 그랬는데도...연애질하기 바빠서 안한다고 했다. 아...그 선배 얼굴 하야져서...서운해하더군.

그러니까 시대적 고민이 부족하여서인지 자유주의적 망상이 지나쳐서인지 일관성이 내 춘향이 널뛰기였다. 정확히 보자면 쁘띠 성향이었겠고 스스로 변호해보자면 자유로운 예술혼이었다고 하자.(결국 쁘띠 브루주아 개인주의이자 뭐)

그러니까...나는 민중미술에는 감탄하고 세잔의 혁명적 시선 변화에 똑같이 감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좀 마음에 안들었다. 맑스는 읽는데 공자는 버려놓는 것도 싫었다. 하여간 20대의 도련님적 반항근성은 운동에 동참하면서도 분파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 운동방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조직 운동 차원에서는 있으면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정규TO로 채워놓기 애매한..늘 그런 상황이었다.

어쨋거나...나는 정치권에서 불러주지도 않고 불러도 나가기 싫고....여전히 계속 혼자 운동하고 있다. 맑스에서 더 나아가기도 하고, 다시 맑스로 돌아가기도 하고, 폐기하기도 하고, 탈주를 해보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혼자서 운동하고 있고...대를 이어서 계속 그렇게 해 볼 생각이다.

서울대학교 당국에서 이번 시위에 '경찰의 서울대생 폭행'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성명서를 냈다. 서울대에 출입하는 기자 몇 명 모아놓고 보직 교수가 설명하는 화면을 봤다.

그런데....뭐가...

경찰이 잘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고 그 여학생이 안쓰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무식한 권력의 종노무새끼들은 변하지도 않는다. 가학적인 새디스트 같은 새끼들...그리고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 볼 면목이 드냐...욕 1000번 (글 제대로 못읽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욕 한 참 한다.)

그런데....뭐가...

그 여학생이 지방 소재 전문대 대학생이었으면....대학 당국이 나서서 그렇게 해주었을까? 방송에서 그렇게 단신 뉴스거리라도 취급해 주었을까...미디어들의 속성이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그 많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면서 '지방대 전문대생 ' 이래' '미용학과 라던데' 그랫을까?

그렇다고 믿고 싶겠지만...미안하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다. 시위 중에 다친 사람,봉변을 당한 사람,동영상에 올라온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다들 누구를 기억하는가? 시청앞에 모인 시민이든 ,아프리카를 본 시민인든, 계급 투쟁에 나선 사람이든, 다중의 출연에 신나하는 사람이든...

서울대생만 기억하고 있다.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나는 계속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분파주의든, 종파주의든, 조직주의이든, 탈조직주의이든

운동은 대를 이어서 계속된다. 예찬아!! 

 "내가 지금 이세상을 살고 있는 것을 21세기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야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매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 라.. 라..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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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6-0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기만 하구만요 뭘~~

드팀전 2008-06-04 13:12   좋아요 0 | URL
뭐가 좋아요...
운동권 비판자가 요즘 하도 운동권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운동권 옹호론자처럼 비춰지고 있는 판에..

Mephistopheles 2008-06-04 13:57   좋아요 0 | URL
히히 저같은 양비론자에게 딱이에요..^^

2008-06-04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6-04 13:17   좋아요 0 | URL
전 독립군 아닙니다.전 조직운동에 대해 성찰적 자세를 취하고 조직운동 내에서 소수지만 조직 운동 자체를 폐기하는 접근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깃발을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됩니다. 연대란 깃발들을 모두 없애서 무중심적인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연대란 자유로운 주체들의 소통입니다.거기에는 깃발과 깃발의 연대도 포함됩니다. 깃발 조차 하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역사 속에서 깃발을 내려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 깃발을 세우기 위해 흔렸던 모든 피와 눈물에 대한 시민적 폭력입니다.

2008-06-04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06-04 18:01   좋아요 0 | URL
ㅋㅋ..그랫나요.너무 심각하게 댓글을 단것 같긴하네요.서울대 이야기야 뭐 딱히 더 할말도 없는 공론같은거여서...^^

글샘 2008-06-0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내 운동 방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래해~', '온수를'...
이런 것이 새 시대의 운동이지요.
피범벅이 된 여학생이... 찍으세요. 그래서 널리 알려야죠. 이게 운동이죠.
물대포 뿌렸다면, 다음날은 시위대가 확 줄어야 하는데,
더 늘어났다면, 그게 뽕짝을 부르든, 지루박을 추든 올바른 운동의 방향이고 시민 정신이라고 봐야죠.
좀더 무서운 시대가 온다면 소시민들도 많이 생기겠지만, 시민 의식의 확인이 촛불 집회의 교훈 아닐까 합니다.
점심 먹으면 맨날 롯데 이야그만 하던 동료들이 오늘 드디어 그랬어요.
노무현이보다 진짜 탄핵해야할 놈 아니냐고... 당근!!!

드팀전 2008-06-04 13:25   좋아요 0 | URL
전 딴따라가 되나 가지고...노는 방식의 적응에 빠릅니다.모든 종류의 새로운 놀이에 시선을 집중하지요.^^ 제 개인적인 자유주의적 딴따라 근성과 제 세대적 특성이 혼합되어서 그럴거라고 추측해봅니다.

노무현은 운이 좋았던 것 뿐입니다. 노무현은 비켜 간 것 뿐이지요. 그를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노무현 역시 신자유주의를 어쩔 수 없는,대한민국의 국운을 건,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마늘빵 2008-06-04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대니까 주목받은 것도 없잖아 있다고 봅니다. 군화 짓밟기 말고도 처참한 장면이 여럿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드팀전 2008-06-04 20:44   좋아요 0 | URL
특히 언론이 그랬는데...언론이 그랫다고 다른 분들까지 언론이 만들어 틀을 유지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돼겠지요

글샘 2008-06-05 19:04   좋아요 0 | URL
서울대에서 강력하게 따졌다잖아요.
그런데... 오늘 경찰에서 회견하는 거 보니깐, 역시 눈가리고 아웅, 입디다.
시청 앞 잔디밭 점거한 정치깡패 보니 이승만 각하 옆자리에 엠비를 눕히고 싶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