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제주도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서쪽으로 돌았던 우리들은 여행 마지막 날, 함덕 해수욕장에 다다랐다. 일행은 푸른 잉크빛 바다에 몸과 기억을 염색하려는 듯 바다를 즐겼다. 동네 아이들에게 물장난도 치면서 말이다. 물놀이에 숨이 차질 무렵이었다. 소년 하나가 바윗가 근처에서 손바닥 절반쯤 되는 게를 한마리 잡았다. 집에서 먹던 꽃게에 비하면 흉칙하게 생긴 것이었다. 이것이 식탁에 오르던 게와 같은 종이라는 것이 의심스럽게 생겼다. 우리는 바닷가의 장난감을 톡톡 건드리며 놀았다. 그때 게를 발견했던 제주 소년이 한마디 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면 안됀데요."

우리는 조금은 흉칙하게 털이 난  볼품 없는 게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그래서 도시인의 무감각한 자신감으로 " 야...이걸 먹는 건지 못먹는 건지 니가 어떡게 아냐? " 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 때 제주도의 태양과 바람덕분에 까맣고도 건강한 피부를 갖고 있던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 음...음....몰라요. 근데 조상때 부터 먹었어요"

우리는 제주 소년이 쓴 '조상' 이란 말에 박장대소했다.

그 제주 소년은 마이클 폴란이 말한 '잡식동물의 딜레마' 를 해결하는 인류학적 방법을 이미 알고고 있었던 것이다. 조상이나 주변 어른에게 직접 배운 것은 책이나 도감보다 더 확실하다.버섯을 따 놓고 식용인지 식용을 가장한 가짜 버섯인지 고민하던 폴란도 이 말에에 공감을 표한다.그는 도감과 책을 펴놓고도 우왕좌왕한다.결국 생명과 관련된 먹을 거리의 선택문제에서 '도감'과 '책'은 무용지물이었고 주변의 전문가의 한마디가 더 큰 신뢰를 준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란  음식에 대한 선택의 다양성이 이중의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버섯은 먹어도 되고 어떤 버섯은 먹으면 배가 아픈지 고민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먹을 때 마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면 정말 머리가 아플 것이다.하지만 인간은 '문화'라는 장치를 통해서 매번 식탁 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놓았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했다. 또 다양한 요리법을 통해서 먹기 불편할 것들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동물 살해라는 윤리적 함정을 살짝 망각하게끔 해주는 방식들도 장치들도 제공해 놓았다.그런데 마이클 폴란은 이런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풍요로와진 세기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구석기 인간들의 고민보다 한결 세련되게도 대형마트에서 카트를 끌면서 현대인들은 같은 종류의 고민에 빠진다. '유기농? 무농약? 칠레산? 중국산? 아니 한국산? '

마이클 폴란은 우리 식탁에 오르는 먹을 거리들의 계보학을 추구한다. 이를 '음식 사슬'이라고 한다. 즉 아침 식사에 오른 닭가슴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육,도축,포장,유통되어 오르는지를 거꾸로 찾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답게 '음식사슬의 로드무비'를 찍는다. 좀 더 성찰적인 '체험 삶의 현장'인셈이다. 그는 '산업적' '전원적' '수렵 채취'의 음식사슬의 한 쪽 끝을 직접 체험한다. 산업적 생산물의 경우 오하이오의 대규모 옥수수 공장을 탐방한다. 이 과정에서 신대륙에 옥수수가 퍼지는 과정과 산업농에 맞춰 옥수수가 진화하는 과정, 한 알의 옥수수가 옥수수 바다에 들어가고 이것이 어떤 어떤 곳에 씌여지는 지를 재미발랄하게 묘사한다. 정말 재기발랄하다. 환워론적인 오류가 있겠으니 미디어적으로는 충분히 재미 있는 '옥수수인간' 같은 개념은 우리가 대규모 단일재배되는 옥수수에게 얼마나 의존적인지 보여준다.

또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소와 관련해서 윤리적으로 위생학적으로 가장 건강한 육식의 공급방식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그것은 가축 내장을 먹이거나 옥수수를 먹여서 공장에서 소고기로 키운 소가 아니다. 권정생 선생의 말로 하자면 '가장 소답게 키운 소'를 먹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말한다. 즉 소답게 풀을 먹고소답게 풀 위에 똥을 싸면서 큰 소 말이다. 마이클 폴란도 사육과 도축이란 딜레마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위해 희생되지만 가장 그 종의 본성과  어울리게 키워진 방식을 권장한다. 즉 소는 소 답게 닭은 닭 답게 키우고 그렇게 키운 것들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고기로 키운 소나  닭고기로 키운 닭. 계란을 낳게하기 위한 제품처럼 키워진 닭과 그 생산품은 닭에게도 인간에게도 비윤리적이다. (불행히도 한 동네에 대 여섯군데씩있는 닭집은 모두 양계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불운한 닭들이다.)

마이클 폴란은 폴리페이스 유기농 농장에서 흥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의 가장 부가가치 높은 산업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산업적 유기농'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과연 산업적 유기농이 유기농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산업적 유기농'이 유기농이 의미가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유기농의 지속가능한 순환론적 세계관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그는 유기농 운동의 세가지 철학적 조건을 말한다.즉 대안적 생산방식,대안적인 유통시스템,그리고 대안적인 소비방식이다.그는 이 세가지가 유기농 운동이라는 혁명적 프로그램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라고 말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단지 '생산방식' 만을 유기농화한 기업형 유기농 공장은 결코 유기농운동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할 수 없다.

흔히들 유기농 운동같은 것을 하는 단체에서는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의 세계관이다' 라는 말을 한다. 내가 처음으로 한살림 강의를 들었을 때도 담당자는 그 이야기로 첫문을 열었다. 마이클 폴란도 말하지만 유기농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 함의가 들어있다. 단지 '웰빙'을 위해 유기농을 먹는 것은 이기적인 선택일 뿐이고 비정치적이다. 유기농 운동은 생태주의 운동의 먹을거리 판본이다. 또한 대규모 생산을 꿈도 꾸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소농과 지역중심의 운동이다.격주로 들어오는 한살림 소식지에는 땅과 소농 그리고 지역을 살리기 위한 한살림 운동의 취지가 적혀있다.나는 먹는 행위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  경남 밀양에서난 고추와 경남 함안에서난 쌀과 경남 남해의 마늘을 먹었다. 나는 거리에서 시위를 하듯 정치를 먹어 삼킨 것이다.(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누가 그 맛있고 싱싱하고 비싼 음식을 먹으며 매번 정치를 염두에 두겠는가.)  내가 먹은 음식들은 모두 비싸고 모두 경남 지역에서 났다. 그리고 농작물을 키운 농부에게서 조합을 거쳐 바로 내 식탁으로 왔다. 나는 마이클 폴란의 글을 읽다가 장일순 선생을 비롯해서 한산림 운동을 시작했던 분들의 혜안을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이 책에서 가장 껄끄러운 부분은 결국 잡식성 동물이 피해갈 수 없는 '사육동물의 도축'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담장 너머의 누군가에게 맡기기때문에 뚝뚝 떨어지는 소들의 핏방울이나 향기롭지 못한 내장, 그리고 죽음을 앞둔 동물의 눈망울을 볼 필요가 없다. 거기에 우리는 적당하게 이런 과정을 잊게 만들 풍부한 요리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마이클 폴란은 직접 닭의 목을 따는 용기를 선보인다. 무척이나 주저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채식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육식을 하고 가축을 기른 것은 진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의 윤리적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층위의 윤리가 작용한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동물섭취를 청교도적 윤리로 제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연의 모든 동물은 먹고 먹히는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연은 종 자체를 유지하면서 순환하게끔 한다. 그런데 극단적 채식주의 휴머니즘은 동물 종이 아니라 동물 개체 하나 하나에 윤리를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감정적인 차원에서는 옳고 박수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의 법칙에는 어긋난다. 실제로 야생의 동물들 중에서 편안하게 자기 수명 다 누리고 자식들 보는 앞에서 임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개는 어린 동물일 때 또는 늙거나 병들어서 또는 재수가 없어서 더 큰 육식동물들에게 희생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에게 잡혀먹히는 어린 영양이 불쌍하다고 모든 사자와 고양이과 포유류를 우리에 가두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중간 과정의 코미디는 알아서 상상해보고 ....결국 생태계의 흐름은 무너지고 만다.마이클 폴란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 동물애호가인 피터 싱어에게 메일을 보내 답을 구한다. 피터 싱어 역시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물섭취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낸다.

폴란의 여정은 수렵 채취 과정까지 간다. 멧돼지 잡기와 곰보 버섯따기가 그것이다. 이 장은 실제로 조금은 실험적인 것이다. 멧돼지를 잡고 버섯을 직접 따러 간다. 여기서는 그 의미보다 책 전체에 걸쳐 있는 폴란의 위트있는 문장력을 칭찬하고 싶다. 앞서서도 그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비유와 구체적인 상황 묘사로 글의 흡입력을 높였다. 난생 처음 총을 쏘아 보는 폴란이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은 오히려 다큐멘터리화면이 묘사하지 못하는 글의 생생함이 담겨있다. 첫 사격을 양보하고 느낀 후회부터 돼지를 잡고나서의 흥분,그리고 죽은 돼지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을 본 뒤 생긴 후회감.돼지를 분해하는 작업에서의 역겨움..그리고 동료에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잔머리..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잘만든 다큐멘터리보다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폴란이 가진 흥미있고 감각적인 문장력때문이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지속시킬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정말 훔쳐오고 싶다.

결론에서 폴란은 이 모든 음식사슬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고 직접 식탁을 차린다. 동료들을 불러모아서 '이야기'가 있는 저녁 식사의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음식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겠다고 했을 때 " 까다롭고 때론 역겨운' 과정을 지켜본 후 무슨 즐거움은 즐거움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로드무비를 다 보고 나서 그가 만든 식탁을 보면서 나 역시 그 즐거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무지의 식탁을 성찰하고 앎의 즐거움으로 식탁을 채우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들 예찬이와 그를 힘들게 했던-아직도 숨어있을지 모를-아토피에게 감사했다. 나와 아내는 그전부터 한살림이나 유기농 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아는 것이었다. 아이가 아토피가 생기고 나면서 우리 부부는 음식에 훨씬 많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주저하는 나를 '자연요법과 유기농'으로 설득한 것은 아내의 공이다. 당시 나는 주저주저하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확신범이었다. 그것 때문에 몇 번 충돌도 있었다. 하지만 나 역시 아내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한살림에 가입했다. 부산의 한살림은 또한 자랑스럽다. 다른 곳은 그저 인터넷으로 가입하고 돈만 내면된다. 그러나 부산 한살림은 사람 귀찮게 한다. 꼭 사무실에 방문해서 1시간 이상 강의를 들어야 한다.강의라는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한살림의 취지-이기적 웰빙만은 아닌-를 듣고 이해시킨다. 우리집은 주로 한살림에서 기본적인 부식거리를 산다. 당연히 마트는 한 달에 한번이나 갈까 말까이다.또 가끔은 예찬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위해 동네 산업유기농 판매하는 유기농점포에서 돌에서 만든 유기농 바나나를 사먹인다. 바나나는 한살림에서 나오지 않는다.그렇다보니 유기농과 산업유기농의 차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예찬이의 아토피는 거의 나은 듯 보인다.하지만 아토피는 낫는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도 먹는 것은 관리한다. 아이는 과자도 아직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고 오렌지 주스나 사탕,아이스크림같은 것은 말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아이는 다른 또래 보다 주먹 하나가 더 크다.그리고 어찌나 밥을 씩씩하게 잘먹는지 어디 가든 칭찬받는다. 아이는 한번도 항생제를 맞지도 바르지도 않았다. 예방주사 역시 마찬가지다.(언젠가는 맞힐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에 대한 정보는 예방주사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모임같은데 가보면 안다. 돌이켜 보면 아토피가 우리 부부에게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한 번 더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준 셈이다. 나와 아내는 가끔 닭을 시켜먹기도 하고 피자도 먹는다. 내가 조금 더 나쁜 음식을 자주 먹는다. 바쁠 때는 햄버거로 때우기도 하고 조미료 마구 들어간 김치찌개도 잘 먹는다. 예찬이도 앞으로 커가면서 그럴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애써 피할 필요는 없다. 대신 알고 나면 조금 더 줄이게 되고 가급적 멀리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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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6-08 15:49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리뷰만 보면 항상 사고싶어 근질근질해져요...ㅎㅎ

드팀전 2008-06-09 10:57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그러면서도 깊이 있는 성찰이 들어있습니다.특히 폴란의 웃음담긴 문체는 즐겁게 하지요.

zzanga62 2008-07-16 03:28   좋아요 0 | URL
사실 저자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채식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옹호하지는 않으며,

피터 싱어를 통해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물섭취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의 답변을 받아냈다는 리뷰를 보고 의견을 올린다.

극단적 채식주의자란 '당신 꼭 채식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말할까요?
그러나 대개의 채식인들은 채식의 좋은 점을 홍보하고 동참하기를 권하거나,
육식을 줄일 것을 권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왜냐면 현실적으로 당장 모든 축산을 금하고 모든 육식을 중단하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먹이사슬을 인정하고 자연에서도 불쌍하고 고통스런 죽음들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나 피터싱어가 채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이해해보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산업축산은 너무나 반자연적이고 반생명적이며,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상상하기 힘든 고문을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 환경파괴외 인류기아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일지라도 평생 가둬키우다 잡아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축산이 점차 대형화되며 값싸게 많이 생산하기위해
동물을 생명취급하지 않고 작업속도도 엄청나게 높입니다.
도살장의 경우만 해도 그 업체의 직원들조차 엄청난 신체적,정신적 위험 속에 일하고,
너무 빠른 작업속도로 동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자연스레 동물을 일부러 학대하기까지에 이를 정도이니,
동물학대가 얼마나 많이 다양하고 끔찍하게 일어나는지는 차마 입에 다 담기 어려운 지경이며, 결국 그 생산물을 먹고 인간은 광우병, O-157, 조류독감과 같은 끔찍한 질병에 감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살장> 읽어보세요)

신자유주의 추세 속에 축산업체는 점차 합병되어 대형화되는데,
그럴수록 선진적이고 수준 높은 생산과정과 결과물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국 정부와 나아가 전세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힘이 세져서
어떤 윤리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이윤 높이고 작업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될 뿐입니다.
은막 뒤에서 이뤄지는 동물과 인간에 대한 끔찍하고 잔혹한 학대와 비리들은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다양해지며 그들을 건드리기는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그들의 감독자이며 축산과 동물보호법을 관장하는 농림부는 국민건강이나 동물복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축산업체 경영자들의 이윤창출만을 비호해줄 뿐입니다.

축산업체에 대한 규제 완화와 합병의 허용은 레이건, 부시 등 시장주의자,
극우적 대통령 집권기에 더욱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초국적 자본들은 육류 외에 모든 음식에 걸쳐 전세계에 죽음의 밥상을 강요합니다.

그래서 유기농 식물과 로컬푸드를 지향합니다.

자연친화적 축산이 보편화되려면 지금처럼 고기를 싸게 많이 먹으려 해서는 안되고,
가끔씩 제값 주고 먹어야 합니다.
암튼 이런 현실들을 알면서 되도록 고기 소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내가 한 마리라도 극단적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기, 우유, 다단식 닭장에서 생산된 달걀 등을 먹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꼭 채식해야 합니다라고 말 하지는 않지만,

육식을 줄여가지 바라며 채식은 현재 최선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도 신자유주의에 깊이 쩔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축산에 있어서도 미국과 같이 대형화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한미FTA는 우리가 꼼짝없이 노예화되게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