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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교향곡 25, 38 '프라하' & 39번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작곡, 네빌 마리너 (Neville / PHILIPS / 2008년 3월
12,500원 → 10,300원(18%할인) / 마일리지 110원(1% 적립)
2008년 07월 10일에 저장
절판
이 교향곡(25번)은 영화 <아마데우스>의 도입부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한 번 들으면 이내 흥얼거리게 되는 멜로디...그 영화 사운드 트랙은 네빌마리너의 연주였다.
모차르트 : 교향곡 40 & 41번 '주피터'
DG / 2005년 2월
21,400원 → 17,800원(17%할인) / 마일리지 170원(1% 적립)
2008년 07월 10일에 저장
품절
내가 최초로 산 클래식 LP음반이 이 곡이었다. 자킷은 다르다. 라이센스 음반의 자킷은 빈의 무슨 궁전같은 것이었다. 원전 연주에 밀리는 모짜르트지만 뵘의 연주 역시 오래 남지 않을까.
[수입] 베토벤 : 교향곡 4, 6번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발터 (Bruno Walter) 지 / SONY CLASSICAL / 2003년 4월
14,700원 → 12,300원(16%할인) / 마일리지 130원(1% 적립)
2008년 07월 09일에 저장
절판
여러 종의 베토벤 '전원' 중에서 가장 자주 손이 간다. 발터의 겸손하고 소박한 성품답게 소담한 음반이다. 스트레오 초기 녹음의 아날로그적 정서가 훨씬 더 깊은 아우라를 갖는다
[수입] 베토벤 : 교향곡 5번 & 7번- DG Originals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작곡, Carlos Kleiber 지휘, / DG / 1997년 11월
22,900원 → 18,600원(19%할인) / 마일리지 19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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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10일에 저장

뭐라고 해야 할까...클래식 팬들은 나중에 좋아하든 싫어하든 모두 이 음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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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인간 2008-07-10 08:03   좋아요 0 | URL
샤이 말러 5번을 들어 보고 싶네요.
그나저나 모차르트가 없군요. (초보자용 리스트인데도 불구하고...) ^^

전자인간 2008-07-10 18:42   좋아요 0 | URL
리스트가 업데이트되었네요.
감사합니다.

바밤바 2008-07-14 14:12   좋아요 0 | URL
초보가 듣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말러와 브루크너라.. 저도 초창기엔 지루했거든요. 오히려 클래식에 대한 편견만 심화시킬 것 같은데 ^^:;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강요하지 말라."

                                                                                                  - 미셀 푸코-

<내가 누구인지 말할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소설이 있었다. 내용도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리틀 이문열'이 될 뻔한 이인화가 작가였다는 것은 기억난다.

주체 문제에 있어서 나는 '탈자아론'적 입장에 있다. 김중혁이 그의 소설 뒷머리에 자기를 구성하는 문화 상품과 지식 상품들을 나열하고 그것이 모인 것이 '나'이다. 라고 했을 때 기계론적 합성이 웃기기는 했지만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맥락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분열된 자아에 그다지 큰 불만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통일된 자아' 라는 상을 만들려고 너무 애를 쓰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철학계에서 심난하게 만들었던 '상대주의'를 '총체성의 철학'으로 돌파하려는 지젝이나 바디우같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이 간다.

어떤 분이 내게 '맑스-레닌주의' 나 '트로츠키주의' 아닌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되었다. 생각해보니 또 그런 요소가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노동자' 문제와 '계급'문제를 이야기하고 구좌파의 책을 최근 주로 손을 대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요즘 흐르는 물의 흐름 중 일부분이다. 봄의 물 맛이 다르고 가을 물맛이 다르다.

나는 '촛불집회' 초기 부터 '생태주의적 가치'로 집회에 참가했다. 즉 소고기의 식품안정성을 넘어 '공장제 사육제도'와 그의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적 소비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이야기했다. 물론 집회에서 구호는 똑같을 수 밖에 없다.

삶의 방식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변화는 요원하다.즉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전면적 회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에 의탁해 있다면 아무리 안전성 검사를 높이더라도 쇠고기의 문제는-또는 그와 유사한 방식의 문제는-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인간의 검역시스템이란 것은 그만큼 불충분하다. 언젠가 읽었던 글 중에서 '핵'의 안정성에 대한 글이 이에 대한 비유가 될 듯 하다. '핵은 기본적으로 무오류성에 바탕을 두고 추진된다' 는 대목이었다. 핵 시설을 설치할 때 한수원이주민들에게 절대 안전하다고 이야기하지 10000만분의 1이라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가 하는 일에 절대 안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기본적 한계를 망각한 '핵의 무오류주의'적 발상은 엄청난 모순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생태주의'를 주장하지만 '생태근본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것이 정치적 담론과 직접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저 도덕주의 운동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생태운동'을 위해 시골로 들어가는 분들의 개인적 선택을 존중한다. 그들이 하나의 거점이 되고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분들의 글이나 기사를 보면서 힘도 얻고 반성도 한다. 그렇지만 다수가 공생을 위한 대안적 방식을 찾기 위해서는 거대한 정치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서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생태주의적 실천을 함과 동시에 나는 또한 현실정치의 사회인으로서 그에 적합한 의무를 다해야한다. 나는 이것에 약간 의무감을 갖는다. 이유는 내가 잘먹고 잘살고 대학나와서 지금하는 일을 할 수 있는데는 나의 재능도 있었짐나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답답한 마음에 "아....C8 왜들 이렇게 뭘 모르고,무식하지..진짜 힘빠지네." 라고 했을 때 아내는 "자기가 얻었던 기회를 모든 사람들이 다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라고 말했다. 열받았던 마음을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나는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런 열받음은 순간 순간드는데 그 때 마다 나는 아내의 저 말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나는 생태주의와 좌파가 '자본주의'라는 공동의 대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하나가 삶의 태도와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또다른 하나는 역사와 제도의 측면에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 <자연과 타협하기>가 그런 고민에서 나온 책으로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범좌파'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어떤 사상이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 어떤 사상이든 자기 수용적 태도를 갖는다. 그것이 정규교육으로 학습받지 않은 수많은 메노키오들의 방식이다. 나는 그것을 아쉽게는 생각하지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이 있다면 그는 내게 다른 영역에서 그에 상응할 만한 것을 주었을테고 그런 역할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 받은 질문은 나에게 '범좌파'에서 '최종심급'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게 만들었다. 사실 '최종심급'이란 것 자체가 있을 만큼 대단한 내공을 쌓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찾을 만한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 '최종심급'이란 단어를 안다는 이유때문에 그 단어가 나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알튀세르는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 차원'에서 '최종심급'을 이야기했다. 그는 '중층결정'의 과정 속에서도 그 '최종심급'으로 -앞의 전제를 단 채-'경제'를 말했다고 알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동물이다' 라는 것이다. 그게 알튀세르가 수용한 '최종심급'이다. 인간이 동물인지 모두 알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경제'도 아마 그에게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것처럼 말이다. 

윤건차의 <현대 한국사상의 흐름>을 다분히 도식적이긴 하지만 20세기 말의 한국 지식인의 지형도를 그린다. 스펙트럼은 구좌파 부터 시민사회론자들의 역사를 아우른다. 물론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보수적 민족주의자나 수구 보수주의자들을 이야기하지만 큰 장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2000년대 주목받은  자율주의같은 흐름은 빠져있다. 윤수종이나 조정환같은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다. 이 책의 증보판이 나온다면 '수유'같은 곳에서 활약하는 소장학자들의 이름도 거기에 등재될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학자들 역시 한가지 흐름을 갖고 있지는 않다. 물론 초지일관인 사람들도 있으나 대게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해서 이념적 차이, 사회를 분석하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나무 가지처럼 나뉘어진다. 한때는 같은 흐름이었다가 또 사상적으로,인간적으로도 갈라선 유명한 사람들도 있다.

나같은 아마추어 '범좌파'가  그다지 필요치도 않는 '최종심급'으로 윤건차의 도식을 살펴보면 나는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자  (여기에는 강내희 등의 문화연구그룸이 있다,그리고 이진경의 코뮌주의도 있다. 이 스펙트럼도 무지하게 넓다.) 좌파적 시민사회론자 (김동춘,조희연,임영일 등) 이 있는데 대략 저 둘 사이 어디가 아닐까 싶다.

특히 윤건차는 김동춘,조희연에 대해 재미있는 설명을 했는데...기억에 의존해서 쓰면 대략 이런 것이다.

김동춘과 조희연의 경우는 좌파 시민사회론자로 구분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전통을 토대로 삼는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한 '노동자'와 '계급'의 토대가 없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 촛점을 맞춘 연구 작업들도 이루어왔다. 그러면서 이들은 구좌파가 비판하는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특히 임영일(나는 임영일의 책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은 그람시적인 시민사회론자이면서 노동계급이 시민계급으로 전화해 나가는 데에 대해 노동계급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작업을 한다. 특히 그가 있는 -창원인 듯 하다- 곳이 한국에서 산업의 중심적이 곳이어서 그는 실제 연구와 현장 활동에서 활약을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범좌파'라는 스스로의 자기 규정을 마음에 들어한다. 어떨 때는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구좌파식의 '개량주의'지적이 옳아보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노동자'들이 체제포섭되어 아무런 실제적 동력이 될 수 없다고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이론이든 현실을 압도할 수 없고,또한 회색적이며,모든 이론은 중첩되어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내 편견에 때문이다. 그리고 또하나가 있다.'모든 이론은 현실과 별 상관없다.' 라는 '반이론적 정서'에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는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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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것 보다 이해하기 쉽다. 





이 친구는 예전에 부산에 있던 친구인데...

서울가서 무지하게 예뻐졌다.

덧니도 뺀 것 같구..

조명이나 세트,분장,의상 등이

아무래도 부산보다 10배쯤 나으니까 인물이 산다.

오며 가며 한 번 본 적 있었는데 키가 상당히 크고 얼굴이 작았다고 기억난다.

웃을 때 보조개도 나쁘지 않았구...

시위에 매일 이렇게 예쁜 여자들이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정말 좋겠네

(페니미즘 그룹에게 혼나는 건 아닌지..그래도 난 예쁜여자가 좋더라.)

 

 

촛불 집회가 여의도가 갔다고 한다.

문득 알라딘에 인용되는 신문이나 글 들 중에 <미디어 오늘>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 오늘>은 학교 다닐때 정기구독을 하기도 했었고, 요즘은 회사 자료실 가면 그냥 주워서 화장실에 두고 올 수 도 있다. 실제 정기구독은 좀 그렇다면 인터넷 신문 같은 것도 많이 좀 봤으면 좋겠다.

대학 들어가서 교수님이 <한국 언론사>시간인가 뭐 그런 시간에 처음으로 한 말이 그거였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 말은 50%만 믿어라." ....압축적으로 한 말이긴 하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면 된다. 아이들과 대중들에 대한 미디어 교육은 상당히 중요하다. 비판적 시각에 대한 훈련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자기가 보는 것이 자기가 믿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미디어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을 위한 미디어 교육 교부재다. 좋은 칼럼들도 많다. 내 기억에 강유원도 여기다가 글을 쓰고 있던데....클릭하면 바로 간다...

http://www.mediatoday.co.kr/

또 하나는 직종 홈페이지이긴 하지만 최근 사태와 관련해서 관심을 갖고 볼 만한 사이트다.

'한국PD연합회'에서 만드는 <PD저널>이다.

http://www.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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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팍 2008-07-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론의 자유는 정말이지 언제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요?
정말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주말이 더 힘들다.

토요일 오전에는 아이와 함께 '아파트 놀이터 투어 프로젝트 3탄'을 시행했다. 와이프 맛사지 보내주고 예찬이와 3-4시간 놀아야 되는데 '놀이터'만큼 좋은 곳이 없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마다 놀이터 모양이 조금 다르다. 그래서 아이는 새로운 놀이터에 가면 정말 정신없이 신나게 논다. 그래서 시작된게 '놀이터 투어 프로젝트'. 이번 주에는 강 건너 있는 주공아파트 놀이터에 갔다. 우리동네 놀이터에 비해 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어서 예찬이 한테 딱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크고 작은 6군데의 놀이터를 다 돌아 다녔다.

토요일 오후에는 '예찬이의 촛불집회 3번째' 참가가 있었다. 나는 평일에도 틈틈히 나갔지만 와이프와 예찬이는 주말 집회만 참가한다. 물론 내가 혼자 가든 가족과 함께 가든 아주 늦은 시간까지 있을 수는 없다. 집회 가서 유모차 대기 좋은 곳을 찾다보니 전교조와 공공노조 언저리에 앉았다. 예찬이가 징징 거려서 안고 다니다가 몇 몇 아는 분들을 만났다. 지역 시민단체에 계신 분들과 눈인사를 했고..또 모유수유와 자연분만 모임의 시샵분도 만났다. 최근에 몇 달 전에 아이를 낳았는데 큰 애는 엄마가, 간난 아이는 아빠가 안고 왔다.

예찬이와 집회를 갈때 내 가방은 소풍가방이 된다. 각종 먹을 거리를 다 담아간다. 예찬이는 집회 중에 유모차에 앉아서 저녁 만찬을 했다. 전교조 쪽 분지 함께 나온 가족들인지 한 분이 떡을 주어서 또 예찬이의 저녁상이 풍족해졌다.

행진의 방향이 범내골 쪽이어서 함께 걷다가 중간에 빠져나왔다. 차를 그 쪽 어느 골목에 대놓아서 좀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회의 참가자는 아무리 '좋은 의지'로 무장해서 뻥을 쳐도 지난 6월 10일의 3분의 2수준이었다. 앞으로도 촛불은 계속 모일 것 같고...당장 쇠고기가 끝나도 5년 내내 이럴 것 같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100만이 아니라 200만도 모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모이면 뭐할 것인가?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걷고...해산하고...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다. 문화정치적으로 분명히 의미있는 일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은 빠뀌어가고 함께 하는 의미를 깨우칠 것이다. 그런데...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말'이던가.

가끔 '직접 참여'가.. '말'의 영역인지 '행동'의 영역 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대부분 열성적인 진보적 다수는 '참여'가 거리에 나아가는 시간을 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액션을 하기 때문에 '행동'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또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이것은 혹시 '말'의 영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좀 유식하게 말하자면 '정치,사회적' 인것이 아니라 '문화적' 인 것 아닌가 하는 말이다. 물론 애초부터 '촛불은 문화정치다' 라고 생각했다면 별로 이상할게 없이 그 수순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시민들의 참여와 거대한 물결이 '정치,사회의 제도적' 변화를 이루어 내야만 '승리'를 선언할 수 있다고 -다수의 진보인사들과 생각이 다른- 무모한 생각을 했다. 우습게도 말이다.

지젝이 왜 촘스키나 하워드 진의 활동들을 긍정하면서도 그들을 비판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알라딘에서는 촘스키와 진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마 '반진보적' 인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좀 알아야 할 듯 하다. 지젝이 말하는 '유사 능동성' 만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다수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절대적 진리를 상정하지는 않고 싶다. 대신 내가 하는 것들이 '유사 능동성' 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게 그렇게 해가 될까?  

100만,200만 또 모일 수 도 있다. 그런데 질문은 100년에 가까와가는 질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일요일은 더 힘들었다.

아침 일찍 부터 금정산 산성 마을에 있는 '빅뱅 어린이 체험도서관'에 갔다 왔다. 뭐 그렇게 대단한 곳은 아니었지만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 모든 놀이 기구를 예찬이가 독점해서 가지고 노니 아이 보는 입장에서는 편안했다. 산성 마을에서 비빔밥을 먹고....예찬이의 의젓한 숟가락질은 또 주변 어른들에게 또 한번 칭찬의 대상이었다. 아이와 함께 풀밭에 누워서 잤다. 가져간 큰 수건을 이불 삼아 덮어주고 나는 하늘을 배경삼아 누워서 책을 좀 봤다.

아이가 깨어 나서는 사직동에 갔다. 이미 야구가 시작되어서 시끌시끌했다. 아내는 자전거를 빌리고 나는 전기자동차를 빌려서 아이를 앞에 앉히고 탔다. 바람을 맞아 일렁이는 아이의 머리결이 보기 좋았다. 예찬이는 신나서 '와..신난다.' '와...좋아..이쪽 ..이쪽 ' 을 연신 외쳤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고 아내도 즐거워 했다.

하루 종일 정말 빡빡하게 놀고 집에 와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수고한 나를 위해 내가 준비한 '삿포로'생맥주 한 캔을 마셨다. ㄱ

..그리고...예찬이보다 먼저 자버렸다.

"예찬아...엄마랑 책읽어. 아빠는 오늘 안방에서 먼저 잘래'

쿨쿨...zzz

새벽에 수영가기 전까지-수영 배우기 시작한지 4개월째다-단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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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8-07-08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블로그엔 처음으로 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드팀전님은 맑스주의 진영내에서 자신의 성향이 다중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래도 맑스-레닌주의 혹은 트로츠키주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친구분이신 바람구두님 블로그에 남긴 아래의 글은 아무래도 <자율주의>에 오해가 조금 있으신 것 같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자율주의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전 가두시만 열 다섯 번 이상 참가했습니다.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조 못하고요. 아무래도 아래의 <다중론자>는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어떤 자율주의자가 되었더라도 드팀전님께 그런 힐난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교수가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론자 입니다. 그렇지만 전 이번 촛불 문화제를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에 묶어두는 주장들을 혐오합니다. 단적으로 전 촛불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도 혐오합니다. 이런 맥락들을 좀 알아주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님께서 비판하시는 노동운동 혐오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실제 집회에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님께서 비판하시는 사람이 자율주의자들이나 저는 아니겠지요? 물론 알라딘에서 전 피토하면서 이명박을 욕했지만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바라보시는 분들에 대해서 그런 힐난을 한 적이 없고요. 물론 맑스주의자들 중 이번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율주의나 대중 혹은 다중의 자발적 역량은 이번 사건을 이만큼이나 끌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조직화 혹은 관리하는 방식,대표하는 방식들로 나아갔을 때 발생하는 한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맑스주의자들 이론적 입장에서 누가 옳다, 그르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걸 주장하는 맑스주의자들 중에서 단지 사태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의 실천적 주체로 참여하려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전 이 부분에 대해선 해석자가 아니라 실천적 주체로 참여하려 했던 사람 중 한 명 입니다. 물론 전 자유주의자도 아니고, 시민사회론자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드팀전님과 제 사이엔 맑스주의의 이론적 스펙트럼(전 그런면에서 볼 때 지젝의 입장이나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장에 어느정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느정도 입니다)의 차이뿐만 아니라, 세대차이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촛불이 다 끝나기 전에 이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다만 아래 글의 표현은 지나친 오해가 있는 듯 싶어 몇자 적어봤습니다. 그 오해의 당사자가 제가 아니었음 하는 바람이고요. 혹시 촛불 문화제나 가두시위에 나가게 되시면 경찰의 폭력에 몸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계속되는 가두시위 참여에 "나도 죽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저도 "과격한 폭력 시위꾼이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문제는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이외에 다른 대안으로 운동하는 것들에 대해 비판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참가자들 내부에서 등장했던 말들이 '좌빨'이니 '프락치'니 하는 것이겠지. 나는 '다함께'에 개입되어있지도 무슨 편향이 있지도 않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노동운동'과 '진보적 문제'에 그들의 사상을 가지고 행동해왔어. 그런데 그들이 거리에서 왜 '순수한 시민'들이나 '다중론자'들에게 '좌빨'로 몰려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더라. "물론 실제로 '프락치'가 있었겠지만 그런 단어들이 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운동방식과 한계 이외에는 도통 관심없는 '무연대성'의 대표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해.

내 경험으로 보자면, 집회에 민주노총 대오가 합류햇을때 박수를 보내면서도 '제 들은 또 뭐야'라는 식의 반응, 노동계는 순수한 시민들의 대오에 숟가락 하나 얹어 이득을 챙기려하는 구나하는 반응을 많이 봤어. 그리고 알라딘에 피토하며 이명박을 씹는 분들 내에서도 말이지.

드팀전 2008-07-1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과나무님께 비밀댓글로 답을 올렸던 글인데...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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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댓글 잘받았습니다.

제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물론 대학 들어가서 저를 감짝놀라게 했던 '맑스'를 근본적 토대에 두고 있긴 합니다만 말입니다.요즘 맑스아닌게 어디있나 싶지요^^ 희안하게도 제가 대학 들어가서 학부에서 배운 맑스는 트로츠키나 레닌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앞과 뒤였습니다.그람시도 전 프랑크프루트의 일환으로 배웠던 것이지요.또 제겐 상당히 문화정치적 요소가 강합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했다면-한때 유학갈 생각에 외국대학 사이트도 알아본적 있지만-전 예술사회학이나 문화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모두 좌절..ㅜㅜ

문제는 제 스스로 그런 문화주의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고민했다는 겁니다. 만약 제가 트로츠키주의자나 맑스-레닌주의자로 비췄다면 그 스펙트럼안에서 상호 보완적인 요소들 또는 각각이 갖고 있는 한계들에 대한 문제의식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제가 학교다니며 가장 답답스럽게 생각한 '유아적 운동권' 선배들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너 팝송들어..야 미제국주의의 음악인데'..제가 이런 논의에 질색했다는 것을 말씀드리지요.

전 개인적으로 인간 트로츠키의 험난한 개인사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저는 그들의 완고한 경제주의와 노동자 중심성에 대해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맑스의 원전을 이야기하며서 그건 왜곡이라고 말하겠지만 말이지요. 부연하면 전 노동자 중심성에 대해 인정하지 않습니다.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트로츠키주의에서는 이 지점이 결절점 아닐까요..

그런데 왜 제가 노조 문제를 이야기하고 노동운동가처럼 비춰지느냐? 그건 첫번째, 노동자들이 고립되어 노동자/시민이 다른 존재라고 여기지는 것이 하나가 있겠지요. 노동자하면 붉은띠 두르고 검게 탄 피부를 자랑하는 마초들이고 시민들은 그렇지 않은 존재.그런데 전 사무직 노동자로서 그렇게 피부가 타지도 않았고 마초도 아닙니다. 전 노동자/시민이 왔다갔다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명태의 이름이 여럿이듯 말이지요.제가 회사에 나오면 전 노동자지만 주말에 놀이동산에 가면 전 시민이 됩니다. 이것을 노동자 대 시민 구조로 나누어 이해하는 방식-학계에서도 이런 방식이 일상적입니다-은 제 개인적 가치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두번째는 알라딘에서 만날 수 있는 가정주부나 독립사업자들과 달리 저는 저희 작업장은 산별노조에 속해있습니다. 무화과나무님은 아무런 소속이 없는 지식 노동자이기에 훨씬 더 알라딘의 대부분의 입장과 같을 수 있습니다. 전 알라딘에서 신문광고하는데 돈을 내지 않는데 제가 보기에 그 액수는 자신의 이름을 얹고 자기의 의지를 알리는 것 외에 별다른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아프락사스나 승주나무님의 활동에 박수를 보냈는데..그것은 단순히 소속없는 알라디너들에게 비빌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지요.그렇지만 전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비빌 수 있는 언덕이 여러개가 있어왔습니다. 노조도 그 중 하나겠지요.그외에 다른 시민단체들 역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집회에 나가면 전 혼자갈 수도 있고 시민연합과 함께 갈 수도 있고,민주노총 깃발 아래일 수도 있고, 생태주의자들이 많은 한살림 깃발 아래일 수도 있습니다. 또 진보신당의 깃발 아래일 수도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제가 이 모든 조직들에 조직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회비를 내고 있기때문입니다.

제가 '다중'을 비판한 것은 -전 '제국'과 그 논쟁을 조금 읽어본 처지지만- '다중'의 구성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유럽처럼 비물질노동자가 얼마나 될까도 궁금하지만-그거야 일종의 경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비물질노동/물질노동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노동자'라는 개념의 약화문제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중'의 성격이 아니라 그 성격이 가지고 있는 예측되는 결과의 한계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문화적으로 추수'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을 과연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회운동은 결코 독자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립적이지만 서로 연대하는 정치세력이 필요하지요. 또한 사회운동의 동력을 끌어가기 위해서 조직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며 사회운동은 안팎에서 와해와 붕괴공작을 받기때문입니다.그리고 사회운동은 태동,성장,와해의 과정을 거치고 그 끝에서 그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조직이나 정당의 형태로 제도화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양날의 칼입니다. 조직을 이끌고 동원을 하고 제도를 바꿀수 있지만 또 그 조직으로 인해 운동이 붕괴되고 반동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날의 칼중 어느 하나만 집어서 '무중심'과 '탈조직'을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도 또한 현재적이지도 못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현실정치적 요소들을 탈각시키면 '이상적인 운동 과정'이 눈 앞에 목도된다는 즐거움은 큽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예견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만큼 큰 쾌감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 모든 것이 현실의 구차한 정치 영역속에서 어떻게 해소되고 어떻게 치고 나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되는 것이 제 위치입니다.

무화과나무님을 지적해서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님 역시 '다중'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알고 계실텐데요. 전 그것을 대입시켜보는 것이고 무화과나무님은 그냥 사소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물론 세대적 차이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 둘의 사회환경이 좌우하는 의식의 흐름부분도 있을겝니다. 무화과나무님은 이론을 생산하는 영역에 계시고 전 이론과 대중사이의 궤를 매꾸는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님이 상아탑에만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현장에 나가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상아탑이 그만큼 고립되어 있다는 저간의 시각에 반증이지요.또한 무화과나무님은 그에 대한 공명이었을테구요...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는 개인적 차원과 함께.

네그리의 '제국'을 저는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답답하던 때에 맥을 뚫어주는 시원함이 있었지요. 그리고 무화과나무님이 이미 올리셨던 '다중'도 제 책장에 있습니다. 곧 보겠지요.
그런데 전 어떤 사상에도 조금씩은 비판적이고 자가수용적입니다.
그게 저같은 메노키오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절 규정하면 '범좌파' 라는 말과 '통합파'라는 말 밖에 마땅한게 없습니다.
결국 전 진보신당으로 갔지만 분열단계에서는 그래도 분열시키니 말자는 '통합파'였다는..심상정을 좋아하지만 그 때 심상정의 판단은 여전히 회의적이라는...

전 혁명의 유토피아를 믿지 않지만 이 말들은 기억합니다.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아니다.혁명을 하고도 여전히 민중이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학자이신 무화과나무님이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잠수탓는데..글을 더 많이쓰는 이런 모순된..아 그리고 전 왠만해선 시위대 전위로 안나갑니다. 애아빠가 다치면 애는 누가보나요 ^^)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세미나리움 총서 12
에릭 홉스봄 지음, 김정한.정철수.김동택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남자.........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

 에릭 홉스봄은 포스트모던한 시대 조류에서는 구세대에 속하는 경직된 역사학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민중'의 역사에 대해 말한다. 홉스봄이 특히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는 '노동자','농민' 들은 창졸간에 호적정리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역사로부터 망각된 '민중'이라는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 세우는 것이 자신의 필생의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조지프 미첼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나나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큰' 사람들이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라 불린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홉스봄의 러브레터를 압축해 놓은 것이다. 예전에 실렸던 글들을 다시 재편집해 놓은 것이라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글들이 찜찔방 나들이 나온 대가족들 마냥 오손도손 모여있다. 홉스봄 학문을 관통하는 저류에 대한 일관성이야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정원에 틀어 놓은 수돗물 파이프를 따라가듯 글의 흐름이 일관되게 콸콸콸하고 터져나오는 것은 아니다.

 1부는 영국 역사 중에서 특정 시기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지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홉스봄은 '러다이트운동'과 '기계파괴자'를 구분하고 있다.'러다이트'라?  전형적인 상식 세계사 수준으로 나 역시 '러다이트= 기계파괴'운동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중간 중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난 자료들을 좀 찾아 읽어야 했다. 1부에서 가장 흥미있는 대목은 '제화공들의 정치성'이라는 글이다. 단 한번도 '제화공'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이 장은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순간 순간 놀라면서 읽을 수 있었다. 19세기라는 혁명기 속에서 제화공들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이었다.  홉스봄은 제화공들의 조직구성과 독특한 노동 방식,그리고 그들의 작업장이 가진 공간적 특징, 또한 제화공들이 가진 신체적 핸드캡의 역사적 전통들을 따라가면서 변혁정치내에서 제화공들의 잊혀졌던 위상들을 일깨운다. (똑같지는 않지만 영국 제화공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전자본주의 단계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연구해 볼 만한 한국의 보붓상들이 떠올랐다.) 홉스봄은 제화공들이 시골의 지적,정치적 삶의 대변자였으며 시골의 지식인이자 숨은 은자와 같은 교육자들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좌파 예술의 도상학에 대한 부분도 1부에서 흥미있는 글 중에 하나이다.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필두로 좌파 예술에 나타나는 사회주의적 도상의 역할과 변화에 대해 재미있는 글을 만나게 된다. 가슴을 드러내고 민중을 이끌던 여성이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서 강한 근육질을 노동하는 남성상으로 바뀌게 된 추이가 흥미진진 하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9장 역시 예술의 사회사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갖고 볼 만한 대목이다. 초기에 우호적 관계에 있던 아방가르드 예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운동으로 부터 분리되고 비난받게 되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저자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미학론에 영향을 받은 건축들이 '전원도시'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

2부의 주인공들은 농민들이다. 11장에서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을 한다. ' 농민을 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흔히들 '노동자,농민'을 함께 묶어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농민'은 '노동자'와 다른 독특한 역사와 성향을 갖는다. 이때문에 과거 트로츠키같은 사람들은 변혁 주체 설정에 있어서 '농민'을 배제하고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홉스봄 역시 '농민'들에 대해 '아이구.. 불쌍한 우리 농민들..' 하는 식으로 온정주의적 방식으로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농민들이 가진 인식의 편협성에 대해 그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한정된 지역 바깥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고 또 무력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큰 국가로 자리잡은 시기에도 농민들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고 말한다. 홉스봄은 여기서 출발하여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일반적 농민운동이 비현실적이라고까지 말한다.19세기 말 러시아에서 나로드니키가 강력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홉스봄의 강조점은 '농민'들이 가진 역사적 특수성과 인식론적 특성을 정치,사회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는 이어지는 장에서 '토지점거'에 대한 농민들의 유연하고도 장구한 운동 방식에 대해 서술한다. 세대와 세대를 걸쳐서 가끔 전복적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일시적 후퇴를 용인하면서 이루어지는 긴 호흡의 투쟁의 역사는 끈끈한 감동을 준다.

 이어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20세기 낭만적 의적으로 묘사된 산적 줄리아노다. 홉스봄은 '민중주의'를 가진 소영웅의 씁쓸한 결말을 통해서 '사회의식이 있는 산적이 아무리 민중의 사람을 받고 그들의 공감과 찬사를 받더라도' 훌륭한 정치적 판단력과 목표와 조력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지배계급의 볼모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홉스봄의 관점을 '포뮬리즘'에 대한 경계로 읽을 수도 있을 법하다. 줄리아노가 활약했던 시대 분명히 대중들은 산적의 의협심과 민중주의에 환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게 썩어빠진 관료들보다 우리를 위한다는데 그게 뭐가 나빠?' 라는 상식적 반응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홉스봄이 지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설령 그것이 '반관료적이고 반권력적'일지라도 ,또한 그것이 '민중주의'적 인 것일지라고 그것은 나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수사학'에 승부를 걸고 그 '수사'에 대한 몰입으로 자신을 입증하는 대중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 진지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단기적으로 해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그런 '수사학의 포퓰리즘'은 진보 정치에 있어서도 장기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위한 도정에 안개를 뿌리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물론 수사학을 잘 이용하는 것도 대중정치의 덕목이다.진보의 순수성이 가끔 놓치기도 하는)

요즘 사태와 연결시켜서 '난무하는 수사학'에 대해 언급해본다면 '이명박 타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반이명박'이 정체성인 양 작동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치적 정체성의 부재이다. 즉 '반이명박'은 하는데 그 다음이 뭔지 모른다는 것은 '내거티브'한 전술이 '정체성'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예가 선거때마다 출몰하는 '비판적 지지'라는 유령이다. 실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지 못하고 결정적일 때는 객관식 중 하나를 고르는데 만족하며 대신 '진보적 수사학의 포퓰리즘'에는 환호하는 것. 한국의 기회주의적 우파들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정작 중요한 사람들인 스스로를 진보의 화살표쪽에 조금 더 가까이 위치시켜 놓는 다수의 건강한 시민들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상대의 악에서 나의 정당성을 끄집어 내는 것은 노예의 철학이다.' 라고 니체를 인용한 듯한 말을 한 사람은 유명한 진중권이다. 그러니까 결국 '반 이명박'을 넘으라는 말이다.

홉스봄의 이야기하다가 또 삼천포로 갔다. 뭐 인생이 그러려니 하자..

홉스봄의 재즈 이야기는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이 큰 편이었다. 주로 책 서문들을 오려 붙여놓은 인상이 강했다. 재즈에 대해 어느정도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별 다른 흥미를 못느낄 것 같고 또 재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루해만 할 것 같다. 그나마 재즈의 사회사라는 측면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재즈'나 '1960년대 이후의 재즈' 편은 읽을 만하다. 특히 홉스봄의 시각에서 중요한 점은 '재즈의 성격'에 대한 그의 확고한 생각이다. 와인 붐이 불기 전에 살짝 넘실거렸던 한국의 재즈붐을 생각해볼 때 교과서적이지만 또한 중요한 시사점을 읽을 수 있다. 홉스봄에게 재즈는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음악이다. 그는 초기 재즈 성장에 있어서 이런 성향을 끌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좌파들 중에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모든 전위 예술들은 어떤형태로든 원형과 정신이 탈취되고 상업주의의 옷이 입혀져 지배적인 대중문화로 자리잡는다. 즉 대중이 만나는 문화는 어떤 출발점을 갖더라도 결국 '상업주의'의 옷을 입고 만나게 된다. 재즈 역시 이와 유사하다. 이제 우리에게 재즈는 분위기 좋은 카페, 낯선 외국 양주, 이름 모를 이태리 안주와 어울리는 음악이 되어버렸다.

홉스봄의 지적을 들어보자.

"재즈는 바로크 음악처럼 교양인을 위한 패스티시나 고고학적 유물의 형태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재즈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이다....이제 재즈는 별 수 없이 일종의 클래식 음악과 같은 것으로 변모하고 마는 것인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경제적으로 윤택한 중년의 중산층 관객이나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재즈 예술가들이 거의 한물간 양식들로 채워진 레퍼토리를 라이브로 연주하는 일종의 보편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말이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을 사람도 있지만...요즘 재즈는 분명히 홉스봄이 말하는 그런 패스티시같은 성향이 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팝이나 락은 애들 듣는 것 같고 클래식은 좀 지루하고 적성에 안맞고...재즈는 적당히 고상하면서 또 적당히 즐길 수 있어서 나이 들어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했다. 덧댈말이 없을 만큼 아주 전형적이다. '나이'에 담겨진 사회적,경제적 속성들을 행간 속에서 읽으면 더이상 부연이 필요없이 홉스봄의 지적과 똑같다.  

또한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대해서도 홉스봄의 말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어딜 가나 왜 'FLY TO THE MOON' 인지...그리고 일본 비너스 레이블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에디 히긴스 트리오시리즈는 홉스봄적인 의미에서 정말 지겹다. 미국의 재즈가 진 자리에 유럽재즈가 등장했 듯이 요즘 국내 재즈 음반들을 보면 유럽쪽 브랜드들이 더 많은 다양성과 재미를 준다.

홉스봄은 역시 노인네다. '노동자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대에 여전히 '대문자 L' 로서의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중'의 시대에 여전히 '민중'에 대한 추억거리를 들먹인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정 정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도  가끔 땅에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영화를 떠올린다. 그런 장면들이 가끔 나오지 않던가. 마을의 위기를 구하는 중요한 한 마디를 건네는 어느 현명한 노인들...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식의 정원에서 소일하는 무위도식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니체 <삶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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