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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ㅣ 세미나리움 총서 12
에릭 홉스봄 지음, 김정한.정철수.김동택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남자.........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
에릭 홉스봄은 포스트모던한 시대 조류에서는 구세대에 속하는 경직된 역사학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민중'의 역사에 대해 말한다. 홉스봄이 특히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는 '노동자','농민' 들은 창졸간에 호적정리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역사로부터 망각된 '민중'이라는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 세우는 것이 자신의 필생의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조지프 미첼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나나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큰' 사람들이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라 불린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홉스봄의 러브레터를 압축해 놓은 것이다. 예전에 실렸던 글들을 다시 재편집해 놓은 것이라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글들이 찜찔방 나들이 나온 대가족들 마냥 오손도손 모여있다. 홉스봄 학문을 관통하는 저류에 대한 일관성이야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정원에 틀어 놓은 수돗물 파이프를 따라가듯 글의 흐름이 일관되게 콸콸콸하고 터져나오는 것은 아니다.
1부는 영국 역사 중에서 특정 시기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지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홉스봄은 '러다이트운동'과 '기계파괴자'를 구분하고 있다.'러다이트'라? 전형적인 상식 세계사 수준으로 나 역시 '러다이트= 기계파괴'운동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때문에 중간 중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지난 자료들을 좀 찾아 읽어야 했다. 1부에서 가장 흥미있는 대목은 '제화공들의 정치성'이라는 글이다. 단 한번도 '제화공'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이 장은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순간 순간 놀라면서 읽을 수 있었다. 19세기라는 혁명기 속에서 제화공들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이었다. 홉스봄은 제화공들의 조직구성과 독특한 노동 방식,그리고 그들의 작업장이 가진 공간적 특징, 또한 제화공들이 가진 신체적 핸드캡의 역사적 전통들을 따라가면서 변혁정치내에서 제화공들의 잊혀졌던 위상들을 일깨운다. (똑같지는 않지만 영국 제화공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전자본주의 단계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연구해 볼 만한 한국의 보붓상들이 떠올랐다.) 홉스봄은 제화공들이 시골의 지적,정치적 삶의 대변자였으며 시골의 지식인이자 숨은 은자와 같은 교육자들이었다고 회고한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좌파 예술의 도상학에 대한 부분도 1부에서 흥미있는 글 중에 하나이다.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필두로 좌파 예술에 나타나는 사회주의적 도상의 역할과 변화에 대해 재미있는 글을 만나게 된다. 가슴을 드러내고 민중을 이끌던 여성이 사회주의 혁명 단계에서 강한 근육질을 노동하는 남성상으로 바뀌게 된 추이가 흥미진진 하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과 아방가르드 예술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9장 역시 예술의 사회사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갖고 볼 만한 대목이다. 초기에 우호적 관계에 있던 아방가르드 예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노동운동으로 부터 분리되고 비난받게 되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저자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미학론에 영향을 받은 건축들이 '전원도시'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의 상품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
2부의 주인공들은 농민들이다. 11장에서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을 한다. ' 농민을 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흔히들 '노동자,농민'을 함께 묶어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농민'은 '노동자'와 다른 독특한 역사와 성향을 갖는다. 이때문에 과거 트로츠키같은 사람들은 변혁 주체 설정에 있어서 '농민'을 배제하고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홉스봄 역시 '농민'들에 대해 '아이구.. 불쌍한 우리 농민들..' 하는 식으로 온정주의적 방식으로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농민들이 가진 인식의 편협성에 대해 그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한정된 지역 바깥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고 또 무력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큰 국가로 자리잡은 시기에도 농민들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라고 말한다. 홉스봄은 여기서 출발하여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일반적 농민운동이 비현실적이라고까지 말한다.19세기 말 러시아에서 나로드니키가 강력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홉스봄의 강조점은 '농민'들이 가진 역사적 특수성과 인식론적 특성을 정치,사회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는 이어지는 장에서 '토지점거'에 대한 농민들의 유연하고도 장구한 운동 방식에 대해 서술한다. 세대와 세대를 걸쳐서 가끔 전복적이기도 하고 또 가끔은 일시적 후퇴를 용인하면서 이루어지는 긴 호흡의 투쟁의 역사는 끈끈한 감동을 준다.
이어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20세기 낭만적 의적으로 묘사된 산적 줄리아노다. 홉스봄은 '민중주의'를 가진 소영웅의 씁쓸한 결말을 통해서 '사회의식이 있는 산적이 아무리 민중의 사람을 받고 그들의 공감과 찬사를 받더라도' 훌륭한 정치적 판단력과 목표와 조력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지배계급의 볼모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홉스봄의 관점을 '포뮬리즘'에 대한 경계로 읽을 수도 있을 법하다. 줄리아노가 활약했던 시대 분명히 대중들은 산적의 의협심과 민중주의에 환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게 썩어빠진 관료들보다 우리를 위한다는데 그게 뭐가 나빠?' 라는 상식적 반응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홉스봄이 지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설령 그것이 '반관료적이고 반권력적'일지라도 ,또한 그것이 '민중주의'적 인 것일지라고 그것은 나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수사학'에 승부를 걸고 그 '수사'에 대한 몰입으로 자신을 입증하는 대중의 정치적 움직임에 대해 진지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단기적으로 해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그런 '수사학의 포퓰리즘'은 진보 정치에 있어서도 장기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위한 도정에 안개를 뿌리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물론 수사학을 잘 이용하는 것도 대중정치의 덕목이다.진보의 순수성이 가끔 놓치기도 하는)
요즘 사태와 연결시켜서 '난무하는 수사학'에 대해 언급해본다면 '이명박 타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반이명박'이 정체성인 양 작동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치적 정체성의 부재이다. 즉 '반이명박'은 하는데 그 다음이 뭔지 모른다는 것은 '내거티브'한 전술이 '정체성'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예가 선거때마다 출몰하는 '비판적 지지'라는 유령이다. 실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지 못하고 결정적일 때는 객관식 중 하나를 고르는데 만족하며 대신 '진보적 수사학의 포퓰리즘'에는 환호하는 것. 한국의 기회주의적 우파들은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정작 중요한 사람들인 스스로를 진보의 화살표쪽에 조금 더 가까이 위치시켜 놓는 다수의 건강한 시민들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상대의 악에서 나의 정당성을 끄집어 내는 것은 노예의 철학이다.' 라고 니체를 인용한 듯한 말을 한 사람은 유명한 진중권이다. 그러니까 결국 '반 이명박'을 넘으라는 말이다.
홉스봄의 이야기하다가 또 삼천포로 갔다. 뭐 인생이 그러려니 하자..
홉스봄의 재즈 이야기는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이 큰 편이었다. 주로 책 서문들을 오려 붙여놓은 인상이 강했다. 재즈에 대해 어느정도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별 다른 흥미를 못느낄 것 같고 또 재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루해만 할 것 같다. 그나마 재즈의 사회사라는 측면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재즈'나 '1960년대 이후의 재즈' 편은 읽을 만하다. 특히 홉스봄의 시각에서 중요한 점은 '재즈의 성격'에 대한 그의 확고한 생각이다. 와인 붐이 불기 전에 살짝 넘실거렸던 한국의 재즈붐을 생각해볼 때 교과서적이지만 또한 중요한 시사점을 읽을 수 있다. 홉스봄에게 재즈는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음악이다. 그는 초기 재즈 성장에 있어서 이런 성향을 끌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좌파들 중에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는 점을 말한다. 물론 모든 전위 예술들은 어떤형태로든 원형과 정신이 탈취되고 상업주의의 옷이 입혀져 지배적인 대중문화로 자리잡는다. 즉 대중이 만나는 문화는 어떤 출발점을 갖더라도 결국 '상업주의'의 옷을 입고 만나게 된다. 재즈 역시 이와 유사하다. 이제 우리에게 재즈는 분위기 좋은 카페, 낯선 외국 양주, 이름 모를 이태리 안주와 어울리는 음악이 되어버렸다.
홉스봄의 지적을 들어보자.
"재즈는 바로크 음악처럼 교양인을 위한 패스티시나 고고학적 유물의 형태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재즈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이다....이제 재즈는 별 수 없이 일종의 클래식 음악과 같은 것으로 변모하고 마는 것인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경제적으로 윤택한 중년의 중산층 관객이나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재즈 예술가들이 거의 한물간 양식들로 채워진 레퍼토리를 라이브로 연주하는 일종의 보편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말이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을 사람도 있지만...요즘 재즈는 분명히 홉스봄이 말하는 그런 패스티시같은 성향이 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팝이나 락은 애들 듣는 것 같고 클래식은 좀 지루하고 적성에 안맞고...재즈는 적당히 고상하면서 또 적당히 즐길 수 있어서 나이 들어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했다. 덧댈말이 없을 만큼 아주 전형적이다. '나이'에 담겨진 사회적,경제적 속성들을 행간 속에서 읽으면 더이상 부연이 필요없이 홉스봄의 지적과 똑같다.
또한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대해서도 홉스봄의 말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어딜 가나 왜 'FLY TO THE MOON' 인지...그리고 일본 비너스 레이블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에디 히긴스 트리오시리즈는 홉스봄적인 의미에서 정말 지겹다. 미국의 재즈가 진 자리에 유럽재즈가 등장했 듯이 요즘 국내 재즈 음반들을 보면 유럽쪽 브랜드들이 더 많은 다양성과 재미를 준다.
홉스봄은 역시 노인네다. '노동자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시대에 여전히 '대문자 L' 로서의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중'의 시대에 여전히 '민중'에 대한 추억거리를 들먹인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정 정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도 가끔 땅에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영화를 떠올린다. 그런 장면들이 가끔 나오지 않던가. 마을의 위기를 구하는 중요한 한 마디를 건네는 어느 현명한 노인들...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식의 정원에서 소일하는 무위도식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니체 <삶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과 단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