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에 무감해지는 순간이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잘 찍은 사진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마음도 반쯤은 떠밀려 포기한 처연함 속으로 잦아든다. 기억이란 것도 결국 탈색되어 가는 사진처럼 덩그러니 공허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눈 아래 덮혀질 것이다.

 

던져 놓은 양말처럼 느긋하게 연말을 보내고 싶었다. 바람은 바람따라 날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한 때 육신의 무게를 도도한 저항감으로 안아주던 소파도 이제 그 팽팽한 긴장을 놓았다. 그 자리는 제각각의 모서리를 뽑내는 책들에게 내어준지 오래다. 넘어갈 듯 아슬아슬 버텨주는 책들의 절묘함에 감탄 섞인 한숨이 흘러 나온다.   

 

이미 몇 몇은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택배 기사의 손에 건네 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난 하고 싶은 말을 잊었다./ 눈먼 제비는 그림자들의 궁으로 돌아가리라./ 찟긴 날개로 투명한 것들과 놀기 위해./ 인사 불명 속에서 밤의 노래가 불린다./ (중략) "

 

오시프 만델스탐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나오는 시. 출판사 '문학의 숲'에서 나오는 '세계 숨은 시인선' 은  눈여겨 봐도 좋을 기획이다.

시의 번역이란 것이 원론적으로 늘상 아쉬울 수 밖에 없겠지만, 우리가 세계의 모든 언어를 배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투박하지만 솔직한 제목이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 영화운동이 불면서 가장 주목받았던 감독 중 하나가 타르코프스키이다. 지금은 오히려 잊혀진 감독처럼 느껴진다. 지난 주 알렉산더 소콜로프의 <파우스트>를 보고 왔는데, 그 여운 때문에 타르코프스키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소콜로프가 과연 타르코프스키의 뒤를 잇는 러시아 거장이 될 수 있을까?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 영화 이론에 대해 살피다보면 크라카우어라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일종의 가려진 실재의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두번째 세계에 대한 그의 접근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첫번째 번역서이기에 더욱 관심이 간다.

 

 

음반. 재즈피아니스트 존 루이스. 바흐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 클래식을 좋아하든, 재즈를 좋아하든 이 음반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존 루이스의 피아노는 매우 겸손하며, 심각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경박하지도 않다. 자유로운 생기를 잃지 않으며 절제의 선을 놓치지 않는....좋은 음반이다.

 

 

 

 

 

 

이 음반은 지난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명불허전이란 말로 말이다.

나탄 밀스타인과 모니카 에리니가 함께 하는 바흐의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LP로만 나와 있어서 CD 라이센스로 나왔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게 아니다.

한동안 유투브에서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 놓은 듯 하다.

 

 

심각하게 유혹하는  바그너.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없어서 더욱 고민이다. 1080의 블루레이를 보고나면 DVD는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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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친구에게 오랜 만에 문자가 왔다.

'드팀전아...나 책 냈다.'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의 단독 저작으로 첫 책인 셈인가?
잊지 않고 출간 소식을 알려준 것이 고맙다.

 

 



(알라딘 책 소개에 162페이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생각되어 본인에게 확인해 봤더니 500페이지가 넘는다고...알라딘의 표기 실수인 듯 하다)
 

과거 알라딘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 중에 책을 낸 분들이 꽤 많다. 이현우님, 윤미화님, 김이설님, 최정우님, 서민님 그리고 돌아가신 홍윤님 등등...전성원님도 들어가야겠군.

 

하여간 내게 필요한 책을 써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책 제목은 <다이어트 중도 포기자를 위하여..> 뭐 이런거 <로또는 재벌도 춤추게 한다> 

 
이 책은 사서 볼 생각이다. 중고책으로 ㅎㅎ 내 알라딘 주문의 팔할은 중고 서점이다.크흐흐
바람구두님 고생하셨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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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2-08-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2-08-1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 진보를 염원한다는 사람들은 그 80년대식 견인주의를 뛰어넘지 못하는가?

견인주의의 앎에 대한 위계는 매우 단순하다. 

'세계의 실재를 전부는 아니어도 이해하는 나/ 권력의 전술에 포획당해 희히덕 거리는 너희 대중'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각성'이다. 이 위계적 구도를 각성이라는 요청 사항에 대입시켜 보자면, '각성한-각성하려고 애쓰는- 나' 와 ' 무관심한 대중'이 있다. 

최소한 발화하고 격노를 토하는 나는 '각성한 자'의 위치에서 '무지한 대중'을 비판하고 정치적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무지한 대중'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무지'를 반성하고, 작은 '각성'이라도 한다면, 시쳇말로 '개념 탑재'라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베아트리체의 천국에 가진 못해도 최소한 연옥의 단계까지는 올라오는 셈이다. 물론 원론적으로 '개념 탑재'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처럼 '비개념'인간은 '도대체 개념이 뭐지?' 라는 질문을 먼저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개념이라고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이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개는 인정적 휴머니즘의 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념 탑재'의 외부에는 '개념 무탑재'가 있는 것인가? 

 나같으면 누가 '야..너 개념있구나'라고 한다면 '누가 너에게 개념을 하사할 권리를 주었는데?' 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만.

80년대의 시대적 급박함은 대중운동에 일종의 견인주의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를 낳았다. 실제 많은 정보들이 통제되었고, 조직적 저항 자체가 전면적으로 분쇄되었다. 현재의 고통을 과장하기 위한 습성은 MB시대를 과거 80년대나 그 이전의 군부독재시절과 비교한다. 그걸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맥락에 내포된 말은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지 단순한 대차대조는 아니다. 만약 정말 이 시대가 과거로의 완전한 회귀라면  87년 이전 이후의 수많은 민중운동의 결과와 축적된 대중의 역량에 대한 부정이다. 설령 MB가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밟으면 밟히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그 가능성과 축적된 역량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격노에 찬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공포의 연상을 통해 80년대식 억압/투쟁의 양식으로 이해하고, 연쇄적으로 80년대식 견인주의적 운동의 메타포를 활용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진보 내부의 진보를 발목잡는 일이다.

우리의 삶을 포획하고 있는 선들은 단순한 이분법적 견인주의로는 풀어내기 쉽지 않다. 빌헬름 라이히는 '비정치적 인간'에 대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를 동반하는 '정치적 능동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라이히의 지적이 진정 옮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비정치적'인 것인 일종의 방어적 능동주의라면 견인주의의 전술인 '각성'에대한 외침은 소잡자고 닭잡는 칼 들고 오리 우리 앞에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세분화된 미시권력과 통치 권력의 배치와 지배전술 속에 놓여 있다는 것만 이해한다면 듣는자 없는 '각성'이라는 분노는 사실 칼이 아니라 칼집에 씌여진 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반가운 문자가 왔다. 번호 바뀌어서 안그래도 궁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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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제목만큼이나 멜랑콜리하진 않다. 오히려 블랙 커피의 남은 찌꺼기를 혀로 핥는 듯 진한 씁쓸함이 있다. 그 입맛이 기억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메모를 남겨 놓는게 좋을 듯 하다.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블랙 코미디다. 그로테스크한 정치우화다. '슬픈 광대는 아이들을 웃기지 않는다.'는 영화 속 주인공 하비에의 말처럼 박장대소 할 수 있는 장면은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외형상 사랑의 삼각관계를 중심 축으로 한다.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군에 아버지를 잃은 '슬픈 광대' 하비에와 서커스단의 주역인 '웃긴 광대' 세르지오, 그리고 세르지오의 연인인 줄타기 하는 나탈리. 영화 중반부 이후 서사는 질투와 광기의 두 광대 사이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띤다. 이들의 사랑은 광기와 폭력의 화염에 뒤섞인 뒤틀린 사랑이다. 영화는 결국 삼각관계라는 캐릭터의 배치를 이용할 뿐 사랑의 의미따위를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사랑이 극단적으로 놓이게 되는 시대적 멘탈리티 같은 것에 의미를 둔다. 전체적인 영상은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특히 사건의 변화와 흐름,그리고 시대적 알레고리와의 연결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적인 화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영상의 이중적 활용 방식은 관객을 극과 사실 사이에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게끔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 거리는 영화를 단순한 치정행위로 소급시키지 않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이 유효한 거리를 통해 광대들의 이야기와 프랑코 독재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직조할 수 있게 된다. 뉴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시기는 성장하는 소비사회의 과실을 향유하는 낭만의 시대로 묘사된다. 그 화면 속의 스페인은 정열과 사랑의 나라일 뿐이다. 아무런 일도 없다. 그러나 광대들의 사랑을 둘러싼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런 단면에 빗금을 긋는다.안락하게까지 보이는 독재시대와 파국으로 향하는 광기 어린 사건들은 사이의 간극은 전자의 포획된 정체가 일종의 마약과 같은 판타지에 지나지 않음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앞서 말한 대로 '슬픈 광대' 하비에다. 그런데 하베에르는 왜 슬픈광대가 되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말이다. 감옥을 방문한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광대가 되려면 슬픈 광대가 되라.'라고 말한다. 그는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어린아이인 적이 없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는 어린 하비에에게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으로 '복수' 를 말한다. 
 영화 초반 도입부는 주인공의 멘털리티를 형성하고 이해하는 첫번째 단초로 작동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수'를 요청한다고- 마치 무협 영화를 연상시키듯- 몇 몇 영화 기사에서 쓰고 있는데, 완벽한 오독이다. 최소한 사적 복수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기하는 길은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나갈수 있는 극단적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개인적 복수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시대적 무능을 이겨낼 수 있는 분노를 요청하는 것이다. 파르티잔의 '복수'를 말한다. 이것은 하비에의 구명 계획의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몰고오면서 개인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실재계의 트라우마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온순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던 하비에르가 미친광대가 되어가는 과정은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복귀로 볼 수 있다. 하비에르가 갖는 트라우마는 스페인 사회가 무의식 속에 담고 있는 트라우마의 은유이기도 하다. 

 


 서커스단은 역사적으로 축소된 작은 스페인 사회가 된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교실로 압축된 한국 사회의 폭력과 위계구조였듯이.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그런 역할을 한다. 서커스단의 '웃는 광대'는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있다. 하비에가 사랑하게 될 나탈리라는 여인은 폭력과 성적 비하를 당하면서도 그에게 복종한다. 서커스단의 당원들 역시 생계를 위해 그에 순종한다. 하비에가 '슬픈 광대'가 된 것은 아버지의 유언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시대적 메저키즘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들뢰즈에 따르면 메저키즘은 사디즘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디즘과 유사한 정서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슬픈 광대'를 택한 것은 스페인의 대중 정서 구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을 제압할 수 없을 때,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공포를 느낄 때, 대중이 취하는 방식은 스스로 폭력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메저키즘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즉 알아서 기는 방식으로 폭력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비에가 서커스단에서 첫번째 공연을 했을 때, '웃는 광대'는 그의 연기를 높게 평가한다. 하비에는 적극적으로 메저키즘의 매커니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코 시대의 스페인 사람들 역시 그와 같지 않았을까? 성향은 달랐겠지만 오랜 독재 시절을 경험했던 우리에게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감독은 그 시대를 관통했던 대중들을 연민하면서도 풍자와 독설을 아끼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이런 장면들이다. 미친 광대가 된 하비에르가 거리로 총을 들고 나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위협하듯 '당신들 때문이야' 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하비에에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협박당하게 되는 일가 역시 휴게소에서 무얼 먹을까로 실랑이하는 소시민적 주체들이다. 그들은 하비에의 총구 앞에 도망가기 바빠서 화장실간 막내 아들을 놓고 온다.  '대중독재'에 대한 공모에 대한 풍자적인 자기비판이자 항고이다. 이런 장면들도 있다. 주인공 하비에가 어린 시절 악연을 맺게된 대령의 집에 잡혀왔을 때 일이다. 대령은 숲에서 그를 잡아서 사냥개처럼 부린다. 문자 그대로 '사냥개'로 취급한다. 하베에는 군벌들의 사냥터에서 잡은 새를 입으로 물고 주인에게 가져온다. 이 때 둘 사이의 악연을 모르는 프랑코가 이를 나무라다가 하비에게 물린다. 하비에는 '무는-기계'가 되어 정말 개처럼 프랑코의 손을 물어 뜯는다. 이 장면은 우습기도 하지만 또한 매우 조롱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 집의 집사가 '어쨋거나 프랑코의 손을 물어 뜯다니 대단해.'라고 하는 대목에서 질문은 매우 선명해진다. '하비에=무는 기계;  개' 가 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코를 물어 뜯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한 '개-기계' 가 되지 않고는  물어 뜯을 수 조차 없는 정치권력은 어떤 존재의미를 갖는가? 


 




영화속에서 내성적인 하비에르가 숨겨진 광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일종의 환타지적 사건을 통해서다. 하비에르에게 나탈리는 성모의 모습으로 수호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영화에서는 이장면을 포함하여 영화 후반부에 카톨릭과 관련되어 두 번 정도 종교적 이미지가 사용된다.프랑코 독재와 카톨릭과의 연계를 생각한다면 이 것이 괜한 배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종교의 신비주의와 파시즘이 연동되는 방식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실제 프랑코 정권 역시 정적들을 제거하고 독재 정권이 안정적 단계에 들어서자 카톨릭 세력들을 영입하여 국민적 지지를 확보해 나간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탈리의 성모 현신'은 사건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나탈리는 '성과 속'이라는 부르주아 남성의 성적 이데올로기 재현방식이 전형적으로 투영된 인물이다. 공포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은 정상적인 형태를 띨 수 없다.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었던 즉 오이디푸스적인 하비에르는 '복수'라는 법의 이름으로 상징계 속에 봉합되어 삶을 유지해 왔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의 내적 실재가 폭발하는 공간은 자기투영적 짝패라 볼 수 있는 '웃긴광대'의 폭력성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궁극적으로 '웃긴 광대'와 '슬픈 광대'는 거울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비에의 폭력성을 깨운 것은 세르지오의 폭력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비에는 세르지오에 대해 일종의 거세 공포에 시달린다. 영화 초반부까지 하비에는 세르지오에 공개적으로 무섭다고 할만큼 주눅들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비에르는 영화 속에서 성적 무능력자처럼 그려진다. 그는 나탈리라는 여인을 성녀화하면서 또한 마초적 유희의 대상으로서 염원한다. '웃는광대'와 나탈리의 거친 성교장면을 피치못할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비에르는 마치 부모의 성교행위를 목격한 자식의 경험상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 모욕감과 동시에 오디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전치된 형태는 당연히 '성녀 마리아'일 수 밖에 없다. 하비에르의 불시의 공격으로 자상을 입은 '웃는광대'가 영화 후반부 자학을 통해 일그러진 '우는 광대'의 얼굴을 보고 '너도 나처럼 되려고'라는 뉘앙스의 말을 뱉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비에의 오이디푸스적 혼란은 극장씬에서도 드러난다. 슬픈광대의 발라드를 부르는 라파엘의 노래에 몰입해 있던 하비에에게 또 다른 판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수와 폭력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며 영화 속 영화의 라파엘은 그런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길 종용한다. 하지만 하비에의 내적 갈등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미 하비에는 이미 부서진 상징질서 속에 드러난 실재의 영역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최후의 격전지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광기를 드러내고 죽음의 욕동을 향유하는 길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통과한 두 명의 서로 다른 광대가 조우한다. 관객은 파국적 비극의 결말에 와서 서로의 거울로써 공명하고 있었던 등장 인물을 확인한다. 무릎을 맞댈만한 거리에서 이 둘은 공통으로 경험한 상실과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비극의 몫을 상기하며 웃음과 울음을 교차한다. 짧지만 강력한 두 광대의 클로즈업은 누가 울고 누구 우는지, 또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마치 어린 시절 본 작은 광대 장신구처럼 위에서 보면 웃고 있고 돌려보면 우는 그런 형상을 닮아 있다. 광대들의 비극은 그렇게 시대적 비극을 소환시키며 웃음과 울음의 기묘한 이중주 속에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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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사에는 제작의 형식과 구조를 두고 '다이렉트시네마'와 '시네마베리떼'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지, 무엇이 더 다큐멘터리적인지 논쟁은 있으나 근원적 진실은 없다. 리얼리티와 관련된 문제가 다큐멘터리의 태동기부터 '왼쪽벽'- 스티브 제이굴드식 용어이며 <풀하우스>에서는 주정뱅이 모델로 진화의 방향성을 지칭한다-으로 작동한다는 것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라는 오래된 질문이 남는다. 







내 세계관이나 정치적 성향에 근접한 것은 '진실'인가?  카메라로 재현된 저것이 '진실'인가? 

테리 이글턴은 <이론 이후>에서 진실은 대개 매우 단순한 것에 한정된다고 말한다.  

세상은 작은 진실의 규모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진실의 커다란 에드벌룬만이 진실의 의상을 입고 거울 앞에 선다.



 



그런데 진실을 외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이 진실이다' 또는 '내가 경험 한 것이 진실이다.'라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외친다. 무덤들이 반복적으로 공원 묘지를 점유하고 있듯이 '동어반복'은 자기복제적 진실이 되어 주체를 완성한다. 











아...진짜 입 없는 것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지만, 외면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진실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 묻는 사람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우며, 익명의 공간이라는 행동의 거세를 조건으로 하는 어떤 세상에서 진실을 목터져라 외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다. 혐오스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몇 몇 가지 굵직한 역사적 과오들을 소환시켜, 현실의 모순을 감정적으로 되집어보는 것은  사이비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 또는 공부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자기분노를 전염 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 사람 다산 정약용은  제대로 된 분노를 '유분'이라고 했다. 분노는 딱딱하게 굳어 아무때나 터져나는 '욱'이랑은 다르다. 차라리 매번 분노를 배뇨하기 위해 땀구멍 대신 문자를 이용하느니 거대한 분노를 응축해 놓는 것이 더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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