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보를 염원한다는 사람들은 그 80년대식 견인주의를 뛰어넘지 못하는가?

견인주의의 앎에 대한 위계는 매우 단순하다. 

'세계의 실재를 전부는 아니어도 이해하는 나/ 권력의 전술에 포획당해 희히덕 거리는 너희 대중'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각성'이다. 이 위계적 구도를 각성이라는 요청 사항에 대입시켜 보자면, '각성한-각성하려고 애쓰는- 나' 와 ' 무관심한 대중'이 있다. 

최소한 발화하고 격노를 토하는 나는 '각성한 자'의 위치에서 '무지한 대중'을 비판하고 정치적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무지한 대중'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무지'를 반성하고, 작은 '각성'이라도 한다면, 시쳇말로 '개념 탑재'라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베아트리체의 천국에 가진 못해도 최소한 연옥의 단계까지는 올라오는 셈이다. 물론 원론적으로 '개념 탑재'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처럼 '비개념'인간은 '도대체 개념이 뭐지?' 라는 질문을 먼저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개념이라고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이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개는 인정적 휴머니즘의 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념 탑재'의 외부에는 '개념 무탑재'가 있는 것인가? 

 나같으면 누가 '야..너 개념있구나'라고 한다면 '누가 너에게 개념을 하사할 권리를 주었는데?' 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만.

80년대의 시대적 급박함은 대중운동에 일종의 견인주의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를 낳았다. 실제 많은 정보들이 통제되었고, 조직적 저항 자체가 전면적으로 분쇄되었다. 현재의 고통을 과장하기 위한 습성은 MB시대를 과거 80년대나 그 이전의 군부독재시절과 비교한다. 그걸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맥락에 내포된 말은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지 단순한 대차대조는 아니다. 만약 정말 이 시대가 과거로의 완전한 회귀라면  87년 이전 이후의 수많은 민중운동의 결과와 축적된 대중의 역량에 대한 부정이다. 설령 MB가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밟으면 밟히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그 가능성과 축적된 역량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격노에 찬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공포의 연상을 통해 80년대식 억압/투쟁의 양식으로 이해하고, 연쇄적으로 80년대식 견인주의적 운동의 메타포를 활용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진보 내부의 진보를 발목잡는 일이다.

우리의 삶을 포획하고 있는 선들은 단순한 이분법적 견인주의로는 풀어내기 쉽지 않다. 빌헬름 라이히는 '비정치적 인간'에 대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를 동반하는 '정치적 능동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라이히의 지적이 진정 옮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비정치적'인 것인 일종의 방어적 능동주의라면 견인주의의 전술인 '각성'에대한 외침은 소잡자고 닭잡는 칼 들고 오리 우리 앞에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세분화된 미시권력과 통치 권력의 배치와 지배전술 속에 놓여 있다는 것만 이해한다면 듣는자 없는 '각성'이라는 분노는 사실 칼이 아니라 칼집에 씌여진 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반가운 문자가 왔다. 번호 바뀌어서 안그래도 궁금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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