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사에는 제작의 형식과 구조를 두고 '다이렉트시네마'와 '시네마베리떼'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지, 무엇이 더 다큐멘터리적인지 논쟁은 있으나 근원적 진실은 없다. 리얼리티와 관련된 문제가 다큐멘터리의 태동기부터 '왼쪽벽'- 스티브 제이굴드식 용어이며 <풀하우스>에서는 주정뱅이 모델로 진화의 방향성을 지칭한다-으로 작동한다는 것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라는 오래된 질문이 남는다. 







내 세계관이나 정치적 성향에 근접한 것은 '진실'인가?  카메라로 재현된 저것이 '진실'인가? 

테리 이글턴은 <이론 이후>에서 진실은 대개 매우 단순한 것에 한정된다고 말한다.  

세상은 작은 진실의 규모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진실의 커다란 에드벌룬만이 진실의 의상을 입고 거울 앞에 선다.



 



그런데 진실을 외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이 진실이다' 또는 '내가 경험 한 것이 진실이다.'라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외친다. 무덤들이 반복적으로 공원 묘지를 점유하고 있듯이 '동어반복'은 자기복제적 진실이 되어 주체를 완성한다. 











아...진짜 입 없는 것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지만, 외면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진실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 묻는 사람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우며, 익명의 공간이라는 행동의 거세를 조건으로 하는 어떤 세상에서 진실을 목터져라 외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다. 혐오스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몇 몇 가지 굵직한 역사적 과오들을 소환시켜, 현실의 모순을 감정적으로 되집어보는 것은  사이비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 또는 공부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자기분노를 전염 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 사람 다산 정약용은  제대로 된 분노를 '유분'이라고 했다. 분노는 딱딱하게 굳어 아무때나 터져나는 '욱'이랑은 다르다. 차라리 매번 분노를 배뇨하기 위해 땀구멍 대신 문자를 이용하느니 거대한 분노를 응축해 놓는 것이 더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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