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달 위로/ 여우 꼬리 끝처럼/ 흰 산봉우리' 

... 

까다로운 여우는 이 하이쿠를 보고 비로소 바쇼를 대시인으로 인정한다.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그 시에는 여우가 나오니까'  

.............

'어렵다.' 라는 말은 나도 쓰고, 남들도 쓰고... 

약사를 거치지 않아도 오용되고 의사를 거쳐도 남용되는 말이다.  

내가 조금 알면, 기러기가 하늘길을 알 듯 난척한다. 

내게 조금 낯설면... 그냥 어렵다. 왠진 싫다. 어려워서... 

그리고 주로 남 탓 한다. 대개는 작가나 예술가.  

...  

클래식은 원래 어렵구. 재즈는 들으려해도 어렵다. 팝송은 안들려서 어렵구, 현대미술은 그게 뭐가 미술이야?

철학책은 허무맹랑한 책같아서 어렵구, 역사책은 뭔가 다 외워야 될 것 같아 어렵구, 외국소설은 번역투가 목에 걸린 가래같아 어렵구, 종교책은 초월적인 것 같아 어렵구. 경제책은 그림 안그려져서 어렵구, 비평서같은 건 자기들끼리 말장난하는 것 같아서 어렵구. 

하여간 다 어렵다.  

.....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젯밤 무릎팍 도사를 만났다.  

그의 답. .. .. ..

"공부하라 그러세요." ...팍팍... 

세상에 어렵지 않은게 있을 수 있을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것이 대중의 입에 딱 맞게 주먹밥 만들어 주라는 뜻도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 중에는 보이지 않는 '자부심'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결코 말은 안하지만,자기는 어느 정도 문화적 소양과 학식을 갖추고 있는데, '그런 내가 봐도 어렵다.그러므로 그것은 창작자들의 잘못이다.' 여우처럼 말이다. 내가 이해하면, 그건 쉬운거다.  

이거야 말로 대중을 외면하는 창작자보다 더 오만한 대중의 독선은 아닐까? 

물론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많이 있고 실제로 이해 못하고 남겨두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어렵다' 라는 형용사가 사고의 정지, 행동의 정지를 공표하는 선언문의 끝단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어렵다'를 보채는 아이 입에 물린 줄줄이 사탕처럼 달고 다니면서 딱 거기까지만 알고 또 느끼고 멈춘다.    

어려우면...그걸 알기 위해 더 쉬운 것 부터 시작하면 된다. 쉬운거 서너권 보거나 듣고, 좀 어려운거 보다 지치면 , 다시 또 쉬운거 보고...해설서나 비평서보고...또 이래저래 인터넷글들도 좀 보고...그러면 나중엔 '아...그런거군'  전문가는 못되도 최소한 '어렵다' 와는 결별할 수 있지 않을까?  개개의 '어려운 것들'과의 이별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어렵다' 라는 태도에 대한 저항력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사람이 만든거고,  동시대에 누군가 즐기고 있는 것들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웠다. 이틀이 걸렸다. 잡아주면 가고 놓으면 넘어지기를 반볻. 이틀째 되는 날  '아빠 놓치마.'...아버지가 잡고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페달을 쭈욱 밟았다. ...잠잠... 뒤돌아본 아버지는 손을 흔들고 있었고,점점 작아졌다.  나는 이울어가는 저녁놀을 맞으며 텅빈 운동장을 쌩쌩 달리고 있었다.

 습관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앞으로 개입할 지점, 즉 인식과 감성의 풍요를 위해 열려있는 문틈이 많다는 뜻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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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의  ㅂㅁㅋ라인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있다. 손가락 깁스라는 걸 했기 때문이다. 왼손 새끼 손가락은 지금 터미네이터 1.0 의 골조처럼 되어있다. 앞으로 10여일은 있어야 풀 수 있다. 

사람이 원래 안하던 일을 하면 다친다. 간만에 혼자 쭐레쭐레 벌초를 갔다. 부슬부슬 비도 한두방울 내리고, 먼 하늘에는 버펄로떼마냥 검은 구름이 뭉실뭉실 몰려오고 있었다.  묘비 앞에 회향목 두그루가 고도비만 초등학생 만큼 자라서 가만두자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근처 공사장에서 낫을 하나 슬쩍해와서 열심히 가지들을 쳐냈다. 미용사가 숱을 쳐내듯..싹뚝..싹뚝...척척척... 

한참을 하다가  

두뚝... 욱

똑..똑..똑...  

풀만 벨것을 왜 벌목을 해가지고...눈에 띄는 걸 어쩌겠나.

왼손 관절을 낫이 먹어버렸네. 불같이 뜨거운 혓바닥이 쑤욱. 허겁지겁 장갑을 벗어 상처 부위를 누르는데 ..아 뭔가 하얀게 보여...이건 뭐...그건가 하여 겁이 덜컥났지만 너덜해진 살부위가 금세 쪼르르 아기고추처럼 말려들어가더군.  

오랜 만에 와서 향도 하나 못 사르고 사가지고 간 작은 팻트병 소주 한 잔 빗물에 녹여 따르고 내려왔다.  

공원묘비 관리실에서 밴드 하나 붙이고...1339  

분당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는게 낫겠다 싶어 한 손을 누르며 운전을 했다. 

명절이라서 응급실만 했는데, 가장 많이 눈에 띄는 환자는 아이들과 오토바이 사고자. 

일단 검진을 했는데...손가락 다쳤는데도 쇼크가 오더라. 좀 누워 있다가 간호가가 하는 말이 통증이 싶하면 가벼운 쇼크가 오기도 한다고 ... 

성형외과 담당의가 오기전에 항생제주사와 파상풍주사.   

밤을 샌듯 졸린 눈을 한 20대 후반의 여자성형외과 의사가 와서 마취제 놓고 깁기 시작했다.두툼한 안경속의 그 친구 삶이 지루해보였다. 실제로 무척 지루한 표정이었다. 이름표 속의 사진은 봄날처럼 생기 있었는데... 가운입은 그녀는 그냥 백화점 엘리베이터 걸처럼 무표정. 아...20대의 이 처자가 어쩌다가 40대의 누런 옷을 입고 있는 건지...그래서 이래 저래 재미있게 말했다. 그런데도 이 친구 영 심심...별 대꾸도 없구. 

한참 바늘질을 하는 걸 보면서, 매듭에 약한 나로서는 하기 힘든 직업이었겠구나 생각했다. 두번 감아서 쏙...두번 감아서 쏙...  

하여간 그녀 말이 관절부근이어서 인대까지 다쳤단다. 그나마 신경이랑 뼈는 괜찮다고 했다.  

"음...당분간 설거지는 안해도 되겠군요" 라고 했더니 결국 이 친구 빵터졌다.^^ 

"설거지 많이 하시나봐요?" 

"설거지가 집안일 중 제일 쉬운 건데요. 빨래 널기 이런거 귀찮구. 육아는 최악이죠. 육아가 철인3종 경기라면 설거지는 산보죠" 

"아...그래요..ㅎㅎㅎ"  

응급실에 1-2시간 있다가 -얼마만에가 본 응급실인지- 문득 바람직한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게 잘자라는 아이들에게 화 좀 내지말자' (오래 지키지 못해..ㅠㅠ )  

아이 근데...왜 갑자기 맥주가 그렇게 먹고 싶은거야. 당분간 못 먹으니까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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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여간... 사람 살이가 다 그렇다.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지적 능력, 감성의 범위, 인격적 깊이, 시각의 예리함, 또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삶으로 녹아들어가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타자는 심연이다. 그렇게 본다면 타자를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건 자기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존재하고 영향을 받지만 영원히 이해할 수는 불가능성의 영역...

흔히 무공에 비유하면 이렇다.  

극진 공수도의 창시자 최영의의 수련과정을 영화화한 <바람의 바이터>를 보자. 궁정화된-이건 일본 천궁이 아니라 엘리아스식 비유다- 기존 무협 체제에 그는 신출나기 조센징일 뿐이다. 그는 돌발적 사건이다. 문명화된 일본 무협에서 그의 존재는 샛파란 핏덩이 조차 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풍의 도장 격파. 최영의의 '사건'이 시작된다.  

일본 무협의 고수와 최배달이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본다. 

일본의 고수는 최배달이라는 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최배달은 '한수 배우겠습니다' 라는 무림의 전형적인 예를 취한다. 일본의 고수에게 그는 '한수 가르쳐주어야 하는' 건방진 시골뜨기일 뿐이다.  좀 더 너그러운 고수였다면 귀찮지만 먼길을 찾아왔으니 '한수 가르쳐주려고' 했을 것이며, 오만한 고수였다면 '귀찮은데 한 방에 보내고' 다른 일을 하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메라 줌 아웃. 무대 천장쯤에 달려 있는 카메라는 스크린과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 모두를 지금 찍고 있다.(에르곤과 파에르곤의 구분이 모호한게 요즘 트렌드 아닌가?)  

  전지적 위치에 있는 관객들은 이미 최배달이 그를 능가하는 고수라는 정보를 갖고 있다. 일간 스포츠가 연재만화로 제공한 선험적 인식이다. 그렇다면 스크린 안팎에서 최배달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유일한 이는 누구일까? 무참하게 깨질 '일본인 고수'다. 

그는 결국 '한수 가르치려' 다가 코끝이 깨지는건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무지한 스승들' 인 것이다. 

결국 실천의 소실점을 '나'라는 주체의 행위로 모아 행위를 위한 실천적 명령으로 꾸려본다면, ' 내가 모았다고 자부하는 졸라 얄팍한 것들을 가지고 가르치려 들지 말아라.'는 것이다. 누차 생각해도 책 좀 읽었다는 인간들은 - '나를 비롯해'라는 말을 넣고 싶지만, 그것이 살짝 샛눈뜨고 하는 기도같다는, 즉 반성의 형식을 뒤집어쓴 면죄부 판매라는 생각도 들고.. 또한 첫번째 윤리적 형식을 띤 질문에는 비켜가지만, 두번째 '책 좀 읽었다는'에서 '도대체 얼마나 읽었관데?" 라는 것에 발목이 잡히기 때문에 주저하게된다- 이 점을 자꾸 놓친다.   

2. . 일부 책 읽는 좌파들 중에는 '글로 만난 자본주의' 를 '자본'과의 대면 접촉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푸코가 말한 권력에 포획된, 생체정치적 '신체' 와 최저 생계비에 항문에 피맺힌 '신체'를 어쨋거나 '자본'에 포획된 실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용해서 그렇지만. ) 실제로 그들이 접하는 것은 '텍스트화된 자본'이지 '유물론적' 관계의 '자본'은 아니다. 그들이 만나는 권력은 관통은 하는데 불편함은 못느끼게 하는 권력이지, 결재도장들고 막는 막아서는 권력은 아니다. 결국 '자본주의'와는 열심히 싸워도 '자본'과는 싸우지 못하는 것이 착각하는 사람들의 공유된 특성이다. 나중에 나중에 그들은 '문자에 포획된 반자본주의'로 '자본주의' 세계에서 햇빛 드는 구멍을 찾으려고 애쓴다.     
 

 좌파가 선가의 방장처럼 대우하는 이가 마르크스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성과이자 철학사의 변별적인 특징 중에 하나는 '실천'이며 '아래로부터의 변혁'이다. 좀 더 교활해진 이성은  '실천'의 개념을 위한 변명을 만든다. 물론 '실천'이 직접적 '행위'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실천이 협의의 개념이 아님을 과거에 어떤 분과의 비밀댓글을 통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실천이 돌을 드는 것만은 아니라는게 내 입장이었으고 그걸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분석적 개념을 통해서 '실천'이라는 힘이 가진 '변수의 다양성'에 대해 자신의 경험 폭만큼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패리앤더슨이 <서구마르크스주의자 읽기>에서 알튀세르에 대해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라고 했던 것이 100%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걸 반푼도 안되는 자기변명을 위해 이용하라고 만든 것은 아니다.  

 '실천'이라는 개념 속에는 분명히 포획되지 않는 사건들이 있다. 결과라는 것은 항상 원인의 총합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런 잉여를 만드는 것은 분명히 현장의 실천성이다.  이게 요즘 불현듯 유령처럼 귀환한 레닌의 발견 중에 하나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마치 '실천 영역'에서 만나게 되는-또는 배우게 되는-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그러니까 <무예도보통지>를 천번 필사한 사람이 조선 최고의 고수가 된다고 믿는거다. 그래서 자기는 모르지만 결국 각종 무림비기를 열심히 베끼고 있는 데, 스스로 무협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혁명적 이론가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수영 독본을 천번 읽어도 수영장에서 박태환처럼 나아갈 수 없는거다. 

 왜인고 하니? 정답은 '몸'에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욕망의 철학이 세간에 알려지며 다시 찾게 된 그 '몸'말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몸'은  철학적 개념으로서 '몸'이 아니라 꼬집으면 아프고 뽀뽀하면 기분좋고, 술 먹으면 하다가 멈출 수도 있는 그 '몸'이다. '몸'이 안따라 주는 거다. 맥주맛도 모르면서... 태극1장의 기본 품세만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봄부터 연병장을 그렇게 굴러야했건만...  더질 더질.

결국 '실천'은 이론책에 나오지 않는 것이고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건 구체적 행위를 통해 관계들의 충돌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차베스가 그랬다더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안되는 이유를 대느라고 긴 시간을 허비했다" 라고. 

3. 겸허함의 토대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다. 최소한 어디가서 양파니 쪽파니 하려면, 그 '실천'의 가능성-그건 자기 의지와 이성의 바깥 영역이다-이 가진 '긍정의 힘'에 대해 믿어야 한다. 전태일은 "우리가 희망 앞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라는 말을 했다. 

영화<애니 기븐 썬데이>에서 알 파치노는 전반전이 끝난 후 락커룸에서 그의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미식축구 영화다. 스타일리쉬한..) 
 

Life is this game of inches.그거다. 위대한 건, 어디서나 어느 곳에서나 손톱으로 함께 긁어 모으는거. 담론의 포크레인으로 퍼담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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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 오브 시베리아>(1998)라는 영화다. 몇 곡의 유명한 클래식 음악과  러시아의 하얀 눈밭이 기억의 잔설처럼 남아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제국의 궁전들...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3개의 장면이 있다. 

1. 시베리아로 유형가는 열차에 탄 주인공 안드레이. 그를 동료 사관생도들이 찾는다. 하지만 수십량의 수송열차 중 어느 칸에 친구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기차는 기적을 울리고 출발한다. 좋았던 시절 함께 부르던 노래를 시작한다. 동료들 모두 울먹이며 '안드레이, 우리가 여기 와 있다.' 라는 듯 울먹이며 노래를 따라한다. 수송열차 안에 안드레이 역시 죄수들 사이에서 그 안타깝고 반가운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평소 자주 불렀던 '나는 이 마을의 일인자 Largo al factotum della citta' 라는 오페라 아리아를 부른다. '친구들아. 슬퍼하지 마라.그리고 고마워'라고 말하는 듯. 동료들은 친구의 밝지만 슬픈 아리아가 새어 나오는 객차를 향해 뛰면서 다시 못 볼 동료에게 끝까지 손을 흔든다. 기차는 뿌연 새벽 안개를 헤치고 작은 점이 된다. 

 

2. 영화의 엔딩 부분이다. 젊은 날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눈 안드레이를 찾아 시베리아로 간 제인. 안드레이는 추방되어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다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른 제인. 이 사실을 알게된 안드레이는 가을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 시베리아 벌판을 달린다. 산을 뛰어 넘는다. 20년을 기다려온 만남이다.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안드레이는 연인을 단 한번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산을 달린다.그리고 노란 자작나무 숲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멀리서 지켜본다. 남은 것은 겨울을 준비하며 노랗게 물들어가는 자작나무 숲. 담배 한 모금으로 평생을 걸친 사랑과 삶의 회한이 모두 날아가 버릴 일이야 없겠지만...

삶이란 한번 피었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과 형제다. 

3. 영화에는 숨은 또 하나의 스토리라인이 있다. 제인과 안드레이의 짧은 사랑의 결실인 그의 아들. 아버지를 닮아 고집이 세다. 신병 훈련소에 들어간 그는 모차르트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는다. 미친 개라는 선임하사는 '누가 여자 사진을 올려놓았느냐'며 다그치고.  모차르트가 누군지 전혀 모르던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아들을 괴롭힌다. 연병장에 신병들을 방독면 쓰고 집합 시킨다.그리고 '모차르트는 개똥도 아니다' 라고 외치게 한다. 그걸 외친 신병만 방독면을 벗게 한다. 아들은 끝까지 '모차르트는 위대한 작곡가' 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방독면을 쓴 상태에서 모든 훈련을 받는다. 아니 잠을 잘 때 조차 방독면을 쓰고 있는다. 

그리고...어느 새벽. 이 고집 센 신병에게 질린 선임하사는 도대체 모차르트가 뭣이관데..라며 회유한다. 이 때 신병은 선임하사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을 연주한다. 새벽 여명을 뚫고 조용히 울려퍼지는 모차르트에 선임하사 역시... 

유투브를 보니 그 장면이 있다. 유투브 4:00대를 보면 선임하사와의 마지막 대결 장면이 나온다. 유투브 상에서는 음악이 좀 편집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아들과 선임하사간의 결말이 나온다.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 한번 저렇게 자기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었는지.  

지푸라기 하나를 가지고도 위대하게 싸워야 하는 것인데...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2악장 연주다. 칼뵘과의 협연. 젊은 날 남긴 폴리니의 몇 안되는 모차르트 연주. 그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모차르트 음반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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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도 끝나가고.... 아직 청주 처갓집에 있지만 오늘 오후 내려간다. 휴가 기간 비오는 종로 거리에서 술 한잔 하는 호사도 누렸다. '저잣거리의 말들을' 잊지 않겠다는 젊은 친구의 다짐 어린 말에 나 역시 박수를 보내며,또 스스로 반향하기도 했다.

신문기사를 보니 ktx 여승무원들이 1500일만에 복직 판결을 받았나보다. 

뻥뚤린 입은 1500 일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겪음의 1500일'은 싼입으로 결코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잘되었다는 축하와 함께 마음이 무겁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는 것 때문이다. 

KTX 여승무원들이 처음 뽑힐때 언론에서 엄청 홍보했다. 고속철의 스튜어디스니...뭐니 ...좀 과장하자면 스튜어디스들의 인기에 버금가는/  

예쁜 여자 많은 곳을 좋아하는 지라 어떻게 하다보니 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일부는 또는 대다수는- 이건 내가 그들과 개인적인 연락포인트를 갖고 있지 않아서 추측한다는 뜻이다- 길 바닥에 나앉아 시위를 했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KTX를 탈때 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또는 다른 절차를 통해 들어온 여승무원들을 볼 때 마다 초창기에 본 -어려운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는 자부심과 취직했다는 희망에 들뜬- 그 앳된 여승무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후 서울역에서 부산역에서 그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길에서 나누어준 선전문건을 들고 잠시라고 귀기울여 주는 척. 가는 길에 5분가량 서있는 걸로 마음의 부담감을 덜었다. 앞에서 떠드는데 아무도 듣지 않는 것 만큼 비참한 건 없기때문에....관객 없는 무대에서 혼자 노래부르는 무명가수처럼 쓸쓸한 일이 될까봐..  (그렇게  싸움은 구체적이다.)

내가 한 건 그게 다다. 끝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 마치 내가 무슨 승리를 이룬 것처럼,내가 그들의 승리에 무언가 도움을 준 것 처럼 우리의 일로 과장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온정의 마음을 가지고 지켜본게 다일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낸거...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건 기본에 끼지도 못하는 일이다. 

축하의 소식을 들으면서도....나는 그들의 시위에서 뒤에서라도 크게 구호 한번 외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다. 좀 쪽팔리면 어땟다구. 

나는 아무일도 안했다. 그 마음을 낸 것....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말과 마음은 정말 부르주아적 편의용품이다. 머리라구....그나마 유행따라 가봐야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정치던지 그것도 아니면 급진주의의 불임 정치정도 되겠지. 머리들이 계속 혁명의 가능태나 도화지에 그려대고 있을 때, 없는 것들은 '겪는다' 그러면서 이처럼 '작은 승리' 라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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