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네팔, 라오스, 산티아고 가는 길, 올레길, 걷기, 유기농식품, 사진, 전원 생활, 황토집, 한옥, 자연요법...            

 이런 것들은 '가치'를 팔고 있는 상품은 아닌가? 이것들은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구조와 취향을 헤치고 나가려는 또하나의 획일화되는 트렌드 아닌가? 이 모든 것들을 좋아하는 것은 유별난 것 처럼, 또는 탈세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도시인들이 대개 한번 쯤 꿈꾸는 자기 미래에서 불러들인 노스탤지아와 중첩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은 회색 도시인들에게 여름철 내놓은 시루떡처럼 쉽게 부패하고 마는 그런 꿈들은 아닌가 ?  

 언젠가 본 잡지가 기억난다. 도발적인 제목때문에 읽게 된 기사가 있었다.짧은 기억력으로 복원해 보자면 "나이들 수 록 도시에 살아라. 그래야 늙지 않는다." 였다. 뉴욕에 사는 어떤 이국의 칼럼리스트가 쓴 글이었다. '나이들면 시골가서' 라고 먼 미래를 가상하는 사람-나도 그런 공허한 말을 자판기에서 커피 빼먹듯 뱉곤 하는 위인인데-의 입장에서 자못 도전적이고 설득력 있는 기사였다. 노자와 장자의 '자연주의'사상에 대해 그리스인들의 후예보다 친화적인 동양-그리고 한국-에서는 분명 먹힐 만한 기사는 아니었다. 특히 나이들 수 록 더욱 '동양 고전'에 친화적이어야 더 후숙되는 것 처럼 느끼는 많은 이들에게는 말이다.   

사람들은 현역에서 은퇴 후 명품 타운 하우스의 여유로운 삶은 아니어도, 양지 바른 작은 양옥집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깨는 자신을 그린다. 화초도 키우고, 취미활동도 하고, 산책도 다니는 삶. 지인들이 가끔 찾아와서 뜸뿍새 소리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아이구..이런데 살면 좋겠네." 라고 흥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런데 억새밭의 은빛을 연상시키는 머리칼을 가진 벽안의 칼럼리스트는 오히려 도시에 사는 노년을 추천하고 있었다. 사실 도시에 살아 봐야 좋을 것이 하나 없다는 생각을 가진 나였지만 '도시의 노년'에 대한 장점을 보고 싶긴 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은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문화적 경험과 도시의 역동적인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먼 미래에 자연에 파묻혀 사는 즐거움을 꿈꾸는 것도 좋지만, 또한 도시에서 잘 늙는 방법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꿈꾸는 것 만큼 전원생활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기때문이다.)   

 여행지로 인도도 좋고 네팔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몇 년전 티벳 출장의 기회가 날아간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와 하고 있다.) 그곳은 정말 영적 에너지가 오뚜기 배 모양만큼 충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곳에 대한 붐은 우리들이 계발해낸 것은 아니다. 원통하고 야속하겠지만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발견해낸 곳이라는 점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렇다고 그곳이 가진 영성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영혼의 정화수를 뒤집어 쓴 감동받은 여행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일 게다. "니가 안가봐서 그래" 라는 대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영적 쇄신이 오로지 내적 발현에 의한 것 만은 아니라는 점은 무언가 찝찝함을 남긴다. 그 찝찝함은 역으로 '여행자의 겸손'으로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은 척 하지 않는 여행자의 '겸손' 말이다. 그 곳에도 삶이 있고, 투쟁이 있고, 애욕이 있고, 모함이 있고, 협잡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아픔이 있을 것이기에...  전원 생활이든, 낯선 풍광으로의 여행이든 우리는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 자기투사의 여행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인생이 달라졌다는 사람들은 나는 믿지 않는다. 산티아고의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날 우리집을 방문하셔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홍보하는 책들도 다 홍보맨들 특유의 과장법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어떤 출판사나 여행사가 이런 삐뚤어진 반응에 열 받아서 '내가 널 거기 보내 줄 테니 정말 바뀌는 지 안 바뀌는지 가봐. 얼마나 감동적인데' 라고 말하며 보내준다면 꿀떡받아 먹겠다. 산티아고가 아니라 제주도라도 말이다.) 그것은 군을 제대하고 나서 3개월쯤 지난 뒤에도 여전히 6시가 되면 자동기계처럼 기상한다는 말처럼 들릴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오랜 만에 서점에 갔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겨울철 버스 정류장 앞 오뎅 리어카 처럼 여행서 진열대가 분주하다. 그 옆에는 떡복이 속 흰 계란처럼 각종 '전원생활의 즐거움들' 이 탱글거린다. 이 곳도 꽤나 손을 탄다. 예전에 여행서는 주로 서유럽 일색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인도,네팔 그리고 이어서 북유럽, 남미...그리고 아시아의 오지들. 아프리카... 다음은 어디쯤일까?  아이슬란드나 마다가스카르...혹은 아프카니스탄.  

충북 진천 농다리 인근이 내가 나중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곳이다. 옛말에 "생거 진천, 사거 용인" 이라 했다는데 사실 "생거 아파트, 사거 납골당" 이 될 가능성과 계속 실랑이 중이다. 그리고 이러다 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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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망상 [, delusion of persecution]  

정신분열병이나 편집장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고 속이며 고통을 주고 피해를 입히려 하고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려 하며,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는다. 이런 증상은 환자 자신의 결함이나 적개심·불만이 다른사람에게 투사되어 그들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피해망상의 형태로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다는 추적망상, 자기를 죽이려고 음식에 독을 탔다고 믿는 피독망상,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관찰망상 등이 있다. 이들 증상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실이 모두 자신과 관련되어 일어난다고 믿는 관계망상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관계망상'이란 무엇인가? 

  관계망상 [, delusion of reference]  

아무 근거도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이 자기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망상. 다른 망상에 비해 관계망상은 기초적인 것이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피해망상() ·주시망상() ·작위체험() 등으로 발전한다. 과민성 관계망상은 일정한 논리적 근거가 있기는 하나 거기에 과도한 감정적 요소가 더하여 정상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망상으로 발전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열병에서 관계망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감정의 강도만으로는 알아볼 수 없다.    

히스테리 [Hysterie]  

정신적 ·심리적 갈등 때문에 일어나는 정신신경증.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신경증 또는 심적 반응의 한 형을 말하는 경우와 정신병질 또는 이상성격의 한 형으로 쓰이는 경우로 크게 나눈다 

히스테리라는 말이 정신병 또는 이상성격의 한 형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자기중심적으로, 항상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바라고, 오기가 있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성격, 또는 현시성()인 병적 성격을 가리키는 일이 많다.

...  

우리가 정상적인 소통을 한다거나 또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한-또는 최소한 성숙하려는 노력이 있는- 어른들의 안정성'과 관련이 있는 행동이다. 이런 '안정감'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지 않는 경우- '괴팍스럽다' 라는 말로 표현하긴 하는데- 대화나 소통은 결코 쉽지 않다. 가끔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친구들을 본다.  

 나보다 두세살 많은 여자 직원이 있다. 이 사람은 평소에는 밑에 있는 아이들도 잘 챙겨주고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 일을 하다가 업무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곤란에 처했을 때 그녀는 돌변한다. 그녀는 히스테리적이다. (나만 해도 서너번을 목격했다. 그리고 부서가 다른 내게도 십년전 쯤에 한번 그랬다가 한방 먹었다. 화가 나서 내게 '야..너가..어쩌구..' 이러다가 물론- 나이는 내가 어리지만 -"뭐야...너라구...이게 어떠대구?" ^^ ) 그 밑에 직원들은 대개 참다가 나중에는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선배님, 아무리 그렇다해도 말이 좀 지나친거 아니에요? )나는 가끔 그녀에게 이제 나이도 있는데 도를 넘는 나무람으로 어린애들한테 역공당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사람의 문제는 평소에 잘해주면 또 다 무마 된다고 생각한다는데 있다. 사람들은 평소에 잘해주는 것만큼이나 나쁜 기억을 간직한다. 물론 앞에서야 고분고분하겠지만 뒤로 돌아서면 '인격파탄자'로 생각하거나 '자기통제력 상실자'로 생각한다. 그녀의 후배들은 그녀의 '안정감결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성격이나 인성이란 것은 좋을 때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보여지는 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 양식이 정말 그 사람의 본바탕이다.   

재미있는 특징은 이런 히스테리나 망상증 의심환자들의 공통된 속성이다. 그들은 스스로 망상적이지 않음을 보이려는 입증과정을 통해 또는 사랑 받고 싶음을 욕망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더 주위에 자기가 망상증의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된다.  

 더 어리석은 것은 '나는 달라졌어' '나는 변했어'라고 말로 그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동'으로 그것을 판단하지 '나는 변했어'라는 말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앞서 말한 그녀도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 예전 만큼 애들한테 안그래.')  대개 이런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한번쯤 폭발한다. 이렇게 항변하면서 말이다. "나는 변했는데..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아. 씨방..." 내가 겪었던 일종의 망상증 환자 중에 하나는 '스토커'였다. (오해 마시길...내가 당한게 아니라...내가 해결해 준....상황봐서 잡아넣는 방식) 

건강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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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제는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다. 형식적으로 끝나고만 회의 뒷자리가 이어졌다. 술을 강제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냥 저냥 즐겁게 마셨다. 토요일까지 장모님이 와계시기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ㅎㅎ 

2. 그러니까 내가 상상하는-만들고 싶은- 미장센은...일종의 혼종-하이브라이드인 셈이다. 판소리 창자를 오페라 가수처럼 턱시도나 명품 와이셔츠도 입혀보고...아니면 그로테스크할 수 있는 분장도 해보고...비쥬얼을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성과 스타일리쉬함이 동시에 확보되어야 한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늘 좋다. 거의 늘. 참신하다. 상상력이 좋다. 그림도 좋겠다. 주제의식도 좋다.문제는 현실이거나 의지, 또는 효용성이거나 '할 수 있겠냐'는 소심함, 그리고 몰이해 등등...  

오페라 무대 몇 개를 옮겨본다. 부분적으로는 이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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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놀 줄 아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건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예전에도 이런 류의 페이퍼를 쓴 적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에는 늘상 전교 1등을 도맡는 친구들이 문과와 이과에 각각 한 명 씩 있었다. 이 친구들의 수준은 한 차원 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좀 처럼 1등을 노리는 자는 몇 업었고 2등 부터가 우리에게 할당된 자리같았다. 그런 문이과를 대표하는 이 수재들은 희안하게도 스타일이 달랐다. 문과 1등하는 친구는 정말 공부 잘하는 아이의 전형이었다. 생긴것도 지적으로 생겼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밥 먹을 때도 사전을 펴놓고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운동을 해도 구기종목은 잼병이었는데 체력장에 나오는 기초 체력종목들은 정말 잘했다. 인간미도 살짝 없었다. 반면 이과 친구는 생긴 것도 MC몽처럼 생긴데다가 자율학습 땡땡이도 잘치고, 월담도 잘했다. 집은 좀 가난했지만 해맑았다. 처음보는 친구들하고도 쉽게 어울렸다. 오죽하면 나랑 과도 다른데 내가 수학문제에 막히면 이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을까?  

내가 보기에 문과 1등하는 친구는 '공부'와 접촉한 '기계' 였다.이 친구는 대학 3학년 때 행정고시에 재경부문에 합격했다. 재경부인가 통상부인가에 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대학 들어가자 마자 아마  '행시 모드'로 전환해서 열공을 했을 것 같다. 최소한 연애질 하다가 실패해서 헤롱거린다거나, 무모한 혁명의 이상때문에 길바닥에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런 '비합리적'인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짓을 하면서 대학 3학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아마 그런 간지대로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을 것이다. 초지일관하게 말이다. 내 소망은 그렇게 일관되게 살아온 그가 부디 그 뛰어난 머리로 대다수의 못난 국민들 거품 물게 하는 정책들을 입안하고 추진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는 자기 목표 이외의 다른 것들은 모두 낭비적인 것, 부차적인 것, 불필요한 것들로 간주했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중요한 것들'의 순위에서 하위로 배치하여 언제든 순위에서 밀렸을 것이다. 그라고 욕망이 없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모든 욕망을 자기 목표와 절제의 힘으로 눌렀다. 그는 '놀지 않는 아이'였던 것이다. 

자기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는 프로는 아름답다. 박지성의 발,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김연아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자기와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사다. 문학적으로 니체를 인용하자면 모두 '삶의 전사'인셈이다.  

문과 1등을 했던 그 친구는 '공부'라는 재능을 가진 '박지성'이나 '김연아'같은 전사가 아닐까? 그는 아마 오른쪽 손에 볼펜자국에 눌린 근육이 불거졌을 것이다. 발과 손의 차이이고, 국민 스타와 행정부 고위 관리의 차이일 뿐, 이들은 같은 도식을 가졌다. 문화연구적 입장에서는 박지성이나 김연아는 '영웅으로 만들어진' 미디어 시대의 영웅이다. 그리스의 영웅이 '신과 운명' 사이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비인간적 존재들이라면 박지성이나 김연아는 21세기 미디어와 스포츠 산업이 나은 인간적인 영웅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 개인의 노력을 폄훼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의 자기극복을 위한 열정과 노력은 영웅의 대접을 받을 만 하다. 물론 이런 스타들에게는 명예와 부라는 개인적 부상이 따른다. 살아가면서 그런 존재들은 여러 모로 필요하다. 가끔은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어떤 꿈들에 대한 투사가 가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좌절을 겪을 때 용기를 주기도 한다. 김연아나 박지성의 성공이 순탄했던 것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범한 우리의 삶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 자기 수련을 하느라 포기해야했던 '노는 삶'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건 '평범한 삶'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치의 역전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게 '좋은 삶이고 즐거운 삶'이다. '노는 삶' 말이다. 버스를 타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삶, 자기 스스로 타인이 알아봐 줄 기대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삶, 공항에서 VIP실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삶. 굳이 '자기 극복'이 되면 좋지만 안되도 "인생이 그렇지 뭐.." 라고 씩 웃을 수 있는 삶.  

 나는 그래서 너무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 보다 좀 즐기려는-최소한 즐겨보려고 애쓰는- 아이들이 좋다. 모케이블에서 아메리칸 아이돌을 모방해서 슈퍼스타 K라는 프로그램을 했다. 우승 후보중에 조문근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처음부터 '즐겁게 놀기'가 목표라는 듯 출전해서 결승까지 갔다. 물론 그게 처음부터 설정일 수도 있었지만 하여간 생긴 것 부터가 좀 놀게 생겨서인지 나는 이 친구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는 사실 '놀아도 된다'는 약간의 자만심 같은 것도 있어 보였다. 이 친구는 중간에 한번 떨어졌다가 패자부활전을 통해 구제되는데, 그 와중에도 그다지 원통해하거나 슬퍼하거나 하지 않았다. 예의 그 오만함, "잘 놀았는데요 뭘" 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우승후보자가 좁아지면서 욕심이 생기기도 했을 거다. 물론 최종에서도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게다. 어쨋거나 이 친구는 2등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친구의 '재야 딴따라' 근성이 아주 맘에 들었다. "지금까지 고생을 했고, 앞으로도 그걸 건데. 여기서 잘되면 좋고 아니면 잃을게 없는데, 뭘." 하는 어찌보면 탈속적인 유희. 전복적 놀기. 그래서 이 친구는 못 생긴 만큼 자유로와 보였다. 그에 반해 구구절절 사연과 함께-노는 친구라고 사연이 없겠는가?- 반드시라는 의욕을 너무 드러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물론 방송은 이런 둘 다를 원한다. 방송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저 밍숭맹숭한 것이지 '더 나쁘거나 더 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니 '전복적 유희'라는 것도 이미 초월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이라면 손발 부르트게 안타까와하는게 맞을까? 주체에 '늘'이란 족쇄를 씌우지는 말자.) 

사람들은 다들 이런 '노는 가치'를 좋아한다. 그런 책을 읽고 좋아하고, 그런 영화를 보고 감동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슈퍼스타 감사용>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그래 맞아" 라며 맞장구를 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눈은 언제나 TV 속, 역사 속, 책 속의 '영웅'에 맞춰져 있다. 내 친구 중에 하나는 위인전이나 평전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듣고 보니 나름 일관된 철학이 있다. 남들이 다 체 게바라 T 셔츠를 입고, 포스터를 붙여 놓고 다녀도 그는 영 관심이 없었다. 사실 체 게바라 이미지의 소유행위와 달리 삶과 정치가 더 체 게바라적 가치와 가까운 녀석인데도 말이다. 그에게 그건 '뛰어난 영웅의 이야기' 일 뿐이다. 편벽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 친구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바는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 역시 '잘 놀고' 있다. 자기 삶을 충분히 즐기고, 자기 방식으로 투쟁하면서 말이다. 

박지성이나 김연아가 될 게 아니라면... 차라리 잘 놀자. 잘 놀아야 ...2등 해도 억울하지 않다. 공부 못하면 수영 잘하면 되고, 축구 못하면 야구 잘하면 되고, 스케이트 못 타면 낚시잘하면 되고...참고로 나는 '잘 놀아야 된다'는 말을 늘상 '연애를 잘해야 한다' 라는 메타포에 실어서 이야기한다.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내가 '연애 지상주의자'인지 안다. 그런데 맞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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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는구나. 오늘 오전에는 예찬이 유치원 추첨하러 가야된다. 푸하.. 3 대 1이란다. 가까이에 있는 유치원인데, 생태유아공동체에 가입되어 있고, 유기농음식 비율이 높다. 그리고 무지하게 놀리는 유치원이다.  회사 선배는 자기 아이들이 그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고 하면서 " 거기 좋아. 그냥 놀리고 자연체험 많이 시키고... 우리 애 6살인데 아직 한글도 몰라." 라고 말한다.  

아이와 함께 지난주에 유치원에 사전 답사도 갔다 왔는데 나 역시 마음에 들었다. 원서접수를 했는데 또 그런게 있더라. 일단 현재 다니고 있는 원생의 동생들에게 선순위가 있단다. 그런거 처음 알았다. 그래서 그 아이들 자리를 빼고 나니 경쟁률이 3대 1이나 되어버렸다. 원래 26명이 모집인원인데 일반 지원을 위해서는-그것도  40여장의 추천서로 한정된다-  9명 뽑는단다. 그러니기 추천서 받은 사람들 중 절반정도는 0순위자였던 셈... 

오전에 가서 막중한 부담을 안고 추첨해야한다. 잘 될꺼다. ^^ 난 원래 잘 된다 (이거 자기암시다.) 

이번주에는 이런 책들이 눈에 든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이름만 알았던 책이다. 내가 한 때 영화를 쬐금 공부할 때 '아메리칸 뉴시네마' 를 좋아했다.(따지고 보면 음악도 그 시절의 음악들을 좋아한다.) '아메리칸 뉴시네마'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피터폰다,데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다. THE BAND의 노래에 맞춰 '부르릉'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가 미국 사막을 건너는 드라이빙 장면이 생각난다. 하여간 이 세대. 흔히 비트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젝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열독서였다고 하는데...이미 한 세대가 지난 작품이지만 놓칠 수는 없을 성 싶다. 이 책을 읽는 중에 6-70년대 락 음악을 많이듣게 될 듯    

김명인 시인의 <꽃차례>. 몇 년 전인가 나는 김명인 시인에 꼽혀서 그의 시를 열심히 읽은 적이 있다. 좀 관념적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좋았다. 그의 시를 보면 절간 추녀 끝에 매달린 물고기가 생각난다.  과거 오규원선생이 80년대 그의 시 구절을 보고 '떠나지 못하는 그리움과 쓰러지지 못해 다시 떠나는 비겁함'이라고 햇다는데.. 시인은 이를 존재론적으로도 더 확장시킨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그리스적 비극미가 있다. 나는 그의 문장을 '후미진 골목 끝을 오래바라보는'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이것이 현대적 미술>'제프쿤스, 데미안 허스트, 앤디 워홀,오노 요코' 정도 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그 외에는 모르는 작가들이 천지다. 물론 어떤 작가의 작품은 본 적은 있을 수 도 있다. 하여간 이 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오로지 한가지. 내가 모르는 미술작가들이 많이 거론되기 때문이다. 미술 관련된 책들은 많다. 그런데 대중적인 책들은 대개 우리가 미술시간에 배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거나 아니면 유럽미술관기행같은 것들 뿐이다. 동시대에 예술가들이 어떤 세계를 보는지는 중요하다.  

아감벤의 <목적없는 수단> 인문서치고 표지 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든다.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사두고 아직 건너지 못하고 있다. 전문적인 이야기라서 쉽게 다가갈 수도 없겠거니와 또 이후 나온 학술적 분석들에 기가 질려서다. 물론 그렇게 학자풍으로 읽어야 될거라고 생각한다.(딱딱하긴 하지만 도움이 된다.진짜) 전문영역이니까...그런데 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다.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이때 전문가는 '기술관료,분과적인 과학자'들을 뜻한다. 그런데 인문학에는 그런 '전문가'가 없을까?  '소주'의 달짝지근한 취기,어둑어둑,붉으스름해져가는 술자리의 즐거움을 모르고 '소주=메탈알콜+물+ 기타' 라고 이야기하거나 '소주'와 '소주잔' 의 '사이관계'를 강조하거나, '소주'와 '맥주' 사이의 '차연'에 집중하면 ...술 맛 버리는 거다. 나는 그럴 때 주로 '야..입다물고 술이나 먹어. 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케르'를 먹던 '사케'를 먹던 좀 부드럽게 먹자는게 내 입장이다. 내가 이걸로 보따리 장사할것도 아닌데...뭘.  

 스팅은 내일 모레면 우리나이로 60이다. 그런데 여전히 섹쉬하다.(나도 그러면 좋으련만..몸만들기를 해야하나) 그의 겨울음반이 하나 떡하고 나왔다. 기대된다. 내가 처음 받아쓰기를 한 팝송이 폴리스의 '에브리브레즈 유 테이크'였다. 아마 내 세대에 팝송을 듣던 사람들은 받아쓰기를 해봤을 거다.^^ 스팅의 음악이 음악사적으로 어떤 이정표를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이 시대를 상징하는 팝 아이콘도 아니다. 하지만 자기 색깔을 가진 대중가수임에는 분명하다. 또한 다른 장르의 음악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아랍적 리듬도 써보고, 류트음악도 해보고 ..그러나 자기의 본령을 넘어서 왔다갔다하진 않는다.( 나름 영국적 고집이 있다닌깐..) 앨범 자켓도 겨울 분위기가 물씬나고...음반사 소개를 보니 포크적인 정서의 노래가 많다니 이래저래 올 겨울 이 음반을 사게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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