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여간... 사람 살이가 다 그렇다.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지적 능력, 감성의 범위, 인격적 깊이, 시각의 예리함, 또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삶으로 녹아들어가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타자는 심연이다. 그렇게 본다면 타자를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건 자기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존재하고 영향을 받지만 영원히 이해할 수는 불가능성의 영역...

흔히 무공에 비유하면 이렇다.  

극진 공수도의 창시자 최영의의 수련과정을 영화화한 <바람의 바이터>를 보자. 궁정화된-이건 일본 천궁이 아니라 엘리아스식 비유다- 기존 무협 체제에 그는 신출나기 조센징일 뿐이다. 그는 돌발적 사건이다. 문명화된 일본 무협에서 그의 존재는 샛파란 핏덩이 조차 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풍의 도장 격파. 최영의의 '사건'이 시작된다.  

일본 무협의 고수와 최배달이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본다. 

일본의 고수는 최배달이라는 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최배달은 '한수 배우겠습니다' 라는 무림의 전형적인 예를 취한다. 일본의 고수에게 그는 '한수 가르쳐주어야 하는' 건방진 시골뜨기일 뿐이다.  좀 더 너그러운 고수였다면 귀찮지만 먼길을 찾아왔으니 '한수 가르쳐주려고' 했을 것이며, 오만한 고수였다면 '귀찮은데 한 방에 보내고' 다른 일을 하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메라 줌 아웃. 무대 천장쯤에 달려 있는 카메라는 스크린과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 모두를 지금 찍고 있다.(에르곤과 파에르곤의 구분이 모호한게 요즘 트렌드 아닌가?)  

  전지적 위치에 있는 관객들은 이미 최배달이 그를 능가하는 고수라는 정보를 갖고 있다. 일간 스포츠가 연재만화로 제공한 선험적 인식이다. 그렇다면 스크린 안팎에서 최배달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유일한 이는 누구일까? 무참하게 깨질 '일본인 고수'다. 

그는 결국 '한수 가르치려' 다가 코끝이 깨지는건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무지한 스승들' 인 것이다. 

결국 실천의 소실점을 '나'라는 주체의 행위로 모아 행위를 위한 실천적 명령으로 꾸려본다면, ' 내가 모았다고 자부하는 졸라 얄팍한 것들을 가지고 가르치려 들지 말아라.'는 것이다. 누차 생각해도 책 좀 읽었다는 인간들은 - '나를 비롯해'라는 말을 넣고 싶지만, 그것이 살짝 샛눈뜨고 하는 기도같다는, 즉 반성의 형식을 뒤집어쓴 면죄부 판매라는 생각도 들고.. 또한 첫번째 윤리적 형식을 띤 질문에는 비켜가지만, 두번째 '책 좀 읽었다는'에서 '도대체 얼마나 읽었관데?" 라는 것에 발목이 잡히기 때문에 주저하게된다- 이 점을 자꾸 놓친다.   

2. . 일부 책 읽는 좌파들 중에는 '글로 만난 자본주의' 를 '자본'과의 대면 접촉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푸코가 말한 권력에 포획된, 생체정치적 '신체' 와 최저 생계비에 항문에 피맺힌 '신체'를 어쨋거나 '자본'에 포획된 실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용해서 그렇지만. ) 실제로 그들이 접하는 것은 '텍스트화된 자본'이지 '유물론적' 관계의 '자본'은 아니다. 그들이 만나는 권력은 관통은 하는데 불편함은 못느끼게 하는 권력이지, 결재도장들고 막는 막아서는 권력은 아니다. 결국 '자본주의'와는 열심히 싸워도 '자본'과는 싸우지 못하는 것이 착각하는 사람들의 공유된 특성이다. 나중에 나중에 그들은 '문자에 포획된 반자본주의'로 '자본주의' 세계에서 햇빛 드는 구멍을 찾으려고 애쓴다.     
 

 좌파가 선가의 방장처럼 대우하는 이가 마르크스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성과이자 철학사의 변별적인 특징 중에 하나는 '실천'이며 '아래로부터의 변혁'이다. 좀 더 교활해진 이성은  '실천'의 개념을 위한 변명을 만든다. 물론 '실천'이 직접적 '행위'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실천이 협의의 개념이 아님을 과거에 어떤 분과의 비밀댓글을 통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실천이 돌을 드는 것만은 아니라는게 내 입장이었으고 그걸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분석적 개념을 통해서 '실천'이라는 힘이 가진 '변수의 다양성'에 대해 자신의 경험 폭만큼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패리앤더슨이 <서구마르크스주의자 읽기>에서 알튀세르에 대해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라고 했던 것이 100%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걸 반푼도 안되는 자기변명을 위해 이용하라고 만든 것은 아니다.  

 '실천'이라는 개념 속에는 분명히 포획되지 않는 사건들이 있다. 결과라는 것은 항상 원인의 총합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런 잉여를 만드는 것은 분명히 현장의 실천성이다.  이게 요즘 불현듯 유령처럼 귀환한 레닌의 발견 중에 하나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마치 '실천 영역'에서 만나게 되는-또는 배우게 되는- 가능성을 애써 무시하려 한다. 그러니까 <무예도보통지>를 천번 필사한 사람이 조선 최고의 고수가 된다고 믿는거다. 그래서 자기는 모르지만 결국 각종 무림비기를 열심히 베끼고 있는 데, 스스로 무협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혁명적 이론가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수영 독본을 천번 읽어도 수영장에서 박태환처럼 나아갈 수 없는거다. 

 왜인고 하니? 정답은 '몸'에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욕망의 철학이 세간에 알려지며 다시 찾게 된 그 '몸'말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몸'은  철학적 개념으로서 '몸'이 아니라 꼬집으면 아프고 뽀뽀하면 기분좋고, 술 먹으면 하다가 멈출 수도 있는 그 '몸'이다. '몸'이 안따라 주는 거다. 맥주맛도 모르면서... 태극1장의 기본 품세만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봄부터 연병장을 그렇게 굴러야했건만...  더질 더질.

결국 '실천'은 이론책에 나오지 않는 것이고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건 구체적 행위를 통해 관계들의 충돌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차베스가 그랬다더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안되는 이유를 대느라고 긴 시간을 허비했다" 라고. 

3. 겸허함의 토대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다. 최소한 어디가서 양파니 쪽파니 하려면, 그 '실천'의 가능성-그건 자기 의지와 이성의 바깥 영역이다-이 가진 '긍정의 힘'에 대해 믿어야 한다. 전태일은 "우리가 희망 앞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라는 말을 했다. 

영화<애니 기븐 썬데이>에서 알 파치노는 전반전이 끝난 후 락커룸에서 그의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미식축구 영화다. 스타일리쉬한..) 
 

Life is this game of inches.그거다. 위대한 건, 어디서나 어느 곳에서나 손톱으로 함께 긁어 모으는거. 담론의 포크레인으로 퍼담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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