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 일 트로바토레
TDK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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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트로바토레>는 '음유시인'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싱어 송 라이터'쯤 될까?  극 중 주인공 만리코가 자신을 레오노라에게 그렇게 위장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복수의 대리인이며, 루나 백작의 정적이자 연적이다. 오페라<일 트로바토레>의 스토리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다. 각각의 기둥에는 '복수' 와 '사랑'이라고 씌여있다. 인류가 '겨울을 대비하여 햇빛을 모으고'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 <프레드릭>에 나오는 말이다. 프레드릭은 생쥐 작가다.) 가장 많이 곳간에서 꺼내 먹는 소재이다.  

<일 트로바토레>는 신화나 민담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유럽에 구전되던 신화나 민담 등이 베르디의 음악으로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에는 '유아살해' 라든가 '근친살해' 같은- 백작와 만리코의 관계는 카인과 아벨과도 같다.- 요소들과 '마녀설화' 같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일 트로바로레>의 도입부 성문 장면에서 백작의 근위수장인 페르란도가 화자가 되어 그 간의 상황을 요약한다.  

 현재 영주인 루나 백작의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변괴가 생긴다. 유령같은 집시 여인이 아이를 만져보고 나서 아이가 병이 생긴 것이다. 이에 분개한 백작의 아버지는 여자 집시를 화형에 쳐한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복수 해줄 것을 부탁하는데, 그 즈음 백작의 둘째 아기가 사라지고 만다.그리고 화형대에서는 집시의 유골과 함께 반쯤 타다 만 아기의 뼈가 발견된다. 

페르난도의 설명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 집시 딸인 아주체나가 등장하여 아들 만리코에게 복수를 외치며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줄 때까지는 말이다. 집시 딸인 아주체나는 화형식이 있던 그날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울며 어머니를 따라간다. 그리고 몰래 백작의 둘째 아들을 납치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고통을 보며 아기를 불길 속에 밀어넣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작의 아기가 옆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그렇다. 처절한 공포와 분노,슬픔 앞에서 그녀는 정신을 놓친 것이다. 그녀는 백작의 아들 대신 자기의 아기를  불에 밀어넣은 것이다. 

아주체나는 이제 어머니와 자기 아들의 비극적 죽음의 원인이 백작 가문에 있다고 생각하고, 장성한 첫째 아들, 루나백작의 복수를 도모하는 것이다. 불길에 던져지지 않고 살아남은 백작의 동생 만리코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만리코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 아주체나가 사악함의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데 이 오페라의 매력이 있다. 그녀는 실제로 복수를 꽤하지만 만리코를 정말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고 키운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형제 간의 살육을 유도하면서도 자기가 키운 아들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모순적인 어머니가 아주체나 인 것이다. 그녀의 이런 이중적인 딜레마는 그녀의 캐릭터를 살아있게 만든다. 아주체나는 결국 <일 트로바토레>에서 '복수 라인'의 중심 축이다. 

스토리의 또 다른 한 축은 '사랑 이야기'이다. 루나 백작이 만리코에게 적대감을 갖게 된 원인이다. 루나와 만리코는 한 여인을 두고 사랑의 경합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레오노라이다. 레오노라는 음유시인으로 위장한 만리코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럴 수 록 루나 백작의 분노와 질투는 커진다. 자기와 비할바 없는 음유시인 따위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비천한 자에게 여인을 빼앗긴다는 모욕감과 질투 앞에 칼을 들게 된다.   



 1978년 카랴얀이 빈 슈타츠오퍼와 함께 연주한 <일 트로바토레>는 이 오페라의 공연물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꼽히는 영상이다. 카라얀은 여기서 지휘는 물론이고 무대,조명,의상 등 무대 연출에도 직접 관여하여 '카라얀 프로덕션'으로 이 작품을 완성한다. 당시 잘츠부르크 무대에서 활약하던 카라얀은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 <일 트로바토레>에 특히 매력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영상물 내지의 해설을 보면 '일트로바토레에서 원형적 인물들을 보았기'때문이라고 한다. 이 공연물을 원래 TV로 유럽 전역에 방송될 예정이었으나 캐스팅과 관련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 공연물에서 30년전의 싱싱한 목소리의 플라시도 도밍고의 만리코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프랑코 보니솔리가 이 역을 맡기도 되어 있었으나 그의 공연 리허설에서 그의 상태가 거의 최악이었던 듯 하다. 그래서 대타로 급히 도밍고가 캐스팅되었다.  

<일 트로바토레>는 특히 4명의 남녀 성악가들의 고른 안배가 매력적인 오페라이다. 이 공연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기준 중에 하나는 4명의 각기 다른 성역의 가수들이 얼마나 재기량을 보여주었느냐, 그리고 그들의 조합이 어떤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는가이다. 카라얀의 <일 트로바토레>공연물이 고전 반열에 오를 수 있다면 이 음반이 그런 4명의 카리스마 있는 가수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만리코의 도밍고는 -지속적으로 지적되는- 고음의 한방은 보져주지는 못하지만 젊고 윤기 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카라얀의 오페라 연출에서 지적된다는'배우들의 정적인 움직임'에 있다. 도밍고의 장점 중에 하나는 그가 이탈리아 테너들처럼 청량한 고음을 장착하고 있진 못하지만 극 중 배역에 대한 몰입과 연기력에서 동급 최강 대우를 받아왔다. 부드러운 면모와 분노의 화신이 되어야 하는 만리코는 그런 면에서 역동적인 모습이 필요한데 이 오페라에서 도밍고의 움직임은 정적이다.  

루나 백작의 피에로 카푸칠리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바리톤의 안정감을 보여준다. 특히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백작의 근엄함을 느끼게 해주는 목소리는 훌륭하다. 또한 연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질투의 감정 역시 그의 선 굵은 목소리에 잘 어울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새롭게 발견한 소프라노가 레이아나 카바이반스카 이다. 세계적인 목소리임에도 칼라스나 서덜랜드급의 대우를 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흘려 지나갔던 듯 하다. <일 트라바토레>에서 그녀는 고혹적인 미모와 그에 어울리는 기품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레오노라를 보여준다. 아름다운 곡인 '사랑의 장미빛이 날개를 타고'라고 노래하는' D'amor sull'ali rosee'같은 곡에서 그녀의 여리면서 기품있는 목소리는 은빛 메차보체를 끌어낸다. 그리고 이들 세명이 함께 부르는 삼중창 Di geloso amor sprezzato 도 좋다. 



그렇지만 내가 <일 트로바토레>를 들을때 가장 민감하게 듣는 사람은 아주체나다. 이 역할은 독성이 대단하다. 그래서 너무 이 역할을 잘하면 다른 역할에서 무디어질 수도 있다는 역설도 존재한다. 카라얀의 사랑을 받은 메조 소프라노가 바로 피오렌차 코소토이다. 그녀의 아주체나는 뱃 사람을 원귀로 만든다는 세이렌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세이렌의 미소 뒤에는 늘상 독이 발린 비수가 숨어 있다. 피오렌차 코소토의 목소리가 그렇게 강력하다. 종종 그녀를 전시대의 최고 메조소프라노 줄리에타 시묘나토에 비교하곤 한다. 시묘나토가 조금 더 귀족적이고 풍요로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레퍼토리에소도 시묘나토가 조금 더 넓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아주체나는 피오렌차 코소토이다. 그녀는 카라얀의 <일 트로바토레> 말고도 명반으로 알려진 툴리오 세라핀이 지휘한 음반에서도 아주체나를 맡았다. 도밍고보다 조금더 더 좋아하는 카를로스 베르곤지가 그의 아들 만리코 역을 맡았던 음반이다. 카라얀의 이 영상물에서 피오렌차 코소토는 가장 연극적인 분장을 했다. 마치 디오니소스 제전의 광란의 여사제같다. 백박마녀전의 마녀처럼 코소토의 아주체나는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무대 위에서 내뿜는다. 끊어오르는 독성의 용광로처럼 이글 거리는데 이 점이 가장 큰 매력이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주체나의 이중성-즉 복수의 화신이자 어머니로서의-이 그 강력함에 가려지는 부분이다.   

조각같은 외모의 카랴안답게 사운드는 풍부하고 미려하다. 영상의 화질은 아무래도 78년 작품이다 보니 요즘 것들과 비교하면 곤란할 듯 하며,또한 무대 연출은 전통적인 스타일이지만 무대를 화려하게 만드는 제피렐리식과는 거리가 있다.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이 인상적이다. 한 세대 전에 좋은 가수들의 맹활약으로도 기억될만한 영상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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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단 코엔 외 감독, 조쉬 브롤린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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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페이퍼로 올렸던 것을 다시....스포일 있을지도 모름..^^0

부산에서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개봉관 이제 딱 1개뿐이다.

합리화된 영화관,멀티플렉스의 맹위 덕분에 개봉 영화의 회전율은 맥도날드 좌석 회전율보다 빠르다. 이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배급사의 속도에 올라타지 않으면 힘들어진다.배급사의 기준은 결국 '수익'이다.1-2주 사이에 '자본의 기대 수익률'에 호응하지 못한다면 영화는 '다윈의 자연선택가설'에 따라 처분될 수 밖에 없다.자본이라는 '타이타닉'에 올라타지 못한 '좋은 영화'(자본의 입장에서는 '별 볼일 없는 영화')를 보고자 하는 관객들은 이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어야 만 한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겠다.그나마 이 영화에 대해 위안이라고 한다면- 비록 늦었지만 -'분리수거' 되기 직전에 극장에서 건져 내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내게는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 영화였다.하지만 먼저 밝혀야 할 것이 있다.내 왼쪽 가슴 아래 께에서 올라오는 펌프질은 이 영화의 줄거리(또는 드라마 )가 만든 것이 아니다.영화 후반 작업의 요소들(예를 들자면 감정을 고양하는 음악같은 것)에 의하지도 않는다.영화의 스피디함과 극적 긴장감에 의한 것도 아니다.(통상적인 의미의 스릴러물이 갖는 속도감이란 의미이다).오히려 '극적 긴박감'이란 측면에서는 영화<추격자>가 앞선다.그 영화의 '야수적 감성'과 '속도감'은 오랜만에 한국 영화에 '춘광사설'을 날리고 있다.<추격자>가 망원동이라는 미로같은 폐쇄공간 속에서의 공포를 유발시켰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대척점에 있다.텅빈 공간이 주는 광장의 공포와 유사하다.

나는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현재적 고민과 함께 읽었다.조금 더 한정하자면 좌파적 기획의 고민같은 것이다.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본의 전세계적인 변화 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사유의 전환같이라고 하면 그럴싸 해 보일까?.물론 코엔 형제가 정치적 좌파인지는 알 수 없다. 저자인 코맥 맥카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현대 사회와 그 속의 인간 군상들에 대해 날카로운 페이소스를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영화를 '좌파영화'로 한정 짓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돈을 중심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그리고 그 외에 몇 명의 쫓는 자들이 나온다. 영화의 도입부는 군더더기 없다.'하드 보일드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듯 무뚝뚝한 하비 바르뎀의 안면 근육처럼 진행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보안관 살해 장면은 빠르지 않은 몇 커트 안에 살인마의 이미지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훌륭한 장면이다.보안관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서의 부감 샷과 그 앵글 속에 비친 바르뎀의 모습은 섬뜩하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저항에 대응하는 힘든 표정과 웃는 표정이 동시에 어려있다. 생명의 박동을 앗아가는 손의 무게감과 자신의 일차적 목표의 성취가 곧 도래한다는 이중적 감정이 살아 있다. 살해 이후 옆으로 누운 바르뎀은 마치 격렬한 오르가즘 이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간결한 동작과 병치되는 사망자의 수많은 구두발질의 흔적. 일본의 하이쿠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짧고 간결하면서 회화적인 상상을 가능케 하는 '절제의 미학'말이다.

하비 바르뎀이 분한 안톤 쉬거는 '죽음의 신'이다. 힌두의 죽음의 신 시바처럼 창조를 위한 무로서의 신이 아니다. 그는 잔악하며 강인하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무작위적이다. 전형적인 사아코 패스이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그를 '사이코 패스'라고 한정짓고 나면 다른 의미들이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다른 '사이코 패스' 영화와의 비교 밖에 건질 것이 없게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영화 속 '살인마' 안톤 쉬거 같이 집요하게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은 현재 세계에서 무엇일까? 이것은 최근에 본 콘스탄틴 프라비츠키의 <타라카노바의 황녀>의 주인공이 느꼇을 그런 임재해있는 '공포'와 유사하다. 내게 안톤 쉬거는 '자본주의'였다. 영화 속 사이코패스처럼 극악무도하며 비인간적이고 또한 무작위적인 공포는 '자본'의 공포와 유사하다.

안톤 쉬거의 동작은 살인-기계의 그것이다.그의 동작은 자연스럽지만 모든 것이 효율화되어 있다.그에게 군더더기란 없다. 코맥 맥카시의 문장과 인물이 하나가 된다. 하드 보일드의 강한 압축은 또한 최소 동선이라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짝패를 이룬다. 쉬거가 자신을 고용한 멕시코 갱들을 처단하는 장면,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 등등... 안톤 쉬거는 또한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다.그는 이것을 '원칙'이라고 말한다. 마치 자본주의하에서 '법'에 대한 정치 철학자들의 견해처럼 '스스로의 완결성'으로 순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이럴 필요까지 없지 않아?'이다.살해당하는 자들이 쉬거 앞에서 하는 말이다.이 질문은 드라마적인 진실을 부과화면서 동시에 '자본'에게 되묻는 방식이다.그 대답은 '짜증'과 계획대로의 '이행'일 뿐이다.베토벤의 최고 걸작인 후기 현악사중주 14번의 부제는 이것이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했다."

자본의 야만성 앞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은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질문이다.영화에서는 실제적 폭력이지만...원래 상징적 폭력의 기본 형식은 강요된 선택이다.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을 물신화시키는 '자본'의 세계에 그런 질문을 허용되지 않는다.질문이어도 그것은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한'이라는 강요된 선택이다.

 구조조정 당하는 직장인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대학을 졸업하는 백수가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묻는다?' 2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하는 차상위 계층 조손가정의 할아비가 묻는다.'이럴 필요까지 있느냐?' 

자본은 '공포'를 근간으로 진화해왔다.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아의 공포'가 그것이었다.제국주의의 시대를 넘어 '제국'의 시대라는 현재의 공간에서 자본의 힘은 훨씬 교묘하며 은밀한 공포이다.그곳에는 탈출구가 없다.소설가 이순원이 '하루 한 걸음씩 압구정으로 다가가는 세상'에 대해 <압구정에는 비상구가 없다>라고 했던 말은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이제 유일한 비상구는 '운'일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영화에서 안톤 쉬거는 선택이라는 일종의 '허구적 탈출'방식을 제공한다.두 번이 등장한다.한번은 주유소에서 또 한번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살해라는 목적으로 찾아간 모스의 아내에게서이다.첫 번째 동전 던지기에서 쉬거는 기존의 가치들에 대해 혐오를 들어낸다.그리고 공공연히 살해의 의욕을 붇돋는다.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히치콕식 맥거핀이며 복선이다. 동전 던지기의 정치적 함의는 후반에 있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를 현대화되고 진화한 '자본'이라는 공포,즉 전세계화한 자본의 공포와 그에 따른 사유의 변화방식이라는 코드로 읽는다고 전제했다.모스의 아내는 주유소의 사장이 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쉬거의 동전던지기에 응한다.모스의 아내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

 슬라보예 지젝을 잠시 인용하자 

"우리는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도 보는 것을 통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스펙터클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인 꿈을 깨드리려 하지만 이는 허사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이 글에 이어 반유대주의에 대한 예를 적용한다.그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비이데올로기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이 부차적 합리화를 가져와 '무의식적 편견'을 확증시킨다고 말한다.그러므로 반유태주의에 대한 정답은 '유태인이 정말 그런가?-아니 실제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런 관념은 '유태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안톤 쉬거의 동전 던지기에 대해 주유소의 노인은 선택을 한다. 반면 모스의 아내는 선택 자체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그것은 체제가 틀 지워준 질문에 대한 '탈영'이다.가장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의 저항은 '탈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에는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탈근대적 저항의 방식으로 '탈주'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근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적 통제 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근본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스의 아내는 탈근대적 방식으로 '공포'에 저항한 셈이다. 물론 모스의 아내 역시 '이렇게 까지 해야하느냐?'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은 과거 노인의 방시과 사뭇 다르다. 그녀는 이미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부터 해방된 주체의 형식을 갖고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자면 공포의 '자본'앞에서 '존재의 피투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공포'로 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톤 쉬거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모스의 죽음장면이다. 모스의 살해장면은 직접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그의 죽음은 마치 예고없이 찾아드는 정전처럼 그렇게 찾아온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담담하게 비춰지지만 효과가 크다. 특히 이 장면에서 시점의 교차가 흥미롭다. 사건 자체를 객관화시키면서 영화의 중심인물이자 죽음의 주체를 대상화 시켜버린다. 처음에는 살인 자체가 누구에 의한 것인지도 혼란스럽다. 보안관이 다시 현장을 찾아간 장면에서 그림자와 거울을 이용한 미장센은 인상적이다. 조금 앞에 장면에서 노인들로 대표되는 구세대들의 현실 개탄에 이어서 벌어지는 장면이다.현재의 축적된 자본의 공격양상이 마치 하늘 아래에서 떨어진 듯 개탄하는 그들은 향수로 자신들을 도덕화한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 역시 현재라는 '희생양'을 위해 재단을 쌓았던 '노인'들일 뿐이다. 만약 제목에서 말하듯 '노인'이 없어져아 한다면 그것은 '세대론'적인 노인이 아니다. 그것은 손에 피를 묻혔고 또한 현재를 만든'아버지', 그러므로 살해 되어야만 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코엔형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에게 동일한 장면을 연출케 한다. 모스가 멕시코 국경을 넘으며 점퍼를 사던 장면,쉬거가 팔의 붕대를 위해 셔츠를 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감독은 '탈주'와 다른 방식으로 '공포'에 대항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은 '순수'와 '휴머니즘'이다. 모스에게 점퍼와 맥주까지 팔던 청년들이 있었다면 쉬거에게는 다르다.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두가지의 가치를 동시에 충돌시키는데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이지는 않다.'탈주'와 '휴머니즘'에 기대지만 그것에도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주를 통한 저항은 폭력 앞에 무력하다. 또한 선의의 도덕 역시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에 포섭된다.

무표정한 자본주의는 상처와 흉터를 남기지만 다시금 길을 나선다. 스스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가면서 말이다. 지젝을 다시 인용하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조건들을 발달시켜 영구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데,이는 바로 그것의 내재적인 모순 덕분이다...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썩어있다.그것은 균형의 내적인 결핍에 의해,치명적 모순과 불협화음에 의해 낙인찍혀있다....그 내재적 모순이 가중되면 될수록 그것은 생존을 하기 위해 자신을 더 혁명화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쉬거에게 같은 질문한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유령이 떠돌고 있다...모든 것을 잠재운 유령이다. 돌아서서 멀어지는 듯 하지만 코 앞에서 숨쉬고 있는 그 유령에 대해 우리는 어떤 사유와 행동으로 맞설것인가?

이 영화를 읽는 방식은 천 개의 고원처럼 많을 것이다. 내가 본 것도 내가 아는 선에서까지만 이야기하는 한가지 방식일뿐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밤과 낮처럼 갈라진다.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고 또한 인터넷에서 본 네티즌의 별 점도 그렇다.영화라는 텍스트를 읽는 방식과 작품에 대한 기대 수준,관객들의 영화적 경험의 폭에 따라 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나뉘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수 백년 전 부터 어떤 사람들에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인류 역사가 이룩한 미학적 성취'(실제로 그 악보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인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한 클래식 음악 중 유명한 한 곡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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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제티 : 사랑의 묘약 (한글자막)
도니제티 (Gaetano Donizetti) 외 / 워너뮤직 (wea)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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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은 상투적인 동화다.시골 청년 네모리노는 동네 킹카 아디나를 짝사랑한다.그는 순박하면 건실한 젊은이이다.고전적으로 이런 청년들은 대개 내세울게 별로 없다.반면 아디나는 청순하며 예쁘고 또 적당히 약았다.가련한 네모리노...애정의 권력 관계가 이런 식으로 형성되면 영화<음란서생>에서 후궁을 빼앗긴 왕의 말처럼 '더 사랑하는게 늘 약자'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시골 청년 네모리노는 아기 손에 들려서 질질질 끌려다니는 아빠가 사준 곰돌이 마냥 아디나에게 끌려 다닌다.아디나..요 영악한 것은 치마를 팔랑 거리며 한번씩 웃어준다.가증스런것.^^

 1막에서 아디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를 동네 여편네들에게 읽어준다.그 둘을 불멸의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랑의 묘약'에 대한 이야기이다.아디나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는 네모리노의 귀는 당나귀 귀가 되었다.'복선'이라고 하기에 '사랑의 묘약'은 너무 직접적이다.귀가 쫑긋해있는 그에게 극을 갈등으로 이끌 제3의 사나이가 등장한다.군대 인사계처럼 생긴 벨코레 상사.그가 아디나에게 꼽힌 것이다.

네모리노의 사랑을 아디나도 안다.그러나 그 가증스런것은 네모리노에게 '넌 좋은 사람이지만 아니야'라고 말한다.짝사랑 한 두번 해본 사람들은 대한민국 헌법 1조같은 이야기를 여러번 들어봤을 것이다.대사를 좀 바꾸고 싶을 만큼 진부하다.하지만 오늘도 대학가 어느 술집에선 당신을 닮은 어떤 순진한 청년이 저 소릴 듣고 소주 1병을 더 시키고 있을 것이다.친구들에게 전화질 해대면서 울다가 웃다가 자학하다가 잊어버리겠다고 악을 쓰다가..오만 쌩쇼를 다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제4의 인물이 또 등장한다.떠돌이 약장사 둘카마라.마음급한 네모리노는 그에게 누구나 한 잔 마시면 사랑하게 되는 '묘약'을 구한다고 말한다.당연히 있지...뱀 한번 고아먹으면 요강이 터지는 약장사에게 그건 완전히 약방의 빨간약 수준이다.둘카마라는 순진한 네모리노에게 사기를 친다.포도주를 한병 주면서 구하기 어려운 약이라고 한다.

네모리노 와인 한 병에 적당히 풀린다.어차피 약발 받으면 아디나는 자기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그러면서 아디나에게 좀 튕긴다.아디나는 저게 쥐약 먹었나 하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지만 '어 거참 자꾸 돌아보게된다' 이거다.아디나는 약간 자존심이 상해서 느끼한 벨코레상사에게 결혼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네모리노는 약발 받으려면 하루 더 있어야 되는데 발등에 불떨어졌다.결국 한 병 더 사려하지만 돈은 없고...현역입대 해야 별로 받을게 없으니 모병입대 싸인한다.벨코레가 음흉하게 웃으며 모병지원서를 받아든다.라이벌 하나 군대 보내는 거다.

그런데...거참 나에게는 이런 행운도 없지만 네모리노에게는 있다.돌아가신 삼촌이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다.네모리노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하지만 민심의 행방에 민감한 것인지 돈의 흐름에 민감한 것인지 동네 처자들이 먼저 사실을 안다.네모리노가 나타나자..언니들 동방신기 따라다니는 팬클럽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콧대 높은 아디나도 이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도 네모리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대충 줄거리 여기까지 해도 충분할 듯 하다.큰 갈등도 없이 네모리노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 한 방 후에 서로의 마음 확인하고 해피엔딩 된다.

쓰다보니 줄거리가 길어졌다.

미스터 빈 처럼 생긴 롤란도 빌라존과 요리보고 조리봐도 예쁜 안나 네크렙코는 오페라계에서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커플이다.로베르토 알라냐와 안젤라 게오르규 이후 최고의 커플이다.실제 결혼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칼라스-스테파노,서덜랜드-파바로티 등의 맥을 잇는 커플이라 기대가 크다.

2004년 빈에서 공연된 <사랑의 묘약>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극 중 인물들이 그대로 재연된 듯 보이는 완벽한 캐스팅과 연기력이다.특히 남자 주인공은 롤란도 빌라존은 인상적이다. 그의 가창이 '최고의 네모리노'로 꼽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만큼 청자에 대한 파괴력이 있거나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의 연기력과 극 중 인물에 대한 몰입,그리고 그의 컴플렉스가 되기도 할 희극적인 외모가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그 자체이다.사랑의 묘약을 한 병 마시고 즐거워 추는 춤이나 박수를 이끌어내는 저글링들은 팬서비스이다.질질 끌려다니는 젊은 청년의 마음을 빌라존은 완벽하게 그려낸다.

안나넵트렙코는 일단 비디오가 되니까 다 용서해주고 싶어진다.40 넘은 배우가 총기넘치는 아디나로 분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별로 똘똘해보이지 않는 뚱뚱한 언니가 이 역할을 해도 감정이입하기 어려울 것이다.넵트렙코는 영상 시대에 활용도가 아주 높은 오페라 가수가 될 듯 보인다.개인적으로 그녀의 가창이 딱 내 스타일은 아니다.수많은 디바들과 아직 비할 바는 아닌 듯 보인다.하지만 아직 젋고 가능성은 무한하다.그리고 일단 예쁘니까 .^^

조연들 역시 훌륭하다.벨코레역을 맡은 가수는 현역 최고의 리골레토라는 레오 누치이다.젊은 가수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처럼 듬직하다.누치가 나오는 순간 왠지 무대가 안정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연륜이 가져다 주는 후광효과일 듯 보인다.적당히 느끼한 일데바르도 디칸젤로는 요즘 맹활약하는 바리톤이다.작년에 음악계의 최대 이슈였던 '모차르트 22' 오페라 전곡 상영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았던 '피가로의 결혼'에서 피가로 역을 맡았다.또한 '돈조반니'에서 조반니의 하인인 레포렐로 역을 맡기도 했다.전도 유망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어울릴 듯 하다.생긴 것도 쭉쭉빵빵하고 적당히 이탈리아 기름도 흐르고...    

훌륭한 캐스팅이 맛을 살린 <사랑의 묘약>이다.젊은게 좋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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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7-06-19 23:37   좋아요 0 | URL
정말 어느 구석 하나 빈 곳이 없는 캐스팅이 이 작품을 오래 남도록 해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야손은 일찌감치 결혼해서 아름다운 부인이 있고, 항상 공연마다 따라다닌다고 하니 결혼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아요. 우울할 때마다 한번씩 꺼내서 보는 디비디라지요. 왠지 기분을 묘하게 들뜨게 해주더라구요. 그 까탈맞은(리히테르도 음악일기에서 치를 떨었던) 빈의 관객들을 열광에 몰아넣은 두 젊은 성악가가 고마울 뿐이죠.ㅎㅎ

드팀전 2007-06-19 23:45   좋아요 0 | URL
미스터 빈에게 축배를 ^^ 전 그래도 음반으로 듣는 옛날 성악가들이 좋긴해요.
뭐랄까 ..더 다양한 개성들의 각축장 같은...

로렌초의시종 2007-06-19 23:58   좋아요 0 | URL
ㅎㅎ전 어느쪽이 더 좋다고 말을 못하겠어요~ 그래도 역시 동 시대를 같이 살면서 궤적을 직접 따라갈 수 있는 요즘 성악가들이 조금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옛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역시 달리 이름이 남은게 아니구나 싶더라구요. 요즘 유투브에서 이런저런 짧은 영상 보는 재미로 살거든요.^^ 얼마 전에 들었던 니콜라이 갸우로프의 La calunnia는 감동이었어요.ㅎㅎ

드팀전 2007-06-20 07:28   좋아요 0 | URL
제 회사 컴퓨터가 윈도우98쓰는 수준의 것이라서..유투브는 언감생심^^...영상적인 차원에서 요즘 가수들은 기술의 도움을 많이보지요.저도 dvd는 요즘 걸 사요.흑백화면 또는 비디오 수준의 화면을 보다가 요즘 나오는 DVD보면 눈이 시원해지잖아요.물론 음질면도 그렇고.
갸우로프는 맏형 같아요.생긴 것도 그렇고 소리도 안정감이 있고...생긴거랑 음악이라 비슷하게 가나봅니다.
 
로시니 : 세빌리아의 이발사 - 한글자막 포함
유니버설뮤직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유니버셜에서 최근 나오는 한글 번역판 DVD는 여러모로 평가가 좋다.영어를 따라가느라 음악과 영상에 집중하기 힘든 점을 조금 덜어주기 때문이다.물론 영어가 우리말처럼 편안한 사람들이야 한글 읽는 거나 영어 읽는 거나 오십보 백보일것이다.그러나 대개는 모국어로 된 번역이 빨리 읽힌다.그런면에서 오페라 DVD가 라이센스로 보급되는 것은 오페라의 층을 넗히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우선 유니버셜의 DVD들은 특정 극장과 특정 시기에 상영된 작품들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대개가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공연이 많다.그렇다보니 남자 주인공은 열에 아홉이 '플라시도 도밍고'이다. 공연물들이 주로 80년대 또는 90년대 초반에 녹화된 것이라는 점도 문제다.화질과 연출이 이 시대의 기대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그런면에서 볼 때 가장 최근에 나온 레알 마드리드 극장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그 동안의 유니버셜 DVD의 약점을 어느 정도는 해소해주고 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공연물은 2005년 레알 마드리드 프로덕션의 새로운 작품이다.무대 연출가는 에밀리오 사기이다.공연이 시작되고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 위에서 세트가 만들어진다.검은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오고 가면서 세비야의 하얀 거리를 만든다.무대의상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무채색의 세련된 조화는 2막 마지막 부분까지 이어진다.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극의 마지막 부분이 되면 무대 위는 검은 색과 흰색의 단단한 조화를 벗어던지고 총천연색으로 변한다.갑자기 조르지오 알마니에서 베네통으로 옷을 갈아입는 느낌이다.사랑하는 두연인의 결합을 축하해주기 위해 무대는 동화처럼 바뀌는 것이다.무대 연출가는 이렇게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무대의상의 전환을 생명력의 분출로 설명하고 있다.동화 같은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지만 무대 전체를 이끌고 가는 심플함 역시  매력적이다.흰색과 검은 색으로 구성된 옷을 입어도 스트라이프 패턴,물방울 패턴등을 활용하여 지루함을 없앤다.오히려 무대의 배경과 어울리는 깔끔함으로 기억된다.장면의 전환은 서곡과 마찬가지로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진다.무대를 만드는 과정등은 보너스 DVD에 실려 있다.오페라 무대가 대략 저렇게 만들어지는 구나를 훔쳐보는 즐거움이 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출연하는 가수들은 현역 최고의 로시나 가수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사랑에 목메달고 있는 알마비마 백작은 페루의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가 맡았다.몇 년전 부터 오페라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잘생긴 청년이다.전형적인 레제로 테너로 가볍고 탄력있는 목소리가 그를 동시대의 최고의 로시니 테너로 만들어가고 있다.1막 전반부부터 시작되는 카바티나부터 플로레즈는 사랑의 열정에 상기된 젊고 자신만만한 알마비마 백작의 모습을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나름대로 훤칠하게 생긴 외모 역시 비디오가 중요시되는 최근의 오페라 무대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큰 메리트가 되고 있다.

로시니의 현명한 여자 주인공 로지나 역은 스페인의 마리아 바요가 맡고 있다.그녀는 모차르트나 헨델음반등으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가수이다.플로레즈의 젊음에 비해 외모는 조금 나이 들어 보인다.그러나 그녀의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개성적인 목소리는 현대적인 여성상으로서의 로지나를 잘 표현해내고 있다. 마리아 바요의 음색은 크리스탈처럼 맑다.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유리관을 막 빠져 나온  산소같은 생기가 느껴진다.사각거리는 홑이불을 펼치듯이 마리아 바요는 탄력 있는 가창을 들려준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이발사 피가로 역할을 맡은 피에트로 스파논리이다.그는 정말 호남이다.키도 크고 다리도 길다.생긴 것 역시 귀족적이다.플로레즈와 서있는 장면을 보면 어디가 귀족인지 잘 모르겠다.오지랖 넓은 중매쟁이 피가로로 보기엔 너무 멋있다.그는 마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대농장 소유주처럼 생겼다.그의 가창 역시 희극적이 부분을 살리기에는 너무 점잖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돈 바질리오에 나오는 루제로 라이몬디는 일단 무척 반갑다.아무래도 자신감있는 목소리는 아니다.그래도  한 시대를 대표했던 베이스가수들 젊은 가수들 틈에서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바르톨로를 맡은 브루너 파라티코는 생긴 외모만큼 인상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외모는 나이든 늙은 의사와 너무 어울리지만 말이다.

새로운 프로덕션의 작품이지만  실험적이지는 않다.배경은 대략 계몽주의 시대쯤으로 설정해 놓고 있다.실험성 보다는 -바그너나 베르디가 아닌 로시니니 만큼- 로맨틱하며 코믹한 오페라 부파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는 쪽을 택하고 있다.최근 <세빌리아의 이발사>녹음이나 DVD가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 공연물이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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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그너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외 / DG (도이치 그라모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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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 중 하나이다.바그네리안들에게는 바그너 음악의 정점인 <반지><트리스탄과 이졸데><파르지팔>을 듣기 위한 선행학습쯤으로 여겨진다.대개 <방황하는 네델란드인><탄호이저><로엔그린>등이 기존의 오페라와 큰 차이를 갖지 않으면서도 후기 바그너의 전조를 예감할 수 있기 때문에 추천된다.이런 선행학습을 통한 음악듣기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음악 듣기가  마치 태권도 승급심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물론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데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더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모차르트가 바그너보다 덜 된 음악가이기 때문이 아니다.바그너의 음악은 -그가 말했듯이-음악,문학,철학,신화학 등의 많은 정보를 한 접시에 담아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 접시 안에 들어있는 재료들을 음미하려면 어느 정도 예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편안함을 주는 감상중심의 음악팬에게 이런 공부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그리고 공부하면서 들어야하는 음악이 꼭 훌륭한 음악감상 태도라고 생각치는 않는다.어떤 좋은 음악은 무도장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들어야 제 맛이다.또 어떤 좋은 음악은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와이퍼의 박자에 맞추어 들어야 최고다.다양한 음악과 다양한 청취 방식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공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대하며 귀찮은 음악'이다.사실 어떤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듣느냐는 질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예술'에 대한 가치관의 설정의 문제이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의 다른 음악처럼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곡이다.7년마다 한번씩 뭍에 오르는 유령선장 네덜란드인.그는 저주를 받아 바다를 헤매인다.저주의 족쇄를 풀 수 있는 길은 한 여인의 희생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길이다.바그너는 이 신화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꼇다는 것이 정설이다.바그너는 일종의 '모성컴플렉스'가 있었던 사람이다.그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바그너는 사랑에 굶주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자신과 동일시했다.그리고 바그너의 도피행각에 겪었던 항해의 경험까지 반영되었다.서곡을 필두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폭풍치는 바다'의 주제는 그래서 더욱 생생하다.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폭풍우 치는 바다의 그르렁 거림이 쟁쟁한 금관과 강력한 현악 앙상블에 의해 묘사된다.

이 DVD는 85년 바이로이트 실황으로 유명한 하리 쿠퍼의 연출이다.과거에 LD로 나왔을 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이미 20년전 연출이고 이후 새로운 프로덕션이 새로운 시대의 바그너 무대를 꾸며오고 있지만 쿠퍼의 실험적이며 설득력있는 연출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는다.85년 하리 쿠퍼 프로덕션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주인공은 단연코 젠타이다.이 공연에서는 리즈베트 발스래프가 젠타 역을 맡았다.그녀의 가창은 바그너 음악에 필요한 근기가 있으면서도 신화/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불안감을 표현하기에 적절했다.또한 촛점을 잃은 듯 한 눈빛,경계선 인격장애자가 가졌을 법한 광기가 그녀의 연기에 담겨있다.그녀의 훌륭한 가창과 연기는 하리 쿠퍼가 젠타의 분열적 성향에 연출의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젠타는 공연 내내 무대 좌측의 작은 철재 난간위에 서있다.가슴에는 신화 속 주인공인 네덜란드인의 초상화를 앉고 말이다.그녀는 단 한번도 그 초상화를 내려놓지 않는다.그녀는 무대 위에서 현실/신화 속을 오고간다.철재 난간 위에서 그녀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온 아버지 달란트를 본다.저주받은 네덜란드인과의 거래도 지켜본다.선원들의 춤도 바라본다.또한 철내 난간을 내려와 들이대는 에릭을 거부하기도하고 네덜란드인의 존재를 믿는다고 놀림하는 동료들에게 멋진 발라드를 들려주기도 한다.하리 쿠퍼가 젠타를 무대에 계속 남겨둠으로써 생기는 효과는 훌륭하다.인구에 회자되던 선원신화와 원신화가 현실에서 재현되는 과정이 2중구조로 명확하게 보여지면서 또 무엇이 신화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모호하게 만든다.젠타가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드라마의 내러티브는 다른 말로 하면 젠타의식 속에 있었던 네덜란드인 신화의 반영이기도 하다.이런 생각을 계속 발전 시키다보면 무대의 내러티브가 젠타의 무의식인지 극중 현실인지 헷갈리면선 묘한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네덜란드인과 젠타의 조우 장면은 현실과 신화의 경계에 서 있는 젠타의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아버지 달란트가 무대 뒤에서 검은 실루엣의 네덜란드인을 데리고 온다.그리고 자리를 떠난다.무대 뒤편에 다시 네덜란드인의 배(양손을 모은 모양을 한)앞에 달란트와 이야기를 나눈 네덜란드인이 나온다.(사이몬 에스테스가 이 역을 맡았다.흑인 노예같은 인상이다.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네덜란드인의 절규가 영화에서 본 흑인 노예의 절규처럼 현실감이 있다.) 결국 무대위에는  두 명의 네덜란드인이 있는 셈이다.어디가 젠타의 무의식속에서 나온 음성인지 어디가 아버지 달란트가 데려온 실루엣 네덜란드인의 목소리인지 구분이되지 않는다.또한 이것을 구분하려 하면 하리 쿠퍼의 연출이 의도한 바를 훼손하게된다.극중에서 젠타와 네덜란드인은 거의 서로를 바로보며 이야기하지 않는다.우리고 보고 있는 네덜란드인이 신화 또는 신화를 내재화한 젠타의 의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대개 여성의 희생을 통한 영원회귀라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방황하는 네덜란드인>도 그런 도식을 따른다.이 오페라에는 에릭이라는 젠타를 원하는 남자가 등장하여 일종의 삼각관계를 형성하게 된다.에릭과의 삼각관계는 결국 비극을 향한 전초가 되는 셈이다.하리 쿠퍼의 연출에서는 그런데 이 부분이 아무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쿠퍼의 연출이 의도한 바는 그런 통상적인 비극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수들의 가창도 노련하고 카메라의 화면구성 역시 볼 만하다.간혹 막과 막의 연결을 위한 진부한 디졸브 화면이 눈에 거슬리기는 한다만 그정도는 눈감아 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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