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오브 맨 - 할인행사
알폰소 쿠아론 감독, 클라이브 오웬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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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에 눈이 내릴 수록 눈은 '희망'을 향한다.  역설적인 징후다. '희망'이 사라질 수록 '희망에 대한 욕망'은 커진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희망을 원한다.'고 선언할 수 있으리라. 불과 몇 년 사이에 '희망'이라는 말을 봄철 돋아난 연두빛 새순처럼 좀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비록 그 희망이 봄날의 아지랑이거나 또는 흘러넘치는 술잔의 잉여일지라도 말이다.  
  
  모든 '희망'은 애둘러온 '희망'이어야 한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희망'이며 일종의 '부정성의 희망'이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절망 쪽에 늘 고개를 주억거리는 '비극 친화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키지도 못할 허언이나 낭만적 상상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 잘될거야' 또는 '언젠가 되겠지' 는 술자리에서나 결혼식장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것도 싫다.'바닥을 봐야 튀어오를 곳이 있다'는 닮아빠진 전언에 문종이 한 장 더 바르는 짓 말이다. 나는 '절망'이나 '포기' 이후 뭐가 있는 지 모른다. 정확히는 '그 이후 뭐가 있는지 없는지 내 알바가 아니다'가 모토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성향은 여전하다. (쉬크하기는...) 

하지만 '부정성의 희망'이란 것. 골똘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희망의 실재'가 아닌가 싶다.  '희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 아닌가? 68혁명이 원했던 그 불가능성말이다.  

내게 '희망' 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나의 아이들이다. 아이 이전/ 이후에는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애 낳아봐야 어른된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류의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희망'의 전도사가 될 생각은 없고 되고 싶지도 않지만 '희망'이라는 공간에 대한 재영토화의 계기는 있어야 했고, 또 그런 일이 있었다면 1m도 안디는  작은 그 아이들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희망'을 다시 창조해야 했다. 소급해서 보면  인류라는 족속들 중 일부는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목록을 세대 유전하기 위해서 이어져 온게 아닌가 싶다.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은 아이가 사라진, 아이들을 잃어버린, 즉'불임의 세계'가 배경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옥외 전광판은 인류의 마지막 아이가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속보를 전한다. 인류는 마지막 아이의-실제적 나이는 청소년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한다.  

 그렇다면 이 미래 세계에서 무엇이 불임을 만들었을까? 사실 원인은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치 않다. 제대로 언급되지도 않는다.(환경 호르몬때문이었을까? ^^) 이미 인류는 '불임의 시대'를 조건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실제감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가 현실의 조건인 것 처럼 말이다. 현재의 자본주의를 생각해보자. (좀 더 정확히는 우리가 의식적/무의식적 이데올로기로 믿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말이 정확하겠다.) 자본주의는 끝임없는 흐름을 목적으로 한다. 즉 무한 생산-소비가 전제조건이다. 그런고로 앞서 말한 '불임' 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하지만 자기증식하는 자본주의는 그외의 것을 타자로 만들며 '(타자의) 불임'을 생산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이외의 것은 없다'  '역사의 종언'이니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니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그로 우리가 '불임'속 인류임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자본주의 외엔 없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개인을 그런 방식으로 호명하는 순간-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자본주의하의 불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분고분해지게끔 만든다. 

  물론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론>을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이 자본주의의 욕동-일종의 자기증식형 경향성-이라고 말한바 있다. 자본주의 외에 다른 것을 상정할 때 우리는 더 커다란 괴물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래, 그러니까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 충실하며 행복해지자' 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불러온 세계의 풍요와 그 안팎의 비참 속에서 어떤 이론적 구멍, 어떤 가능성의 돌파구를 내보자는 것이다. 가라타니식으로 말하자면 '가능성의 중심'으로서 '불임'을 돌파해보겠다는 것이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이제 인류에게 남은 것은 서로를 대적하며 머리통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으로 입을 닦는 것 뿐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우골리노 백작처럼 말이다. 우골리노는 탑에 갖힌 채 배고픔으로 인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을 버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탑 안에서 비극적으로 아사한다. 그의 복수는 오로지 지옥에서나 가능할 뿐..

"그 때 한 구멍에 두 놈이 함께 얼어 붙은 것이 보였다. 한 놈의 머리가 다른 한 놈의 머리에 모자터럼 얹혀있었는데 굶주린 놈이 허겁지겁 빵을 먹듯이 위에 있는 놈이 밑에 있는 놈의 머리와 목사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 32편  

 그런데 주인공 테오는 이런 현실로 부터 무감각하다. 일종의 무감각. 정치적 용어로 하면 '냉소주의'다. 그 만인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들 마지막 인류의 죽음에 애도는 하지만 인류의 사멸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테러는 테러이고, 격리는 격리일 뿐이다. 이 영화에 대해 높이 평가한 지젝이- 그의 인터뷰가 유투브에 있지만 슬라브식 영어탓에 오래 듣고 있기 힘들다- 이 영화의 앞면과 뒷면, 즉 배경이 되는 정치적 갈등의 -인종주의, 정치적 과잉 억압등-과 그에 반해 이질적으로 평온해 보이는 내부 정상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는 점도 거기에 있다.  지젝이라면 우리가 '냉소'에 빠져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또는 '민주주의' 라는 이름의 그곳 아닌가?

  지젝이 지적하고 있듯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디스토피아의 현실이 은폐된 평범하고 전통적인 의미의 영국 일상 풍경이다. 한쪽은 폭동에 격리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 또 한 쪽은 여전히 근위대가 낡은 위용을 자랑한다. 먼 미래같지만 공간의 축소만 제외한다면 '여기'아닌가? 여담이지만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반가왔다. 내 또래의 락 음악 애호가들은 흥얼댈만한 곡이다. 공포에 쩍 벌어진 입 자킷으로 유명했던 킹 크림슨의 'court of crimson king'이다. 80년대 락매니아들은 이 앨범과 동시에 이 앨범의 히트곡 'epitaph' 를 기억할 것이다.  

테오의 사촌이 근무하는 곳은 일종의 미술관이다. 영국정부가- 불임의 시대, 다른 나라들은 이미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다. 오직 영국만이 어찌되었든 통제되고 있다- 인류의 유산들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계 각국의 작품들을 컬랙션하는 곳이다. 테오가 그곳에 들어가자 마자 처음 만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이다. 미술관답게 매우 모던하고 매끄러운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홀에 걸린 그림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리고 또 하나 창밖으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의 돼지와-또 모른다 .락밴드CAKE의 돼지일지도- 핑크플로이드의 자킷에 나온 굴뚝 비스무리한 것도 보인다. (나는 가끔 영화 속에서 감독들이 배치해 놓는 이런 소품들이 좋다.잔재미를 주니까) 테오는 곧 인류가 없어지면 이런 작품들도 의미가 없을텐데 왜 수집하느냐고 묻는다. 사촌은 미래는 관심없으며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분히 세속적이며 또는 냉소적인 현실주의다.  

  

 
 주인공 테오도 한때는 반정부테러리스트였다. 그가 어떻게 전향(?)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저 '운명'을 택했다는 정도의 설명뿐이다. 하지만 전 부인이자 이민자 권리를 위한 -극중에는 이들은 '푸지'라고 부르며,지워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그런데 인류의 '희망'은 또 그들로 부터 나온다. 매우 정치적인 설절아닌가? - 테러리스트 집단의 지부장이 그를 찾는다. 그리고 그에게 자의반 타의반 프로메테우스의 의무가 지워진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분히 신학적이며 신화적이다.(아마 지젝이 이 영화를 좋아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 '테오'의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테오'란 이름은 '신과 관련된' 것이란 뜻이다. 영화 속에서 테오의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는 베들레헴을 찾은 요셉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세레자 요한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삼위일체중 성자는 앞으로 '딜런'- 밥 딜런이 연상된다-이라고 불리우게 될 여자아이다.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장소는 베들레헴의 마굿간 처럼 푸지들의 쓰레기같은 집단거주지의 폐허 속이다. 예수가 마굿간이라는 가장 낮은 장소에서 태어낫듯이. 

 

  

좀 뒤로 가서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마지막 롱테이크의 탈주씬을 보자. 주인공 테오는 모세와도 같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어린 시절 교회사람들과 함께 가서 본 찰튼 헤스튼 주연의 <십계>를 떠올렸다. 바짝 쫓아온 이집트인의 추격 앞에서 정말 통렬하게 갈라지는 홍해.(당시 극장 곳곳에서 '할렐루야'가 터졌다.) 테오가 안고 있는 아이 앞에서 경이에 찬 침묵에 쌓여 갈라지는 무리들의 모습은 마치 그 장면의 패러디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유대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나룻배씬도 그렇게 일치한다.    
   

 쿠아론 감독은 영화 중간에 넌지시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작은 질문을 상정한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 그리스 비극이 던졌던 질문이다. 쿠아론감독은 히피처럼 사는 제스퍼(마이클 케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운명'에 대항하는 '신념'이라는 과제를 던진다.  그는 예감되는 죽음의 상황 앞에서 디스토피아에 사는 마지막 인류를 위해 친절하게 고안된 알약을 통해 편안한 마감을 택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식물인간이 된 자기 아내를 위해서만 그걸 사용할 뿐. 주체적인 죽음 즉 신념에 따른 죽음을 선택한다. '불임의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저항력은 '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실주의 이데올로그에 맞서는 주체의 윤리적 자기선택이기나 한 것 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한다. 감독은 그냥 그렇게 유동하는 불안 속에 끝낼 의도였다고 하나 결국 다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상투적이게도 -'미래호'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좋았느냐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미래호'는 분명히 치명적인 사족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긴 한다. 이 영화가 상업영화였으니-이건 여러 입김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했으리라.  

    
 늦은 밤까지 DVD로 이 영화를 본 나는 주말도 집안 팎으로 분주하다. 그래도 집 안에 있는 녀석들과 노는게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제일이다. 나는 일이 없으면 땡하고 집으로 가는 사람인데, 요즘은 빠질 수 없는 일 때문에 잠든 아이들 옆에 소리를 죽여 눕는 경우가 많다. 11월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나는 여전히 ' 희망하는' 존재이다. 소중한 내 아이들과 귀중한 그 아이들의 친구들을 위해서,  이 땅에서 내게 할애된 시간만큼 세상이 한뼘만큼은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하는게 평범한 아빠로서의 소망이자 다짐이다.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시대'이다. 최소한 희망을 물려줄 수 없는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희망을 아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도 열량 제로 것들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련다. 희망의 가능성에는 늘 무게가 있다. 

<바람구두님 홈페이지 대문 사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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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 할인행사
앤드류 도미닉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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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dvd를 찾다가 지난 페이퍼들을 찾게 된거다.결국


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영화제목이 좀 길다. 제목만큼이나 상영시간도 길다. 대략 2시간 40분 정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수 없다.

바로 DVD로 나왔다. 전주 국제 영화제를 찾았던 행운아들은 이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행운아들이고 그들의 심미안에 박수를...

올해 나를 가장 기쁘게 했던 영화는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내 주변 반응은 '그게 도대체 뭔 말이에요' '뭐야..끝이 그게' '아...진짜 답답하네' 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봉태규가 나온 <가루지기>에 더 큰 박수를 보낼 듯 하다. 취향이야 취향이니까..박수를 보내도 상관없다.(진짜루) 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경험의 일천함과 텍스트를 읽는 노력의 부재를 자신의 무기로 삼아, 당당하게 진지한 영화를 매도할 때-대개는 재미없다는 말로 통합된다. 도대체 재미란 무엇인가?- 는 정말 정말 마야코프스키의 싯구를 실행에 옮기고 싶어진다.

이 영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후에 가장 훌륭하다. 서부시대 실존했던 제시 제임스라는 갱 역학을 맡았던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로 부활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하다.

영화는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열차 강도 한 번 이외에는 별 다른 액션이 없다. 영화 제목이 이미 제시 제임스의 죽음을 밝히고 있으니까 제시 제임스가 로버트 포드에게 죽는다는 것을 알려도 그닥 스포일은 되지 않을 듯 하다. 제시 제임스가 죽는게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20살이 된 로버트 포드가 제시 제임스 일당에 합류하면서 시작한다.로버트 포드 역을 맡은 유약하며 지적으로 보이는 친구는 커시 애플렉이다. 이름이 좀 낯익지 않은가? <굿 윌 헌팅> <아마게돈> 등에 출연했던 밴 애플렉의 동생이다.

로버트 포드는 제시 제임스의 추종자다. 요즘말로 하면 열혈 팬이다. 그의 기사를 수집하고 그와 관련된 픽션들을 모두 읽는다. 심지어 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까지 기억해낸다. 이 소심해보이는 청년이 장차 제시 제임스의 암살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제시 제임스는 우상이자 아버지이고 또한 절대적 가치이다. 그랬던 그가 왜 제시 제임스를 죽이고자 할 까? 프로이트적으로 말하자면 살부를 통해 아들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함이었을까...아니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의 주인공처럼 '절대적인 미' 에 대한 타나토노스적 충동이었을까...왜 채프먼은 그래서 존 레논에게 총구를 겨누었을까? 결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돌아온 브래드 피트를 보자.

브래드 피트는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뽀쏭 뽀송한 그였을때가 가장 좋았다.

그 이후..나는 그에 대해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파이트 클럽>에서 뭔가 좀 다른 느낌을 주었지만...

결국 내게 그는 이 영화로 그가 허방이 아닌 한방임을 보여준 셈이다..

제시 제임스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정말 매력적이다. 그가 '안티 히어로'로서 매력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악마적으로 집요한 갱 두목이지만 이웃집의 선량한 가장이기도 하다. 그가 어린 아이를 상대로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고 이어서 잔설이 남아 있는 벌판에나와 말에 기대어 우는 장면은 그의 복잡한 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성과 속'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또한 '폭력과 침묵'을 동시에 품고 있는 사람이다. 브래드 피트는 이런 양가적인 내면을 가진 인물을 하나로 브랜딩해 내는 일에 성공했다. 무심한 듯 아름다운 서부의 풍광을 연출해낸 감독의 미장센도 큰 몫을 했다. 



영화는 아주 느릿 느릿 진행된다. 중반부까지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그러나 싶을 정도다. 마치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교향곡을 듣는 느낌이다. 지붕에서 땅을 향에 떨어져 내리는 거미줄처럼 흔들거리며 중심으로 치닫는다. 장면들은 눈 내리는 소리처럼 침묵과 침묵 사이를 매운다. 실제 영화에서도 눈 덮인 장면이 자주 나온다. 서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눈 내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처음 본다.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느린 템포 속에서 극적 사건을 맞아서 느림과 느림을 충돌시켜 긴장감을 극화하는 방식이다. 이건 정말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장면들에서 그런 '느림의 긴장감'을 맛볼 수 있는데...위 사진에 나온 씬도 그런 장면 중에 하나이다. 두 형제가 제시 제임스라는 거목을 잡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선을 나누는 장면이다. 누런 풀빛이 눕는 와중에 아무런 대사도 없이 둘의 얼굴과 펌프질하는 물 떨어지는 장면가지고 거사를 앞둔 긴장감을 표현해낸다. 이런 표현이 좀 뭣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화는 씬과 씬 사이의 이동장면이나 나레이션 장면에서 매혹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때로는 화각을 왜곡하거나 유리를 통해 비춰지는 장면들로 미장센을 구성함으로써 다분히 몽환적이고 선적인 느낌을 준다. 

영화는 제시 제임스 암살 이후에 조금 더 진행된다. 제시 제임스를 800번을 죽인 로버트 포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슴을 누군가에게 한 웅큼 움켜 잡혀 있는 먹먹함을 준다. 돌아보니 영화 내내 제시 제임스는 타자였을 뿐 로버트 포드가 나의 한 구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조연같은 주역이기도 했고 그의 시점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려는 카메라 앞에서도 나는 로버트 포드의 좌심방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시 제임스는 로버트 포드의 뒷덜미를 바라보면서 의자에 앉아 시거를 피우고 있다.  

영화 길다. 그런데 이 영화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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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2disc)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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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가 배트맨이다.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약간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친구다.

물론 잘생겼고 돈도 많도 믿음직한 친구들도 몇 명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약간 '과대망상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의 '과대망상증'은 '악을 섬멸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그는 '아이구...주인님 이제 그만 쫌' 이라고 말하는 늙은 하인에게

"배트맨이 넘을 수 없는 선은 없어요"

라고 마치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어요'라는 철부지 부자같은 말을 한다.

물론 배트맨도 '악'을 전부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밤 마스크 쓰고 쇠가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는 것도 힘든일이다. 그래서 배트맨은 살짝 '자경단'의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이에게 그의 임무를 건네려고 한다.

늘 상 입으로 이런 말을 달고 다닌다. "배트맨이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라고 말이다. 지쳐버린 영웅이거나 벽에 부딪힌 영웅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는 '영웅의 자기정체성 혼돈'을 잘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배트맨의 고담시도 역시 그렇다. 가짜 배트맨도 나타나고 얼굴에 분칠 한 녀석이 나타나 오히려 '배트맨'덕분에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한다. 그리고 물론 대중들은 그에 동의한다. ....'배트맨을 잡아라' 

 빌헬름 라이히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이(물론 여기서 라이히가 말하는 것은 속류 맑시즘을 말한다.그리고 이것이 또한 저변화되어 있기도 하다.)  대중심리를 이해하지 못한 무능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가난한 이들이 도둑이 되는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왜 도둑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욕망을 스스로 즐기는가' 라는 지점에 칼을 들이댄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이명박을 찍었던 것에 분개하고 '계급의식이 없어' 라는 세살 먹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 개탄보다 '왜 스스로 알아서 이명박을 노동자들이 지지했는가'의 '대중심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성격상으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계급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계급을 넘어서는 인간들의 심리적 한계이자 또 보편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모든 '독재'를 파쇼라고 칭하지만 실제 파시즘은 좀 다르다. 학자들마다 파시즘의 발생원인과 성격에 대해 좀 다르게 평가를 한다. 하지만 그 핵심에는 모든 파시스트 정당이 '대중동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비교적 제한된 파시즘론을 주장하는 로버트 팩스턴같은 경우에도 파시즘의 성장에 있어서 '대중동의'를 인정한다. 그는 파시즘이 초기에는 퇴역 군인같은 무리들이나 주변부 무리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말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파시즘의 가장 큰 토양이 된 것은 -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바로 '중간계급'이다. 즉 히틀러의 계급적 토대는 '중간층'이라는 거다. 요즘 말로 하면 '중산층'이다. 파시즘은 진행과정에서 국가별로 좀 차이가 있다. 몇 가지 공통된 점을 보면 '기존 우파들의 무능에 대한 반동,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척결, 강력한 민족주의'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20세기 초에 나타난 일종의 '뉴라이트'인 셈이다. (이걸 지금의 한국의 '뉴라이트'와 매칭시켜서 '이명박은 파쇼다' 라는 공식으로 쉽게 도출하진 마시길...내가 대중진보에 가장 혐오감을 느낄때가 그럴때다. 그것도 '포퓰리즘'이다. )

건강한 시민사회의 토대가 되는 '중산층' 과 '대중동의'의 중간계급은 차표 한 장 차이다. 물론 그 한 장 차이가 넘을 수 없는 차이이긴 하다. 어쨋거나 그런 위치에서 자신을 너무 강하게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불확실성의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 '성찰'을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불안정한 위인데 그 안에서 무엇을 그리 강하게 확실할 수 있겟는가? 그러다보면 이것 저것 '불안정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걸 멋들어진 말로 하면 '성찰'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세상물정 모르게 덥썩 믿다보면 하비 덴트를 믿게 된다. 어떤 영화 편집장은 미국 정치에 빗대어 하비덴트를 오바마에 비유했다.

우리나라에 빗대어 보면 아마 노무현이 될 듯하다. 지난 이야기 해서 무엇하리오만...'너네들 말이 다 맞아. 근데 그래도 노무현 밖에 없잖아' 를 기억한다. 대개는 영화 속 대중들처럼 나중에는 하비덴트를 몰아세운다. 배트맨 잡아오라고 말이다. 아니면 ' 진보니 뭐니 해봐야 별 볼일 없네'라고 '애라 모르겠다, 내 일 아니다.' 주의로 돌아간다.  배트맨도 밤 마다 옷갈아 입기 귀찮아서 하비 덴트를 후원한다. 부자들의 파티에 조커가 총질하면서 직접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조커는 총질을 하는데 무차별 살해는 잘 하지 않는다. 그건 양아치나 하는 짓이라고 조커는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의 웃음과 아버지,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는 조커...조커의 과거사? 그런데 조커의 말을 믿나?

 

'낮의 기사' 하비 덴트는 개인적 분노와 조커의 약발짓에 반쪽을 해가지고 팔팔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이런 과거의 '낮의 기사'들 지금 국회가면 많다. 현재 뉴라이트의 리더들...21세기의 대중진보들이 엄두에도 못 낼만큼 날아다니던 사람들 많다. 다 열거하기도 힘들다. 뉴라이트의 현재 리더들이 과거에 '거리'에서 얼마나 날아다니던 사람들이었는지.  


내게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은 바로 바로 이 친구 '조커' 다. 히스레저의 연기가 멋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순수 악이다. 푸잇...언젠가 써먹었던 말인데 또 써보자.

"...그래서 결국 너는 누구란 말이냐? " "나는 영원히 악을 원하면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괴테가 하신 말씀이란다.

다들 자기가 선이라고 믿기를 좋아하는데 조커는 스스로 '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당히 '너희들은 나의 자식이다' 라고 말하는 것같다.(나는 이런 캐릭터가 정말 좋다.) 괴테가 '악' 스스로 '영원히 선을 행하는 힘'이라고 말한 것이 그 이유때문이다. 배트맨이 멍청한 것은 이런 것 자체뿐만이 아니라 '영원히'라는 말 자체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때문이다. '선/악'은 영원한 수레바퀴이다.

 선은 악에 의해 만들어진다. '선'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즉 악이 있지 않으면 선이 생기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알라딘에서 그냥 조용 조용 글쓰고 음풍농월과 비분강개, 농담따먹기로 소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선'이 되었다. 이명박이라는 '악'이 등장하면서 부터 말이다. 다른말로 하면 '이명박'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저기 멀리 있는 '신자유주의'에 강 건너 돌던지면서 무던히 살았을 것을 말이다. 인하대의 김진석 교수는 이런 '선'들이 발끈할지도 모를 말인데 "'신자유주의에 모든 돌을 던지지 말라." 라고 일침을 가한다.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이해될 일이지만 세상의 배트맨들에게 '악'이 필요하다. 존재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말이다. 나는 김진석 교수의 메시지를 슬쩍 '진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을 요구해보라고 읽는다. 뭐 더 나쁘게 읽어도 할 수 없다. 

조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메시지다. 이미 틀 밖에 있다. 배트맨이 린치로 조커의 입을 열려고 하지만 조커는 '그런 걸로 통하지 않는다' 라고 웃는다. 열나게 얻어터지면서도 말이다. 배트맨도 그걸 알아버렸다. 결국 조커는 모든 판을 짜고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배트맨을 움직인다. 자기가 입을 열고 싶을때 열고, 또 일이 적당히 꼬이게끔 만든다. 본인에게도 시간을 벌고 말이다.

두 개의 배 씬은 좀 작위적이긴 했다. 일종의 게임이론이다. 버튼 눌러라 안 누르면 제들이 누른다. 둘 다 안누르면 둘 다 죽는다. 한쪽은 일반 시민, 다른 한쪽은 간수를 비롯한 제소자. 건강한 시민들은 학습한데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1인 1표 보통투표'를 한다. 제소자들은 뭐 웅성거리기나 할 뿐, 간수들의 총앞에 부재자 투표란 없다.

결과가 아주 재미있다. '대의민주주의제.. 엿먹어라.' 라는 결과다. 건강한 일반 시민의 투표결과는 거의 두배 차이로 상대방 배를 터뜨리는 것으로 나왔다. 문제는 소심한 시민들중 누가 마지막 버튼을 누를 것인가 이다. 죄수들 중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죽기 싫으면 눌러야한다. 간수가 기폭장치를 들고 벌벌 떨고 있을때, 덩치 큰 죄수가 스스로 그 역을 맡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버튼을 바닷가에 버린다. 그러니까...뭔 고하니 예전에 내가 언급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네가 만든 게임의 룰을 따르지 않겠다.' 라는 일종의 '탈주'방식이다. 물론 비슷한 일이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대롱대롱 빌딩에 매달려 있던 배트맨은 기세등등하다. 세상에는 너처럼 나쁜 놈만 있지 않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독이 약한 마음이 들었던지 아니면 착한 이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던 듯 하다. 몇 몇 개인의 양심적 선택. 물론 이것이 세상을 나아지게 해준다. 그런데 이거 완전히 운에 기대거나,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 위태한거다.

내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나는 제소자들의 배를 터뜨렸을 것이다. 물론 게중에는 ' 우리처럼 양심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 어차피 중죄를 지은 저들이 죽는것이 더 낫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야만 한다. 게 중에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버튼을 누르세요' 라고 말하는 이도 있어야 한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도 있어야하고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버튼을 누르시오.' 라는 이도 있어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조커를 위해서라도 '제소자'들 배를 터뜨리고 싶었다. 아니면 시민들이 토론을 다 끝내고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제소자들이 먼저 버튼을 눌러서 모든 토론을 허공으로 날려보래던가...배트맨에게도 '네가 막지못하는 것이 있다' 는 메시지 정도는 하나쯤 남겨주었어야 하는데....안타깝다.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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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날.....지금 막. 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었다. 판타스틱!! 마태와 악마의 대화가 나오는 멋진 장면이 등장한다. 결국 내가 하려던 배트맨/조커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나는 주절거리고 거장은 역시 더 짧고 강한 이펙트를 남기는 문장을 구사한다. 나는 루비콘 강은 넘어도 저건 못 넘을 듯 하다.  클래식 만세!!

" 넌 이곳에 나타나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어. 그게 뭔지 말해줄까? 문제는 너의 말투야. 너는 마치 그림자들을, 그리고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며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

 "늙은 소피스트, 나는 너와 논쟁할 생각이 없다." 레위 마태오가 대답했다.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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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베니치오 델 토로 감독, 할리 베리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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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 페이퍼에 올린 걸 리뷰란으로 옮깁니다.





영화의 원제목은 'Things we lost in the fire' 이다. 우리 말로 바꾸어도 달라 질게 거의 없는 착한 번역이다.

이 영화는 국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 지난 달인가 곧장 DVD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동네 비디오가게에 가서 시를 읊듯이 낭낭한 목소리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주세요.라고 하면

주인이 '그게 뭔데요?' 라고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흑진주 할 베리와 사령관 '체' 의 베니치오 델 토로이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영화여서 간략하게 줄거리를 좀 이야기해야겠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X-파일'의 히로인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나온다. 그의 극 중 이름은 브라이언이다. 그는 굉장히 착실하고 가정적이며 사려깊은 가장이다. 오드리(할 베리) 와의 사이에 10살 먹은 여자 아이와 물에 머리 담그기를 두려워 하는 6살의 남자 아이를 두고 있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절친한 친구가 있다. 마약 중독자 제리(베네치오 델 토로)이다. 브라이언은 제리에게 유일한 친구이다. 모든 사람이 제리를 포기했을 때 조차 브라이언은 그에 대한 우정을 져버리지 않는다. 오드리는 그런 남편이 못마땅하다. 

제리의 생일날,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은 제리에게 간다. 싸구려 모텔에서 마약에 쩔어 있는 제리를 만나고 브라이언은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말이다. 그런데 공원에서 한 여자를 두드려 패는 남자를 본다. 그를 저지하려는 브라이언. 남자는 갑자기 총을 꺼내든다.

영화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제리. 오드리와 제리는 이것이 첫 만남이다. 오드리는 제리에게 당신을 싫어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며칠 후 오드리는 제리의 모텔을 찾아가서 창고로 들어와 살라고 말한다.

과부와 죽은 남편 친구의 로맨스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상실'을 다루는 영화이다. 여성감독 수잔 비에르는 잔잔한 삶에 파멸시키는 충격적인 사건을 대하는 개인들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녀는 감각적인 클로즈업을 사용하고 바디캠이나 핸드핼드 카메라를 이용해서 조용하지만 상처로 흔들린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특히 눈이나 손같은 부위에 대한 세심한 클로즈업이 빈번히 사용된다. 반면에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내에서 상실감을 극대화시킬수 있는 롱샷등을 통해 할 베리의 처연한 마음을 그려낸다.

영화에서 오드리와 제리는 둘 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다. 오드리는 소중한 남편을 제리는 세상의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오드리는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제리를 침실로 불러들인다. 통속적인 상황인가? 그렇지 않다. 오드리는 정말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다. 남편이 잠들기 전에 귓볼을 만져주었듯이 제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제리는 그렇게 한다. 물론 성적인 긴장감이 도는 장면들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감독은 그 지점에서 살짝 씩 현명하게 비켜나간다. 

오드리의 딸이 제리에게 '아빠가 되면 안되겠냐?' 고 묻는다. 제리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브라이언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서는 안되지않겠냐고 말이다. 영화 내내 감독은 이 약속을 지킨다. 그렇지만 의리의 돌쇠같은 스트레오타입화 된 방식은 아니다.

오드리는 제리가 점점 브라이언의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에 분노한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감독은 오드리의 이중적인 감정을 잘 잡아낸다. 한편으로는 제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도 또 제리가 브라이언의 영토를 침범하게 될 까봐 두려워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 둘은 '상실'이라는 커다란 트라우마 앞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뚜렷이 들어나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마치 시간을 찍어내듯이 그렇게 상처와 싸우고 상처와 화해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의 미덕이 그곳에 있다.

영화의 제목은 브라이언 네 집에 있었던 화재와 관련이 있다.

<단테 신곡 강의>를 쓴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책에는 유명한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개인적 일화가 잠깐 소개된다.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입을 빌어 '신이 인간에 준 가장 큰 선물이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마르셀은 작별 인사를 하러간 도모노부에게 묻는다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있지.그게 뭔지 알려나?".....도모노부가 머뭇거리고 있자 마르셀은 이렇게 말한다. "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물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영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가브리엘 마르셀과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짧은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것 같다. 영화는 그런 가르침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절망'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더 주목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삶과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도 함께 말이다. 영화는 말미에 브라이언이 말한 '좋은 것은 받아들여' 라는 글귀로 끝맺는다. 현실이 지옥같아도 결국 그것을 헤쳐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진정 '좋은 것'을 잃었을 때이다. 그 좋은 것이 이름이 '믿음'이든 '사랑'이든 '희망'이든....정할 나름이다.

잔잔하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언젠가 '상실'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라면 더더욱. 할 베리와 델 토르의 연기는 훌륭하다. 특히 델 토르의 마약과 담배로 뇌의 절반 쯤 빈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듯한 연기와 눈빛은 인상적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와이프와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와이프가 좋아할 만한 영화다.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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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일반판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리나 레안데르손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예전에 페이퍼에 쓴 것들을 옮깁니다. 

눈은 침묵이다.

눈 오는 날은 그래서 아름답다. 세상이 동양화의 마지막 여백처럼 남아 있는 날은 읽던 책을 뒤로 물리고 눈이 완성하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내가 '차가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잘 얼린 네모난 얼음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햇빛을 머금은 민들레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아폴론의 미'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하다.  '차가움'은 일단 '단순함'을 준다. 우리가 가끔 모든 로코코적 수식을 걷어낸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정말 세련된 디자인들은 선을 줄인다. 눈은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선을 단 몇 개의 줄로 환원시킨다. 본질을 향한 질주같은 그런 선들은 아름답다. 우리는 눈이 지워지면 다시금 세상의 선들을 만나겠지만, 삶의 어떤 순간 순간에는 그런 선들을 생각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북극'을 사랑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갇혔다는 것은 침묵에 갇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폭설로 공항에 묶였던 날이 생각난다. 공항 대합실의 소란과 대비하여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은 조용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날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들이 흡음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끊겨버린 비행기에 대한 마음은 놓고 나니 하루를 거저 얻은- 남은 일이야 알아서 되라지 뭐-자의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디로 갈야할 지 결정하기 위해 나 앉은 공항 벤치에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눈이 건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다른 지역에 눈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어느 북구의 겨울과 그 침묵을 만나러 갔다.

영화 <렛 미 인>(여기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아서들 보시오. 그것까지 배려하면서 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구리구리한 요구요.)



영화 속의 스웨덴은 계속 눈에 덮여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눈이 펄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웨덴의 겨울풍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다. 하지만 결코 공포물은 아니다. 영화는 '성장영화' 이고 '사랑'의 영화이며 '봉합'(?)의 영화다. 왕따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가 주인공이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의 금발과 햇빛이 부족한 피부빛은 스웨덴의 겨울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칼로 나무에 분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를 만난다. 그녀는 '맞받아 치라'고 오스칼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한다.('소통'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마치 이 말이 이제는 '혁명'의 모든 조건인양 쓰이는 경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가나 '소통' '소통' '소통'이다.  남발하는 '소통'의 만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서로 '외롭다'는 조건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기존 공포물의 뱀파이어와는 다른 동화적 구현의 '렛 미 인' 에서 첫 번째 깜찍한 전환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그렇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이다. 나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 장승이나 솟대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뱀파이어'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구의 감독은 '외로운'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에 '왕따' 소년의 '외로움'에 침입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으면 - 스토리라인에 온 신경만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뱀파이어 이엘리는 오스칼의 '얼터에고'인 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엘리의 존재를 알게된 오스칼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엘리는 '나는 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오스칼의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내는 얼터에고로서의 이엘리를 감독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식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야' 오스칼의 망상이야라고 스토리를 따라간다면 관객의 상상력 협착증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중요한 장치가 스웨덴의 눈오는 풍경이다. 오스칼의 내면처럼 그곳은 눈으로 흡음된 침묵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상징계의 상징이 언어라면 상징계를 거세하는 표상은 침묵이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오스칼을 창 안에 있는 아이로 설정한다. 창 밖과 창 안이 모두 눈 속에 있는 셈이다. 북구의 겨울은 어둠과 묵음으로 이에 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무채색이며 이유없는 뱀파이어의 희생양이다. 감독은 여기서 음향효과를 이용한다. 어른들의 장면에는 몇 가지 시끄러운 일상의 소란을 설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는 단순한 기타멜로디로  덮어버린다. 단절이며 거세다. 동성애적 코드가 보이는 오스칼 아버지와 친구의 대화장면은 오스칼이 이런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된 존재임을, 즉 거세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없다.(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떠올려보자.)

오스칼은 눈오는 밤이 세계와의 소통의 단절을 말하듯이 오스칼 역시 언어들도 부터 단절된다. 상징적 질서와의 단절이다. 그는 '외로움'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성장통이지만 감독은 파괴나 일탈 같은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극단적인 폭발을 내재한 이 성장의 아픔은 결국 '뱀파이어'의 흡혈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흡집을 내기 시작한다.(하지만 상징의 질서는 힘이 세다.) 

이 영화 초반에 이엘리를 돕는 아버지 또는 애인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그는 이엘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흡혈을 하지 않도로 살인을 통해 이엘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는 유일한 제도적 안전 장치가 되는 셈이다. 뱀파이어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실패했을 때, 뱀파이어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잔인한 방식의 사랑의 완성이다.( 다분히 잔인한 것은 성장할 오스칼이 곧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는 마지막 암시 같은 것 때문이다.) 





영화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가방에 넣어서 어른들의 세계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결국 어른들의 언어는 그들을 침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오스칼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적인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런면에서 현실적이다.) 결국 오스칼은 언젠가 자신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인정함으로서만 그 여행을 마감할 수 있다. 오스칼의 셈세함은 그 선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는 이미 우리다. 우리들 역시 오스칼같은 봉합의 기억이 있었을지 모른다. 상징계로 통합되기 위해서 우리는 일정 정도 뱀파이어야하고 또 그런 기억조차 잊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런 태고의 섬세한 기억을 잃고 뱀파이어를 완전시 소거해 버린 순혈적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나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뱀파이어를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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