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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단 코엔 외 감독, 조쉬 브롤린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예전에 페이퍼로 올렸던 것을 다시....스포일 있을지도 모름..^^0
부산에서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개봉관 이제 딱 1개뿐이다.
합리화된 영화관,멀티플렉스의 맹위 덕분에 개봉 영화의 회전율은 맥도날드 좌석 회전율보다 빠르다. 이제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배급사의 속도에 올라타지 않으면 힘들어진다.배급사의 기준은 결국 '수익'이다.1-2주 사이에 '자본의 기대 수익률'에 호응하지 못한다면 영화는 '다윈의 자연선택가설'에 따라 처분될 수 밖에 없다.자본이라는 '타이타닉'에 올라타지 못한 '좋은 영화'(자본의 입장에서는 '별 볼일 없는 영화')를 보고자 하는 관객들은 이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어야 만 한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겠다.그나마 이 영화에 대해 위안이라고 한다면- 비록 늦었지만 -'분리수거' 되기 직전에 극장에서 건져 내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내게는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 영화였다.하지만 먼저 밝혀야 할 것이 있다.내 왼쪽 가슴 아래 께에서 올라오는 펌프질은 이 영화의 줄거리(또는 드라마 )가 만든 것이 아니다.영화 후반 작업의 요소들(예를 들자면 감정을 고양하는 음악같은 것)에 의하지도 않는다.영화의 스피디함과 극적 긴장감에 의한 것도 아니다.(통상적인 의미의 스릴러물이 갖는 속도감이란 의미이다).오히려 '극적 긴박감'이란 측면에서는 영화<추격자>가 앞선다.그 영화의 '야수적 감성'과 '속도감'은 오랜만에 한국 영화에 '춘광사설'을 날리고 있다.<추격자>가 망원동이라는 미로같은 폐쇄공간 속에서의 공포를 유발시켰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대척점에 있다.텅빈 공간이 주는 광장의 공포와 유사하다.
나는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현재적 고민과 함께 읽었다.조금 더 한정하자면 좌파적 기획의 고민같은 것이다.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본의 전세계적인 변화 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사유의 전환같이라고 하면 그럴싸 해 보일까?.물론 코엔 형제가 정치적 좌파인지는 알 수 없다. 저자인 코맥 맥카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현대 사회와 그 속의 인간 군상들에 대해 날카로운 페이소스를 던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영화를 '좌파영화'로 한정 짓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돈을 중심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그리고 그 외에 몇 명의 쫓는 자들이 나온다. 영화의 도입부는 군더더기 없다.'하드 보일드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듯 무뚝뚝한 하비 바르뎀의 안면 근육처럼 진행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보안관 살해 장면은 빠르지 않은 몇 커트 안에 살인마의 이미지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훌륭한 장면이다.보안관의 목을 조르는 장면에서의 부감 샷과 그 앵글 속에 비친 바르뎀의 모습은 섬뜩하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저항에 대응하는 힘든 표정과 웃는 표정이 동시에 어려있다. 생명의 박동을 앗아가는 손의 무게감과 자신의 일차적 목표의 성취가 곧 도래한다는 이중적 감정이 살아 있다. 살해 이후 옆으로 누운 바르뎀은 마치 격렬한 오르가즘 이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간결한 동작과 병치되는 사망자의 수많은 구두발질의 흔적. 일본의 하이쿠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짧고 간결하면서 회화적인 상상을 가능케 하는 '절제의 미학'말이다.
하비 바르뎀이 분한 안톤 쉬거는 '죽음의 신'이다. 힌두의 죽음의 신 시바처럼 창조를 위한 무로서의 신이 아니다. 그는 잔악하며 강인하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무작위적이다. 전형적인 사아코 패스이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그를 '사이코 패스'라고 한정짓고 나면 다른 의미들이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다른 '사이코 패스' 영화와의 비교 밖에 건질 것이 없게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영화 속 '살인마' 안톤 쉬거 같이 집요하게 '공포감'을 자아내는 것은 현재 세계에서 무엇일까? 이것은 최근에 본 콘스탄틴 프라비츠키의 <타라카노바의 황녀>의 주인공이 느꼇을 그런 임재해있는 '공포'와 유사하다. 내게 안톤 쉬거는 '자본주의'였다. 영화 속 사이코패스처럼 극악무도하며 비인간적이고 또한 무작위적인 공포는 '자본'의 공포와 유사하다.
안톤 쉬거의 동작은 살인-기계의 그것이다.그의 동작은 자연스럽지만 모든 것이 효율화되어 있다.그에게 군더더기란 없다. 코맥 맥카시의 문장과 인물이 하나가 된다. 하드 보일드의 강한 압축은 또한 최소 동선이라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짝패를 이룬다. 쉬거가 자신을 고용한 멕시코 갱들을 처단하는 장면,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장면 등등... 안톤 쉬거는 또한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다.그는 이것을 '원칙'이라고 말한다. 마치 자본주의하에서 '법'에 대한 정치 철학자들의 견해처럼 '스스로의 완결성'으로 순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이럴 필요까지 없지 않아?'이다.살해당하는 자들이 쉬거 앞에서 하는 말이다.이 질문은 드라마적인 진실을 부과화면서 동시에 '자본'에게 되묻는 방식이다.그 대답은 '짜증'과 계획대로의 '이행'일 뿐이다.베토벤의 최고 걸작인 후기 현악사중주 14번의 부제는 이것이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했다."
자본의 야만성 앞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은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질문이다.영화에서는 실제적 폭력이지만...원래 상징적 폭력의 기본 형식은 강요된 선택이다.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을 물신화시키는 '자본'의 세계에 그런 질문을 허용되지 않는다.질문이어도 그것은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한'이라는 강요된 선택이다.
구조조정 당하는 직장인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대학을 졸업하는 백수가 '이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묻는다?' 2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하는 차상위 계층 조손가정의 할아비가 묻는다.'이럴 필요까지 있느냐?'
자본은 '공포'를 근간으로 진화해왔다.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아의 공포'가 그것이었다.제국주의의 시대를 넘어 '제국'의 시대라는 현재의 공간에서 자본의 힘은 훨씬 교묘하며 은밀한 공포이다.그곳에는 탈출구가 없다.소설가 이순원이 '하루 한 걸음씩 압구정으로 다가가는 세상'에 대해 <압구정에는 비상구가 없다>라고 했던 말은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이제 유일한 비상구는 '운'일 가능성이 높다.하지만 그것은 허구이다.
영화에서 안톤 쉬거는 선택이라는 일종의 '허구적 탈출'방식을 제공한다.두 번이 등장한다.한번은 주유소에서 또 한번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살해라는 목적으로 찾아간 모스의 아내에게서이다.첫 번째 동전 던지기에서 쉬거는 기존의 가치들에 대해 혐오를 들어낸다.그리고 공공연히 살해의 의욕을 붇돋는다.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히치콕식 맥거핀이며 복선이다. 동전 던지기의 정치적 함의는 후반에 있다.
나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를 현대화되고 진화한 '자본'이라는 공포,즉 전세계화한 자본의 공포와 그에 따른 사유의 변화방식이라는 코드로 읽는다고 전제했다.모스의 아내는 주유소의 사장이 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쉬거의 동전던지기에 응한다.모스의 아내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
슬라보예 지젝을 잠시 인용하자
"우리는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도 보는 것을 통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스펙터클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인 꿈을 깨드리려 하지만 이는 허사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이 글에 이어 반유대주의에 대한 예를 적용한다.그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비이데올로기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이 부차적 합리화를 가져와 '무의식적 편견'을 확증시킨다고 말한다.그러므로 반유태주의에 대한 정답은 '유태인이 정말 그런가?-아니 실제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런 관념은 '유태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안톤 쉬거의 동전 던지기에 대해 주유소의 노인은 선택을 한다. 반면 모스의 아내는 선택 자체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그것은 체제가 틀 지워준 질문에 대한 '탈영'이다.가장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의 저항은 '탈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에는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탈근대적 저항의 방식으로 '탈주'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훈육시대에는 사보타주가 저항의 근본관념이었던 반면 제국적 통제 시대에는 도주가 저항의 근본 관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스의 아내는 탈근대적 방식으로 '공포'에 저항한 셈이다. 물론 모스의 아내 역시 '이렇게 까지 해야하느냐?'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은 과거 노인의 방시과 사뭇 다르다. 그녀는 이미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부터 해방된 주체의 형식을 갖고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자면 공포의 '자본'앞에서 '존재의 피투성'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공포'로 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안톤 쉬거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모스의 죽음장면이다. 모스의 살해장면은 직접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그의 죽음은 마치 예고없이 찾아드는 정전처럼 그렇게 찾아온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담담하게 비춰지지만 효과가 크다. 특히 이 장면에서 시점의 교차가 흥미롭다. 사건 자체를 객관화시키면서 영화의 중심인물이자 죽음의 주체를 대상화 시켜버린다. 처음에는 살인 자체가 누구에 의한 것인지도 혼란스럽다. 보안관이 다시 현장을 찾아간 장면에서 그림자와 거울을 이용한 미장센은 인상적이다. 조금 앞에 장면에서 노인들로 대표되는 구세대들의 현실 개탄에 이어서 벌어지는 장면이다.현재의 축적된 자본의 공격양상이 마치 하늘 아래에서 떨어진 듯 개탄하는 그들은 향수로 자신들을 도덕화한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 역시 현재라는 '희생양'을 위해 재단을 쌓았던 '노인'들일 뿐이다. 만약 제목에서 말하듯 '노인'이 없어져아 한다면 그것은 '세대론'적인 노인이 아니다. 그것은 손에 피를 묻혔고 또한 현재를 만든'아버지', 그러므로 살해 되어야만 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코엔형제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에게 동일한 장면을 연출케 한다. 모스가 멕시코 국경을 넘으며 점퍼를 사던 장면,쉬거가 팔의 붕대를 위해 셔츠를 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감독은 '탈주'와 다른 방식으로 '공포'에 대항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은 '순수'와 '휴머니즘'이다. 모스에게 점퍼와 맥주까지 팔던 청년들이 있었다면 쉬거에게는 다르다.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두가지의 가치를 동시에 충돌시키는데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이지는 않다.'탈주'와 '휴머니즘'에 기대지만 그것에도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주를 통한 저항은 폭력 앞에 무력하다. 또한 선의의 도덕 역시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에 포섭된다.
무표정한 자본주의는 상처와 흉터를 남기지만 다시금 길을 나선다. 스스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가면서 말이다. 지젝을 다시 인용하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조건들을 발달시켜 영구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데,이는 바로 그것의 내재적인 모순 덕분이다...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썩어있다.그것은 균형의 내적인 결핍에 의해,치명적 모순과 불협화음에 의해 낙인찍혀있다....그 내재적 모순이 가중되면 될수록 그것은 생존을 하기 위해 자신을 더 혁명화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쉬거에게 같은 질문한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유령이 떠돌고 있다...모든 것을 잠재운 유령이다. 돌아서서 멀어지는 듯 하지만 코 앞에서 숨쉬고 있는 그 유령에 대해 우리는 어떤 사유와 행동으로 맞설것인가?
이 영화를 읽는 방식은 천 개의 고원처럼 많을 것이다. 내가 본 것도 내가 아는 선에서까지만 이야기하는 한가지 방식일뿐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밤과 낮처럼 갈라진다.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고 또한 인터넷에서 본 네티즌의 별 점도 그렇다.영화라는 텍스트를 읽는 방식과 작품에 대한 기대 수준,관객들의 영화적 경험의 폭에 따라 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나뉘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수 백년 전 부터 어떤 사람들에게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인류 역사가 이룩한 미학적 성취'(실제로 그 악보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인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한 클래식 음악 중 유명한 한 곡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