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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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공전하는 행성이다. 밤에 잠들고 나서 운동은 시작된다.  아이에 따라서 공전 궤도와 공전주기는 각각 다르다. 때론 방향에 일관성이 없기도 하다. 간혹 개성적인 아이들은 회전 궤도를 만들지 않고 베게 너머로 이탈하기도 한다. 만약 아이들이 진짜 밤하늘에 달린 별이었다면 우주는 카오스 그 자체였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집 아이들은 하룻 밤에180도 정도만 돈다. 아침이 되면 난 내 발 밑에 있는 그들을 발견한다.   

  야간에 불규칙한 회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부모가 시도 하는 가장 어려운 일중 하나는 '이불 덮히기'다. 무한 도전에 가깝고 대개는 실패한다. 때로는 부모들도 아이 때의 습관에 따라 이불을 걷어차며 잔다. 요즘 부모은 그래도 좀 낫다. 그 고충을 헤아려 '조끼 이불'이라는 이불 대용품이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 안전벨트 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들에게 기능성 의류를 입힌다. 언젠가는 이것도 귀찮아 할 테지만 말이다.  

칼 폴라니에 대한 서평에 왠 아이들과 이불 타령이냐 할 사람도 있을게다. 칼 폴라니의 핵심 개념에 대한 내 나름의 비유이다. '경제야 이불 덮고 자라. 제발'  지난 몇 년 사이 인문,사회학계에 칼 폴라니의 훈풍이 불었다. 그리고 그의 주요 개념들은 이제 상식적인 용어로도 인용될 정도다. 앞서 이불을 이야기한 것은 폴라니가 말한 '배태성(embedness)'과 관련이 있다. 그들에게 침대라면 우리에게는 이불일 테니, 사회라는 이불 속에 뛰쳐나가는 경제를 다시 묻어주자는 것이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목적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것 처럼 폴라니는 경제라는 것에 선행하는 사회를 언급하는 학자다. 폴라니의 입장은 그가 비판하는 측을 통해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가장 큰 상대는 전통적인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리카도,멜서스 등이다. 폴라니는 그중 아담 스미스는 살짝 구해준다. 부각되지 못한 '도덕주의자' 스미스의 모습이 있기때문이다. 그렇다고 폴라니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맑스 연구에 단절/연속론 논쟁을 만들기도 했던 청년 맑스/후기 맑스 중에서 전자의 인본주의에 훨씬 높은 관심을 보인다.    

폴라니의 목적은 경제를 사회에 통합하는 것이었음은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폴라니의 이 책의 서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경제가 사회와 분리된 것이 근자의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일임을 논증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폴라니는 인류학적 방법론을 동원한다. 즉 개인적 이익이라는 새로운 개념보다 인류 사회가 상호교환, 호혜적 관계를 중요시 했다는 인류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기적 개인'과 '협조적 개인'이라는 문제는 인류학 뿐 만이 아니라 진화생물학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그리고 모종의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 폴라니 역시 이와 유사한 말을 하는데  '개인적 이익 추구의 선천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은 기실 '시장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의 목적을 위해 소급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연구가 경제학적으로 대단히 이질적인 것은 그것이 고전경제학이 의존하는 수리 경제학이나-이들에게 '경제는 과학이다'. 그래프와 수식으로 경제관계를 모델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직접적으로 인간 생활에 관여하는 형태의-후생경제학이나 케인즈주의같은- 정책적 경제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의 거대한 조류에서 살짝 비껴나간 느낌이 있다. 쟁쟁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주장들-물론 원서로 읽진 못했으나- 에 비하면 칼 폴라니의 접근은 인문학적인 향기가 강하다. 정식화 과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치론적 당위에 대한 논증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현재 자본주의적 작동 방식이 인류의 거대한 전제가 되어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조금은 소박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마저 느껴진다. 폴라니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경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시차적 한계는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경제사상가로서 폴라니의 지평을 조금은 낭만화, 극소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폴라니가 한국의 인문사회학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실물경제학적인 필요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부분이 폴라니의 담당 분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담론적 지지대가 매우 필요한 시점에서 폴라니가 살아났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역자는 후기에서 몇 가지 주요 개념 보다 '사회의 중심성'을 되살리려는 사회개혁가로서의 폴라니를 고려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한다. 즉 현재 우리 사회의 대중들의 '필요'가 잊혀진 폴라니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폴라니가 다시 소개된 시점을 폴라니 자신의 용어를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이중운동'의 자발성 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부터 이어져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MB정부에 들어서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화용론적으로 과거 정권과의 차이를 두자면 과거에는 '그래도 이런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게 길이라구요, 안그렇습니까? ' 였다면 지금 방식은 '원래 이런거야. 뭐라구? 이 빨갱이 자식들' 인 셈이다.(좀 희화해서 쓰다보니 너무 과거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에 대해 나이브하게 말한 것 같다. 마치 문제는 '소통'의 문제였다는 식으로 오해받기 좋겠다. '소통'만 잘 해결되면 이 정권도 별 문제없고, 저 정권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소통' 문제만 다르지 신자유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  상징적 질서가 작용하는 현실의 좌표계에서 사람들은 과거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는 쉽게 잊는다. 현재 진보정치판의 일부 사람들은 과거유산의 적자인양 손을 들고 다닌다. "저요. 제가 상속자란 말이이에요. 쟤는 배신자에요. 쟤는 양자에요"  대중들의 취향에 영합해야하는게 정치라지만 창피함도 좀 알아야 할 텐데.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남북이 어찌 하나 같이 '유훈정치'맛에 길들여져 있는지.   

 어쨋거나 폴라니는 MB와 친구들의 뻔뻔한 신자유주의 슬로건이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때 재발간되었다. 신자유주의외엔 대안이 없다라는 맹폭에 대한 반대 운동의 담론은 여러 형태가 있었다. 가장 큰 저항담론은 언제나 마르크스 쪽에서 온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선두는 그였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한 그래서 마르크스도 갈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변태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아마 계속 갱신될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미 90년대 물건너갔다거나 또는 고도의 학문적 경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언가 다 뒤집어 없자는투의 마르크스 말고 신자유주의의 레토닉에 방어적 공격을 할 수 있는 '언어들'은 없을까?  출판계와 미디어 등에서 특히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대해 살짝 애무 당한 느낌으로 글을 쓴 것은 대중들에게 필요한 '언어들'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접근은 매우 담론정치적이긴 하다.지금 그렇게 쓰고 있으니까...) 장하준의 책에 대한 인기 역시 어떻게 보면 담론투쟁의 도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투쟁은 담론 투쟁 부터 시작된다. 장하준을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여러 종류의 대안적 논쟁들의 백가쟁명은 분명히 긍정적인 것이다. 최소한 역동성은 그런 와중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사회의 건강성의 한 지표이기도 하다.     

대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어느 한 편에서는 도구적 성격보다는 그 텍스트 자체가 가진 한계와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폴라니 전공자가 많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다지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 비판적 도전이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생존 인물인 장하준과 그의 재벌론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과 재비판들이 가해졌다. 반면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독특한 비주류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논쟁은 오히려 '개량'이나 '혁명'이냐는 식으로만 진행된다. 좀 더 체계적인 칼 폴라니 비판서가 출현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마이클 샌델만큼 히트 한 책이 아니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상식선에서도 폴라니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와 전근대단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론적 비판이 늘 수반하는 매우 통속적인 비판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다른 쪽으로 옮겨보면 어떨까? '시장'에 대한 생각 말이다. 폴라니의 이중운동의 개념을 도입하자면 이 책이 나온 1940년대 이후 세계를 지배한 것은 -일반론적이기는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폴라리도 지적했듯이 순수한 시장경제란 없지만 '운동-반운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1940년대 이후는 세계는 '수정주의'가 승리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진보-보수의 주기를 10년 주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적 방식이긴 하지만) 폴라니는 19세기를 분석하면서 유럽의 균형상태를 언급한다. 그처럼 1940년대 이후 냉전은 또 하나의 역설적 균형을 이루어낸다. 그것은 상호 견제를 전제해 둔 불안한 균형이었으나 양자 모두 절충적인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미국과 서방은 케인즈주의에 바탕을 둔 수정자본주의적인 방식을 존중했으며, 소련과 동구권 역시 계획경제의 한계와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균형이 무너지며 신자유주의는 다시 기지개를 킨 것이다.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의 이름하에 말이다. 우리는 폴라니의 기원론적 고찰을 통해 이 또한 당대 역사와 상호작용하는 일시적 현상임을 이해할 수는 있다. 고전 경제학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자유라는 기표를 전유하면서 조정 상태를 예외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들 역시 최근 몇 년 사이 벌어진 통화위기에 잠시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폴라니가 '이중운동'이라고 명명해놓은 역사적인 관계는 매우 통찰력있는 방식이다. 결국 경제라는 것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태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하는 사고에 일침을 가할 수 있으며 또한 상존하는 저항의 근거를 늘 존속시킬 수 있다. 폴라니가 이중운동의 과정 중 자유주의적 인위성과 저항의 자발성을 배치 해 놓은 것은 그의 경제학이 대단히 인본주의적 전통 하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폴라니는 최종심급에서 '경제'로 환원해서 세기의 전환기를 읽고 있다. 거기서 핵심되는 개념은 '금본위제' 에 대한 것이다. 국내 및 국제 관계의 모든 사회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자기조정시장'과 '금본위제'라는 서로의 존재를 전제하는 관계 속에 이해한다. 그외 폴라니의 개념 '자기조정시장의 유토피아성','다시 묻어두기' 등과 함께 <거대한 전환>에서 돋보이는 개념은 '허구의 상품'이다. '노동,토지, 화폐'는 실제 상품이 아니며 '자기조정시장'을 탄생 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역사적 필연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금방 이해하기 쉽지 않다. 또한 마르크스의 상품 개념과도 다르다. 마르크스는 이것의 '물신화'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이것의 발생자체를 허구화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공상적 사회주의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폴라니는 산업사회의 동학에 대해 선구적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로버트 오언을 극찬한다. 반면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산업의 위대한 힘이 자신들이 계획한 변화를 허용할지 어떨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라고 일침을 가한다. 폴라니의 가장 큰 장점은 결국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의 허구적 성격을 인류학적 방식을 따라 매혹적으로 서술한데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다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게 된다. 그동안 '자유시장'이란 개념의 허와 실에 대해 몰랐던 것일까? 일부 계층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그대로 믿었던 것일까? 경제학적으로 봐도 고전주의 경제학을 수렴한 신고전파 종합에서도 그런 '시장만능주의'에 대해선는 의심을 했엇다.  '시장주의'에 경도된 사람들 조차 정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일까?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자기조정시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대중들의 담론 속에서 '시장주의'는 문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라고 하며 슬쩍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껄끄러운 무엇이 아닐까?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다시 이데올로기 문제로 들어가고 만다.  지젝은 이런 상태를  바로 '냉소주의적 주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과거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적 주체들을 표현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와는 사뭇 다른 주체들이다.    

특정 세력들 또한 그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모를이 없다. 이익에 가장 눈 밝은 자들이 그것을 모를 수가 있는가?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노동자이기 보다는 자본가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그것을 잘 알면서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고 그 숙명적 희롱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믿는 척, 또는 믿어 버려야  것이 대중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데올로기론은 여전히 존속될 수 밖에 없다.) '이제 누가 그런 거에 신경쓰냐'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냉소어린 표정에는 조숙하게 늙어버린 피곤함이 늘상 간파된다.    

폴라니의 경제학은 어떤 측면에서도 비주류다. 공시적으로도 또한 통시적으로도 그렇다. 기원론적으로 노동,토지,화폐를 허구상품이라고 논증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하나의 존재로적 '전제'가된 상태다. 그것의 기원을 파헤치는 것과 그것이 전제로 작동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폴라니의 경제학은 가치론적인 부분이 훨씬 강하다. 그런면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폴라니를 읽고 현재화하는 것이 관건인 듯 싶다. 

 조금은 역설적으로 폴라니 본인이 부정한 '유토피아'적 개념을 동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유토피아 정치를 응원하는 바는 아니다.) 폴라니는 고전 경제학자들의 전제, '자기조정시장'이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반면 고전 경제학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식 사회주의나 코뮌 사회가 유토피아라고 한다. 그렇다고 보면 양자 모두 유토피아를 향한 운동인 셈이다. 제 3의 길을 찾는 것도 물론 방식이다. 그것도 어떤 지향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최소한의 지향을 본다면 질문은 어떤 유토피아로 가고 싶은 것인가? 조금 더 순치하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가 될 수 있다. 인류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역사는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그 무늬를 만들어 왔는가? 칼 폴라니를 비롯해 마르크스,심지어 고전경제학자들까지 주장했던 답 중에 하나는 '인간 자유의 확장'이다. 공통의 문제와 공통의 답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더 많은, 더 넓은 '자유'를 안겨주는가에 대한 개별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더 넓은 시장적 자유인가 더 넓은 인민적 자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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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 효형출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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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도시는 아름답다"   <파사젠베르크>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자궁이다. 도시는 욕망하고, 생산하며, 배출한다. 현대 대도시의 구성원들은 너무도 빨리 변하는 도시의 속도와 반복적 리듬에 몸을 싣는다. 모두들 도시의 합리성과 편리성 때문에 도시에 살긴 하지만 모두들 다른 곳을 꿈꾼다.  그곳은 도시가 아닌 곳이다. 대개 도시인들의 소망은 은퇴 후 전원에 작은 집을 짓고 텃밭 키우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렇데 그런 소박한 꿈마저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곳이 도시다. 도시는 알고 있다. 실제 탈주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는 자는 매우 소수라는 것을 말이다. 벤야민의 지적대로 대도시는 '욕망과 꿈' 마저 기성품처럼 만들어 주고, 또 세련되게 배려해주는 판타스마고리아다.   

그램 질로크의 책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우리는 세심한 눈을 가진 베테랑 산책자 발터 벤야민을 도우미 삼아 세기 초의 거대 도시들을 걷게된다. 단순히 도시의 외관을 보여주는 것은 그 안내자의 역할이 아니다.  노련한 도시의 안내자는 파스러진 낙엽같은 도시의 아케이드를 통과하며 그 근대성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 그램 질로크는 흥미롭게도 벤야민의 작업에 일련의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는 벤야민 초기 저작부터 최후 저작과 도시와의 계를 마치 소개팅 나온 남녀처럼 일대일 대응관계로 연결시킨다. 벤야민의 생에서 중요하게 거론하는 도시는 '나폴리-베를린-모스크바-파리' 이다. 공교롭게도 이 도시들이 가르키는 지점은 지도상의 사방과 공명한다.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벤야민의 최후 대작이자 미완의 역작인 파리와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프로젝트)의이다.  

 <파사젠베르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최대의 도시, 아니 인류 문명의 최정예 도시였던 파리를 배경으로 한다. 그램 질로크는 '파사주 프로젝트'가 1927년부터 시작된 도시연구 계획의 연속성을 띤 프로젝트라고 공언한다. 즉 <사유이미지>를 출발점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파사젠베르크>까지 일련의 도시를 둘러싼 사유실험의 연작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 독립적 작품들이고 각기 어떤 연속성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정확한 의미의 연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램 질로크는 이를 좀 더 원경에서 바라보며 벤야민의 작업을 통해 관통하는 도시에 관련된 어떤 일관된 특징들을 사출하려는 것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의 도시 독해의 방법론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관상학,현상학,신화,역사,정치학, 그리고 텍스트이다. 먼저 벤야민은 사회적 총체의 축소판으로 도시를 읽는다. 일명 '도시 모나드'라고 할 수 있는데 벤야민이 수집가의 비유등을 통해서 들어낸 도시 단편을 통해 도시 전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벤야민은 이렇게 주변적인 것들을 말하게 함으로서 도시가 하나의 신화임을 폭로하는 방식을 취한다. 대도시가 판타스마고리아임을 밝히는 것이 벤야민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벤야민의 폭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벤야민 사상의 매력적인 점은 부정의 상태를 그대로 끌어 안는 곳에 있다. 벤야민이 '꿈 깨우기' 위한 자명종의 비유를 든다면 이는 곧 '꿈'이라는 상태의 전제마저 동시에 긍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도시의 삶을 반복에 바탕을 둔 거대한 환등상이라고 햇다. 이것은 벤야민의 정치철학에도 그대로 연장된다. 벤야민이 보기에 흔히 등장하는 진보라는 것도 결국은 '반복동일성'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와 진보의 역사성에 빗금을 치는 것이다. 그는 파괴의 몰락의 지지자다. 결국 하나의 꿈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자유로와진 이미지와 구상이 정치 투쟁을 통해 활성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정치철학이 신학적이라는 이유는 여기서 유래한다. 물론 벤야민은 정치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시는 생존 투쟁과 계급 투쟁의 경기장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벤야민은 당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주변부적 대상에게도 가능성을 읽어낸다. 물론 나치의 등장과 함께 군중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증대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 전반부에서는 나폴리, 모스크바, 베를린을 경유하며 도시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역사,정치,미학 등에 대해 사유의 만화경을 펼치는 벤야민을 만날 수 있다. 그램 질로크는 각 도시와 관련된 벤야민의 저작 일부와 이에 대한 학자들의 주석을 분석하면서 벤야민의 철학을 이해하게끔 하는 일종의 유연한 홈을 파기 시작한다.나폴리는 수전 벅모스의 입장을 반영한다. 그녀는 "파사젠베르크의 기원은 파리가 아니라 19세기 이탈리아다.' 라고 했다. 도시에 대한 관심의 출발점이 나폴리였다는 것을 부각한것이다. 나폴리에서는 저자는 '다공성'(현상사이의 명확한 경계없음) 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시의 혼미성과 그 속에서 방향 상실이 주는 철학적 아이디어를 계진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도시는 은유적으로 미로(혼미)이고 폐허(몰락)이며 극장(즉흥성과 연기)인 셈이다. 모스크바의 벤야민은 혁명 이후 러시아의 경험을 통해 현대 기술과 도시와의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후에 등장하는 변증법적 이미지라는 개념 역시 러시아 영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기때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모스크바에 양가적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램 질로크는 베를린의 기억을 벤야민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현대성의 원사가 중첩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수전 손택과 아도르노의 입장을 공평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벤야민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로 이를 언어로 직조해 내는 과정에 착수한 것이다. 그램 질로크는 이를 통해 벤야민이 망각된 꿈과 유토피아적 충돌을 회복하고 실현시키려고 했다고 평가한다. 

<발터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는 이제 나폴리-모스크바-베를린을 거쳐 마지막 기착지인 파리에 도착한다. 흔히 <파사젠베르크>로 알려진 이 작품은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며 또한 어떤 일관된 체계를 가진 텍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작품을 두고 "나의 모든 투쟁과 이념들의 극장"이라고 말했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벤야민이 당시 주변 사람에게 넘겼다는 유실된 원고가 <파사젠베르크>의 미완성 부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그래서 사람들은 더 아쉽게 한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 연구를 통해 얻어낸 도시의 상품물신성, 근대성의 신화,판타스마고리아적 속성,반복성등을 중심으로 파리 관련 연구의 전반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벤야민에 앞서 파리를 거닐었던 보들레르를 통해 즉 벤야민-보들레르의 인식론적 공통성을 중심으로 파리로 상징되는 현대 대도시의 특성들을 뽑아낸다. 보들레르를 경유한 벤야민은 알레고리로서의 도시 읽기, 새롭게 등장한 군중이라는 양가전 존재의 특성들을 살펴본다. 

이 책<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는 벤야민에 낯선 독자에게 커다란 지도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벤야민이 도시연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문제 의식과 흐름들에 대해 간파할 수 있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도르노나 수잔 벅모스등의 연구자들의 벤야민에 대한 비판적 서술을 통해 간격을 유지하며 벤야민에 접근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벤야민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서로서, <파사젠베르크>읽기의 징검다리로서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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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김진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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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저자 김진석을 알게 된 건 21세기 초입이다. 당시 나는 계간지 <당대비평>(삼인)과 <사회비평>(나남) 을 보고 있었다. 두 계간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 문제와 담론 공간에 개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당대비평>은 탈근대적 지평 위에 있었고 <사회비평>은 근대적 지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평가는 그 잡지의 전체 성격과 필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뉘앙스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당대비평>에는 편집위원으로 권혁범,임지현,문부식 등이 있었고, <사회비평>에는 김진석이 편집주간이었다. (김진석은 현재 <황해문화> 편집위원으로 있다.) 당시 내가 이 두 계간지에 관심을 갖게 된것은 임지현 교수가 제기한 '일상적 파시즘론'을 두고 이 두 잡지가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각기 지면을 통해 비판과 반비판이 이어졌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에서도 김진석은 '미시 파시즘론 비판'이란 형태로 이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 한다. '파시즘'이란 것은 20세기 정치에 나타난 매우 흥미로운 정치현상이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하에서 '유사파시즘'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반복의 우려'라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늘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임지현 교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미시 파시즘' 문제를 세간에 부각시켰다. 임지현의 이 책은 미디어의 관심을 받으며 인문서 중에서도 꽤나 대중적으로 읽힌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일상적 파시즘론'이 더듬어낸 한국 사회의 진단에 크게 공감한 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일까? 이런 생각의 와중에 <사회비평>의 글들은 내게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공감에 비판적 횡선을 그을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파시즘'을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그 의미의 확장을 이해하고 그 문제 의식도 공유하지만- 주의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거기에는 김진석 교수가 과거 <사회비평>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미시 파시즘 비판'에서 받은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  

김진석의 이야기를 하다가 '미시 파시즘론'부터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일단 간략하게 마무리는 해야겠다. 김진석은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은 들뢰즈.가타리의 '미시파시즘론'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저작 <앙띠 오이디푸스>가 '일상적파시즘','미시파시즘'의 수원지가 되는 셈이다. 들뢰즈주의자들의 비판과 반비판이 그 동안 많이 일어났던 문제라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성 싶다. 이 책에 나타난 김진석의 주장만 요약하자면 '미시 파시즘론'은 근본주의의 위험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즉 '삶은 미시적 권력의 경연장' 이라고 설정할 때,모든 권력을 파시즘적 요소로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모든 권력=파시즘'이 되는 근본주의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이 모두 애국주의에 휩싸인 일상적 파시즘의 구성인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월드컵의 붉은 악마나 한국의 스포츠 애국주의,또는 인터넷의 애국주의 폭력성-2PM의 재범이 사건같은-것을 두고 '파시즘 도래' 운운한다.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에도 '저강도 파시즘'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런 앙칼진 비판을 한  개인은 최소한 그로부터 분리된 - '반파시즘'의 사제로서- 자기 선명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긴 하다. 그렇다면 '촛불 집회'에 모인 전국적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아닌가?  물론 그들이 공적인 목적으로,더 이성적인 자신의 정치적 또는 상식적 주장을 바탕으로 했다고 말한다면 차이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촛불의 '대중'은 모두 '각성된 엘리트' 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패거리와 힘을 부정할 경우 생기는 자가당착이다.즉 '모인 패거리'의 힘을 '파시즘'의 미심쩍은 시선으로 볼 때 그것은 '파시즘 근본주의'가 되어 스스로의 목도 조이게 되는 것이다.  김진석이 보기에 '미시파시즘' 에 대해 들뢰즈가 제시할 수 있는 방식은 '분열증적 혁명' 이나 '탈주' 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초월'이지 김진석의 말하는 '포월'은 되지 못한다. 김진석은 '폭력과 권력'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임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기우뚱한 균형찾기'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파시즘이란 지도 위에다 '미시 파시즘'을 올려 놓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고 미시 파시즘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조금 더 섬세하고 한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파시즘'이란 주제가 좀 길어졌다. 하지만 이 내용 역시 책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와 어깃장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김진석은 먼저 한국에서 지금까지 수용된 니체가 '정치철학적' 요소가 배제된, 즉 탈정치화된 니체라는 점을 문제시 한다. 애써 정치철학과 결합한 경우는 니체의 '반민주주의요소'를 나치나 또는 파시즘의 수원지 정도로 이해하고 비판하는 방식이다.(김진석은 박홍규의 <반민주적인, 너무도 반민주적인>을 이런 류의 텍스트로 본다.) 그 외에 니체 수용은 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요소만 강조되고 그의 정치적 반민주성, 반페미니스트적 요소들은 외면하거나 축소시켰다. 김진석은 데리다, 들뢰즈등을 경유하여 유입된 '탈근대론적 니체론'이 이 흐름을 주도했다고 본다. 그는 이런 해석들이 니체 열풍을 불러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사상 중 걸림돌이 될만한 '반민주적 요소'들을 슬쩍 피해감으로서 오히려 또 다른 곡해만을 나았다고 본다. 결국 김진석은 니체의 반민주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니체라는 현실로 뛰어드는 것이다. 

니체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는 꽤나 알려져 있다. 이런 인용을 보자

"우리,(무리짐승의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가진 우리는 민주주의적 운동을 단순히 정치조직의 타락형식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인간의 타락 형식이며 왜소화 형식, 그리고 인간의 평준화와 가치의 낮춤이라고 여긴다."  .... <선악의 너머에서> NO.203 

대중, 민주주의, 평등, 선함, 베품, 연민 등등에 대한 니체의 모진 발언들은 니체 중기 이후 철학적인 양상의 진전과 함께 전면에 드러난다. 거기에 니체의 아포리즘적인 문체와 상호모순적 발언들은 니체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김진석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제가 역사적 결과물로서 문제가 많지만 역사적인 차선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는 지평에서 니체에 접근한다. 결국 역사적 선상에서-현재의 흐름 위에서 본다면- 니체는 '반시대적'이며 '반민주주의자'였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니체같은 위대한 지성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김진석은 니체의 텍스트가 아직 민주주의가 도래하고는 있지만 아직 정착되기 이전의 것이었음을 말한다. 니체는 그런 이행기에 귀족적이며 엘리트주의적 입장에 서 있지만 또한 민주주의가 펼쳐보이게 될 몇 몇 지평에 대해 뛰어난 예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진석이 보기에 니체의 가장 큰 모험은 -겹치기도 하지만- 구분 되어야 할 '철학적 개념'의 선분과 '정치적 지평'라는 선분을 무리하게 중첩시키려고 한데 있다. (김진석은 이 둘 사이에 분명히 틈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니체에 대한 접근법은 먼저 이걸 전제해두고, 그의 반민주적인 발언들을 철학적 태도로 설명한 이후, 다시 정치와 역사라는 현실의 프레임 넣어서  가두어지지 않는 부분들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그런 면에서 책의 성격을 잘 요약해 냈다. 자유를 상징하는 날개, 평등의 저울, 가치의 파괴자 니체의 망치, 그리고 상호 여집함을 남기는 세가지의 프레임들....현실에서 우리는 조금은 해괴한 다형의 틀을 쓴 니체로 만날 수 밖에 없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를-여기에는 사회주의도,공산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무리짐승의 도덕이라며 악담을 퍼부었을까? 그냥 박홍규 선생이나 김상봉 선생처럼 말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의 절반 정도를 할애한다. 요약하면, '위대한 정치'에 대한 그의 정의, '강자의 고귀함'에 대한 그의 강박, '격차의 열정' 에 대한 그의 응원이 결과적으로 평등을 전제에 깔고 있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니체가 서양 역사와 사상사의 전복자였다는 점과 동시에 읽어야만 한다. 그에게 '위대한 정치'는 고결한 정신이 이끄는 정치이다. 이 정신은 기독교적 죄의식 또는 도덕과는 관련이 없다. 니체는 '권력의지'라는 강자의 철학이 이런 '선한 정치'가 아닌 '좋은 정치' 를 만든다고 믿었다. 니체의 강자 역시 그런 '영혼의 위계성' 에 바탕을 둔 철학적 개념이다. 이는 현실적 변용과정에서 보수주의적으로 적용되고는 한다. 김진석은 이 점에 대해 니체의 태도를 단순한 귀족적 보수주의와 구분하여 '귀족주의적 급진주의'라는 말로 설명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철학사의 반성과 성찰 속에서 나온 것이고 그 스펙트럼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니체는 거기서 나아가려했다는 것에서 '위험한 철학자'가 된 것이다. 쉽게 이해해서 '철학'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대입하려 했다는 것이 김진석의 니체 기소 내용의 핵심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 권력이나 격차의 위계라는 것 역시 비역사적 공간이나 초월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책의 절반 정도는 니체를 경유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다.들뢰즈와 데리다의 니체 해석이 주요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일단 '미사 파시즘론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이 작업은 진행된다. 김진석은 이들의 작업이 '신선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시대의 변호를 예측하고 예고한' 점은 인정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사회적 변화를 서술하는 일을 지나치게 상징화하고 추상화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니체 텍스트를 '탈정치화'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니체의 '권력의지'를 '힘의 의지'로 번역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그런 예로 거론된다. 그는 들뢰즈의 탈코드적인 노마니즘을 예로 들면서 그의 '바깥사유'의 강조가- 정작 들뢰즈는 안과 밖의 단절과 연결을 매우 강조했음에도- 일련의 오해과 통속적 이해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김진석이 비판의 선을 대고 있는 부분은 오히려 '포스트사상의 한국적수용'에 있지 않나 싶다. 그는 이것이 전체적으로 사회적 대항철학의 공간을 잠식하게 될 부분을 우려한다.(반대편에서는 이는 대항-철학 공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어쨋거나 그는 '망치로 철학하기는 부수기라도 하지만 부수지 못한 채 떠돌기만 하는 비결정성은 자칫하면 공허한 보수성을 띠거나 텍스트의 우울함에 빠지기 쉽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그는 일련의 포스트모던한 관점들이 다 유효성이 없는 공허한 말장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효과들에 대해 보완하고 수정할 여지가 있다는 점, 특히 현실 세계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점을 말한다. 그가 이 책의 한 장의 제목을 '오, 니체, 여기는 한국이오'라고 정한 점은 서구 철학을 열심히 파고들어 결국 한국 사회를 지도삼아 적용하려는 작업들에 주의를 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실제 지식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나마 어려운 말들로 담론 공간에서나 활약하여 대중파급력이 미약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결론적으로 김진석은 니체를 읽는 독자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우선 니체의 시대와 현시대가 인식틀에 변화가 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니체를 철학사적인 틀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티-플라톤주의자였지만 철학사의 우월성을 현실로 적용하려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와 닮아 있다는 것이 김진석의 주장이다. 니체 철학을 깨끗한 표백제로 탈색하려는 것 역시 니체의 핵심을 비켜간다고 말한다. 폭력이라는 것은 '문화'의 숨겨진 이면이다. 그러므로 모든 폭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력적이다.폭력-권력의 문제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반민주주의적 요인들은 니체 중반기 이후의 텍스트에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텍스트의 심장을 뛰게하는 근원과 닿아있다'라고 그는 말한다.이렇게 해야지-비록 오남용의 위험도 있지만-능동적 가능성도 동시에 열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니체를 통해 일방적인 평등주의를 지양하고 '싸움을 인정하는 탈현대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로랜스 해텁을 인용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김진석은 '니체 텍스트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을 통해 니체 해석의 역사가 만들어 온 지평들을 부분수용,보완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체를 교대하고 교체하면서, 어렵게 땅을 찾고 길을 찾는다. 우리는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에 착지한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는 그동안 김진석이 보여준 관점의 반복일 수도 있다. 김진석도 가끔 회색주의자란 말을 쓰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가끔 ' 진리는 회색 속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곤 한다. 최소한 그 어딘가에서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 다양한 번역본의 니체 저작이 나오고 또 다양한 해석서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 책이 학술적으로 꼼꼼함이 돋보인다고 이야기하긴 힘들 것이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니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던져준다는데,또 대중적읽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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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 독트린 -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살림Biz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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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파이크 리 감독의 <제방이 무너졌을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습한 뉴올리온즈를 다룬 영화다. 스파이크 리는 재난에 대처하는 미국 사회 모습을 통해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허술한 지 여실히 보여준다.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이곳은 이디오피아나 이라크가 아니라구요. 여기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맞습니까?"  그리고 다른 스파이크 리의 영화처럼 이 영화도 카트리나라는 재난 앞에 드러난 미국 사회의 흑백문제(그리고 이의 물적기반) 를 건드린다. 이미 오래전부터 침수가 예상되었다는 점들, 또는 음모론이긴 하지만  부유한 백인지구를 지키기 위해 제방을 붕괴시켰다는 소문 등등.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이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는 그런 소문들이 돌았다는 것은 흑백갈등과 이에 비롯되는 빈부의 문제가 오랫동안 이 지역의 쟁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재난 앞에 사리진 '국가'를 보여준다. 부상당한 아이를 앉고 부실한 대응책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건 흑백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백인이고 내 아이는 지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 그는 재난 앞에서 '국가의 공백,국가의 무능,국가의 책임 방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후안무치한 국가는 재난을 마치 바랬다는 듯이 발빠르게 움직인다.

  재난의 예방과 복구에 수수 방관하던 이들이 갑자기 열기를 띄며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재즈의 고향' 뉴올리온스를 새로운 실험실로 여기기 시작한다. '재난 자본주의'라고 명명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과 스파이크 리의 <제방이 무너졌을 때>가 서로 얼굴을 맞대는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노 로고>로 반-신자유주의측의 여전사로 등장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 역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실제 뉴올리온스를 취재하며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이나 자연 재해등의 충격적인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일련의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허리케인이나 쓰나미등의 자연 재해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대외정책이 만들어낸 사회가 공통적으로 겪는 트라우마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것을 '쇼크독트린'이라고 명명한다. 사회적 '쇼크 요법'은 일부에게는 죽음에 가까운 치명적인 것이지만 일부에게는 새로운 기회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런 다양한 예들을 찾는다. 그녀는 다양하게 변주된 '쇼크'요법 속에서 이를 주도하는 한 세력들에 주목한다. '밀튼 프리드먼과 시카고 학파'가 그들이다. 나오미 클라인에 의하면 그들의 '자유방임적 시장주의, 민영화, 세금감축'같은 프로그램들은 케인즈의 실험이 끝나가는 70년대 부터 지구 방방 곳곳을 돌며 재난을 일으키거나 또는 재난을 통해 자신들의 복음을 설파해왔다. 그녀는 프리드먼의 실험을 '경제적 쇼크요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오미 클라인이 말하는 '쇼크'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녀는 단순히 인식상의 충격같은 가벼운 느낌의 통증을 쇼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적인 쇼크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열 치료법으로 연구되던 이웬 카메론의 실험을 은유적으로 예를 든다. 이 실험은 CIA의 지원을 받아 적국의 요원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기도 한 것이다. 일종의 '고문'인 셈인데, 그럴싸한 말로 '감각박탈법'이다. 시공간의 감각을 없애고, 폭력과 전기충격을 가한다. 자기 정체감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다량의 정보를 무처별적으로 제공한다. 피고문자는 한마디로 넋을 놓아버린 상태가 된다. 이웬 카메론은 정신병의 치료를 위해 '백지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가설로 부터 이 실험을 시작했다. 즉 완전히 새로운 인간형을 주입하겠다는 것이다. <시계 태엽장치 오렌지>의 알렉스처럼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프리드먼과 시카고 학파가 남미를 비롯해서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 한 짓이 이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또한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방법이 동원되었다. 전쟁을 통해 폐허가 된 이라크나 쓰나미로 어촌 공동체가 붕괴된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들은 동일한 수법을 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유방임적 시장주의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경제가 붕괴되거나 독재정권의 폭력이 일상화되면 국민들은 공포에 시달린다. 일종의 쇼크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모든 것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난 다음 이들은 새로운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칠레의 아엔데 정권을 붕괴시킨 '시카고 보이즈'들의 이야기부터 이런 틀에 맞추어 설명한다. 미국이 자국의 정치적 이해와 대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남미에 독재정권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본주의를 설파하기 위해서 공포정치가 필수적이었다는 것 역시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3200명이 행방불명 되었고 8만명이 투옥되었다. 그리고 20만명이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들은 노조나 좌파적 문화 인사들을 일거에 척결한다. 국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온순해진다. 자유시장은 이런 공포를 동원해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시카고 학파'만이 이런 요소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할 뿐이다. 또는 아예 거론하지 않는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런 '공포정치'의 요소를 단순히 '인권유린'의 부차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유엔을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의 인권 보고서들이 이 공포정치와 경제 정책을 분리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브라지의 <네버어게인>보고서만이 이 둘 사이의 공모관계를 제대로 언급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남아 있다. " 한 국가의 대다수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는 경제정책의 경우엔 무력으로 집행하는 수 밖에 없다." 남미의 대다수 가난한 소작농들과 빈농,인디오들이 그들의 땅을 부자들에게 넘기거나 국유화된 자본을 민영화하는 것에 찬성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남미의 독재정권들이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밖에 없다. 잔혹학 폭력이다. 그것은 칠레나 남미에서 자유방임시장을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나오미 클라인이 현재 기부 자본주의의 전도사로 변신한 제프리 삭스를 비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의 볼리비아 성공담에 가려진 그늘에 대해 그는 정말 모르거나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이라는게 클라인의 비판이다. 어쨋거나 시카고 학파에게 경제학은 수학이었고 그들의 처방은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이 형성된 곳에서는 하나의 유일한 정답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공식은 '모든 것은 시장이 해결한다. 개입은 시장을 왜곡한다.'라는 원칙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한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시장 개방이나 자유화가 자신들의 실험실이 요구하는 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늘상 항변한다. 실제로 이들의 프로젝트가 실시된 곳에서는 몇가지 공통된 현상이 발생한다. 하나는 사회 불평등이 극도로 발생한다. 쉽게 말해서 다 죽는 건 아니다. 대신 잘 사는 자는 더 잘살게 되고 못 사는 자,또는 보통 사는 자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이라크, 폴란드 등등에서 공히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를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경제 정책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쉽게 말해 돈 줄 좀 쥐고 있다면 신자유주의가 나쁠 이유가 하나 없다. 사업 기회는 늘어나고 기타 공공요금 등이 좀 올라도 그까짓거 원래 이용 잘 하던 것도 아니고, 돈 몇 푼 더 내면 구질구질한 꼴 안보고 다닐 수도 있는데 그 정도 기회비용이라면이야...)

그렇다면 미국입장에서 보면 외국에서만 이런 시카고 학파의 '자유시장주의'가 작동했을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추락한다. 닉슨 대통령은 지금은 '케인즈 시대'라는 언명을 통해 프리드먼을 실망시켰다. 또한 남미에서 벌인 추악한 정책들이 속속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원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은 회교혁명으로 쫓겨나고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역시 물러나게 된다. 남미와 아시아를 통해 호기에 찼던 프리드먼의 자유주의는 궁지에 몰린다. 그런데 바로 그 때 1세계에 역대 가장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대처와 레이건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대처의 성공을 포틀랜드에서의 애국주의와 연결시킨다. 떨어지는 지지율의 반전을 가한 대처는 이후 영국 최대 광산노조를 붕괴시키고 '주주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각종 민영화 정책을 취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영국병의 치유'로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가장 추운 겨울이 되기도 한다.  대처와 레이건 시기에 대해 클라인은 크게 다루지는 않지만 한가지 중요한 시시점을 건넨다. 나오미 클라인이 서있는 경제사적 위치와도 관련이 있다. 시장 붕괴에 대해 현실적이며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좌파 계열에서 말하는 '공황-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주의'와 같은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시장 붕괴가 좌익혁명만이 아니라 우익 반혁명도 촉진한다는 이론에 관심을 갖는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지지하는 방식은 케인즈주의적 온건한 시장 조정이다. 프리드먼이 전통 좌파보다 케인즈주의를 적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도 그런 취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처와 레이건 시대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이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은 미국의 국내정책보다는 대외 정책과 경제정책사이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국의 대외정책문제를 다국적 기업의 경제적 이해 관계의 반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 시각도 일면적이긴 하다. 여기에 설령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군사적,정치적 이유들 까지 동시에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911테러로 본토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실험하기 전부터도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확산과 이데올로기적 강화작업에 대한 내부적 고찰역시 필요 하다고 보인다. 호미바바의 식민지-피식민지의 상호 양가성 문제라는 틀을 빌어보자면 미국이나 영국의 자국내에서의 신자유주의 영향력 문제도 결코 간과해서는 곤란한 부분이다. 특히 나오미클라인이 경제적 침탈 문제에 집중하느라 국내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은 독자들이 스스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대처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외치면서 사상적으로는 복고주의적 보수성을 보여준다. 그녀가 도덕적 승리를 위해 써먹던 구호가 '빅토리아시대로 돌아가자' 였다. 60-70년대 혁명의 시대가 보여준 급진적 문화변동에 대한 반혁명적 구호이지 퇴행적인 호소였던 셈이다. 그런데 '강한 영국'이라는 구호와 함께 대처의 보수주의 혁명은 국민에게 먹혀들어간다. 이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레이건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부시정권의 '기독교세력'과의 연대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이 책 <쇼크독트린>에서 특히 눈에 들어온 내용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권 이양과정과 재난수출국가 이스라엘의 부분이었다. 남아공 부분은 진보정권의 국제적 감각의 부재나 정치적 감각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하나의 예가 된다.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은 정권 이양을 앞두고 경제적 부의 집중과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들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ANC 정권은 정치 협상의 중요성만을 생각하다가 그런 경제적 운용의 문제를 소홀히 한다. 결국 정권 이양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아파르헤이트 기간동안의 부채와 경제적 불평등이 만든 사회문제 밖에 없게 된다. "ANC는 명목상으로만 다스릴 뿐이고 실권은 국민당이 갖고 있었습니다. ANC 정부는 정치권력을 잡긴했짐나 허울상의 통치를 했을 뿐이죠. 실제 통치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의 비유를 인용하면 '달랑 집 열쇠만 주고 금고 비밀 번호는 알려주지 않은 셈'이다. 이런 문제는 독립국가나 신생정부의 역사를 가진 곳에서는 늘상 반복하는 일임에도 남아공의 정부는 그런 역사의 경험을 살려내지 못했다.  

 '국가의 아웃소싱'이라는 대목도 무척 흥미롭다. 흔히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의 공통된 부를 사영화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신제국주의>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개념을 선보였다.   

" 강탈에 의한 축적이 수행하는 것은 매우 낮은 비용으로 일단의 자산을 방출하는 것이다.과잉축적된 자본은 이러한 자산들을 취득하여 즉각적으로 이들을 이윤 창출이 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감가된 자본 자산은 과잉축적된 자본에 의해 불티나는 가격으로 판매되어 이윤 창출이 가능하도록 자본순환과정에 재회전 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국가의 공적 자산을 다양한 작업을 통해 저평가된 상태로 만들고 민영화를 통해 매입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본의 입장에서는 공적 자산으로 접근이 금지되었던 영역들이 새롭게 황금알을 낳는 시장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안보시장'이다. 근대 국가의 기본기능이라는 '국토안보'가 '아웃소싱'의 영역으로 변하는 것이다. 언젠가 MB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대하여 농담삼아 '휴전선도 외주주어서 캡스에서 지키게 하지' 라고 빈정거렸는데 우화적으로 보자면 틀린 비유는 아니었던 셈이다. 이런 '안보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안보시스템'의 판매로 이미 악명이 높다. 전쟁과 테러 속에서도 이스라엘 경제가 꿈쩍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서구 선진국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에 '안보상품'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가 주변 아랍국가로부터 섬처럼 존재하는 국가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국가 전체에 실제적인 장벽이든 보안장벽이든 '국토안보'에 필요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테러리즘이 전세계적인 이슈로 부각되는 순간 이스라엘의 첨단 안보시스템은 성장하는 새로운 사업이 된 것이다.나오미클라인은 이스라엘과 관련된 다양한 보안정보회사들의 성장세를 보여줌으로써 세계 경찰 미국과 미국에 납품하는 이스라엘의 공존관계를 보여준다.   

나오미 클라인은 결론에서 쇼크 효과가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쇼크효과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것이 노리는 지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점점 자구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으며 여러국가들이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해 지역연대를 강화한다거나 자구적 대안들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르몽드 디플로마> 한국판 10월호에 보면 이스라엘 가자지구에 대한 정책에 반대하여 이스라엘 불매운동과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또한 오바마 정권 하에서 등장한-물론 오바바라고 별반 다를 수는 없지만- 진보적 유태인 그룹인 J 스트리트 기사도 볼 수 있다. 나오미 클라인은 남미에서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한 '미주볼리바르'의 연대에서도 희망을 본다. 물론 남미의 현재 상황도 사실 만만치는 않아보인다. 미국은 언제나 중동과 남미에 각각 쓸 수 있는 카드를 들고 있다. 중동이라는 카드에는 '테러리즘'이라는 씌여있고, 남미에는 '마약' 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다. 이 두 카드는 필요에 의해서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미국이 쓸 수 있는 카드다.  <르몽드 디플로마>를 보면 미국의 반격 역시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페루 등은 친미국적인 성향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남미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며칠 전 셀라야 대통령의 복귀 문제에 대해 합의를 끌어낸 온두라스의 경우는 향후 남미 정책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될 듯 보인다. 전세계적 금융시장 붕괴와 오바마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와 일방주의는 끝났다고 보는 것은 여전히 간절한 소망에서 나오는 환상에 가깝다. 물론 오바마의 미국이 부시의 소통부재의 미국보다는 유연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바마가 양떼를 모는 목자도 아니고 한 국가의 외교정책이나 방향을 대통령 한 사람이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로 시작된 금융위기가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득세에 경종을 울린 것은 사실이다. 대안적 자본주의들이 조금 기지개를 켤 수 있는 기회를 얻긴 했다. 하지만 자본의 근본적 속성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가 될 것인지는 여전히 끊임없는 투쟁과 고민 속에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농사꾼 세르미호 토마셀라의 말로 끝을 맺자. 그는 독재와 연합한 다국적 기업들의 거대한 착취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국엔 진실과 정의가 승리를 거둘겁니다. 수세대가 걸릴지도 모르죠.저는 이러한 투쟁을 진행하다 죽음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젠가는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 저는 적이 누구인지 압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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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역사의 반복 문제를 말하며,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 도상학에 나오는 이 거대한 뱀은 영원 회귀, 또는 생의 반복, 불교적으로 말하면 육도윤회를 상징한다. 끝없이 순환하는 세계가 자기 꼬리를 무는 원형의 뱀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와 반복>에서 이 우로보스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반복'에 대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구조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지 개개의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은 매번 차이를 발생시키는 일회적인 것이다. 또한 이런 반복은 사후적 파악이 가능한 것이지 의식적으로 실현할 수도 없는 것이란 점을 고진은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가라타니 고진의 '반복'은 거시적으로 월러스틴의 '체계론적'  순환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그는  60년 경제 변동을 뜻하는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따라 세계사 의미를 도표화한다.(월러스틴의 세계체계론을 알고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1810



1810-1870



1870-1930



1930-1990



1990-



세계자본주의



중상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국가



(제국주의적)



영국



(제국주의적)



아메리카



(제국주의적)



자본



상인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국가독점자본



다국적자본



세계상품



모직물



섬유공업



중공업



내구소비재



정보



국가



절대주의



네이션스테이트



제국주의



복지국가



지역주의


.


 예를 들어 그는 현재 시점을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즉 '제국주의적' 시대로 이해한다. 마지막 헤게모니인 미국은 흔들렸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의 시대 인식 방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고진은 되묻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0년대의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는 1870년대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본론에서 고진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다시금 읽는다. 이 책은 그에게 <자본론>의 쌍생아이다. 물론 다른 이면을 다루고 있는. 그는 <자본론>과 <브뤼메르18일>이 대칭적으로 '반복강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론>은 알다시피 자본축적 운동이 자기증식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고진은 이를 자본의 '반복성'으로 읽는다. 자기증식하며 차이를 만들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만 <브뤼메르18일>에서 그가 찾아내고 있는 강박은 무엇일까? 이게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톨킨식의 '왕의 귀환'이다. 지젝이 말한 것처럼 '제대로 묻히지 못한' 왕이 햄릿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럼 제대로 묻힌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두 번 묻히는 방식, 즉 반복적 매장 만이 역사 현상학적으로 가능했다.

   언젠가 어떤 분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뿌리없음을 말하며 그 이유 중 '왕을 목메달지 못한 나라'라는-1789년 프랑스 혁명을 상정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역사적 단죄의 중요성을 말하고자하는 바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얼핏 맞는 듯 하지만 역사적으로 늘 상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루이16세를 목메단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왕을 죽였는데도 말이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나폴레옹 제국이다. 그리고 이를 반복하고 있는 1848년 혁명은  이 책의 주요 주제인 보나파르티슴으로 귀결되고 만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에서 이런 반복 가능한 시스템을 '표상의 문제'에서 읽어낸다. 즉 반복강박이 만들어지는것은 억압 자체때문이 아니라 그 표상 시스템 자체가 가진 '구멍'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실재계의 구멍을 메우려는 대상 a 같은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 국가를 쓰러뜨리고 출현한 부르주아 국가는 마치 전자와 무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실제로는 위이게 그것이 죽인 왕을 다시 소환화게 된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고진은 보나파르티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답인, 엥겔스의 답변을 보완한다. 보나파르티슴에 대해 낯선 이들을 위해 먼저 이 대목을 정리해 보자. 엥겔스는 이 독특한 현상을 두고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균형상태에서 어느 한 쪽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자립성을 띤 국가권력'이라고 말했다. 고진의 문제제기는 이렇게만 보나파르티슴을 이해하게 되면 절대적 왕권 하에서의 균형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왕권의 균형은 계급적 균형이 아니라 '봉건세력과 브루주아의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어떻게 계급적 균형이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고진은 엥겔스의 보나파르티즘을 보완하면서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 한다. <브뤼메르18일>의 표상 문제와 관련된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보통선거와 대의제'의 것이다.  대의제는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사이에 자의성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계층들-마르크스는 농민을 지목했다. 마르크스에게 혁명 주체는 계급적으로 집산된 산업노동자였다-은 '대의제'의 자의성으로 인해 보나파르트를 지지할 수 있게된 것이다. 고진은 히틀러 역시 대표적인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보면서 그가 총통이 된 것에 국민투표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앞서 말했듯이 '왕'을 죽인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왕을 죽인 그 시스템 안에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추대한 반복적 강박의 구명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의제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고진은 '반복의 표상'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가 보기에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을 일종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런 반복 자체가 더 멀리 있는 역사의 재현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다. 1789년 혁명에서 왕을 죽이고 나폴레옹이 나온 것을 '시저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반복적인 제국의 형성의 고투는 '국민국가외 정복 정책의 내적 모순'에 부딪힌다. 결국 나폴레옹시기에 각국은 내셔널리즘과 독립운동에 열을 올리게 되고 결국 '네이션=스테이트'의 연장으로 제국주의 모순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유럽의 제국주의는 또 세계에 더 많은 네이션=스테이트를 반복하게 된다. 고진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것이 이런 '제국'의 반복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견한다. 이제 반복의 구조는 세계자본주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보나파르트의 '모든 이해를 해소하려는' 절충주의적 방식은 결국 당대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경제'의 대립을 불러온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의미의 '제국과 국민국가' 모순의 재연이다. 현재 글로벌경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후진국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인데 이것은 네이션=스테이트를 희미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이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의 분석을 토대로 이제 일본자본주의의 반복 강박을 살펴본다. <브뤼메르18일>의 일본판 응용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면 조금 더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과문하다보니 구체적 사안보다는 일반론적 흐름으로 이해하며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한일관계의 특성상 거론되는 인물 중에 이름이 낯익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고진은 여기서 '천황제 파시즘'의 문제를 파시즘의 '동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보나파르티슴의 다른 표현 양태로 설명한다.  1925년 보통선거의 도입으로 메이지 시대 부활한 '천황'은 의미론적으로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이후 '쇼와 유신'에서 천황은 다시 부활한다. 죽은 왕이 다시 귀환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25년 보통선거제의 도입과 함께 2.26 쿠테타의 실패가 한 몫을 했다. 청년장교들의 쿠테타는 실패하고 군부통제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그리고 이 군부를 비롯해서 의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이미지와 영향력을 가진 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가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다.(우리와는 별로 안좋은 인연의 인물이다.) 그는 황실 귀족이었고, 군부에 영향력도 있었다. 그런고로 군부를 견제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고노에 내각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아지만 2.26쿠테타 당시 기타 잇키같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평등론을-토재분배, 재벌억압같은- 추진한다. 고진은 고노를 보나파르티즘에 가장 어울리는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럼 그는 왜 히틀러가 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를 천황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일본 우익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진은 역설적이게 일본 파시즘을 방해한 것이 천황이라고 말한다.(현재 만연하는 파시즘에 대한 기표적 소비로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 천황은 일본 파시즘 자체이기때문이다.) 

 여기서 고진은 뒤에도 이어가게 될 일본 담론 공간을 구분하는 주요 방법론을 제기한다. 이는 전쟁 중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온 '일본 근대의 초극'이라는 논쟁을 재독하는 것이다.  크게 일본의 근대담론의 공간은 두가지 모순은  '국권/민권' 그리고 '아시아/서양' 사이에서 형성된다.  복고와 유신,존왕과 양이,쇄국과 개국,동양과 서양...이런 것들이 기본축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스스로 서양 세력에 맞서 아시아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한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로 귀결되고 말지만 최소한 담론영역에서는 '아시아적'이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은 그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자 또 서양에 대한 아시아의 해방전쟁이 되는 셈이다. 물론 고진은 이것을 이렇게 해부하려는 시도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하여간 일본의 '근대초극'의 문제는 메이지와 다이쇼..그리고 쇼와를 거치며 반복되는 과제로 고진은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성 문제와 아울러 일본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지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문학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사상가 고진과 비평가 고진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국권





2 제국주의







1 부르주아국가







3 아시아주의







4 민주주의(사회주의)





                             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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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고진이 보기에 오에 겐자부로야 말로 일본적 근대문학의 성취로 보는 듯 하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오에는 동시대의 미시마 유키오와 내적으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다. 이 둘은 서로 비판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근대의 쌍생아였다. 반면 고진은 80년대의 하루키를 등장시키면서 오에와 하루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말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의미를 오에와 하루키를 통해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진은 구체적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몇 년 전 읽은 최고의 소설이었다.) 과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을 일종의 패러디적인 오독을 하면서까지 대립시킨다. (패러디인지 아닌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고진은 말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은 고진이 분석한 '일본 근대의 초극'에 의거하여 캐릭터를 분석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꼇던 것들 예를 들자면 소설 속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생과 역사의 반복 문제,그리고 자기 소멸을 문제 등에 대한 고진의 분석은 흥미로왔다. 거기에 주인공인 나와 동생의 관계,또는 그가 동일시하는 증조부의 관계를 정치적 근대 모순의 좌표 속에 설정한 시도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어서 내게는 작은 발견과도 같았다. 결국 자기소멸이란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명성 마저 이해되는 듯 했다.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을 1960년대와 쇼와 35년의 정치투쟁에는 바쿠후 이래 일본의 정치적.사상적 역학이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만엔원년의 풋볼>이외에 그 '총체'를 또는 그것이 분열된 '근거지'를 파악하려고 한 작품은 없다. 1960년 6월의 정치행동과 만엔원년의 봉기를 결부지음으로써, 이 작품은 말하자면 1960년과 쇼와 35년이라는 시차에 존재하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은 근대적 담론이 탈근대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의 고유명사는 분별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고진은 오에의 주인공들과 비교해서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일종의 '초월론적 자기'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로 묘사한다. 그는 이것을 '풍경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또다른 초월적인 자기의식이 하루키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근본적인 도착이 있다. 이런 초월적인 자기의식은 상찬도, 패배도 모른다. 고진은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탈근대성에 대해  '고유명을 가진 역사가 초월되는 그곳에서 풍경이 등장한다.'라고 말한다. 고진은 이를 단순한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전도된' 이란 말에 밑줄을 긋고 싶어하는 듯 하다. 그가 하루키의 소설을 독해하는 용어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인데, 이 말은 '모든 것이 장난이며 또 진지하다'를 뜻한다.결국 유의미한 것은 무화하고 무의미한 것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세계. 이것은 결국 나르시즘적인 '자기대화'임에 틀림없다. 고진은 이런 흐름이 이미 근대문학계열 속에 있었음을 주지시키며, 이런 독아론적 세계가 최근 작가들의 기본적이 토대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세계로부터의 도피'내지는 '타자성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는 이제 근대문학에 대한 마지막 장으로 향한다. 여기서 그는 헤겔의 노년 비유를 통해 노년을 받아들인 오에 겐자부로, 노년을 거부한 미시마 유키오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규범의 자기 해체 이전에 규범 스스로 자살해버린 시대의 나카야마 겐지의 이행기적 전후작품을 통해 일본 담론공간의 모습이 재구현되고 또 다시 해소되어가는 예를 보여준다.

<역사와 반복>의 마지막 장은 <불교와 파시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선불교가 성장하게되는 정치적 계기들과 지식인들 중심의 선불교의 세계관이 가진 비행동성 내지는 관념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내 선불교의 성장은 정치권력의 민중적 불교인 정토종계열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일본 불교는 한국 불교와 다르다. 주로 정토종 계열로 알고 있다. 일종의 '타력종교'로 '자력' 해탈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선불교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고진은 선불교가 일본내에서 소수 지식인 중심으로 확산된 이유를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이런 대목은 일본보다 오히려 선불교 중심인 한국에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성 싶다. 기독교에도 종파가 많듯이 불교도 다양한 종파가 있다. 한국에서는 조계종의 선불교 전통이 사실 주류가 아닌가 싶다. 즉 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불교 중에서 선불교적 에피스테메 안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선불교가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 할 지라도 법통상 그런 것이고 일반 불교신자들은 - 순전히 기복신앙부터 시작해서- 훨씬 다층적으로 수용한다. 앞선 글 들에 비해 짧은 분량이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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