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역사의 반복 문제를 말하며, 꼬리를 무는 뱀 '우로보로스'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 도상학에 나오는 이 거대한 뱀은 영원 회귀, 또는 생의 반복, 불교적으로 말하면 육도윤회를 상징한다. 끝없이 순환하는 세계가 자기 꼬리를 무는 원형의 뱀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와 반복>에서 이 우로보스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반복'에 대해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구조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지 개개의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은 매번 차이를 발생시키는 일회적인 것이다. 또한 이런 반복은 사후적 파악이 가능한 것이지 의식적으로 실현할 수도 없는 것이란 점을 고진은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 가라타니 고진의 '반복'은 거시적으로 월러스틴의 '체계론적'  순환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그는  60년 경제 변동을 뜻하는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따라 세계사 의미를 도표화한다.(월러스틴의 세계체계론을 알고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1810



1810-1870



1870-1930



1930-1990



1990-



세계자본주의



중상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국가



(제국주의적)



영국



(제국주의적)



아메리카



(제국주의적)



자본



상인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국가독점자본



다국적자본



세계상품



모직물



섬유공업



중공업



내구소비재



정보



국가



절대주의



네이션스테이트



제국주의



복지국가



지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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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그는 현재 시점을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즉 '제국주의적' 시대로 이해한다. 마지막 헤게모니인 미국은 흔들렸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의 시대 인식 방법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고진은 되묻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0년대의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는 1870년대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본론에서 고진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다시금 읽는다. 이 책은 그에게 <자본론>의 쌍생아이다. 물론 다른 이면을 다루고 있는. 그는 <자본론>과 <브뤼메르18일>이 대칭적으로 '반복강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자본론>은 알다시피 자본축적 운동이 자기증식하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고진은 이를 자본의 '반복성'으로 읽는다. 자기증식하며 차이를 만들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만 <브뤼메르18일>에서 그가 찾아내고 있는 강박은 무엇일까? 이게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톨킨식의 '왕의 귀환'이다. 지젝이 말한 것처럼 '제대로 묻히지 못한' 왕이 햄릿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럼 제대로 묻힌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두 번 묻히는 방식, 즉 반복적 매장 만이 역사 현상학적으로 가능했다.

   언젠가 어떤 분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뿌리없음을 말하며 그 이유 중 '왕을 목메달지 못한 나라'라는-1789년 프랑스 혁명을 상정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역사적 단죄의 중요성을 말하고자하는 바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얼핏 맞는 듯 하지만 역사적으로 늘 상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루이16세를 목메단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왕을 죽였는데도 말이다.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나폴레옹 제국이다. 그리고 이를 반복하고 있는 1848년 혁명은  이 책의 주요 주제인 보나파르티슴으로 귀결되고 만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에서 이런 반복 가능한 시스템을 '표상의 문제'에서 읽어낸다. 즉 반복강박이 만들어지는것은 억압 자체때문이 아니라 그 표상 시스템 자체가 가진 '구멍'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실재계의 구멍을 메우려는 대상 a 같은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절대주의 국가를 쓰러뜨리고 출현한 부르주아 국가는 마치 전자와 무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실제로는 위이게 그것이 죽인 왕을 다시 소환화게 된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고진은 보나파르티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답인, 엥겔스의 답변을 보완한다. 보나파르티슴에 대해 낯선 이들을 위해 먼저 이 대목을 정리해 보자. 엥겔스는 이 독특한 현상을 두고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균형상태에서 어느 한 쪽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자립성을 띤 국가권력'이라고 말했다. 고진의 문제제기는 이렇게만 보나파르티슴을 이해하게 되면 절대적 왕권 하에서의 균형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왕권의 균형은 계급적 균형이 아니라 '봉건세력과 브루주아의 균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어떻게 계급적 균형이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고진은 엥겔스의 보나파르티즘을 보완하면서 두 가지 측면을 이야기 한다. <브뤼메르18일>의 표상 문제와 관련된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보통선거와 대의제'의 것이다.  대의제는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사이에 자의성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계층들-마르크스는 농민을 지목했다. 마르크스에게 혁명 주체는 계급적으로 집산된 산업노동자였다-은 '대의제'의 자의성으로 인해 보나파르트를 지지할 수 있게된 것이다. 고진은 히틀러 역시 대표적인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보면서 그가 총통이 된 것에 국민투표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앞서 말했듯이 '왕'을 죽인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왕을 죽인 그 시스템 안에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추대한 반복적 강박의 구명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의제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고진은 '반복의 표상'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가 보기에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을 일종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런 반복 자체가 더 멀리 있는 역사의 재현과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다. 1789년 혁명에서 왕을 죽이고 나폴레옹이 나온 것을 '시저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반복적인 제국의 형성의 고투는 '국민국가외 정복 정책의 내적 모순'에 부딪힌다. 결국 나폴레옹시기에 각국은 내셔널리즘과 독립운동에 열을 올리게 되고 결국 '네이션=스테이트'의 연장으로 제국주의 모순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유럽의 제국주의는 또 세계에 더 많은 네이션=스테이트를 반복하게 된다. 고진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것이 이런 '제국'의 반복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견한다. 이제 반복의 구조는 세계자본주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보나파르트의 '모든 이해를 해소하려는' 절충주의적 방식은 결국 당대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경제'의 대립을 불러온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의미의 '제국과 국민국가' 모순의 재연이다. 현재 글로벌경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후진국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인데 이것은 네이션=스테이트를 희미하게 하며 또한 동시에 이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진은 <브뤼메르18일>의 분석을 토대로 이제 일본자본주의의 반복 강박을 살펴본다. <브뤼메르18일>의 일본판 응용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알면 조금 더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과문하다보니 구체적 사안보다는 일반론적 흐름으로 이해하며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한일관계의 특성상 거론되는 인물 중에 이름이 낯익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고진은 여기서 '천황제 파시즘'의 문제를 파시즘의 '동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보나파르티슴의 다른 표현 양태로 설명한다.  1925년 보통선거의 도입으로 메이지 시대 부활한 '천황'은 의미론적으로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 이후 '쇼와 유신'에서 천황은 다시 부활한다. 죽은 왕이 다시 귀환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25년 보통선거제의 도입과 함께 2.26 쿠테타의 실패가 한 몫을 했다. 청년장교들의 쿠테타는 실패하고 군부통제권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그리고 이 군부를 비롯해서 의회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이미지와 영향력을 가진 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가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다.(우리와는 별로 안좋은 인연의 인물이다.) 그는 황실 귀족이었고, 군부에 영향력도 있었다. 그런고로 군부를 견제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고노에 내각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아지만 2.26쿠테타 당시 기타 잇키같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평등론을-토재분배, 재벌억압같은- 추진한다. 고진은 고노를 보나파르티즘에 가장 어울리는 정치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럼 그는 왜 히틀러가 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를 천황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일본 우익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진은 역설적이게 일본 파시즘을 방해한 것이 천황이라고 말한다.(현재 만연하는 파시즘에 대한 기표적 소비로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 천황은 일본 파시즘 자체이기때문이다.) 

 여기서 고진은 뒤에도 이어가게 될 일본 담론 공간을 구분하는 주요 방법론을 제기한다. 이는 전쟁 중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온 '일본 근대의 초극'이라는 논쟁을 재독하는 것이다.  크게 일본의 근대담론의 공간은 두가지 모순은  '국권/민권' 그리고 '아시아/서양' 사이에서 형성된다.  복고와 유신,존왕과 양이,쇄국과 개국,동양과 서양...이런 것들이 기본축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스스로 서양 세력에 맞서 아시아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한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로 귀결되고 말지만 최소한 담론영역에서는 '아시아적'이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은 그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자 또 서양에 대한 아시아의 해방전쟁이 되는 셈이다. 물론 고진은 이것을 이렇게 해부하려는 시도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하여간 일본의 '근대초극'의 문제는 메이지와 다이쇼..그리고 쇼와를 거치며 반복되는 과제로 고진은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성 문제와 아울러 일본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지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문학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사상가 고진과 비평가 고진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국권





2 제국주의







1 부르주아국가







3 아시아주의







4 민주주의(사회주의)





                             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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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고진이 보기에 오에 겐자부로야 말로 일본적 근대문학의 성취로 보는 듯 하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오에는 동시대의 미시마 유키오와 내적으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다. 이 둘은 서로 비판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근대의 쌍생아였다. 반면 고진은 80년대의 하루키를 등장시키면서 오에와 하루키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말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의 의미를 오에와 하루키를 통해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진은 구체적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몇 년 전 읽은 최고의 소설이었다.) 과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을 일종의 패러디적인 오독을 하면서까지 대립시킨다. (패러디인지 아닌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고진은 말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은 고진이 분석한 '일본 근대의 초극'에 의거하여 캐릭터를 분석한다. <만년원년의 풋볼>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꼇던 것들 예를 들자면 소설 속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생과 역사의 반복 문제,그리고 자기 소멸을 문제 등에 대한 고진의 분석은 흥미로왔다. 거기에 주인공인 나와 동생의 관계,또는 그가 동일시하는 증조부의 관계를 정치적 근대 모순의 좌표 속에 설정한 시도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어서 내게는 작은 발견과도 같았다. 결국 자기소멸이란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자명성 마저 이해되는 듯 했다. 고진은 이렇게 말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을 1960년대와 쇼와 35년의 정치투쟁에는 바쿠후 이래 일본의 정치적.사상적 역학이 집약되어 있다. 그리고 <만엔원년의 풋볼>이외에 그 '총체'를 또는 그것이 분열된 '근거지'를 파악하려고 한 작품은 없다. 1960년 6월의 정치행동과 만엔원년의 봉기를 결부지음으로써, 이 작품은 말하자면 1960년과 쇼와 35년이라는 시차에 존재하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은 근대적 담론이 탈근대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의 고유명사는 분별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고진은 오에의 주인공들과 비교해서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일종의 '초월론적 자기'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로 묘사한다. 그는 이것을 '풍경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또다른 초월적인 자기의식이 하루키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근본적인 도착이 있다. 이런 초월적인 자기의식은 상찬도, 패배도 모른다. 고진은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탈근대성에 대해  '고유명을 가진 역사가 초월되는 그곳에서 풍경이 등장한다.'라고 말한다. 고진은 이를 단순한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전도된' 이란 말에 밑줄을 긋고 싶어하는 듯 하다. 그가 하루키의 소설을 독해하는 용어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인데, 이 말은 '모든 것이 장난이며 또 진지하다'를 뜻한다.결국 유의미한 것은 무화하고 무의미한 것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세계. 이것은 결국 나르시즘적인 '자기대화'임에 틀림없다. 고진은 이런 흐름이 이미 근대문학계열 속에 있었음을 주지시키며, 이런 독아론적 세계가 최근 작가들의 기본적이 토대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세계로부터의 도피'내지는 '타자성으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는 이제 근대문학에 대한 마지막 장으로 향한다. 여기서 그는 헤겔의 노년 비유를 통해 노년을 받아들인 오에 겐자부로, 노년을 거부한 미시마 유키오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규범의 자기 해체 이전에 규범 스스로 자살해버린 시대의 나카야마 겐지의 이행기적 전후작품을 통해 일본 담론공간의 모습이 재구현되고 또 다시 해소되어가는 예를 보여준다.

<역사와 반복>의 마지막 장은 <불교와 파시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일본 선불교가 성장하게되는 정치적 계기들과 지식인들 중심의 선불교의 세계관이 가진 비행동성 내지는 관념성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내 선불교의 성장은 정치권력의 민중적 불교인 정토종계열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일본 불교는 한국 불교와 다르다. 주로 정토종 계열로 알고 있다. 일종의 '타력종교'로 '자력' 해탈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선불교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고진은 선불교가 일본내에서 소수 지식인 중심으로 확산된 이유를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이런 대목은 일본보다 오히려 선불교 중심인 한국에서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성 싶다. 기독교에도 종파가 많듯이 불교도 다양한 종파가 있다. 한국에서는 조계종의 선불교 전통이 사실 주류가 아닌가 싶다. 즉 한국에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불교 중에서 선불교적 에피스테메 안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선불교가 한국 불교의 중심이라 할 지라도 법통상 그런 것이고 일반 불교신자들은 - 순전히 기복신앙부터 시작해서- 훨씬 다층적으로 수용한다. 앞선 글 들에 비해 짧은 분량이지만 흥미롭게 읽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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