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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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푸코의 맑스>를 읽다가 고등학교 때 <수학 정석>을 떠올렸다. 뒤편에 실린 문제 풀이 해설서와 내 연습장의 풀이과정이 똑같을 때 느끼는 소소한 쾌감. 물론 이 말은 내가 푸코를 학문적으로 온전히 이해했다는 말도 아니고, 또한 푸코의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여 푸코주의자가 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푸코에 대해 어떤 고원에서 바라 보는지는 다를 수 있다.(나는 최소한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은 해야한다.) 다만 푸코를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내 입질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정도이다. 여타의 증언들이 '푸코'의 입을 통해서 나오니 지나가던 수학 선생님이 '그래 그렇게 하는 거지.'라고 일종의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화록은 재미있다. 물론 그의 주요 저서보다 얇으며 읽기 쉽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제목이야기부터 해보자. <푸코의 맑스>, 국역판 제목이다. 영역판이 <맑스에 대한 언급>이고, 불어판이 <푸코와의 대담>이다. 국역판은 이에 비하면 제목부터 짧고 굵다. 묵직하다. 하지만 실제 책은 얇다. 역자는 국역판 제목을 이렇게 정한 이유를 푸코 자신의 주장을 인용하여 밝힌다. 푸코는 '경험주의적 철학이 맑스주의의 한계와 인간해방적 관점을 새롭게 재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했다. 먼저 책 제목만 보고 너무 머리를 긁적일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맑스주의자 뜨롬바도리와의 인터뷰 내용을 묶은 것이다. 난해한 프랑스 철학 용어가 난무하지 않는다. 푸코는 소파에 앉아서 하는 인터뷰하는 사람인 양 편안한 어투로 자신의 이론적 관심과 변화, 학문적 접근 태도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관계에 대하여 답변한다. 푸코가 '경험-책'으로서 자신의 이론적 작업과 실천을 설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철학-즉 철학적 활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철학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   미셀 푸코, <쾌락의활용> 

 푸코는 '현재 진행형'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어떤 규정된 틀로,또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리우길 거부했으며, 그렇게 될 수 도 없음도 여러 차레 강조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호기심많은 '실험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론가와 달리 실험가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을 추종하는 일군의 '푸코주의자'가 나왔을지라도 이미 그 자리에 '푸코'는 없다.  이런 태도는 인간 푸코로서의 삶과 이론가 푸코로서의 삶이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이란 주제 그리고 그 대상으로 '주체'라는 문제를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들을 마치 길을 가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처럼 해체하고 재전유해 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역사가'요 '현미경을 가진 역사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푸코는의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천착했던 '권력'의 완결된 상을 만들어 세상에 선사했을까? 하지만 애초부터 푸코는 그런 완결된 '권력'의 모습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푸코의 일련의 미시적 작업을 통해 '권력과 주체' 상당한 다른 모습을 눈치 채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조금 달리 보기 시작한다. 푸코가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그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횡단을 통해 우리는 푸코를 따라 '새로운 관계 맺기' 를 시도하게 된다. 그것은 그것은 단지 세속적 의미의 뇌의 쾌락,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 대한 자기 이론의 통찰이 혁명적 잠재력을 내포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문제를 실천적 영역에서도 감행한다. <감옥정보집단>활동을 말한다. 감옥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상식적 프로그램에 무슨 이론의 경험적 실천이니 정치적 실천이니 대단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푸코의 <감옥정보집단>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실천이 아니다. 오히려 푸코는 '반-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건다.(여기서 '휴머니즘'은 철학적인 개념이다. '인간을 위합니다'같은 류의 휴머니즘이 아니다.) 푸코는 '휴머니즘' 안에 예속적 존재로서의 주체가 있고, 그 '휴머니즘'의 이름 하에 권력에 대한 시선 회피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적인 의미의 반 휴머니즘이다. 결과론적으로 '어쨋거나 저쨋거나 인권을 옹호하니 좋은거 아닌가?' 라고 해버리면 사실 푸코니 들뢰즈니 뭐니 철학적 가치들을 논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게 철학을 매장시키는 행동이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책에서 푸코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뜻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철학자임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실험가'라고 말하는데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그가 '경험'을 강조한 '실험가'적인 작업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광인, 의학, 감옥, 성 과 같은 미시적 문제들의 역사를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증명해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에 대한 그의 강조가 니체, 바따이유, 블랑쇼 등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들인가? 푸코는 그들이 체계를 구축하는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들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주체의 '한계 경험'을 통해 주체 자체를 '뿌리 뽑는' 일에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더 이상 과거의 주체가 아니다. 대담자인 뜨롬바도리는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경험으로서의 작업, 방법에서의 극단적인 상대성, 주체 해체의 긴장'을 푸코의 지적 태도의 핵심적인 측면이라고 지적한다. 푸코의 이런 태도는 그의 비판자들의 타킷이 된다. 메르키오르 같은 사람들은 그를 '신 니체주의자'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 '근본주의적인 강단허무주의자' 같은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메르키오르의 지적은 곡해이거나 과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푸코의 작업에 대한 그런 비평의 맥락 역시 충분히 병행하여 고민해야 하는 바가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푸코가 '맑스의 성전화'를 비판하했듯이 '푸코의 성전화' 역시 함께 지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에서는 푸코의 입을 통해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 철학계의 흐름이라던가 사상적 영향, 그리고 그에 대한 푸코의 응대같은 후일담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푸코가 현상학과도, 사르트르식의 실존주의와도 거리를 두게 되는 이유가 자못 흥미롭다. 예를 들어 푸코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다분히 자유주의적 주체관으로 받아들인다. 푸코에게 사르트르의 주체는 주관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푸코의 의문은 -당연하게도- 주체가 유일하게 실존의 형태일 수 있을까.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자기 동일성 소게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을 없을까, 하는 그런 것이다. 푸코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던 당대의 비판에 대해서도 하나씩 대답한다. 먼저 구조주의자라는 평가에 대한 푸코의 답변들이 흥미롭다. 푸코는 레비 스트로스를 제외하고 알뛰세르나 라캉 같은 이들-물론 자기도 포함해서-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구조주의'라는 개념 적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같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럼 도대체 왜 당신을 구조주의자라고 하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푸코의 답변이다. 푸코는 당대 정세에 영향을 받은 '외인론'의 결과물로 이를 설명한다. 길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스탈린의 소련 이후 맑스주의자들의 불안으로 푸코는 말한다. 즉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좌파문화가 구조주의에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이에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라는 점이다. 푸코는 구조주의 논쟁의 본질이 동유럽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세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해방적인 가치를 읽고 있었던 반면 서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지지가 여전했다. 이런 점은 예전에 읽었던 박노자의 책에서도 나온적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구습으로 읽히는 맑스-레닌이 한국에서는 진보로 읽히는 정세적 모순) 뜨롬바도리는 푸코의 이런 답변이 자의적이라고 응대한다. 

푸코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애정도 이 대담집에 언급된다. 김유동의 <아도르노의 사상>을 읽다보면 푸코와 프랑크푸르트 1세대와의 관계가 언급된다. 푸코는 뉘늦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책을 접했고, 만약 어린 나이에 접했다면 그들의 주석서나 썻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또 너무 늦게 접해서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지 못했다는 점도 말한다. 푸코같은 창의적인 학자로부터 또 많은 읽을 거리를 얻는 독자로서는 그런 늦은 조우가 오히려 득이다. '자아 동일성'의 문제나 근대성 문제에 있어서 '계몽이성과 합리주의의 지배' 같은 프랑크푸르트의 문제 의식에 푸코는 친화성을 느낀다. 물론 푸코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유사성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푸코가 니체적이라면 프랑크푸르트사람들은 조금 더 프로이트적이다. 푸코는 주체문제를 조금 더 멀리 밀고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프랑크푸르트 쪽은 본질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회귀에 해방적 가치를 두고 있다는게 푸코의 입장이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푸코에게 큰 영향을 끼친 68혁명과 튀니지에서의 경험, 그의 정치적 실천 그리고 이런 일련의 행동에 근거가 되는 생각의 바탕들이 흥미롭게 전개되어간다. 대담자 뜨롬바또리는 비교적 푸코의 입장을 듣고 그 때 그 때 푸코에게 누적되어온 세간의 평가-즉 비판적 내용-을 질문한다. 특히 '권력담론'에 대한 장에서는 뜨롬바또리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맑스주의적-자코뱅적인 의미의- 권력 이야기로 푸코의 권력담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는 푸코가 거부한 '집합적' 권력의 총체성이란 문제를 들어 푸코 권력론의 현실성과 실천성을 묻고 있다.뜨롬바또리는 푸코의 권력담론이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폭넓은 정치적 실천이나 프로그램과 절합되기 어렵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반면에 푸코는 -들뢰즈도 말했듯이-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속에서, 권력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의 투쟁이 오히려 더 일반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푸코는 어떤 형태로든 '대의적' 분신에 대한 의심과 역사적 반복의 거부의지가 담겨있다. 푸코는 '우리는 대변인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뜨롬바도리는 '정당이나 제도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를 부차적으로 만드는 효과'에 대해 질문한다. 푸코는 '좌익분파의 오래된 비판'이라고 말한다. 푸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선한 권력' '악한 권력'이 아니다. 그에게는 '권력'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접근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푸코는 그런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을 통해 저항의 결을 이끌어내는 것 뿐이다. (물론 푸코의 이런 태도는 '근본주의적이다, 아나키즘적이다' 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하여간 뜨롬바도리가 책 후반부에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질문들은 푸코 비판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내용들이며, 푸코의 강점이자 또 약점이 되는 부분들이기도 하다.뜨롬바도리는 그것도 못내 아쉬웠는지 저자 후기를 통해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푸코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를 달아 놓았다. (나는 현실정치에서 권력의 얼굴이나 실체에 대해 조금 더 직접적이어야 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반권력적인 담론일 지라도 현실정치의 권력자장 안에서 적용할 때는 함께 작동하게될 권력의 문제에 대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담론적으로는 자코뱅적인 요소를 버리고 성찰할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요소 역시 역사적 실재로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푸코의 긍정적인 점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기 때문에 푸코의 작업이 가진 '해방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권력이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면 권력에 대한 저항 역시 모든 곳에 편재해 있을 수 있다는 푸코의 낙관주의는 오래전에 큰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주의자' 이건간에 그의 대선사께서 만든 이론과 생각을 텍스트로 수용하고 해석해서 이론가로서 실천한답시고 여기저기 끼워넣는 방식에는 늘 부정적이다. 현실의 역사성,복잡성, 그리고 거기에 야수성은 문학텍스트가 아니다. 문학텍스트처럼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우리 대선사께서 하신 이런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그대로 적용가능하다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푸코의 맑스>는 푸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푸코의 입을 통해, 그리고 비판적 질문을 통해 그의 생각의 큰 줄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후에 나오는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은 <푸코의 맑스>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재확인하는 짤은 인터뷰이며 <선악을 넘어서>는 68혁명과 제도권 교육에 대한 고등학생들과의 대담으로 평이하지만 흥미롭다.  

 권력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때는, 권력의 악독한 영향하에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권력이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이,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그들의 적절한 능동성(혹은 수동성)을 가지고 투쟁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이 투쟁들이 권력 체계에 봉사하는 통제와 구속들에 맞서 싸우는 한, 이 투쟁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과 깊은 관련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투쟁의 일반성은 확실히 총체화의 형식, "진리"의 형식을 띤 이론적 총체화의 형식을 띠지 않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투쟁의 일반성은 권력과 동일한 체계이며, 권력이 행사되는 형태일 뿐입니다. 

                                                                     -미셀 푸코 <푸코와 들뢰즈의 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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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 20세기와 한나 아렌트 한길신인문총서 9
김비환 지음 / 한길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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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써보자. '정치'는 '양복입고 싸움질하기, 네모 칸에 도장찍기'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같은 크기의 삼각형에 사각형을 밀어넣는 우를 범할 지라도 깍여나간 부분 말고 나름 작은 효용쯤은 있지 않을까.  

이 책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책 <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을 중심으로 '정치'와 '정치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벌써 머리가 아파지는..)   

그럼 먼저 한나 아렌트가 뭐하는 여자인가부터 이야기를 해보자. 길게 말할 자리도 아니니 쉽게 유태인이었으며-수용소 생활도 해봤다- 하이데거의 제자로 썸씽-자기들은 지적인 뭐라지만 성인남녀의 일은 모른다-하여간 그런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아렌트 약력 소개끝. 이제 본 판으로 들어간다. 이 책의 저자인 김비환 교수는 아렌트를 둘러싼 비판들부터 소개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또 '자유'를 강조했으나 공동체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실존주의적 형이상학이라는 공격도 받았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독특하다'라는 말이다. 머리 막으면 아래치고 아래 막으면 머리치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 또는 그녀의 '정치철학'이란게 뭐냐?   이 책의 저자는 먼저 아렌트의 철학이 경험론적인 실천영역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말한다. 밑줄은 경험론적 실천영역에 쫘악...그러니까 아렌트가 콩 볶아 먹는 머리 속에서 정치철학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나치에 핍박받는 유태인으로서 유태인의 정체성을 자각한 '패리아' 정신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삶과 철학 전체를 관통한다고 말한다.('패리아'라는 것은 원래 인도의 천민을 말하는데,결국 주변인이나 버림받은 자,비인간과 같은 뉘앙스로 이해하면 된다.) 이게 대전제가 되는 셈이다.이 이야기를 저자가 꺼낸 이유는 아렌트 철학에서 전반기와 후반기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둥, 연속성이 없다는 식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답변인셈이다. 실제로 비판론자들이 거론한 모순들은 아렌트 철학이 담고 있는 다원성의 양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를 위해 서구의 전통적인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이른바 플라톤에서 마르크스까지의 총체적 비판이다. 이를 통해 아렌트는 자신이 말하는 '정치'를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흔히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생기는 문제들-욕구이든,갈등이든-을 제도를 통해 해결하여 사람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정도. 사회교과서에 나옴직한 보편적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아렌트에게 '비정치적'이거나 '정치 왜곡'이다. 여기서부터 독창적이지 않은가. 이건 그녀에게 사회적 영역에 종속된 정치적 영역인 셈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영역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영역이란 것도 포함시킨다. 흔히들 사회적 영역을 공적 영역과 같이 쓰는데 비해 아렌트는 이를 분리시킨다. 사회적 영역은 오히려 사적 영역의 공적화, 내지는 공적 영역의 사익화를 본의아니게 획책하는 공간이 된다. 아렌트에게 공적 영역은 '정치적 영역이다. 이 말은 아렌트가 '정치 자체의 원리에 입각한 정치'를 강조했다는 말이다. 즉 '정치'라는 녀석이 워낙 여기 저기 개입되어 있다보니 진짜 '정치'는 사라지고 이제 정치는 모두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적 정치. 또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추동력으로서의 목적론적 정치-아렌트적 용어로는 만듦의 정치-가 주가 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가 그런 셈이다. 이건 중요하지만 정치에 부차적이란게 아렌트의 견해다. 쉽게 예를 들어 '노동자 천국'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은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비정치적 행위이다. 무언가 만듦 자체를 위해 정치가 도구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의 하나로서 순수한(?)의미의 '정치' 복원을 시도한다. (이 말 뜻은 아렌트가 순수학문으로서의 정치이론을 강조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아렌트에게 정치는 경험적인 것이고 현상학적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한 것 같은 두 가지 세상. 이데아계와 현상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모든 것은 여기의 일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도구화되어 있는 정치 영역을 환원하려는 균형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다...라고 저자가 말한다.(그게 가능한지는 이견이 있으나 하여간 아렌트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다.)

이런 아렌트에게 가장 적대적인 정치체는  전체주의였다. (나도 그렇다.다 그렇지 않나?) 그녀는 수용소 경험이 있고 아이힌만 재판 참석 경험도 있다. 그녀는 '정치'라는 공적 공간 자체를 말살 한 것이 '전체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다. 아렌트가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히틀러 체제와 스탈린 체제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렌트비판자 중에는 아렌트의 정치이론이 전체주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는 아렌트를 옹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해부족에서 오는 곡해라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 비판 중 일부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넘어가자.) 이런 '전체주의시대의 도래'에 과거 전통적인 정치철학은 무용지물이었다. 그에 아렌트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정치철학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물 한 잔 먹고 와서...꼴깍) 

어디까지 했더라...하여간 여차저차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깟다는 것. 특히 한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이힌만의 재판을 보면서 아렌트가 전체주의적 사고= 무사고라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다. 그녀가 자각한 패리아의 정신을 강조한 것과 등치해서 읽어도 좋을 듯 하다. 특히 최근 '언론의 자유 문제'를 이야기할 때 아렌트의 이름이 간혹 언급되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아렌트에게 '자유'는 모든 정치적 행위의 근간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렌트에게 '정치'라는 공간은 순수하게 부각시켜야할 만큼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자유'가 위협받거나 말살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뭐 어떻게 되긴? 자유가 없으니 정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럼 '정치'의 '정치다운 복원'을 외치는 아렌트는 공치는 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자유X = 정치X' 이 되기때문에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살리는 게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또 인간의 삶을 위해서(왜..인간이라고 하는지는 바로 뒤에서 설명한다.) 자유는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롤즈/맥킨타이어식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 틀로다가 구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아렌트는 자유주의자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땡!!  대략 정치사상사를 보면 아렌트는 공동체주의자들 속에 이름이 끼여있다. 사실 자유,평등 이라는 개념자체를 이분법적이고 임의적으로 쓰는게 더 문제다. 언젠가 말했듯이 누가 '자유'를 말하면 '어떤 자유?'를 이야기하고, 누가 '평등'을 말하면 '어떤 평등?'을 이라고 되물어야한다. 그만큼 이런 개념들은 이미 자의적으로 활용되어도 누구하나 타바하지 않을만큼 혼합되고 훼손되어 있다.  

왜 아렌트에게 자유=인간=정치이고 또 그럼으로서 공동체주의로 기입되는지 지금부터 볼거다. (하여간 '자유=롤즈=자유주의' 내지는 '노동=마르크스=좌빨' ...이런거는 혼자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볼 때 했으면 좋겠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이제 중심이 된다. 

아렌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알수 없다라고 말한다. 오직 아는 것은'조건지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여간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두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정관적 삶'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인 삶'이다. 아렌트는 뒤에 것에 집중한다. (한가지 더 '역시 실천이야'라고...아렌트는 정관적 삶의 고유한 가치 역시 무시하지 않았다. 아도르노가 정관적 삶을 높이 평가하되 실천적 삶을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한 위치로 대칭된다.) 하여간 '활동적인 삶'의 정치의 존재론적 기본이 되는데 세가지 활동을 의미한다. 노동. 작업. 행위이다. 노동은 말그래도 먹고사는 노동이다. 작업은 '인공적 사물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사람은 인공물의 세계에 산다. 그리고 아렌트에게, 그녀의 정치이론에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여기는 그대로 인용하자 

"사물이나 물체의 매개없이 사람들간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다원성이라는 인간적 조건, 다시 말해 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이 땅에 살고 또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조응하는 활동" 이다.  

중요한 지점은 내가 색칠했다. 아렌트에게 정치철학은 -좀 재미없는 말로 -사이 간 자를 써서 '간주체적' 이며 '다원적' 이며 '현상학적'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행위'라는 개념은 동물과는 다른-동물도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활동을 한다.군집활동을 하는 동물들.그런데 그것은 본능적인 행위이지 이성적 행위는 아니다- 인간의 특징이다. 아렌트는 딱잘라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적 영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즉 개인적 취미나 부의 추구, 미적 탐닉 등 사적 행복과 만족은 결국 온전한 삶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반쪽이 행복이란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세계 소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건 나 모르고, 또한 예술가도 못되고, 그저 예술작품이나 감상하면서 예술 속에 어쩌구 저쩌구 하며 야코 죽이는 이를 보거든 '어...세계소외 되어 있군?' 이라고 하면 대략 정답이다. 그럼 도대체 뭐가 더 있냐구?  

아렌트에게 인간은 공적 동물이다.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복의 영역이다. 그러니 사적 행복만 열나게 쫓아봐야 아렌트가 보기엔 그건 결국 100점 맞아도 수능 변환점수 50점인 셈이다.(아...뛰어나게 쉬운 설명이다.) 이러고 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의미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아렌트는 거기서 더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적 의미망 속에 갖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정치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개의 체제를 주욱 나열하고 그 장단점을 선택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이건 진짜 정치가 아니다. 내가 누차 누누히 강조했던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이거였다. 그렁저렁 하다 노란 깃발이 펄럭일 때 갑자기 과정치화되었다가 노란게 코 묻은 거라고 알고 또 정치에 등돌리다가...알고 봤더니 그 수건이 땀이 배였다는 걸 알고 석과대죄하는게 그게 정치가 아니다. 정치판은 더러운 놈들 쌈질하는 곳이니 관심없다가 거리의 확성기가 울려퍼지면 너나할 것 없이 정치평론가가 되는게 정치가 아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는 인간 삶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정치란 있엇고 내가 살면서도 정치가 있고 또 내가 죽어고 정치가 있다. 오로지 내가 정치적이 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뿐,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자각하여 온전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 아니면 반푼의 행복에 그치느냐이다. 길어졌는데 하여간 내 말로 하면 '투표는 객관식이지만 정치는 주관식'이다. 아렌트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행위라고 했다.

자..다시 아렌트의 '행위'로 돌아오자. 앞서 '자유' '전체주의 반대''공동체주의' 대충 뭐 이런말을 했었는데...아렌트의 정치적 인간에 대한 강조로 대충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한다.(아님..직접 책을 읽고 밑줄을 그어라.) 아렌트에게 '행위'란 발언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왜 아렌트의 이론중 '발언과 정체성'을 독립시켜 인용하는지 알 수 있다.  아렌트에게 행위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이고 또한 이것이 현시적 특징을 갖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폭탄 테러범이 테러를 하고도 숨어서 가만히 있으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이유때문에 테러했소.부시 물러가라'라고 하는 순간 그건 '정치'가 된다.(음..간략하니 쉬운 설명이다.) 마르크스 부사령관이 '우리의 말이 무기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언로를 통한 이데올로기 정치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로서의 발언과 정체성의 문제였다.  전체주의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말을 못하게 한다. 또는 말을 못하게끔 기획한다. 또는 말을 하면 겁주려고 조사한다. 결국 '말을 못하게 행위를 못하게'한다. 그게 모든 전체주의는 아니지만 전체주의의 주요 속성 중에 하나이다. 이제 '행위'와 '전체주의' 간에 이야기는 대략 정리되었다.

그러니까 인간답게 살려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충일하게 살려면 '정치'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행위'는 여기에 필수적이다. 그 '행위'를 통해서 '정체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 20세기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인간의 조건>을 전반부로 해서 <전체주의의 기원>,<혁명론>,<과거와 미래사이> 등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짚어나간다. 책 중반부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과 서구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아렌트에 쏟아진 비판들을 보여주고 아렌트의 의도를 읽게함으로써 반비판을 행한다. 서구 정치철학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에 대해서는 아렌트가 특정 요소만을 부각해서 의도적 칼질을 하고 있다는 균형도 보여준다. 물론 마르크스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 역시 아렌트와 비슷한 지평위에서 말을 한다. 물론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결정론자들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순수'정치학의 의미에서 경제에 정치를 종속시킨 서구 철학의 마지막 대변자였다고 본다. 아렌트는 마르크스를 '노동하는 동물' 의 세계를 만든 철학자라고 비난한다. 마르크스 부분에 대해서는 읽다가 주섬주섬비판적 메모를 해둔 내용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이 생애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곳에서 행위의 근거가 어디서 출발할 수 있는지? 또는 아렌트의 발언행위가 주체의 측면에서  엘리트적인 측면이 강조된 것은 아닌가? 이성의 언어로 발언할 수 없는 상황이나 그에 종속된 주체는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또한 노동자 여가가 소비로 귀결되는 체제에서 이 문제를 돌파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연구의 부분은 간과되어도 되는가. 아렌트의 목적초월적 정치함의가 갖는 문제점, 행위 담론의 수행성을 강조하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점. 정치 영역의 독자성의 강조가 학문적 범주의 외연에서 갖는 문제점 등등...  

 아렌트 철학의 독창성만큼 아렌트 비판자들의 주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들이 많다.마르크스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몇 몇 지점을 빼놓으면 허술하다. 이런 점들이 함께 고려되어야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성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을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까지 도달시켜놓은 점, 그리고 인간의 자발적 행위와 발언,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정치를 강조한 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대의제적 비관주의와 경제올인,정치 외면의 무관심 속에 분명히 새기고 넘어가야할 지점들이다. 

오랜만에 단 한퀴에 썻다. 헉헉...점심 시간 30분전에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 끝났다. 회사 지하 식당 아직 밥주나. 아줌마... (생각나면 수정할 마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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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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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벤야민 선집의 첫번째 책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파편적 아포리즘의 백화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 단상들을 '의미 있는 맥락'으로 결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또 벤야민이 시도한 글쓰기의 의미에도 부합하지 않을 듯 하다. 물론 벤야민 전문가들은 이 책의 내용들을 빗금을 따라 잘 오려내어 색깔별로 도화지에 붙이듯 분류하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이후 그의 책에 나오는 내용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가 갖는 의미를 배치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역자는 해제에서 친절하게 그런 내용을 언급한다.    


<일방통행로>는 단순한 꿈과 기지에 찬 아포리즘들의 모음, 아방가르드적 산문형식의 특이한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폭발력을 갖는 벤야민의 중후기 사유의 모티프들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중략)... 그 모티프들 가운데서도 특히 정신/의식/인식 대신 신체/감각/경험, 의지,개념적 인식 대신 이미지(를 통한 신경감응), 예술의 (자율적,영역적 성격 대신 기술 (내지 영영 없는 예술)이 벤야민의 아방가르드 미학과 정치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데.....<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60  

내용인 즉 1924년에 나온 이 '독특한 비학문적인 저술'에서 우리는 그 뒤에 펼쳐질 벤야민 사상의 맹아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브레히트로 부터 영향을 받은 유물론적 세계관, 초현실주의자적인 아방가르드 미학, 기술낙관론적 매체관, 또한 유대 신비주의적 경험, 이것들이 정치학과 결합되는, 다분히 모순적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제시한 벤야민의 상이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대도시를 여행하면서 일단의 사유이미지들을 얻어낸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일방통행로>라고 지은 것은 도시의 철학자, '파사쥬'의 철학자 벤야민으로서는 일관성이 있어보인다. 그의 최후의 대작 <파사쥬>는 <일방통행로>의 아이디어와 소묘들을 더욱 확장하고 세밀하게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어떻게 도시를 여행했을까? 김유동은 <발터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라는 글에서 그의 여행방식과 독해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을 수동적인 수용기관으로 만들어 외부 세계의 떨림과 변화를 지진계에 기록한다. 그러나 그 지진계에 그려진 형상들을 판독하는 것은 문학 작품의 형상들 뒤에 숨은 의미를 천착해 들어가는 작업만큼이나 쉽지 않다.    <아도르노와 현대사상>p32-33  

일단 이 책의 구성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자. 벤야민이 애정을 둔 감각인 '시각'만큼이나 이 책은 '시각적' 이다.'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벤야민은 말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시각적'이라는 것이 1차적 감각의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몸을 통해,그의 시선을 통해 드러온 감각들이 그의 세밀한 지진계와 화학반응을 불러 일으켜서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글들은 실끊어진 미노타우루스의 동굴같이 더듬거리게 만든다.  벤야민은 이 책을 그의 연인에게 헌사했다. 벤야민의 세계는 그녀 아샤 라치스를 만나면서 모종의 전환을 이룬다. 벤야민은 여행을 통해서-대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급속히 변해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와 각종 인상들을 머릿 속에 스케치한다. 그의 시각이 특이했던 것은 그가 확대경을 쓰지 않고 현미경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발터벤야민>이라는 얇은 평전을 쓴 몸메 브로더젠은 발터벤야민의 작업을 '일상의 현상학'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 뚤려 있는 가장 깊은 갱도의 바닥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골동품 보관소가 놓여 있는 것일까? <일방통행로>p72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일방통행로>p 116

 중요한 것은 '일상의 증후'라는 것이다. 그가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토로하는 것들은  20세기 초 독일의,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들과 그 안의 인간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파생되는 영역들'즉 세기초의 혼란을 겪은 총체적인 사회와 인간의 증후들을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 이미지로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일방통행로>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보자. 

 첫 글은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썬 더 가까이 있다.'로 시작되는 '주유소'이다. 이어서 '아침식당','지하실','중국산 진품','문방구','유실물보관소' 등등이 벤야민이 걷는 일방통행로에 배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벤야민은 이 공간을 유유자적 산책하면서 연신 샷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처럼 행세한다. 짐짓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처럼 때로는 심각하게 두 손으로 사각프레임을 만들어 구도를 제어보고, 때로는 접사를 위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독일의 인플레이션' 을 찍던 사진가는 잠시 담배를 피우면서 '책과 창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또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단편들을 이어 간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사진기 안에 담기는 (철학적)이미지들이다.  벤야민가 찍은 '주유소'에는 달려와 카드를 요청하는 감찍한 아가씨도 없고 '천문관 가는 길'에는 친절한 관측 해설가 선생님도 없다. 

벤야민은 '예술의 정치화'라는 측면에서 기술문명이 가져다주는 영상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이 책 곳곳에는 그런 단초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부지를 임대함>을 보자.이 글은 비평과 광고 그리고 영상미학에 대한 단상이 주를 이루는데 '비평의 적당한 거리두기' 대신 새롭게 등장한 광고와 영화에 대해 말한다.그는 '더 이상 아무것데도 놀라거나 감동 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극장에서 다시 우는 법을 배우는 것 처럼' 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말한다. '다시 우는 법'이라는 것은 벤야민의 개념어로 표현하면 '충격'이며 공감을 통한 '미메시스' 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벤야민은 이 관계 속에 자본주의적 관절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새로움'으로서의 영상이라는 텍스트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광고를 비평보다 그토록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팥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그 글자의 붉은 빛이다' <일방통행로>p139 

벤야민은 어떤 확고한, 아날로그적, 영속성보다 단절과 정지가 주는 '충격'개념을 중요시했다. <두번째 안뜰 왼편, 마담 아리안느>라는 글에 이를 예견하는 표현이 있다.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야말로 미래의 진핵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일방통행로>p153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아우라붕괴' 시대의 새로운-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학의 증거품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벤야민은 특히 에이젠슈타인의 소비에트 몽타쥬-충돌의 몽타주같은-것들을 이런 '충격'의 예술적 표현방식으로 읽고 있다. 즉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충돌을 통해 인식에 어떤 '충격'을 가하고-벤야민은 지식인의 글쓰기란 '화재경보기' 여야된다고 믿었다.-그런 '정지상태'를 통해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세계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격은 붕괴를 이끈다는 사실이다.  ... 충격을 약속하는 그 사람들이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멈춤의 순간까지도 인정할 의사가 있겠는가?  <사유이미지>p194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다가서 그 뒤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일방통행로>p70
 

 이외에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의 속에는 벤야민의 '충격','정신산만','도취','환등상' 등의 미학적 개념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해방을 위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들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또 그의 비평과 철학에 대한 태도, 이론과 현실의 상호 개입문제, 글쓰기,꿈, 대중, 사랑,자연 등등의 문제들이 길거리에 부딪히는 군중들처럼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렇지만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를 모두 학문적으로 제대로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정본 해석이 있을리도 만무하지만, 그 난해함을  좀 이겨 내며 순간 순간 보여지는 그의 그림자를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 기술적이지만 - 처세의 아포리즘이 아니라 다른 사유를 관통할 수 있을 벤야민의 아포리즘을 통해 잠시라도 문장을 부여안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만큼 '충격'의 와인은 익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의 아포리즘 하나 하나를 실험적인 단편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이미 어떤 알레고리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상영을 마친 것들도 있으리라.  


   
  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 확신을 강탈하는 도쩍떼와 같다  <재봉용품>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하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긴급 기술 지원대> 

우둔함과 비겁함으로 점철된 독일 시민의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화법 중에서도 특히 생각해볼만한 것은 절박한 재난에 대해 말하는 화법이다.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안된다'는 말이 그것이다. 뾰족한 대책없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안정과 소유 관념에 매달려온 일반 시민들은 지금 상황이 전적으로 새로운 안정성이 지배하는 상황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 .... 도처에 생에 대한 이론과 세계관이 넘쳐나는데 이 이론들은 종국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상황을 인준하는데 봉사하면서 이 땅에서 오만한 행세를 하고 있다.  <카이저 파노라마> 

성취는 오로지 이 의심과의 연관속에서 즉 구원,결단의 형태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성취가 이러한 형태로 실현되자마자, 벌거벗은 순전한 성취 자체에 대한 새로운 참을 수 없는 동경이 순식간에 들어선다.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지니고 다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소위 내적 이미지라는 것은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순전한 즉흥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앞에 들이대는 마스크에 전적으로 정향해 있다. 세계는 그와 같은 마스크의 저장고이다.<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언한 것들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그것의 밀려나 있고 움츠려든 충만 속에서 '삶의 정오' '여름정원'속의 사상가인 차라투스트라의 시간이 도래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자기 궤도의 정상에 다다른 태양이 그런 것처럼 가장 엄격하게 사물들의 윤곽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짧은 그림자들> 

누군가를 아무 희망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아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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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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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말 중 자주 사용되는 말이 '압축근대'이다. 이 말은 한국의 역사적 좌표를 이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말처럼 보인다. '압축'이 의미하는 바는-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고도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서구의 역사 과정과 비교하여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낸 근대화 과정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복합어의 두번째 단어인 '근대'라는 단어에 시선을 돌릴 필요도 있다.즉 '압축'되었을 망정 '근대' 라는 역사적 시간축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압축근대'라는 말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지만 기실 이 말을 사용할때는 '한국적 근대성의 부정적 요소'들을 언급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전근대적 권위주의의 잔존, 천민자본주의의 상식화, 시민 사회의 역사와 공간의 일천함, 정치적 다양성의 협소화, 다문화와 차이에 대한 이해부족 등등..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국은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신에 기인한 탈근대적 과제 역시 동시에 안게 된다. 결국 제대로 '이루지 못한 근대성'과 너무 '일찍 달려든 탈근대성' 사이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두가지 중층과제를 떠안게 된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어느 한쪽의 우선적 해결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소한 현실에서는 반독재세력에 대한 대항전선이 형성되더라도 그 지점은 출발점이지 결절점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써 피곤해질 '근대와 탈근대'의 논쟁은 재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액체근대>를 읽기 위해서는 수렁에 빠진 이 논쟁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에 관심이 별로 없다면- 그것은 그저 현학적인 학자들의 자기연명 수단정도로 생각한다면- 지그문트 바우먼의 <액체근대>는 별로 읽을 가치도, 읽는 재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들뢰즈가 말한 '권력의 모든 측면에 대항하여 싸울 힘'도 스스로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동네 아이들끼리 가짜 총싸움을 하더라도 그 지형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강화를 위한 지리한 동어반복의 구호보다 차라리 책에 코박는 편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물론 정답은 없다. 최소한 나는 인터넷상에서 100번의 'MB타도' 구호를 외쳤다고 100배쯤 더 진보적이 된다고 생각치 않는 비정상적인 1인 중에 하나다.) 

지그문트 바우먼이 말한 '액체근대'는 무엇일까? 여타 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개념적 용어로 설명한 '변화된 근대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소한 미묘한 차이들은 존재하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 '포스트모던'이다. (보편적 총체성의 거부를 보편적 단어로 설명해버렸다.문제는 이 '포스트모던' 이라는 것이 누구의 '포스트모던'이냐에 따라 또 상호비판적이며 때론 부정적이기까지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먼은 변화된 현재의 역사시대를 '유동성'이라는 액체의 특성에 빗대어서 말한다. 그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인 '모든 굳어진 것은 녹아내린다.'라는 말에서 '액체근대'의 추이를 읽어낸다.( 내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넘겨집던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단어는 단연코 '변화'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변증법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토대가 되는 것 아닌가? 마르크스는 이런 변화를 헤겔의 변증법과 노동계급의 궁극적 승리라는 유토피아주의로 교직해낸다. 문제는 마르크스식의 사적유물론에서는 운동성이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멈추어 서는 공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이고 이에 대한 해석을 두고 비판과 반비판이 가득하다.) 바우먼의 시각에서는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상정하면서 운동의 종말을 스스로 예고한 것으로 읽힌다. 마르크스가 '녹아내리는 것'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대상은 -쉽게 말하자면- 전근대적 과제들이었다는 것이 바우먼의 이야기다. 그리고 -비단 마르크스 프로젝트뿐만이 아니었지만 그의 프로젝트를 가장 이상적인 근대적 계몽의 의지로 읽는다면- '녹여서 이루어낸 것'이 바로 '고체근대', '무거운 근대'이다.이 시대는 근대적 유토피아의 신념은 사라진 시대이다.바우먼의 비유를 들자면 '여호수아의 담론'이 종말을 고하고 바우먼은 이제 그런 '헤비메틀의 근대'가 다시 한번 '녹아내리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이며 이를 개념화해낸 말이 '액체근대'이다.  

물론 바우먼은 전근대-근대-탈근대의 도상에서 해체가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전근대의 장점-예를 들자면 호혜성같은 것들-은 파괴되고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적 수용만이 강제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도 마찬가지이다. 바우먼은 '유동성'이라는 가치가 '상위 계층'의 독점과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밝힌다. 즉 가장 '유동성이 뛰어난 계층'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류층들이 차지하며 이익창출의 토대를 위해서 땅에 고착된 계급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바우먼은 '부재지주'라는 말로 유동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들을 표현한다.  

묶이지 않은 그들의 손은 손이 묶인 사람들을 지배한다.손이 묶이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는 손이 묶인 사람들의 속박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p 193

물론 이쯤 되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결국 '액체근대'라는 것이 현실의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하고 그저 움직이는 자본과 그 일부의 영향력들을 과대하게 형상화해낸 것은 아닌가?" 라는 것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보다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행조차 이루어내지 못해서 다시 싸우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듯 보인다. 또한 다분히 제 1세계의 산업변동 구조에 따른 사회분석의 인상도 갖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바우먼이 말하고 있는 '액체근대'이 경향성들은 이미 한국 사회와 한국의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의 결속성 문제'같은 것들에 대한 시각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노동자 개념'의 부족이다.(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작업때문이기도 하다.(이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바우먼은 사회적 생산양식의 변화-산업적 용어로 보자면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변화이다- 와 그에 따른 개인성와 유동성, 불확실성의 시대에 따른 개인의 선택적 합리성이기도 하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의 특성중에 중요한 부분으로 '상호결속의 시대의 종말'을 말한다. 일명 '결속 끊기'이다. 그는 푸코의 '원형감옥' 역시 한계효용이 다다랐다고 말한다.나름 유명한 개념이기도 한 '시놉티콘'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즉 '고체근대'의 시대는 '한 사람의 관리자가 여럿을 감시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관리자 역시 여럿의 시각에 노출되어야 하고 또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액체근대'는 이정도의 비용조차 비효율적으로 보는 것이다. 즉 공간성의 폐기이다.(바우먼은 그래서 '액체근대'의 시대에는 '시간' 특히 '속도'가 중요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쉬운 예로- 네그리의 <다중>에도 미국의 전략 배치문제가 언급하며 유사한 내용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는데- 지상군 시대의 종말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최소한 지상군이 사라지진 않아도 지상군의 비중이 현격히 줄어드는 것이 바로 판옵티콘에서 시놉티콘으로의 원형감옥에서 탈원형감옥으로의 전환의 예증같은 것이다. 바우먼은 '결혼에서 동거로' 라는 표현으로  '고체근대'의 결속성이 녹아내리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결속성에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전후 지속된 포드주의적 타협, 즉 노동-자본의 결속 또한 포함된다. 바우먼은 여기서 이런 '동거'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다.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서로 득이 되는 합의와 상호의존의 문제였다면 결속끊기는 일방의 문제이다. 일방이라 함은 결합의 한쪽 당사자가 늘 은밀히 바라왔지만 어렴풋하게라도 그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자율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p239-240 

바우먼은 '액체근대'시대에 '총체성의 신화'가 폐기되면서 '불확실성과 토대없는 개인주의'가 지배한다고 언급한다. (개인주의는 근대화의 특징인데 이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두가지가 화학결합하면 '불안'이라는 감정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현대인은 과하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며, 또한 신은 물론이고 자기 정체성, 근대적인 상상 속의 유토피아마저 사라진 하얀 지평선 위를 배회하게된다. 그가 의탁할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바우먼이 강조하는 '소비'이다. 바우먼은 크리스토퍼 래쉬의 <나르시즘의 문화>를 인용하여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린는 일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주도권은 사물에 놓인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우먼은 '소비의 자유' 가 결국은 '버릴 수 있는 자유'의 자원에 따른 '자유의 재분배'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 부분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바우먼이 보기에 소비자본주이 사회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소비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종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소비문제를 다룬 전통적인 학자들-예를 들자면 베블렌같은- 이들은 차별화와 기호가치라는 부분에 촛점을 둔다. 바우먼은 소비에서의 자유는 결국 '자원'의 문제이다. 이 차원은 소유의 자원이 아니라 폐기할 자원이다. 즉 소비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들은 '잘못된 선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나 하위계층은 소비를 통한 욕구의 배설을 꾀하지만 그들에게는 '버릴 자유'가 부족하다.(쉽게 말하면 돈 있는 사람들은 실패하면 다른걸 할 자유가 있지만 돈 없는 이들은 실패하면 빚독촉에 의한 자살이다.) 바우먼은 결국 '쇼핑하기'를 통한 정체성이 해방적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하며 사회적 위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성되는 자유의 재분배정도의 역할이 전부라고 말한다.(그런 이것이 절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본이 생산자와 결속대신에 소비자와의 '상호의존'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찾은 유일한 공간인 '소비의 공간'은 기실 '빈 공간'이다. 바우먼은 레비스트로스가 <슬픈열대>에서 보여준, 타자성 극복의 두가지 대응을 인용하여 '소비공간'에 작동하는 유동하는 자본의 전략을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타인의 타자성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두전략이 사용되었다.하나는 '뱉어내는'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먹어치우는'전략이다. ....소비의 공간은 '먹어버리는'공간으로 배치된 것이다. p164-165 

쉽게 말하면 전자의 전략은 배제의 전략이고 후자의 전략은 포섭의 전략이다. 바우먼이 보기에 현대의 개인은 자본의 포섭 전략에 완전히 노출된 존재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자유롭다고 느끼는 소비의 공간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주관적 만족'속에서만 복무하게 만드는 공간이며 외부와 단절되된 사물화된 공간인 셈이다.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주로 '고체근대'와 다른 '액체근대'의 특징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우리의 여행가방 속에 넣고 시작하기 위함이다. 그는 '액체근대' 시대에 달라진 해방의 개념, 개인성의 문제, 시/공간의 변화, 일과 자본의 결속해체, 공동체주의의 탈색-바우먼은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라는 말을 꺼내는데, 전통적 연대방식의 무너짐과 동시에 인터넷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과잉기대 속에 있다면 그의 분석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등등을 흥미로운 비유와 표현법을 통해 말하고 있다.(이 점에 이 책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덕목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액체근대'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 사실 없다. 이런 경향성 자체를 완전히 거부한다는 것은 벽돌을 가지고 밀물을 막아보려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또한 바우먼의 <액체근대>에서 그런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 책은 '해방전략지침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책 전반부에 바우먼은 아도르노로 대표되는 전세대 '비판이론'을 경유함으로써 현재적 과제를 고찰한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전체주의와 총체성의 거부' 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해방적 성찰로서 유의미했다. 바우먼에 의하면 '액체근대'의 시대에 이런 '총체성의 거부' 자체가 대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말이다.(사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아도르노는 동의하지 않을것이다.그는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에서 오히려 총체화를 거부한다는 이름으로 다시 총체화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읽어냈기때문이다.) 바우먼은 '비판이론'의 과제를 재전도하길 요구한다. 그의 개념적 용어의 사용은 칼 폴라니의 '재배태' 개념과 유사하다.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겠지만, 비판이론은 그것이 다루어야하는 주제 자체가 사라질 형국이다...과거 해방이 지녔던 의미는 현재 상황에서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 되었다.해방의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비판이론의 손길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비판적 공공 정책을 기다리는 새로운 공적 의제들이 현대 인간 조건의 '액화된' 비전과 함께 부상하고 있다. p78 

바우먼은 비판이론이 거부했던 '총체화' 가 전후 서구 역사에서 '액화된' 것으로 본다.즉 모두 녹아없어지고 소비주의의 흐름에 몸을 맡긴 파편화된 개인만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가바라보는 시각이다. 결국 그는 폴라니의 '배태'개념을 재인용하여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며 '재배태'의 가능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법률상 개인과 실제적 개인의 간극'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부정적 자유와 진정한 자유' 등등의 간극을 돌아보고 여기를 메우는 것이 '비판이론'의 과제이며 해방의 선셜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대문자' 정치의 복원과 함께 '공적영역'의 복구를 요구한다. 폴라니식으로 말하자면 탈배태된 '공적 영역'의 재배태인 셈이다. 

이제 공적 권력은 권력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서 힘껏 파괴하고 제거하려 했던 것을 소생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와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p82 

노파심 삼아 말하자면 마지막 결론부분만 방점을 찍어 읽어 내면 바우먼의 <액체근대>를 부분적으로 -결국 계몽주의적 자기강화를 위해 -응용하는 것밖에 안된다. 바우먼은 공동체주의의 부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또 근대적 프레임 속에서 헛발질하는 진보라는 관념 자체도 의문시한다. 그는 포스트모던한 현실의 변화를 충분히 인지한 틀 속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동체적 결사보다는 이미 풀려난 개인의 자유주의적 가치에,생활정치 세계와 결속에 힘을 싣는다. 이것은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불안정','불안전' 이라는 세속의 삼위일체 속에 일시성과 차이가 공존할 수 있는 통한 자유주의적 공동체 개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한가지 가능성은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파고들어가게 되면 인간 전체의 안전의 합이 늘어날 수도 있고,자유와 안전이 상호 공존 속에서 각각 증대됨은 물론이고 이들이 같이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p290 

듣기에만 좋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우먼이 '자유의 간극'을 메우는 실천적 가치에 대해서도 강조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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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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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나는 로쟈를 만났다. 일반적 용어로 '만남이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또 스쳐 지나갔다고 하기엔 너무 가깝다.' (<로쟈의 인문학서재> 리뷰를 쓰기 전에 그와의 개인적 인연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시길...) 

나는 1년에 두 서너번 쯤 서울에 간다. 지난 해도 그랬다. 잔설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 겨울, 모 대학 캠퍼스에 들를 일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오래여서인지 퇴행적 낭만성에 시달렸다. 입시전쟁에 시달릴 때, '대학 홍보달력'이 주던 캠퍼스의 판타지같은 것을 말한다. 달력은 매 달마다 모의 고사를 치뤄야하는 아이들에게 매 달마다 아름다운 판타지로 말을 건다. '조금만 더 참아라. 조금만 더 견뎌라. 저기 가면 자유와 사랑과 젖과 꿀이 흐른다.'  판타지는 과잉된면이 있지만 순간적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내가 로쟈를 만난 그 날도 판타스틱한 겨울 캠퍼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게 꽤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이미 나를 떠난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습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래 저래 습기 '촉촉'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대학 강의동 앞을 지나고 있었다. 멀리서 '중용적'인(중년의 치고는 날씬한) 몸매의 한 사람이 양손에 복사물을 잔뜩 안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겨울학기 강의 뛰는 강사 양반처럼 보였다. 그의 걸음은 경쾌했다. 거리가 가까와 지면서 나는 '어..어디선 본 듯 한 사람인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의 뇌가 파편적으로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 속에서 분석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내 곁을 지나갔다.  벌건 대낮에 나의 '래피드 아이 무브먼트'를 알아차린 것일까, 코가 닿을 만한 거리에서 그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게 끝이다. 그와의 만남의 전부다. 뭔가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스럽긴 하겠지만 나로서는 흥미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 아직 몽타주 분석작업을 마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마쳤더라도 확신하지 못했다. 대학 강의동으로 돌아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몇 번 더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로쟈'임에 왠지모를 확신이 들었다. 전도연처럼 손나팔을 만들고 "저기요...혹시 로쟈님 아니세요?" 라고 불러볼까도 생각했다. 충분히 들릴 거리였고, 그 날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어도 무방한 햇볕이 은은한 겨울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1년에 서너번 서울에 올라가고 그 날 따라 안가던 대학 캠퍼스를 가게 되었고, 로쟈는 하필이면 그 때 도서관에서 복사물을 가지고 그 앞을 지나갔다.  

실증적으로 보자면 평범한 시선교차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의 시간이다. 하지만 불교적 의미로 우연이 맺어지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그 찰나는 거대한 부딪힘으로 변용된다. 물론 그걸 통해 실제적으로 내가 얻은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런 만남의 경험도 '만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만개감같은 것은 수확이다..그와의 단순한 인사가 주는 효용대신에 내가 얻고자 한 것은 이것이다. 일종의 '반시간성'. 어색함과 반가움이 공존하는 만남의 기회비용으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로쟈(이현우라는 본명보다 이게 더 익숙하다.)는 겸손하게도 스스로를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칭한다. 저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마당이니 종국에 '현고학생부군'의 이불을 덮게 될 나같은 독자는 '곁다리 독자'라고 하는게 마땅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란 것도 '곁다리 인문학자'의 생각을 훔쳐본 '곁다리 독자'의 감상 정도 되는것이다.(세상은 '현고학생부군'이 만드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선언>의 진부함을 돌려내 '만국의 곁다리 독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에는 그동안 로쟈가 '저공비행'하면서 지상에 떨어뜨린 작은 꽃다발들이 가득하다. 그의 격납고가 있는 알라딘은 그의 사상의 고향은 못되도 비행기의 집은 될 수 있다. 덕택에 알라딘의 주민들은 그의 '저공비행'을 밭일 하면서 또는 아이를 유치원보내면서 쉽게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그가 새벽안개 속에 입김을 내뿜으며 발진하는 모습이나 붉은 황혼을 뒤로하고 털털거리는 기체를 몰고 돌아오는 모습들은 알라딘 마을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의 비행기가 좋은 점은 주민들의 민원이 발생하는 '굉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아주 '친환경적'이다.) 누가 비행기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면 조종사는  만져보라고 이야기할 뿐, 과잉 친절도 과소 관심도 없다. 그 적절함은 격납고와 그의 비행기를 바라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조종사의 노련함 때문일지 아니면 소심함때문일지 그는 묵묵히 비행에 전념을 하고 꽃다발을 날리고 또 그에 보람을 느끼는 듯 하다.(그가 종국에는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개인연구실 하나 얻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저공비행'은 예전만큼 자주 못하게 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종이로 만들어진 <로쟈의 인문학서재>에서 그를 알게된 2006년 이전의 글들이 여럿 수록되서 좋았다. 책 전체에 '로쟈식 유머'가 많이 묻어 있지만 최근에 인터넷에 오르는 그의 글보다 과거 글에서 그런 '웃음'과 '비틀기'가 자주 등장하는 듯 하다.  <로망스와 포르노>라는 글에 등장하는 이런 대목들을 보자.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젓소부인'의 시대였다.... <젓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 하겠느냐?!)...<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의 죄의식의 공동체!),<젓소부인>의 관객은 대부분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 보는 경우다. <로쟈의 인문학서재> p141 

 <애마부인>을 부모들이 일나간 친구의 집에서 훔쳐보고 <젓소부인>을 다른 테잎 두 개 사이에 끼워서 빌려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키득거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로망스와 포르노>라는 글은 '포르노의 시선은 전체주의적 시선이다'라는 왠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그런 내용을 중심으로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와 지젝의 비평 사이를 오고 간다. 로쟈는 그러면서 슬쩍쿵 하고 '선정적'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모순에 대해서도 일갈을 가한다. 오히려 '선정적인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말이다. 

'이 삶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통해 니체가 외친 반형이상학적 주장을 '이게 다에요!' 라는 '아줌마철학'의 세속성으로 풀어낸 대목도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든다. 저자는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서 니체를 중심으로 한 철학사의 전환대목을 유머러스하게 풀어간다. 만약 이것을 학술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분기점을 설명하고 각각의 이론적 쟁투를 '학술적으로 표현'하려면-과연 누가 대중들이 읽게 될지 모르겠으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소용돌이에 잠긴 종이배처럼 아득하다. 하지만 로쟈는 다분히 유머러스한 문학적인 결론을 통해 이를 화해시킨다. 이미 슬글슬근 이야기는 다 끝냈다. 결론이 이렇다. "우산 셋이 나란히,티격태격 걸어갑니다." "느릅나무는 다형질적이다.다형질적 조합이다. 여럿이 나란히 제각각 살아남는 느릅나무들" 이라고 말이다. 이 말 뒤에 로쟈는 다시 뒤에 인용되기도 하는 '몰락하는 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론 4장에 나오는 말이다.(4장에는 하여간 멋진 아포리아들이 많다. 니체가 다그렇긴 하지만)  나는 -추측이긴 하지만-이 말이 후기에 나오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함께 현재 로쟈의 인간에 대한,학문에 대한,인식에 대한 어떤 자세를 읽게 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바 ( '-는 바' 는 내가 단 한 번도 쓴적이 없는 어투이고, 로쟈는 틈틈이 쓰고 있는 어투여서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그대로 인용한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p 222. 

사람도 두 다리가 있으니 교량일테지만 '왜 몰락하는자'여야하는 지는 각자 생각해 보면 되겠다. 로쟈는 '어깨 결림'이란 말로 또 '닭'이라는 말로 이야기한다.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것. <로쟈의 인문학서재>p20- 이성복,<세상과의 연애>재인용 

 내 조촐한 생각에 '눈 뜬 자들의 근대적 계몽의 오만'은 다시 찾을 때 찾더라도 잠시 잊어주어야 '몰락'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하얀 세상'을 만든 것을 나는 다분히 지젝의 실재계로 받아들였다. 그곳은 경계가 없는 백색의 허구이다. 진실은 그렇게 하얀 것일 지도 모른다.  눈을 뜨고 있을 때 더 많이 걸려 넘어졌다는 리어왕의 독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그리고 이런 개념을 '야만으로 가자는 말인가?'..그렇다 알레고리로 '야만인을 위하여' 이기도 하다만- 계몽으로 굳어진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두어도 좋다. 

로쟈는 하이데거의 '현존재'라는 유명한 개념을 비틀어, 문학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 그러게 '널브러져 있음'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구,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느냐구?' 라는 질문에 -나는 반어적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이해했는데- '그래도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인다.' 라고 말한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신이 없어도 안죽는다.' '희망적이지 않다고 절망한 것은 아니다.' '이데아적 목표가 없어도 우리는 헤쳐나갈 수 있다.' 이른바 '틈'이다. 경계이다. 그곳에서 해방의 싹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목표달성-과업수행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해봄직하다. 우리의 철학적 실천이란 것이 '목표달성-과업수행'의 직선적 세계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말이다.   


내가 크게 박장대소한 표현은'자명종-벤야민'에 대한 이야기에서이다. 먼저 로쟈는 벤야민의 '충격'개념을 이야기한다. '충격'은 벤야민에 대한 브레히트의 영향력일 것으로 보는게 지배적인 듯 하다. 벤야민은 '충격을 위한''깨어남'을 위한 자명종이 되길 바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게는 현실의 강적이 있었다. 바로 히틀러다. (벤야민의 육신은 결국 히틀러의 산을 넘지 못한다.)현실은  벤야민의 기술 문명에 대한 혁명적, 긍정적 해석에 반하여 일어난다. 괴링과 히틀러 역시 대중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당시 '독일이여 깨어나라!' 가 나치즘의 슬로건이었는데 벤야민의 '예술의 정치화' 대신 '정치의 미학화'가 지배적인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로쟈는 여기서 벤야민-히틀러의 대립을 '자명종-벤야민'과 '확성기-히틀러'로 표현한다. 간단한 표현이지만 함축성이 크다. 실제 역사적 파괴력을 보더라도 적확하다. 대중은 시계종소리보다 확성기 소리에 즉각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양자의 공통점은 이후 많은 학자들을 먹여살렸다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에는 문학,예술,철학,번역 비평등이 소개된다. 각각의 글들을 통해 해박한 지식과 자기해석을 거친 설명들을 만날 수 있다. 거기에 앞서 말한 유머러스함은 서비스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로쟈의 글쓰기의 범주와 스타일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일게다. 난이도에 대해서는 알아서 판단을 하면 된다. 내가 보기에 '대학 신입생에게 추천하는 책 '이라는 어떤 신문의 서평 기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대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학생들의 수준이 내가 졸업한 후 꽤나 높아졌는지-오래전이니 가능성도 있겠다만-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 이 표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상적 궤적들이 이 책에는 줄줄줄 흘러나온다.(왼쪽부터 쓰기를 기본으로 사진순서를 이해하면 '지젝에서 시작해서 라캉'으로 끝난다. ^^ ) 특히 로쟈는 '지젝'에 대하야 아애 한 챕터를 할애했다. 주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지젝이 만난 레닌>,<이라크> 등을 1차 텍스트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지젝이 기대고 있는 몇몇 라캉의 개념들과-로쟈는 이를 비유를 통해 비교적 쉽게 말하긴 한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정치,사회,철학적 베이스가 없으면 '딴나라'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 도 있다. (미용사의 판타지를 위해서도 우리는 상상계,상징계,실재계를 알아야된다.)  

 로쟈는 책의 시작에서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라며 '인문학으로의 초대'로 살짝 유혹하지만 실제 '인문학'은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경험축적'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바둑에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바둑을 둔다고 모두 이창호나 이세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대신 바둑의 포석을 알고,싸움의 기술을 알고,묘수풀이를 '아하'하면서 신통방통해 할 수 있어야 '바둑TV'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참고로 내게 '바둑TV'는 그저 컬러로 방송되는 '흑백TV'이다.) 인문학도 부산말로 '내나 마찬가지다.' 고로 초대는 달콤하지만 초대 이후는 산행길이 될 수도 있다. 쉽지 않은 길이다. 제대로 학문하는 사람들은 알피스트가 되어야 한다. 장비를 갖추고 전문적 훈련을 받고 정상의 쾌락을 위해,또는 밥벌이를 위해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을 참고 간다. 대개 그들은 말이 좋아 전문인이지 비정규직 생활을 오래 해야한다.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만이 '산'을 느끼고 아는 것은 아니다. '낮은 산이 좋다'는 말처럼 조금의 인내와 피로를 즐거움으로 여기며 산을 완상한다면 이것도 즐거움이고 깨달음이 돨 수 있다. 그리고 그 숲 어디에선가 우리가 '인문학적 상상력'이 가져다 주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우리 세계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고 또 조금 나아지게 만든다면 도전해 볼만한 산행이 아닌가.^^ 그런면에서 로쟈는 분명 젊은 프로 산악인이지만 또한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주말 등산가이드이기도 한셈이다.

지금까지 곁다리 인문학자의 책을 즐겁게 읽은 곁다리 독자의 리뷰였다.  

P.S) 아..격납고 주변인의 요망사항은...로쟈님이 이 책으로 돈방석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것. 열쇠는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이 쥐고 있다. 부디 이명박 장로가 눈길 한번주시길. 월스트리트도 좋아한다는 마르크스도 아닌 레닌이 여기에도 있는데 왜 여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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