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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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공전하는 행성이다. 밤에 잠들고 나서 운동은 시작된다.  아이에 따라서 공전 궤도와 공전주기는 각각 다르다. 때론 방향에 일관성이 없기도 하다. 간혹 개성적인 아이들은 회전 궤도를 만들지 않고 베게 너머로 이탈하기도 한다. 만약 아이들이 진짜 밤하늘에 달린 별이었다면 우주는 카오스 그 자체였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집 아이들은 하룻 밤에180도 정도만 돈다. 아침이 되면 난 내 발 밑에 있는 그들을 발견한다.   

  야간에 불규칙한 회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부모가 시도 하는 가장 어려운 일중 하나는 '이불 덮히기'다. 무한 도전에 가깝고 대개는 실패한다. 때로는 부모들도 아이 때의 습관에 따라 이불을 걷어차며 잔다. 요즘 부모은 그래도 좀 낫다. 그 고충을 헤아려 '조끼 이불'이라는 이불 대용품이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 안전벨트 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들에게 기능성 의류를 입힌다. 언젠가는 이것도 귀찮아 할 테지만 말이다.  

칼 폴라니에 대한 서평에 왠 아이들과 이불 타령이냐 할 사람도 있을게다. 칼 폴라니의 핵심 개념에 대한 내 나름의 비유이다. '경제야 이불 덮고 자라. 제발'  지난 몇 년 사이 인문,사회학계에 칼 폴라니의 훈풍이 불었다. 그리고 그의 주요 개념들은 이제 상식적인 용어로도 인용될 정도다. 앞서 이불을 이야기한 것은 폴라니가 말한 '배태성(embedness)'과 관련이 있다. 그들에게 침대라면 우리에게는 이불일 테니, 사회라는 이불 속에 뛰쳐나가는 경제를 다시 묻어주자는 것이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목적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것 처럼 폴라니는 경제라는 것에 선행하는 사회를 언급하는 학자다. 폴라니의 입장은 그가 비판하는 측을 통해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가장 큰 상대는 전통적인 고전파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리카도,멜서스 등이다. 폴라니는 그중 아담 스미스는 살짝 구해준다. 부각되지 못한 '도덕주의자' 스미스의 모습이 있기때문이다. 그렇다고 폴라니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맑스 연구에 단절/연속론 논쟁을 만들기도 했던 청년 맑스/후기 맑스 중에서 전자의 인본주의에 훨씬 높은 관심을 보인다.    

폴라니의 목적은 경제를 사회에 통합하는 것이었음은 이미 말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폴라니의 이 책의 서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경제가 사회와 분리된 것이 근자의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일임을 논증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폴라니는 인류학적 방법론을 동원한다. 즉 개인적 이익이라는 새로운 개념보다 인류 사회가 상호교환, 호혜적 관계를 중요시 했다는 인류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기적 개인'과 '협조적 개인'이라는 문제는 인류학 뿐 만이 아니라 진화생물학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그리고 모종의 선택적 친화성이 있다. 폴라니 역시 이와 유사한 말을 하는데  '개인적 이익 추구의 선천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은 기실 '시장 자유주의와 자유방임'의 목적을 위해 소급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폴라니의 연구가 경제학적으로 대단히 이질적인 것은 그것이 고전경제학이 의존하는 수리 경제학이나-이들에게 '경제는 과학이다'. 그래프와 수식으로 경제관계를 모델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직접적으로 인간 생활에 관여하는 형태의-후생경제학이나 케인즈주의같은- 정책적 경제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의 거대한 조류에서 살짝 비껴나간 느낌이 있다. 쟁쟁한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주장들-물론 원서로 읽진 못했으나- 에 비하면 칼 폴라니의 접근은 인문학적인 향기가 강하다. 정식화 과정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치론적 당위에 대한 논증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현재 자본주의적 작동 방식이 인류의 거대한 전제가 되어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조금은 소박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마저 느껴진다. 폴라니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경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시차적 한계는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경제사상가로서 폴라니의 지평을 조금은 낭만화, 극소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폴라니가 한국의 인문사회학계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실물경제학적인 필요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부분이 폴라니의 담당 분야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담론적 지지대가 매우 필요한 시점에서 폴라니가 살아났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역자는 후기에서 몇 가지 주요 개념 보다 '사회의 중심성'을 되살리려는 사회개혁가로서의 폴라니를 고려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한다. 즉 현재 우리 사회의 대중들의 '필요'가 잊혀진 폴라니를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폴라니가 다시 소개된 시점을 폴라니 자신의 용어를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이중운동'의 자발성 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부터 이어져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MB정부에 들어서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화용론적으로 과거 정권과의 차이를 두자면 과거에는 '그래도 이런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게 길이라구요, 안그렇습니까? ' 였다면 지금 방식은 '원래 이런거야. 뭐라구? 이 빨갱이 자식들' 인 셈이다.(좀 희화해서 쓰다보니 너무 과거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대응에 대해 나이브하게 말한 것 같다. 마치 문제는 '소통'의 문제였다는 식으로 오해받기 좋겠다. '소통'만 잘 해결되면 이 정권도 별 문제없고, 저 정권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소통' 문제만 다르지 신자유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  상징적 질서가 작용하는 현실의 좌표계에서 사람들은 과거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드라이브는 쉽게 잊는다. 현재 진보정치판의 일부 사람들은 과거유산의 적자인양 손을 들고 다닌다. "저요. 제가 상속자란 말이이에요. 쟤는 배신자에요. 쟤는 양자에요"  대중들의 취향에 영합해야하는게 정치라지만 창피함도 좀 알아야 할 텐데.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남북이 어찌 하나 같이 '유훈정치'맛에 길들여져 있는지.   

 어쨋거나 폴라니는 MB와 친구들의 뻔뻔한 신자유주의 슬로건이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때 재발간되었다. 신자유주의외엔 대안이 없다라는 맹폭에 대한 반대 운동의 담론은 여러 형태가 있었다. 가장 큰 저항담론은 언제나 마르크스 쪽에서 온다. 정치경제학 비판의 선두는 그였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한 그래서 마르크스도 갈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변태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아마 계속 갱신될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미 90년대 물건너갔다거나 또는 고도의 학문적 경향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언가 다 뒤집어 없자는투의 마르크스 말고 신자유주의의 레토닉에 방어적 공격을 할 수 있는 '언어들'은 없을까?  출판계와 미디어 등에서 특히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대해 살짝 애무 당한 느낌으로 글을 쓴 것은 대중들에게 필요한 '언어들'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접근은 매우 담론정치적이긴 하다.지금 그렇게 쓰고 있으니까...) 장하준의 책에 대한 인기 역시 어떻게 보면 담론투쟁의 도구적인 성격이 강하다는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투쟁은 담론 투쟁 부터 시작된다. 장하준을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여러 종류의 대안적 논쟁들의 백가쟁명은 분명히 긍정적인 것이다. 최소한 역동성은 그런 와중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사회의 건강성의 한 지표이기도 하다.     

대신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어느 한 편에서는 도구적 성격보다는 그 텍스트 자체가 가진 한계와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폴라니 전공자가 많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다지 비중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 비판적 도전이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생존 인물인 장하준과 그의 재벌론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과 재비판들이 가해졌다. 반면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독특한 비주류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논쟁은 오히려 '개량'이나 '혁명'이냐는 식으로만 진행된다. 좀 더 체계적인 칼 폴라니 비판서가 출현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마이클 샌델만큼 히트 한 책이 아니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상식선에서도 폴라니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와 전근대단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론적 비판이 늘 수반하는 매우 통속적인 비판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다른 쪽으로 옮겨보면 어떨까? '시장'에 대한 생각 말이다. 폴라니의 이중운동의 개념을 도입하자면 이 책이 나온 1940년대 이후 세계를 지배한 것은 -일반론적이기는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시장경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폴라리도 지적했듯이 순수한 시장경제란 없지만 '운동-반운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1940년대 이후는 세계는 '수정주의'가 승리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진보-보수의 주기를 10년 주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적 방식이긴 하지만) 폴라니는 19세기를 분석하면서 유럽의 균형상태를 언급한다. 그처럼 1940년대 이후 냉전은 또 하나의 역설적 균형을 이루어낸다. 그것은 상호 견제를 전제해 둔 불안한 균형이었으나 양자 모두 절충적인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미국과 서방은 케인즈주의에 바탕을 둔 수정자본주의적인 방식을 존중했으며, 소련과 동구권 역시 계획경제의 한계와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균형이 무너지며 신자유주의는 다시 기지개를 킨 것이다.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의 이름하에 말이다. 우리는 폴라니의 기원론적 고찰을 통해 이 또한 당대 역사와 상호작용하는 일시적 현상임을 이해할 수는 있다. 고전 경제학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자유라는 기표를 전유하면서 조정 상태를 예외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들 역시 최근 몇 년 사이 벌어진 통화위기에 잠시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런 면에서 폴라니가 '이중운동'이라고 명명해놓은 역사적인 관계는 매우 통찰력있는 방식이다. 결국 경제라는 것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태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것이 전부다'라고 하는 사고에 일침을 가할 수 있으며 또한 상존하는 저항의 근거를 늘 존속시킬 수 있다. 폴라니가 이중운동의 과정 중 자유주의적 인위성과 저항의 자발성을 배치 해 놓은 것은 그의 경제학이 대단히 인본주의적 전통 하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폴라니는 최종심급에서 '경제'로 환원해서 세기의 전환기를 읽고 있다. 거기서 핵심되는 개념은 '금본위제' 에 대한 것이다. 국내 및 국제 관계의 모든 사회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자기조정시장'과 '금본위제'라는 서로의 존재를 전제하는 관계 속에 이해한다. 그외 폴라니의 개념 '자기조정시장의 유토피아성','다시 묻어두기' 등과 함께 <거대한 전환>에서 돋보이는 개념은 '허구의 상품'이다. '노동,토지, 화폐'는 실제 상품이 아니며 '자기조정시장'을 탄생 시키고 유지하기 위한 역사적 필연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금방 이해하기 쉽지 않다. 또한 마르크스의 상품 개념과도 다르다. 마르크스는 이것의 '물신화'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이것의 발생자체를 허구화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공상적 사회주의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폴라니는 산업사회의 동학에 대해 선구적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로버트 오언을 극찬한다. 반면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산업의 위대한 힘이 자신들이 계획한 변화를 허용할지 어떨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라고 일침을 가한다. 폴라니의 가장 큰 장점은 결국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의 허구적 성격을 인류학적 방식을 따라 매혹적으로 서술한데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다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게 된다. 그동안 '자유시장'이란 개념의 허와 실에 대해 몰랐던 것일까? 일부 계층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그대로 믿었던 것일까? 경제학적으로 봐도 고전주의 경제학을 수렴한 신고전파 종합에서도 그런 '시장만능주의'에 대해선는 의심을 했엇다.  '시장주의'에 경도된 사람들 조차 정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일까?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자기조정시장'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대중들의 담론 속에서 '시장주의'는 문제는 알지만 "어쩔 수 없잖아" 라고 하며 슬쩍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껄끄러운 무엇이 아닐까?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다시 이데올로기 문제로 들어가고 만다.  지젝은 이런 상태를  바로 '냉소주의적 주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과거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적 주체들을 표현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짓을 모르나이다."와는 사뭇 다른 주체들이다.    

특정 세력들 또한 그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모를이 없다. 이익에 가장 눈 밝은 자들이 그것을 모를 수가 있는가?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노동자이기 보다는 자본가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그것을 잘 알면서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고 그 숙명적 희롱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믿는 척, 또는 믿어 버려야  것이 대중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데올로기론은 여전히 존속될 수 밖에 없다.) '이제 누가 그런 거에 신경쓰냐'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냉소어린 표정에는 조숙하게 늙어버린 피곤함이 늘상 간파된다.    

폴라니의 경제학은 어떤 측면에서도 비주류다. 공시적으로도 또한 통시적으로도 그렇다. 기원론적으로 노동,토지,화폐를 허구상품이라고 논증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하나의 존재로적 '전제'가된 상태다. 그것의 기원을 파헤치는 것과 그것이 전제로 작동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폴라니의 경제학은 가치론적인 부분이 훨씬 강하다. 그런면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폴라니를 읽고 현재화하는 것이 관건인 듯 싶다. 

 조금은 역설적으로 폴라니 본인이 부정한 '유토피아'적 개념을 동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유토피아 정치를 응원하는 바는 아니다.) 폴라니는 고전 경제학자들의 전제, '자기조정시장'이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반면 고전 경제학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식 사회주의나 코뮌 사회가 유토피아라고 한다. 그렇다고 보면 양자 모두 유토피아를 향한 운동인 셈이다. 제 3의 길을 찾는 것도 물론 방식이다. 그것도 어떤 지향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최소한의 지향을 본다면 질문은 어떤 유토피아로 가고 싶은 것인가? 조금 더 순치하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가 될 수 있다. 인류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역사는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그 무늬를 만들어 왔는가? 칼 폴라니를 비롯해 마르크스,심지어 고전경제학자들까지 주장했던 답 중에 하나는 '인간 자유의 확장'이다. 공통의 문제와 공통의 답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더 많은, 더 넓은 '자유'를 안겨주는가에 대한 개별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더 넓은 시장적 자유인가 더 넓은 인민적 자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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