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명시 체육공원서
[조선일보 박해현기자]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안개’ 마지막 연)
시인 기형도(1960~1989·사진)가 살았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흐르던 샛강의 아침은 종종 안개에 휘감겼다. 이곳엔 외지의 수몰민과 이재민들이 새 터전 삼아 몰려왔다. 데뷔작 ‘안개’는 70년대의 산업화가 안개처럼 퍼지며 수도권을 잠식했던 시기와 그때 성장했던 시인의 내면 풍경을 모사(模寫)했다.
그의 시비 제막식이 16일 광명실내체육관공원에서 열렸다. ‘기형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종락) 50여 회원들이 지난 4년 동안 운동을 펼쳤고, 광명시(시장 백재현)가 1000만 원을 내놓았다. 초기작 ‘어느 푸른 저녁’이 시비에 새겨졌다. 대학 후배이자 소설가인 황경신이 시를 읽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시비 제막식에 앞서 광명시 문화원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평론가 이광호(서울예대)는 “기형도는
미래의 시인”이라고 선언했다. “모든 시인들은 현실에 절망하고, 죽음을 마주한 실존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겉늙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노래했던 기형도의 조로(早老)는 과거의 한 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징후로서의 시간이다.” 92년에 등단한 평론가 김춘식(동국대)은 “기형도의 글쓰기는 완성을 지향하지 않았다. 아래로 녹아 떨어지는 고드름처럼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의 긴장이 기형도의 시적 자의식이었다”며 기형도 문학의 ‘문화론적 청춘’을 강조했다.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9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힌다. 그가 죽기 직전에 시집 출간을 위해 정리해 두었던 원고를 대학 시절 문예반 친구였던 소설가 성석제 원재길 등이 다시 추렸다. 평론가 김현이 시집 제목을 정했고 해설도 썼다. 기형도 17주기가 되는 올해까지 이 시집은 61쇄 40만부 찍었을 정도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박해현 기자 [ 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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