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남는 최고의 스포츠 영화는 <은반위의 기적>이다. 1980년 미국의 레이크플레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최강의 소련대표팀을 프로선수들이 빠진 아마추어 선수들만으로 구성된 약체 미국팀이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한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영화다. 간혹 명절에 한번씩 TV에서 볼 수 있는데 <록키>시리즈처럼 영웅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 배우 한명 떠오르지 않는 다큐먼터리 영화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래도 "스포츠는 살아 있다."라는 광고 카피가 먹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동안 여유가 없어 300만 이상의 관객이 봤다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볼 기회가 없었다. 독서와 영화감상과 더불어 즐기는 게 스포츠 중계를 보는 건데-난 이렇게 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나 보다.- 그 스포츠를 다룬 영화에다 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순례감독이라고 해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세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흥행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여성감독이 여배우들을 중심으로 여성스포츠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니 호기심이 컸다. 그렇다고 톰 행크스, 지나 데이비스, 마돈나가 출연해서 볼거리라도 많았던 <그들만의 리그>도 아니고 주연급이 배우들이 특별히 눈길을 끌만하지도 않았다.
영화는 시종일관 조금씩 엉성한 모습이었다. 인물들은 전형적이었고, 각 등장인물간의 갈등이 극의 내용에 녹아들지 못하고 따로 노는 느낌이고, 극의 주인공 미숙(문소리 분)이 결승전을 앞두고 귀국하려다 공항에서 병상에 누워있는 의식불명의 남편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도 왜 있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엉성한 경기장면은 박진감을 주기에 너무도 부족했다. 하다 못해 스포츠 뉴스나 중계에서도 슬로비디오를 통해 경기의 박진감과 긴장감을 높이는데 이런 스킬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흘려 보내다니...가끔씩 경기장에서 보는게 TV중계보다 재미없을 때가 있는데-경기장에서 먼 위치의 관중석에 앉아서 누가 뛰는지도,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기 어려울 때가 가끔은 있다.- 관중석도 80년대 드라마에서나 보던 스포츠 경기 장면 같고, 스포츠영화라면서 이렇게 경기장면에 불성실하기는 <공포의 외인구단>을 봤던 때가 떠오른다.
그럼 감독이 이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하려고 한 이야기가 무엇일까? 핸드볼에 별관심도 없는 수많은 관객들이-영화의 개봉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핸드볼 큰잔치의 개막전에 몇백명 안되는 관객만 참석했었단 기사를 봤다.- 이영화를 보고 나름의 감동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실화가 주는 무언가 일 것이다. 난 2004년 올림픽 당시 해외 출장 중이라 이경기를 본 기억이 없다. 집사람은 영화를 보고 나오며 당시의 편파판정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며 선수들을 응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실제 불과 얼마전 경기를 통해 선수들의 투혼을 통해 받았던 감동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우리 사회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였다. 아직도 올림픽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따는 효자종목이라고 하지만 선수들이 뛸 팀도 몇 없고, 첫 경기장면처럼 경기장엔 관중도 몇 없는 핸드볼이라는 종목이다. 수억씩 연봉을 받는 프로 야구 축구선수들이 거짓으로 병역을 기피할 때 군팀에서라도 선수생명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는 많은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처럼 지금 우리네가 살아가는 모습도 뉴스에 등장하는 큰사건, 사고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속에서 품고 살아가는 자신들만의 어려움을 잊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우정과 아줌마들의 힘을 보여줬다. 세상에 있는 세가지의 성이 남성, 여성, 아줌마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아줌마들은 몰상식하고 억척스러운 생활력만 강조돼 왔다. 그런 아줌마들의 힘은 <개같은 날의 오후>에서 한번 다뤄졌을 뿐 영화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맨날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류의 내용만 다뤄지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델마와 루이스>처럼 세련빨 날리는 얘기는 아니지만 엄마로, 아내로, 여성으로의 모습을 다룬 영화였기에 이런 성과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영화가 대박을 터트려 얼마전 일본에서 벌어진 올림픽예선 재경기에 <우생순>이란 이름을 붙인 응원 관광상품이 나오고 어떤 지자체에서는 영화의 실존 인물을 감독으로 스카웃해 팀을 만든다는 얘기가 뉴스로 나왔다. 제발 1회성으로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비인기 종목임에도 꿋꿋하게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그리고 그들처럼 별볼일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이 답답한 서민들에게 3류 신파같은 희망이라도 꿈꾸며 살 수 있는 일들이 현실에서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