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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여지껏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거기다 <데드맨 워킹>이나 <우리들의 아름다운 시간> 같은 작품을 보고나면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며 인간을 존중하기 위해선 그들이 죄를 뉘우치건 그렇지 않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들의 죄가 단순히 그들의 인간성이 나빠서보다는 사회적 모순이나 문제로 인해 범죄를 생산하게 되는 사회적 구조를 먼저 비판하고 바꾸어야 한다고 난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혹은 내 가족이 피해자가 된 상황에도 그런 말을 하고 거기에 합당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나주변 인물에게 발생한 일이 아니라도 우발적이거나 어떤 사정이 있거나 혹시 범죄에 한번이라도 연관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색안경 끼지 않고 대할 수 있을까? 예전 <넘버3>에서 열혈검사 최민식은 그랬다.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죄를 짓는 인간들이 나쁜 놈"이라고. 우리는 입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얘기하지만 정작 그러한 추상적인 명제가 내주변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현실에선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지만 "용서와 화해는 멀고 두려움과 자기방어는 가까운 법이다. 장발쟝도 기껏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빵 몇개 훔쳤을 뿐이지만 평생을 차가운 시선 속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편견 속에서 살아가지 않았던가. 죄지은 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생존을 위해 그러한 유혹의 선을 넘나드는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많은 관심과 사랑이 우선해야겠지만 그조차도 힘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나오키의 회사 사장인 히라노는 범죄는 자살이고 사회적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그것도 자기 혼자만 죽는게 아니라 친인척들까지도 죽음의 수렁으로 끌고 간다. 주위와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 속에서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이다.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이 넘쳐나서 그랬거나 아니면 정말 단순하고 사사로운 실수이거나 관계없이 우리가 목소리 높여 외치던 사회의 정의와 평등과 용서에 대한 신념은 버려둔체 내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말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나도 아직은 논리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큰소리를 치고있지만 내게 그런 상황이 주어졌을 때도 내 입에서 나온 말들에 책임질 수 있는 행동이 나오길 빌뿐이다. 작은 죄를 지은 이들에겐 몰아부치는 행동을 하면서 엄청난 죄를 지은이들이 활보하며 큰소리 칠 때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숨만 죽이고 있는 나의 비겁함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오키와 츠요시 형제는 형인 츠요시의 범죄로 일그러지게 되지만 끝끝내 형의 편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 형제간의 화해의 매개로 나오는 존레논의 <이매진>은 이책에선 차별과 편견없는 화해와 용서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역자 후기에선 비록 오노 요코가 그러한 정신과는 반대의 행위를 했다지만... 내가 이노래를 처음 접했던 건 영화 <킬링 필드>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주인공이 마지막 자유를 찾고 친구를 만나는 장면에서 들려오던 음악.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의 현장에서 벗어나며 그죄를 지은 이들과 그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죄를 지은 이들과 자신을 함께 용서하는 음악. 자신의 죄를 마음깊이 뉘우치고 죄의 여부에 관계없이 용서하고 화해하는 그런 세상이 빨리 오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