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 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차승기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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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의 중심 도시는 함흥이었다. 흥남은 함흥의 남쪽이란 뜻으로, 1920년대 초까지는 제대로 된 지명조차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대표적 신흥 재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약칭 일본질소)가 질소비료 공장으로 흥남을 선정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27년 초 사택 부지 포함 전체 47만 평의 토지를 저렴하게 구입하고, 착공 2년 반 만인 1929년 말에 흥남공장 1기 공사를 마무리했고, 193012일 조업 개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비료 생산에 돌입했다.


흥남은 북선(北鮮)의 큰 고을(大邑)’, 또는 동양 굴지의 기업도시라고 불리며 대규모 중화학공업도 시로 탈바꿈했고, 그 결과 1930년에 면으로 등록된 지 1년 만에 읍으로, 다시 1944년에는 부()로 승격되었다. 1960년대 재벌 그룹 현대가 공업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울산이 공업도시로 급성장한 것과 비견된다.


20세기 후반 한국에 울산이 있었다면,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조선에는 흥남이 있었던 셈이다.


일본질소는 창업자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의 이름을 따 노구치 콘체른이라고도 불렸다. 일본질소는 러일전쟁 무렵부터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장과 함께 사세를 확장해 갔다. 그 자신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기술 엘리트이기도 했던 노구치는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할 최적지로 한반도 동북의 해안지역을 주목했다.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기가 필요했는데, 수력발전에 적합한 압록강 상류와 가깝고, 일본과의 물류가 편리한 동해안 지역을 물색하던 중 흥남지역을 선정했다.


일본 자본의 흥남 개발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그 규모보다도 하나의 기업도시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이 징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일본질소는 토착민들을 추방한 땅 위에 단지 발전소와 공장만 건설한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공급소(백화점), 경찰서까지 제공했다. 흥남면은 공장 설비 및 부지의 확장과 함께 1년 만에 흥남읍으로 승격하는데, 놀랍게도 흥남읍의 초대 읍장은 일본질소 창업자인 노구치 시타가우 자신이었다.


원래 비료공장으로 출발했던 일본질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화약과 금속 제련 부문 등 군수 공업 분야에 진출하여 일제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했다. 전시 비상 상황에서 화학 물질을 취급하는 비료 생산 시설이 군수공장으로 전용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생산 분야(화약, 마그네슘, 인조석유 등)가 확충되어 노구치 콘체른의 규모는 더욱 비대해졌다. 일제는 국가 내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전쟁 수행에 집중시키는 이른바 고도국방국가모델을 입안하고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로 배치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 관북 지역에 조성된 일본질소 콘체른의 거대한 중화학공업 인프라는 곧바로 군수물자의 생산 및 공급 기반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노동력의 수요가 증대해가는 와중에, 일본 청년들이 대거 징병으로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일본인 노동력은 현저히 감소했다. 일본인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질소는 총독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모집·동원했다. 그 결과 콘체른 내 노동 인구의 민족 구성은 빠르게 역전되었다. 1932년 당시 흥남공장 전체 노동자 중 일본인이 70%였으나, 전쟁 말기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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