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을 무릎 꺾이게 하는 일이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겨울이면 불려가서 해야 하는 수백 포기의 김장이나, 일거리를 싸들고 가서라도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갖가지 집안 행사라는 현실, 선배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들을 롤 모델로 삼지 말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그만한 성취를 이룬 선배들이 그렇게 자탄할 때 나도 많은 것에 자신이없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충분히 훌륭하다고 대답했지만나 역시 이제 임명받은 후배들에게 같은 충고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본보기로 하면 안 돼, 나보다 더 잘돼야 해.
- P175

제주 속담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정에 가느니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다. 복자네 할망에게 들었지.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
- P189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그렇듯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복을 약속하지만 소설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어 이렇듯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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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공책 2 - 도리스 레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창비세계문학 74
도리스 레싱 지음, 권영희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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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설명이랄 것이.가능할까? 아니나 다를까 블로그며 알라딘 서재를 뒤져 보아도 누구 하나 뾰족한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우선 이 책은 형식 면에서 매우 새롭다.
작가 - 애나 - 엘라 이야기가 마구 섞여서 휘몰아친다. 애나는 이 소설의 초점 화자이다. 공산주의자에 처녀작이 꽤 팔려서 특별히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결혼을 해서 딸을 하나 뒀다가 이혼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여성이다. 여기서 '자유롭게'라는 건 아마도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으리라. 당시 이런 여성들에 대한 일종의 비꼬는 평가의 말이었을 것이라고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애나는 자신이 쓴 히트작 소설이 결국 허위임을, '노스탤지어'를 기록한 것임에 불과함을 깨닫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빨간 공책, 노란색 공책, 검정색 공책, 파란색 공책 등 색깔별로 공책을 나누어 자신의 삶을 기록해 간다.
애나가 파란색 공책에 쓰는 '소설' 속 주인공이 '엘라'이다. 애나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애나가 이 책의 작가를 반영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데, 애나는 또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엘라'의 이야기를 소설에 쓴다. 읽다 보면 이 세 인물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이게 되고 실제로도 작가는 이들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이들을 혼동하도록 작품을 쓴 것 같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작가는 문학이라는 것이 작가 개인의 삶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그랬을 때 그 문학은 허위가 될 수 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처음엔 엘라의 이야기는 소설일 뿐이야.. -사실 애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인데 ㅎㅎ- 라며 애써 두 이야기를 구분하며 머리 아프게 읽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 이 책 속에 수도 없이 나오는 말인 '그건 중요하지 않아'

60년대 초반에 출간된 책인데. '애나'는 너무나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다. 아마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는 새로운 삶을 시도했기에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었다면, 지금 2020년에 보기에는 그토록 사회를 개혁하고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 처절하게 스스로를 비판하고 몰아붙이는 사람이었기에 새롭다. 내가 느끼기에 2020년에야말로 '누구도 타인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단어는
- 위에도 몇 번이나 썼듯 - 처절하다.
뿐. 그리고 새롭다.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소설. 이것이 과연 문학작품이 맞긴 한 건가 싶은. 전통적인 스토리 구성을 완전히 깨고 있다.

책에 대한 설명들을 찾아 읽어보면 작가는 여러 색깔의 공책으로 분열되었던 자신을 '금색 공책'에서 통합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금색 공책'의 내용은 '애나'가 '쏠'이라는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면서 인식상으로 또 심리상으로 처절한 고통을 겪고 쏠을 집에서 내보내면서 거기서 빠져나오는 내용이다. 이 내용과 마지막 '자유로운 여자들5' 파트는 내용이 상충되는데 생각하다 보니 '자유로운 여자들' 부분 또한 애나가 쓴 '애나' 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것 같다. 시작하는 문장이 쏠이 떠나며 주고 간 첫 번째 문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렇게 또 독자는 작가를 애나와 동일시하게 만들어 두었네..

정말 마음 속에 오래 남는 묵직한 책인데.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번 읽어야 할 터인데, 그 또한 불가능할 듯... ㅋㅋ
300쪽 가량을 꾹 참고 읽어야 이 책의 대단함을 알게 되고 끝까지 완독이 가능해지는
꽤 어려운 책이다.
서문부터 너무 길고 어려웠는데, 다 읽고 나니 어째서 그런 어려운 서문이 붙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멋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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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1-18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으셨나 봐요!! 알맹이 님께서 오랜만에 글도 쓰실 정도로!! ^^

알맹이 2020-11-1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사실 올 초에 읽은 책인데.. 리뷰를 써놨다가 옮겨왔어요. 읽을 땐 힘들었는데.. 뭔가 묵직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좋았어요. 근데 두 번은 못 읽겠어요^^
 

이 시대에 우리가 우리의 반성적 능력을 돌볼지 말지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으로나 시민으로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존 던은 이런 차원을 잃어가는 것과, 폭력과 분쟁이 늘어나는 것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보다 저는 우리가 반성적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것은 끊임없이 효율성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나오는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적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시간을 벌려고‘ 하고, 결코 지식은 되지 못할 정보와 오락물의 잡동사니들로 인지적 한계 너머까지 내몰리는 바람에 주의집중의 시간은 줄어드는가 하면, 지식은 점점 조작적이고 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결코 지혜에는 이르지 못하지요.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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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유토피아 인들은 밤하늘에 바라다볼아름다운 별들이 무수히 많은데도 누군가 조그마한 돌덩어리의 흐릿한 빛깔에 매료되는 것을 보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 옷이 다른 사람들 옷보다 더 훌륭한 양모로 지어졌다는 이유로 자기 됨됨이도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 P148

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런 훌륭한 옷이라는 것은 결국 한때 양의 몸을 감싸던 털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을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양보다 더 훌륭한존재로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유토피아 인들은 금처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물질이 왜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람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들 편리한 대로 금에다 가치를 부여했는데도 말입니다. 그 결과 납 덩어리나 나무토막 같은 정신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그저 자신의 부도덕한심성에나 겨우 비교할 만큼 철저히 바보인 사람이, 단지 금화를 엄청나게 쌓아놓고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착하고 똑똑한 수많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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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삶을 원한다면 여행을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다. 남들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여행을 권해드리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여행을 해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바꾸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공간을 사랑함으로써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의지가 있는 분들에게, 여행은 진정 의미가 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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