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을 무릎 꺾이게 하는 일이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겨울이면 불려가서 해야 하는 수백 포기의 김장이나, 일거리를 싸들고 가서라도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갖가지 집안 행사라는 현실, 선배들은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들을 롤 모델로 삼지 말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그만한 성취를 이룬 선배들이 그렇게 자탄할 때 나도 많은 것에 자신이없어졌다. 그렇지 않다고, 충분히 훌륭하다고 대답했지만나 역시 이제 임명받은 후배들에게 같은 충고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본보기로 하면 안 돼, 나보다 더 잘돼야 해.
- P175

제주 속담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정에 가느니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다. 복자네 할망에게 들었지.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
- P189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그렇듯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복을 약속하지만 소설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어 이렇듯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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