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크 시선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서강목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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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나와 있는 블레이크 시집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는 선집이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전편과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물론 <텔의 서>와 <올비언의 딸들의 비전>, 게다가 소론 몇 편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그의 전기 시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짤막짤막한 발췌본이 아닌 완역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시상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으며 시인의 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 작품은 자체로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지만, 성숙하고 진화하는 시인의 삶과 사상과 영감 속에서 더불어 살펴볼 때 간과하기 쉬운 유기적 면모를 발견할게 된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역시 그러하다. ‘인간 영혼의 상반된 두 상태를 보임’이라고 적시한 부제는 ‘순수의 노래’와 ‘경험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사상적 대칭 구조를 통해 비로소 확연히 드러난다. ‘성목요일’, ‘굴뚝닦이’, ‘보모의 노래’는 동명의 작품이 양편에 존재하며, ‘신성한 형상’과 ‘한 신성한 형상’도 동명이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없다. 상호 간에 관련성을 지니는 시들도 여러 편이다. 전편의 ‘길 잃은 어린 소년’, ‘되찾은 어린 소년’은 후편의 ‘잃어버린 소녀’, ‘되찾은 어린 소녀’와 대응되며, 역시 후편의 ‘길 잃은 어린 소년’, ‘길 잃은 어린 소녀’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눈대중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갓난 기쁨’과 ‘갓난 슬픔’도 마찬가지다.

 

티없이 맑고 기쁨에 넘친 때 (<함박웃음 노래>에서)

 

그래 그것이 기쁨이야.

우리 모두 소년 소녀였을 때

우리 어린 시절에도

메아리치는 들판에서 뛰놀았지. (<메아리치는 들판>에서)

 

전편에서 시인은 글자 그대로 순수한 세계를 재현한다. 밝음과 기쁨과 행복이 항상 충만한 세상. 그곳에서 우리는 아이들처럼 푸른 초원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간혹 그림자가 생기더라도 개선과 극복에 대한 시인의 믿음은 확고하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놓지 않고 굳건히 품고 있으면 언젠간 기쁨을 되찾을 것이라고.

 

톰에게 천사가 말하길 착한 아이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지고, 기쁨이 모자라지 않을 거야. (<굴뚝닦이>에서)

 

생각하면 안 되지, 그대가 한숨짓는데

그대 창조주 곁에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대가 눈물 흘리는데

그대 창조주 근처에 없으리라고. (<남의 슬픔에 대해>에서)

 

후편에서는 낙관적 전망은 스러지고 더 이상 없다. 시인은 당대의 현실에 비관하고 절망한다. 경험은 그에게 뼈아픈 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중은 비탄과 고통 속에 허덕거리는 반면 극소수는 특권을 누리며 거들먹거리는 세상(<런던>에서 ‘면허받은’ 템스 강과 거리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마저 왜곡과 단절로 이끄는 비뚤어진 윤리와 종교.

 

그들의 태양은 어디에도 빛나지 않는다.

그들의 들판은 황량하고 척박하다.

그들의 길은 가시로 뒤덮였다.

그곳은 영원한 겨울이다. (<성목요일>에서)

 

아빠 엄마는 어디 있니? 말해 보렴.

둘 다 기도하러 교회에 갔지요.

......

그리고 신과 그 사제와 왕을 찬양하러 갔어요,

우리의 비참함으로 천국을 짓는 치들을. (<굴뚝닦이>에서)

 

젊은 창녀의 저주 소리는 갓난아기를 선천성 맹아로 만들며, 인간의 거짓과 위선은 두뇌와 마음속에 독 나무를 키우고 먹음직스런 속임수의 사과를 맺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한다, 원수와 적의 죽음에. 이것이 블레이크가 절실하게 발견한 당대의 런던이자 현실의 모습이다.

 

이 책의 미덕은 양뿐만이 아니다. 블레이크 시선집 중에서 번역문이 가장 유려하여 자연스럽게 읽혀나간다. 원시의 각운은 우리말로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는 옮긴이의 정성과 노력이 엿보인다. 반면 내게 있어 크나큰 단점은 영한 대역이 아니고 우리말 번역문만 실려 있다는 점이다. 산문도 아닌 운문에 있어 전적으로 번역문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은 주저하게 만든다. 참으로 아쉽다.

 

처음에 실린 <모든 종교는 하나다>와 <자연종교는 없다>는 짤막한 소론으로 작가의 사상이 간명하게 드러나 있어 시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든 종교의 원천은 진정한 인간인데, 시정신(Poetic Genius)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시정신은 곧 예언의 정신으로서 이러한 성향이 아니면 인간의 사고와 관념은 창의 없는 이성으로 제한되어 영원한 반복을 거듭할 뿐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으로 나아간다. ‘논지’의 말미에 논지의 핵심이 잘 요약되어 있다.

 

선이란 이성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것. 악은 활력으로부터 나오는 능동적인 것.

선은 천국. 악은 지옥. (<논지>에서)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분리된 육신은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

활력이 유일한 생명이며 육신으로부터 나오고, 이성은 활력의 경계 혹은 외부 경계다. (<악마의 목소리>에서)

 

시인이 제기하는 천국과 지옥의 관념은 통상적인 의미와 전혀 다르다.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은 외관상 선이며 천국이지만 참된 의미에서는 정반대다. 시인에게 있어 지옥, 악, 악마는 인간과 세계에서 박해당하고 있는 진실한 의미에서의 천국, 선, 천사다. 그래서 시인은 기꺼이 악마가 된 천사와 절친한 친구가 되고, 악마적 의미로 성경을 읽는다.

 

이 작품이 <논지>와 <지옥의 목소리>에 이어 <지옥의 잠언>과 수편의 <기억할 만한 상상>으로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지옥의 진면모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시인의 치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텔의 서>에서 천사의 막내딸인 텔은 자신의 유한성과 필멸성에 절망한다. 그는 삶의 덧없음에 공허감을 느끼고 차라리 죽음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죽음의 잠 편히 잘 수 있다면, 저녁 무렵 동산을 걸었던 이의

그 목소리 편안히 들을 수 있다면. (P.9)

 

텔은 골짜기의 백합, 작은 구름, 백합 위의 벌레와 만나고 흙덩이의 도움으로 땅속 세계를 가보게 된다. 마침내 자신의 무덤 자리에 이르러 구덩이에서 새어 나오는 비탄의 목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현실 세상으로 돌아온다.

 

처녀는 있던 자리로부터 비명 지르며 달아났다.

방해받지 않은 채 하(Har)의 골짜기로 되돌아갔다. (P.17)

 

텔은 더 이상 삶을 권태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소망하지 않을 것이다. 백합, 구름, 벌레들이 누리는 삶의 안분지족과 소박한 기쁨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반면, <올비언의 딸들의 비전>은 다소 난해한 시편이다. <논지>와 <비전들>로 구성되었는데, 대략적인 플롯을 보면 오손은 세오토먼을 사랑하는데, 브로미언이 그녀를 겁탈하고 오손과 세오토먼을 동굴에 가둬놓는다.

 

올비언은 영국의 옛날 이름이라고 한다. 첫 행의 “노예 상태로”는 굵은 글꼴로 강조하고 있다. 옮긴이의 각주를 통해 주인공의 이름의 의미를 헤아려보면 아마 이런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오손은 생의 가치를 중시하고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찬양하는 존재다. 그는 노예 상태에서 흐느끼는 영국 여성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애쓴다.

 

오손은 자신의 가치관이 신의 정의, 즉 신앙과 일치한다고 믿으며, 그래서 세오토먼을 사랑한다. 브로미언의 강압적 폭력에 유린당했지만, 종교적 동굴에서 세오토먼과 믿음으로써 난관을 헤쳐 나가고 극복할 수 있음을.

 

세오토먼이 사랑스러운 눈길을 내게 돌리기만 한다면

온밤을 조용히 맴돌고, 온종일 침묵할 수도 있다.

내가 어찌 더럽혀질 수 있으리오, 그대의 모습을 깨끗하게 비출 수 있는데?

......

나는 희고 깨끗해 세오토먼의 가슴 주위를 맴돈다오. (P.145~146)

 

그런데, 세오토먼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나약과 비탄과 절망과 수동에서 허우적대며 거짓 도덕과 위선의 함정에 빠져 오손을 배척한다.

 

나의 세오토먼도 이 위선적인 정숙함을 추구하는가?

이 교활하고 간교하며, 비밀스럽고, 두려움 많아 벌벌 떠는 위선자를?

그렇다면 오손은 진실로 창녀다! 삶의 모든 깨끗한 희열이

창녀다. 세오토먼은 병자의 꿈일 뿐이고,

오손은 이기적인 신성함의 간교함에 붙잡힌 노예다. (P.152)

 

그렇게 매일아침 오손은 탄식한다. 그러나 세오토먼은

끔찍한 그림자와 대화하며, 대양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다. (P.155)

 

브로미언은 폭력과 편견과 악의적 전통의 체현자이며 욕망의 대변자다.

 

너의 부드러운 아메리카 평원들도 내 것이고, 그 북쪽도 남쪽도 내 것.

태양에 탄 거무스레한 아이들은 내 낙인이 찍혀 있고,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채찍질에 복종한다.

그 딸들은 공포를 경배하고, 폭력에 복종한다. (P.142)

 

블레이크는 <경험의 노래> 중 <길 잃은 어린 소녀>에서 자연적 사랑의 도덕적 단죄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오손은 세속적, 도덕적 잣대를 거부하는 순수한 사랑과 기쁨의 구현자다. 그것은 이성, 종교의 편협한 가치판단을 초월하여 시인이 항상 주장한대로 삶의 활력, 즉 에너지에 연원하는 심원한 원천인 것이다.

 

세오토먼과 사랑의 결합으로 지복 또 지복을 맛보는 모습을.

장밋빛 아침처럼 붉고, 처음 솟은 햇살처럼 기운찬,

그의 귀한 희열을 오손은 보리라, 관대한 사랑의 하늘에 (P.154)

 

일어나라, 그대 번쩍이는 작은 날개들이여, 그대의 갓난 기쁨을 노래하라.

일어나 그대 지복을 마시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기에!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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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김천봉 엮음 / 이담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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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영희 교수의 영미시 소개글을 읽고 난 후 그동안 방치했던 영미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덥석 골라든 책이 이것이었는데, 블레이크와 번즈를 둘 다 소개하고 있는 점이 크나큰 미덕이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시들을 일독한 후 잠시 덮어두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눈과 귀로는 보고 들리지만 머리에 와 닿지 않아서이다. 하릴없이 다시 민음사 번역본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민음사 책과 이 책, 이어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나온 번역본을 연달아 읽다 보니 그래도 블레이크의 시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순수의 노래>의 첫 편, <서시>에서 시인은 ‘행복한 노래들’(happy songs)을 적었다고 밝힌다. 과연 이 시편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행복과 기쁨, 즐거움이다. <메아리치는 녹색 들판>에서 노인들은 아이들이 녹색 들판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어린 시절에 저런 기쁨들 있었다고 술회한다.

 

내가 까만 구름, 그가 흰 구름에서 벗어나

신의 텐트 에우고 양처럼 함께 기뻐하는 날, (<꼬마 흑인소년>에서)

 

순수의 세계에서는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도 사라진다. 18세기 말이라는 연대를 상기해 보면 블레이크의 선구적 휴머니즘에 놀라게 된다. 그의 인도주의적 사고는 소년 노동에 대한 날선 비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아이들의 이상과 그렇지 못한 현실의 대비. 부모가 팔아버린 어린 아이, 까만 관 속에 갇혀 있는 수천의 굴뚝청소부 아이들. 그들의 현실은 비록 암울하지만 꿈속에서나마 천사들의 열쇠로 녹색 들판을 깔깔대며 뛰어다닐 것이다(<굴뚝청소부>). 그곳은 “사자의 붉은 눈/이내 금빛 눈물 흘러넘치고”(<밤>) 갈등과 대립이 소멸되는 영원한 기쁨의 세상이다.

 

<성 목요일>이라는 동명의 작품이 <순수의 노래>와 <경험의 노래>에 각각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의 정서를 통해 시인의 인식이 변모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전자에서는 자선학교 아이들의 시가행진과 성당 장면을 밝고 씩씩하게 묘사하고,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동정심을 간직하도로 후원자들에게 당부하는 어조다. 반면 후자에서는 이곳이 가난의 땅임을 외치며 가시투성이 길, 영원한 겨울만이 존재하는 황폐한 곳이라고 선언한다. 시인이 바라본 런던은 수년 사이에 극도로 절망적인 곳으로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 진정한 현실이라고 하겠다. 순수한 행복과 녹색 들판, 평화로움은 더 이상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어둠과 왜곡과 타락, 한탄과 저주가 난무하는 참혹한 고통의 땅이다. 사랑조차도 “검고 은밀한 사랑”(<병든 장미>)으로 변질되었다. 순수한 감정의 교환은 사라지고 “미소와 모호한 거짓 간계”로 독 사과를 키우고 적을 속여 쓰러뜨릴 때 기뻐하는 게 자신인 동시에 런던이며, 교회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의 장점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온전히 실었다는 데 있다. 민음사 판에는 부분적으로만 수록하여 전반적 면모를 조감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개별적으로도 흥미롭지만 역시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더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만 그다지 쉽지 않은 시작들인데다가 번역문이 썩 매끄러운 편이 아니라서 이해가 쉽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지식을만드는지식 판이 훨씬 자연스럽고 이해가 용이하다.

 

서시 격인 <요지>는 악마에 의해 의인이 불모의 땅으로 추방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민음사 판에는 생략된 끝의 산문 부분이 이후 작품 이해를 도와준다.

 

선은 이성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것들이다. 악은 에너지에서 솟구치는 능동적인 것들이다.

선은 천국. 악은 지옥 (<요지>에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구분되지 않으며, 에너지는 유일한 생명이자 영원한 기쁨이라는 <악마의 목소리>는 기실 시인의 은밀한 신념일 것이다. 이어지는 <지옥의 격언들>은 자체로서도 흥미진진하지만 마지막 산문 대목이 역시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신이 인간의 가슴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지옥의 격언들>에서)

 

이어지는 네 편의 <기억할 만한 환상>은 시인의 시적 환상이 종교적 영감과 만나 이룩한 극적인 대목이다. 첫 번째 편은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려서 시인의 환상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반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상력의 시대에는 확고한 신념이 산을 움직였다”고 하면서.

 

<자유의 노래>에 이어 <합창>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요지>에서 <합창>까지 흐름이 언뜻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시인의 어조와 주장을 살펴보면 긴밀한 내적 흐름이 팽팽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이처럼 전체적 감상을 통해 진면목을 더 잘 알게 된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달리 로버트 번즈는 개인적 범주와, 서정적 정취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간간이 엿보이는 해학적 기질은 슬며시 웃음마저 드리우게 한다. 번즈의 특징인 스코틀랜드 방언은 여기에 토속성과 향토미를 더해준다. 다만 우리 같은 타국 독자들은 발음조차 어려운 방언 어휘들이 오히려 낭독에 지장을 줄 따름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생쥐에게>와 <이에게>를 보듯이 번즈의 시세계는 시골 평민들의 일상을 주 무대로 삼고 있으며 어휘도 가식 없이 소박하다. 전자에서 시인은 생쥐의 보금자리를 갈아엎은 미안함과 동정심을 실컷 드러낸 후 일변하여 그나마 생쥐의 삶이 낫다고 하며 앞으로도 뒤로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망한다. 후자의 경우 예쁜 숙녀의 모자에 달라붙은 뻔뻔한 이를 온갖 표현으로 욕한 후 슬며시 우리 자신에게도 교만이 묻어 있지는 않는지 자성한다.

 

그래도 넌 축복받았지, 나에 비하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현재뿐이니:

허나 아아! 나는 뒤로 눈 돌려도

황량한 전망!

앞으로도, 보이는 건 없고

막연한 두려움뿐! (<생쥐에게>에서)

 

부디 신께서 남들이 우리를 보듯

우리 자신을 살피는 재능을 내려주시길!

그래서 많은 실수 어리석은 생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우리네 옷차림과 걸음걸이, 신앙심에도

교만이 묻어 있기 십상이니! (<이에게>에서)

 

<경건한 윌리의 기도>는 더욱 가관이다. 신에게 바치는 기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강조하면서 그럼에도 육욕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오만해질까봐 의도하신 형벌이라면 기꺼이 달게 감내하겠다며...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인물들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말고 심판을 내려달라고 경건하게 마무리한다. 기도치고는 어처구니없지만 재기와 해학이 넘치는 말재주엔 흠뻑 빠지게 된다.

 

혹시 당신께서 이 육신의 고통으로

당신의 종을 저녁아침으로 괴롭히는 건

제가 너무 많은 선물을 받은 나머지

교만하고 오만해질까 봐 그러시는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든 손 거두실 때까지

달게 벌을 받겠나이다. (<경건한 윌리의 기도>에서)

 

<고운 애프턴>과 <이별의 키스>, <다정한 입맞춤>, <휘파람을 부세요>의 순수한 애정과 서정, <내게 문을 열어주오, 오>와 <붉고, 붉은 장미>의 열렬한 사랑도 인상적이다. 번즈의 시는 블레이크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시세계를 지니고 있음을 몇 편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후기 블레이크와 같은 난해하고 심오하며 착란과도 같은 환상은 없지만, 보통 사람들의 정서에 공감하는 솔직함과 순수함이 요절한 시인답게 그에게 자연스레 깃들어 있다.

 

내 손을 잡게, 나의 충실한 동무,

그리고 자네 손 나에게 주게.

우리 같이 벌컥벌컥 들이키세,

옛날을 위하여. (<옛날>에서)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이 번즈의 시이며 그 뜻도 ‘옛날’이라는 것도 모두 처음 알게 되었다. 익숙한 음악은 애달프게 들리지만, 시 자체는 애상미보다는 중년에 이른 남성들이 모여서 옛 친구와 추억을 반추하며 호탕하게 웃어제끼고 우정의 잔을 연달아 들이키는 음주가라고 하겠다. 다 같이 합창을 부르며 벌컥벌컥 마시는 그 맛은 비할 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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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결혼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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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내에 나와 있는 블레이크 시선집 세 종 중 하나로서 가장 먼저 독자에게 소개된 책이다. 구성을 보면 <순수와 경험의 노래>와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위주로 발췌하고 몇 편의 시를 추가하였으며, 여기에 단상과 작가의 서신 한 통을 덧붙였다. 블레이크 시세계의 입문서로 적당하지만 번역을 원문에 대조해 보면 충실성이 다소 부족하고 시기적으로 나온 지가 오래되어 어휘와 어조가 요즘 감각에 비하면 딱딱함을 풍긴다.

 

<순수의 노래>에 실린 시편들은 대체로 삶과 세상의 순수한 즐거움을 찬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거친 계곡 아래로 피리를 불며>는 순수의 노래를 쓴 계기를 드러내며, 아이, 양, 기쁨, 기쁨의 노래 등 글자 그대로 순진무구한 기쁨을 노래한다.

 

풀밭 위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들의 웃음이 언덕 위에서 들려올 때

내 가슴은 평온하고

그리고 모든 것은 평온하다 (<보모의 노래>에서)

 

위의 싯구와 같이 낙천적이고 밝고 긍정적이며 때 묻지 않은 정서라고 하겠다.

 

반면 <경험의 노래>는 그러하지 않다. 수년의 세월 동안 관찰하고 삶의 체험을 통해 삶과 세상의 어둠을 인식한다. 천국적 환희를 노래하기에 블레이크 당대의 사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부작용이 이미 표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적 보수반동 체제는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억압하고 구체제를 옹호하기에 급급한 시점이었다.

 

기쁨을 위해 태어난 새가

새장 속에 갇혀 어떻게 노래를 할 것인가? (<학동>에서)

 

<학동>은 순수의 정서와 경험의 정서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으며, <런던>은 한층 어둡다. 런던 거리와 템스 강마저 법제화되어 보편적 접근이 제한된 도시. 산업화, 도시화된 문명 속에서 “허약하고 비탄에 잠긴 표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에 스스로 예속되는 참혹한 상태를 묘사하며, 굴뚝 청소에 시달린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불운한 병사의 탄식, 젊디젊은 창부의 저주가 세계의 도시에 메아리친다.

 

블레이크의 시에 두드러진 특색 중 하나는 본질과 순수를 상실한 종교와 교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라고 하겠다. 황금의 교회당은 교회의 타락과 순수한 영성의 변질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당 대신에 시인은 차라리 “돼지 우리로 가서 돼지들 사이에” 눕는다.

 

그런데 나는 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무덤과 묘비가 가득 차 있음을 보았다. (<사랑의 뜰>에서)

 

이제 순수의 세계는 상실되었다.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놀던 푸른 풀밭은 사라지고 그곳엔 금지와 억압의 팻말과 교회당이 서 있다.

 

박제화된 교회에 대한 시인의 비판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벌레는 가장 좋은 잎사귀에 알을 까고, 사제는 가장 좋은 기쁨에 저주를 내린다. (<지옥의 격언>에서)

 

예수께서는 덕 그 자체이며, 충동으로부터 행동하셨지, 법칙으로부터 행동하시지 않았다. (<악마와 천사>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선과 악 또는 지식의 나무에 관련한 질문으로 종교를 시끄럽게 만드는 자들이 내쫓기게 될 것이다. (<단상>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 이르러 지옥과 악마의 의미가 오히려 진실한 신앙과 관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됨을 알게 된다. 교활한 뱀이 선량한 척하고, 의인은 거친 들판에서 노여워할 수밖에 없는 가치 전도된 왜곡된 현실.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시는 부도덕하며, 위대한 인물은 사악하며 악마적이라고 선언한다.

 

은폐되고 잠복한 가치관과 사회의 부조리를 선취한 시인의 노래는 자연 예언적 풍모를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블레이크 시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신비적, 예언적 요소가 그러하다. 예언자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존재이므로.

 

블레이크는 편지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틀에 박힌 차가운 이성과 기계적 획일과 적막이 아닌 “상상력과 비전의 세계”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의 비인간화 현상에 주목하여 순수한 인간성 회복을 선도적으로 주창한 시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은 표피적 선악의 범주를 초월한 심원한 생명력을 근간으로 하며, 신성한 비전으로 나아간다. 비록 이 시집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후기 시들이 독창적이지만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연유가 독자적인 상징체계와 비전에 근거한 데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예이츠의 <A Vision>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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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거꾸로 쏜 사자 라프카디오 ㅣ 생각하는 숲 4
셸 실버스타인 지음,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권 읽은 셸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 제일 분량이 많다. 책에는 쪽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알라딘 정보에 따르면 무려 200쪽이라고 하니! 작가 특유의 단색 펜의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러스한 삽화는 여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그동안 말을 아꼈던 작가가 여기서는 제법 아낌없는 글밥을 제공하고 있다.

 

읽는 도중과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인간의 비인간성 내지 비열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 사냥꾼을 처음 본 사자는 호기심에 차 있지만, 사냥꾼은 오로지 사자를 쏴 죽일 생각만을 갖고 있다. 사자의 항변도 소용없고, 항복 의사도, 기꺼이 산 채로 양탄자가 되겠다는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어이없어 하는 사자에게 사냥꾼은 단지 자신의 맘이라고 할 뿐이다. 잠시 후 역전된 상황에서 이번엔 사냥꾼이 사자에게 자비를 구한다. 어린 사자에게 사냥꾼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와 맘을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어린 사자가 서커스 단장과 함께 미국의 대도시에 와서 이발소, 식당, 양복점 등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또한 별 차이가 없다. 으스대며 사자에겐 서비스가 제공 안 된다고 단언하다가도 으르렁 한 번에 태도가 일변하여 공손해진다.

 

사실 책의 중반부는 어린 사자의 인간화 과정 또는 사회화 과정이라고 불릴 수 있다. 야생 동물이 인간 사회에 와서 명사수 라프카디오로 거듭 나며,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부자가 되어 휴양지에서 망중한을 즐긴다든지 양복을 간지 나게 입는 법, 미인들과의 댄스, 골프, 테니스 등의 스포츠와 취미 활동 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행복과 부, 그리고 명성’을 한 몸에 누리게 된 것 같았다. 어린 사자는 이제 멋진 라프카디오가 되었으므로.

 

라프카디오는 과연 행복할까? 마지막 두 장은 여기에 대한 대답이다. 권태를 잊기 위한 사냥 여행에서 마주친 아프리카의 사자들.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라프카디오. 사냥꾼과 사자 사이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라프카디오. 그는 어린 사자인가 아니면 명사수 라프카디오인가. 스스로 자문해도 자신이 사자인지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냥꾼들이 사는 세상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자들의 세계에 속한 것 같지도 않아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11장)

 

라프카디오는 사자로 태어났지만 사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오로지 지향하였다. 이 우화가 주는 메시지는 확연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는 속담의 함의.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 자기 계발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린 사자가 총 쏘는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은 분명 훌륭하였다.

 

라프카디오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현 알지 못했다. 다만 가다 보면 어디라도 이르게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입장이었으면 여러분도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1장)

 

라프카디오가 어디로 갔을지 우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바로 우리 이웃에, 주변에서 제2, 제3의 라프카디오를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라프카디오가 아니라고 부인할 확신도 없다.

 

작품의 원제는 <Lafcadio, The Lion Who Shot Back>이다. 여기서 Shot Back 의 의미는 물구나무해서 총을 쏘거나 총을 거꾸로 잡고 쏘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발포에 대하여 대응하여 발포한다, 즉 응사(대응사격)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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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징냐, 나의 쪽배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바스콘셀로스의 제제 3부작을 다 읽은 후 그의 최초의 성공작이라 할 만한 <호징냐>에 자연스레 눈길이 쏠렸다.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남자와 그의 쪽배 호징냐 간의 우정과 교감을 다룬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니 더할 수 없는 자연적 낭만주의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미지의 신비스런 존재인 브라질 내륙의 원시림과 강을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니!

 

아, 정녕코 이 소설이 이리 처절하며 충격적인 작품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하였다. 아니, 제제 3부작만으로 작가의 경향이 사소설적 성장소설이라고 속단한 잘못도 크다. 문명 비판의 메시지가 강하게 반영된 이 작품은 전혀 의외였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구분되는데, 1부는 아라구아이 강을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남자 제 오로꼬와 쪽배 호징냐의 여정과 대화를 기본 틀로 하여 그를 찾는 의사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병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원주민이 아님에도 그들 사회에 정착하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제 오로꼬, 그의 존재는 원주민들에게는 외경을, 의사를 포함한 도시지역의 타지인들에게는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와 새들의 말을 알아듣고 쪽배와 대화를 주고받는 능력, 요즘이라면 대단한 재능으로 칭송받을 테지만 당대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제 오로꼬는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으로 도시 지역을 떠나 외딴 변방의 마을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인물임에도 강물을 오가는 그와 쪽배의 모습에서 자취를 찾기 어렵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에게 감내하지 못할 슬픔이 찾아들었답니다. 그 이후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어요. 마치 보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처럼 보였죠. (P.37)

 

1부의 압권은 3장에서 호징냐가 들려주는 어린 나무 니닝냐의 슬픈 운명 이야기다. 어린 씨앗이 강가에 태어나 간신히 숙녀로 자라 생애의 황금기를 보낼 찰나에 맞이하는 대홍수. 무엇보다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뜻밖의 반전이 주는 결말의 묘미가 기막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니닝냐가 서서히 깨닫는 인생의 진리들.

 

아픔이 없는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란다. (P.57)

 

그것이 삶이었다. 삶은 그렇게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자애로움을 실현하였다. (P.79)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던 삶에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주는 삶으로 바뀌었다. (P.91)

 

5장에서는 반대로 제 오로꼬가 호징냐에게 얘기를 들려준다. 2년 전 선상 여행에서 마주치게 된 한 몸 파는 여자를 둘러싼 승객들 간의 호기심과 배척. ‘예수 그리스도 강’이라는 장의 표제가 궁금했는데 문제의 여인 쉬까 도이다의 말을 듣는 대목에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제 오로꼬는 무심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으로 그 강물 속에서 예수님의 선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P.181)

 

이렇게 1부에서는 모든 장들이, 모든 인물들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고 정감을 자아낸다. 적어도 1부에 국한해서는 당초 예상했던 모든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2부는 완전한 대조를 보인다. 광기를 고치러 의사를 따라 도시로 간 제 오로꼬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독방 생활,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그의 절규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그들이 제 오로꼬에게 세뇌를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 문장이다.

 

나무는 단지 나무일 뿐이고,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P.250)

 

설사 그가 미쳤다고 하자. 그가 타인과 주변에 아무런 피해도 위해도 가하지 않고 나무와 말을 주고받는다고 정신병원에 감금하여 학대하는 게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도대체 그 의사는 무엇 때문에 일부러 오지로 찾아들어 굳이 제 오로꼬를 도시로 데려간 것인지 알 수 없다. 제 오로꼬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는 삶을 시기하고 질투한 소위 문명의 음모가 아닐는지.

 

2부에서는 제 오로꼬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는 자연과 교감을 지녔던 변방 자연의 삶을 회상한다. 밀림에 사는 동물의 법왕 우루삐앙가, 식물의 왕 깔라만땅.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과 문명에 파괴되고 위축되어 가는 자연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우루삐앙가는 무조건 인간을 피해 달아나라고 조언한다. 깔라만땅이 들려주는 악어 이야기는 처연함과 엄숙함마저 자아낸다.

 

사람들이 그가 아무도 해치려 하지 않고 단지 평화의 사절로 그곳에 왔음을 모른다는 것을. 모닥불의 불빛, 빛나는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이 담긴 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그의 커다란 두 눈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P.319)

 

병원에서 퇴원하고 도시에서 살다가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밀림으로 돌아온 제 오로꼬.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아니, 슬픔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 자연적 감정을 그는 상실하였다. 인간사회와 문명의 덕택에.

 

너무 늙어 삭아버린 쪽배 호징냐를 불태워 한줌의 재로 흩날린 후 제 오로꼬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도시는 물론 밀림 속 원주민 마을에서도 더 이상 정주할 수 없다. 어떤 인간적 존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존중하지 않는다. 차라리 밀림 속을, 자연 속을 헤매다가 유랑의 삶을 누리는 게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리라.

 

작가는 제 오로꼬가 언제까지나 외로움과 무감정에 지배당하게 놔두지 않는다. 반전을 좋아하는 장난스러운 작가는 여기서도 제2의 호징냐를 등장시켜서 제 오로꼬를 기쁘게 한다. 이제 그에게는 다시금 교감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제 오로꼬가 미친 사람일까 아니면 자연과의 소통을 이해 못하는 문명사회의 도시인들이 미친 사람일까? 작가는 호징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미쳤다고요? 단지 나무들과 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미친 사람이란, 하느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지요. (P.359)

 

그것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동일한 소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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