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징냐, 나의 쪽배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바스콘셀로스의 제제 3부작을 다 읽은 후 그의 최초의 성공작이라 할 만한 <호징냐>에 자연스레 눈길이 쏠렸다.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남자와 그의 쪽배 호징냐 간의 우정과 교감을 다룬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니 더할 수 없는 자연적 낭만주의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미지의 신비스런 존재인 브라질 내륙의 원시림과 강을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라니!

 

, 정녕코 이 소설이 이리 처절하며 충격적인 작품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하였다. 아니, 제제 3부작만으로 작가의 경향이 사소설적 성장소설이라고 속단한 잘못도 크다. 문명 비판의 메시지가 강하게 반영된 이 작품은 전혀 의외였다.

 

작품은 1부와 2부로 구분되는데, 1부는 아라구아이 강을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남자 제 오로꼬와 쪽배 호징냐의 여정과 대화를 기본 틀로 하여 그를 찾는 의사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병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원주민이 아님에도 그들 사회에 정착하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제 오로꼬, 그의 존재는 원주민들에게는 외경을, 의사를 포함한 도시지역의 타지인들에게는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무와 새들의 말을 알아듣고 쪽배와 대화를 주고받는 능력, 요즘이라면 대단한 재능으로 칭송받을 테지만 당대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제 오로꼬는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으로 도시 지역을 떠나 외딴 변방의 마을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인물임에도 강물을 오가는 그와 쪽배의 모습에서 자취를 찾기 어렵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에게 감내하지 못할 슬픔이 찾아들었답니다. 그 이후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어요. 마치 보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처럼 보였죠. (P.37)

 

1부의 압권은 3장에서 호징냐가 들려주는 어린 나무 니닝냐의 슬픈 운명 이야기다. 어린 씨앗이 강가에 태어나 간신히 숙녀로 자라 생애의 황금기를 보낼 찰나에 맞이하는 대홍수. 무엇보다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뜻밖의 반전이 주는 결말의 묘미가 기막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린 니닝냐가 서서히 깨닫는 인생의 진리들.

 

아픔이 없는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란다. (P.57)

 

그것이 삶이었다. 삶은 그렇게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자애로움을 실현하였다. (P.79)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던 삶에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주는 삶으로 바뀌었다. (P.91)

 

5장에서는 반대로 제 오로꼬가 호징냐에게 얘기를 들려준다. 2년 전 선상 여행에서 마주치게 된 한 몸 파는 여자를 둘러싼 승객들 간의 호기심과 배척. ‘예수 그리스도 강이라는 장의 표제가 궁금했는데 문제의 여인 쉬까 도이다의 말을 듣는 대목에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제 오로꼬는 무심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으로 그 강물 속에서 예수님의 선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P.181)

 

이렇게 1부에서는 모든 장들이, 모든 인물들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우며 아름답고 정감을 자아낸다. 적어도 1부에 국한해서는 당초 예상했던 모든 즐거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었다.

 

2부는 완전한 대조를 보인다. 광기를 고치러 의사를 따라 도시로 간 제 오로꼬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적 처우를 감내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독방 생활,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그의 절규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다. 그들이 제 오로꼬에게 세뇌를 강요하는 것은 바로 이 문장이다.

 

나무는 단지 나무일 뿐이고,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P.250)

 

설사 그가 미쳤다고 하자. 그가 타인과 주변에 아무런 피해도 위해도 가하지 않고 나무와 말을 주고받는다고 정신병원에 감금하여 학대하는 게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도대체 그 의사는 무엇 때문에 일부러 오지로 찾아들어 굳이 제 오로꼬를 도시로 데려간 것인지 알 수 없다. 제 오로꼬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는 삶을 시기하고 질투한 소위 문명의 음모가 아닐는지.

 

2부에서는 제 오로꼬의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는 자연과 교감을 지녔던 변방 자연의 삶을 회상한다. 밀림에 사는 동물의 법왕 우루삐앙가, 식물의 왕 깔라만땅. 그들의 이야기는 인간과 문명에 파괴되고 위축되어 가는 자연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우루삐앙가는 무조건 인간을 피해 달아나라고 조언한다. 깔라만땅이 들려주는 악어 이야기는 처연함과 엄숙함마저 자아낸다.

 

사람들이 그가 아무도 해치려 하지 않고 단지 평화의 사절로 그곳에 왔음을 모른다는 것을. 모닥불의 불빛, 빛나는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이 담긴 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 가는 그의 커다란 두 눈을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P.319)

 

병원에서 퇴원하고 도시에서 살다가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밀림으로 돌아온 제 오로꼬.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아니, 슬픔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 자연적 감정을 그는 상실하였다. 인간사회와 문명의 덕택에.

 

너무 늙어 삭아버린 쪽배 호징냐를 불태워 한줌의 재로 흩날린 후 제 오로꼬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도시는 물론 밀림 속 원주민 마을에서도 더 이상 정주할 수 없다. 어떤 인간적 존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존중하지 않는다. 차라리 밀림 속을, 자연 속을 헤매다가 유랑의 삶을 누리는 게 그에게는 더 나을 것이리라.

 

작가는 제 오로꼬가 언제까지나 외로움과 무감정에 지배당하게 놔두지 않는다. 반전을 좋아하는 장난스러운 작가는 여기서도 제2의 호징냐를 등장시켜서 제 오로꼬를 기쁘게 한다. 이제 그에게는 다시금 교감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제 오로꼬가 미친 사람일까 아니면 자연과의 소통을 이해 못하는 문명사회의 도시인들이 미친 사람일까? 작가는 호징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미쳤다고요? 단지 나무들과 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미친 사람이란, 하느님의 섭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을 이해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지요. (P.359)

 

그것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동일한 소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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