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평점 :
품절


국내에 나와 있는 블레이크 시선집 세 종 중 하나로서 가장 먼저 독자에게 소개된 책이다. 구성을 보면 <순수와 경험의 노래><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위주로 발췌하고 몇 편의 시를 추가하였으며, 여기에 단상과 작가의 서신 한 통을 덧붙였다. 블레이크 시세계의 입문서로 적당하지만 번역을 원문에 대조해 보면 충실성이 다소 부족하고 시기적으로 나온 지가 오래되어 어휘와 어조가 요즘 감각에 비하면 딱딱함을 풍긴다.

 

<순수의 노래>에 실린 시편들은 대체로 삶과 세상의 순수한 즐거움을 찬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거친 계곡 아래로 피리를 불며>는 순수의 노래를 쓴 계기를 드러내며, 아이, , 기쁨, 기쁨의 노래 등 글자 그대로 순진무구한 기쁨을 노래한다.

 

풀밭 위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들의 웃음이 언덕 위에서 들려올 때

내 가슴은 평온하고

그리고 모든 것은 평온하다 (<보모의 노래>에서)

 

위의 싯구와 같이 낙천적이고 밝고 긍정적이며 때 묻지 않은 정서라고 하겠다.

 

반면 <경험의 노래>는 그러하지 않다. 수년의 세월 동안 관찰하고 삶의 체험을 통해 삶과 세상의 어둠을 인식한다. 천국적 환희를 노래하기에 블레이크 당대의 사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부작용이 이미 표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정치적 보수반동 체제는 미국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억압하고 구체제를 옹호하기에 급급한 시점이었다.

 

기쁨을 위해 태어난 새가

새장 속에 갇혀 어떻게 노래를 할 것인가? (<학동>에서)

 

<학동>은 순수의 정서와 경험의 정서를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으며, <런던>은 한층 어둡다. 런던 거리와 템스 강마저 법제화되어 보편적 접근이 제한된 도시. 산업화, 도시화된 문명 속에서 허약하고 비탄에 잠긴 표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에 스스로 예속되는 참혹한 상태를 묘사하며, 굴뚝 청소에 시달린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불운한 병사의 탄식, 젊디젊은 창부의 저주가 세계의 도시에 메아리친다.

 

블레이크의 시에 두드러진 특색 중 하나는 본질과 순수를 상실한 종교와 교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라고 하겠다. 황금의 교회당은 교회의 타락과 순수한 영성의 변질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당 대신에 시인은 차라리 돼지 우리로 가서 돼지들 사이에눕는다.

 

그런데 나는 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무덤과 묘비가 가득 차 있음을 보았다. (<사랑의 뜰>에서)

 

이제 순수의 세계는 상실되었다.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놀던 푸른 풀밭은 사라지고 그곳엔 금지와 억압의 팻말과 교회당이 서 있다.

 

박제화된 교회에 대한 시인의 비판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벌레는 가장 좋은 잎사귀에 알을 까고, 사제는 가장 좋은 기쁨에 저주를 내린다. (<지옥의 격언>에서)

 

예수께서는 덕 그 자체이며, 충동으로부터 행동하셨지, 법칙으로부터 행동하시지 않았다. (<악마와 천사>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선과 악 또는 지식의 나무에 관련한 질문으로 종교를 시끄럽게 만드는 자들이 내쫓기게 될 것이다. (<단상>에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 이르러 지옥과 악마의 의미가 오히려 진실한 신앙과 관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됨을 알게 된다. 교활한 뱀이 선량한 척하고, 의인은 거친 들판에서 노여워할 수밖에 없는 가치 전도된 왜곡된 현실. 그래서 시인은 위대한 시는 부도덕하며, 위대한 인물은 사악하며 악마적이라고 선언한다.

 

은폐되고 잠복한 가치관과 사회의 부조리를 선취한 시인의 노래는 자연 예언적 풍모를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블레이크 시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신비적, 예언적 요소가 그러하다. 예언자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존재이므로.

 

블레이크는 편지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틀에 박힌 차가운 이성과 기계적 획일과 적막이 아닌 상상력과 비전의 세계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의 비인간화 현상에 주목하여 순수한 인간성 회복을 선도적으로 주창한 시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상상력은 표피적 선악의 범주를 초월한 심원한 생명력을 근간으로 하며, 신성한 비전으로 나아간다. 비록 이 시집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후기 시들이 독창적이지만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연유가 독자적인 상징체계와 비전에 근거한 데 기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예이츠의 <A Vision>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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