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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거꾸로 쏜 사자 라프카디오 ㅣ 생각하는 숲 4
셸 실버스타인 지음,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권 읽은 셸 실버스타인의 작품 중 제일 분량이 많다. 책에는 쪽수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알라딘 정보에 따르면 무려 200쪽이라고 하니! 작가 특유의 단색 펜의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유머러스한 삽화는 여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그동안 말을 아꼈던 작가가 여기서는 제법 아낌없는 글밥을 제공하고 있다.
읽는 도중과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인간의 비인간성 내지 비열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 사냥꾼을 처음 본 사자는 호기심에 차 있지만, 사냥꾼은 오로지 사자를 쏴 죽일 생각만을 갖고 있다. 사자의 항변도 소용없고, 항복 의사도, 기꺼이 산 채로 양탄자가 되겠다는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어이없어 하는 사자에게 사냥꾼은 단지 자신의 맘이라고 할 뿐이다. 잠시 후 역전된 상황에서 이번엔 사냥꾼이 사자에게 자비를 구한다. 어린 사자에게 사냥꾼을 살려두어야 할 이유와 맘을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어린 사자가 서커스 단장과 함께 미국의 대도시에 와서 이발소, 식당, 양복점 등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또한 별 차이가 없다. 으스대며 사자에겐 서비스가 제공 안 된다고 단언하다가도 으르렁 한 번에 태도가 일변하여 공손해진다.
사실 책의 중반부는 어린 사자의 인간화 과정 또는 사회화 과정이라고 불릴 수 있다. 야생 동물이 인간 사회에 와서 명사수 라프카디오로 거듭 나며,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부자가 되어 휴양지에서 망중한을 즐긴다든지 양복을 간지 나게 입는 법, 미인들과의 댄스, 골프, 테니스 등의 스포츠와 취미 활동 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행복과 부, 그리고 명성’을 한 몸에 누리게 된 것 같았다. 어린 사자는 이제 멋진 라프카디오가 되었으므로.
라프카디오는 과연 행복할까? 마지막 두 장은 여기에 대한 대답이다. 권태를 잊기 위한 사냥 여행에서 마주친 아프리카의 사자들.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라프카디오. 사냥꾼과 사자 사이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라프카디오. 그는 어린 사자인가 아니면 명사수 라프카디오인가. 스스로 자문해도 자신이 사자인지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냥꾼들이 사는 세상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자들의 세계에 속한 것 같지도 않아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11장)
라프카디오는 사자로 태어났지만 사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오로지 지향하였다. 이 우화가 주는 메시지는 확연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는 속담의 함의.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 자기 계발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린 사자가 총 쏘는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울인 각고의 노력은 분명 훌륭하였다.
라프카디오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현 알지 못했다. 다만 가다 보면 어디라도 이르게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입장이었으면 여러분도 떠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11장)
라프카디오가 어디로 갔을지 우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바로 우리 이웃에, 주변에서 제2, 제3의 라프카디오를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라프카디오가 아니라고 부인할 확신도 없다.
작품의 원제는 <Lafcadio, The Lion Who Shot Back>이다. 여기서 Shot Back 의 의미는 물구나무해서 총을 쏘거나 총을 거꾸로 잡고 쏘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발포에 대하여 대응하여 발포한다, 즉 응사(대응사격)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