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명시 낭만주의 시대 1
김천봉 엮음 / 이담북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장영희 교수의 영미시 소개글을 읽고 난 후 그동안 방치했던 영미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덥석 골라든 책이 이것이었는데, 블레이크와 번즈를 둘 다 소개하고 있는 점이 크나큰 미덕이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시들을 일독한 후 잠시 덮어두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눈과 귀로는 보고 들리지만 머리에 와 닿지 않아서이다. 하릴없이 다시 민음사 번역본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민음사 책과 이 책, 이어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나온 번역본을 연달아 읽다 보니 그래도 블레이크의 시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순수의 노래>의 첫 편, <서시>에서 시인은 행복한 노래들’(happy songs)을 적었다고 밝힌다. 과연 이 시편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행복과 기쁨, 즐거움이다. <메아리치는 녹색 들판>에서 노인들은 아이들이 녹색 들판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어린 시절에 저런 기쁨들 있었다고 술회한다.

 

내가 까만 구름, 그가 흰 구름에서 벗어나

신의 텐트 에우고 양처럼 함께 기뻐하는 날, (<꼬마 흑인소년>에서)

 

순수의 세계에서는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도 사라진다. 18세기 말이라는 연대를 상기해 보면 블레이크의 선구적 휴머니즘에 놀라게 된다. 그의 인도주의적 사고는 소년 노동에 대한 날선 비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아이들의 이상과 그렇지 못한 현실의 대비. 부모가 팔아버린 어린 아이, 까만 관 속에 갇혀 있는 수천의 굴뚝청소부 아이들. 그들의 현실은 비록 암울하지만 꿈속에서나마 천사들의 열쇠로 녹색 들판을 깔깔대며 뛰어다닐 것이다(<굴뚝청소부>). 그곳은 사자의 붉은 눈/이내 금빛 눈물 흘러넘치고”(<>) 갈등과 대립이 소멸되는 영원한 기쁨의 세상이다.

 

<성 목요일>이라는 동명의 작품이 <순수의 노래><경험의 노래>에 각각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의 정서를 통해 시인의 인식이 변모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전자에서는 자선학교 아이들의 시가행진과 성당 장면을 밝고 씩씩하게 묘사하고,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동정심을 간직하도로 후원자들에게 당부하는 어조다. 반면 후자에서는 이곳이 가난의 땅임을 외치며 가시투성이 길, 영원한 겨울만이 존재하는 황폐한 곳이라고 선언한다. 시인이 바라본 런던은 수년 사이에 극도로 절망적인 곳으로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 진정한 현실이라고 하겠다. 순수한 행복과 녹색 들판, 평화로움은 더 이상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어둠과 왜곡과 타락, 한탄과 저주가 난무하는 참혹한 고통의 땅이다. 사랑조차도 검고 은밀한 사랑”(<병든 장미>)으로 변질되었다. 순수한 감정의 교환은 사라지고 미소와 모호한 거짓 간계로 독 사과를 키우고 적을 속여 쓰러뜨릴 때 기뻐하는 게 자신인 동시에 런던이며, 교회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의 장점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온전히 실었다는 데 있다. 민음사 판에는 부분적으로만 수록하여 전반적 면모를 조감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개별적으로도 흥미롭지만 역시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더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만 그다지 쉽지 않은 시작들인데다가 번역문이 썩 매끄러운 편이 아니라서 이해가 쉽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 지식을만드는지식 판이 훨씬 자연스럽고 이해가 용이하다.

 

서시 격인 <요지>는 악마에 의해 의인이 불모의 땅으로 추방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민음사 판에는 생략된 끝의 산문 부분이 이후 작품 이해를 도와준다.

 

선은 이성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것들이다. 악은 에너지에서 솟구치는 능동적인 것들이다.

선은 천국. 악은 지옥 (<요지>에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구분되지 않으며, 에너지는 유일한 생명이자 영원한 기쁨이라는 <악마의 목소리>는 기실 시인의 은밀한 신념일 것이다. 이어지는 <지옥의 격언들>은 자체로서도 흥미진진하지만 마지막 산문 대목이 역시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신이 인간의 가슴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지옥의 격언들>에서)

 

이어지는 네 편의 <기억할 만한 환상>은 시인의 시적 환상이 종교적 영감과 만나 이룩한 극적인 대목이다. 첫 번째 편은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려서 시인의 환상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반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상력의 시대에는 확고한 신념이 산을 움직였다고 하면서.

 

<자유의 노래>에 이어 <합창>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요지>에서 <합창>까지 흐름이 언뜻 산만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시인의 어조와 주장을 살펴보면 긴밀한 내적 흐름이 팽팽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이처럼 전체적 감상을 통해 진면목을 더 잘 알게 된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달리 로버트 번즈는 개인적 범주와, 서정적 정취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간간이 엿보이는 해학적 기질은 슬며시 웃음마저 드리우게 한다. 번즈의 특징인 스코틀랜드 방언은 여기에 토속성과 향토미를 더해준다. 다만 우리 같은 타국 독자들은 발음조차 어려운 방언 어휘들이 오히려 낭독에 지장을 줄 따름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생쥐에게><이에게>를 보듯이 번즈의 시세계는 시골 평민들의 일상을 주 무대로 삼고 있으며 어휘도 가식 없이 소박하다. 전자에서 시인은 생쥐의 보금자리를 갈아엎은 미안함과 동정심을 실컷 드러낸 후 일변하여 그나마 생쥐의 삶이 낫다고 하며 앞으로도 뒤로도 막막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망한다. 후자의 경우 예쁜 숙녀의 모자에 달라붙은 뻔뻔한 이를 온갖 표현으로 욕한 후 슬며시 우리 자신에게도 교만이 묻어 있지는 않는지 자성한다.

 

그래도 넌 축복받았지, 나에 비하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현재뿐이니:

허나 아아! 나는 뒤로 눈 돌려도

황량한 전망!

앞으로도, 보이는 건 없고

막연한 두려움뿐! (<생쥐에게>에서)

 

부디 신께서 남들이 우리를 보듯

우리 자신을 살피는 재능을 내려주시길!

그래서 많은 실수 어리석은 생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우리네 옷차림과 걸음걸이, 신앙심에도

교만이 묻어 있기 십상이니! (<이에게>에서)

 

<경건한 윌리의 기도>는 더욱 가관이다. 신에게 바치는 기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의 경건함과 순수함을 강조하면서 그럼에도 육욕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오만해질까봐 의도하신 형벌이라면 기꺼이 달게 감내하겠다며...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인물들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말고 심판을 내려달라고 경건하게 마무리한다. 기도치고는 어처구니없지만 재기와 해학이 넘치는 말재주엔 흠뻑 빠지게 된다.

 

혹시 당신께서 이 육신의 고통으로

당신의 종을 저녁아침으로 괴롭히는 건

제가 너무 많은 선물을 받은 나머지

교만하고 오만해질까 봐 그러시는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든 손 거두실 때까지

달게 벌을 받겠나이다. (<경건한 윌리의 기도>에서)

 

<고운 애프턴><이별의 키스>, <다정한 입맞춤>, <휘파람을 부세요>의 순수한 애정과 서정, <내게 문을 열어주오, ><붉고, 붉은 장미>의 열렬한 사랑도 인상적이다. 번즈의 시는 블레이크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독자적인 시세계를 지니고 있음을 몇 편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후기 블레이크와 같은 난해하고 심오하며 착란과도 같은 환상은 없지만, 보통 사람들의 정서에 공감하는 솔직함과 순수함이 요절한 시인답게 그에게 자연스레 깃들어 있다.

 

내 손을 잡게, 나의 충실한 동무,

그리고 자네 손 나에게 주게.

우리 같이 벌컥벌컥 들이키세,

옛날을 위하여. (<옛날>에서)

 

유명한 <올드 랭 사인>이 번즈의 시이며 그 뜻도 옛날이라는 것도 모두 처음 알게 되었다. 익숙한 음악은 애달프게 들리지만, 시 자체는 애상미보다는 중년에 이른 남성들이 모여서 옛 친구와 추억을 반추하며 호탕하게 웃어제끼고 우정의 잔을 연달아 들이키는 음주가라고 하겠다. 다 같이 합창을 부르며 벌컥벌컥 마시는 그 맛은 비할 바 없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