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피타 히메네스 대산세계문학총서 60
후안 발레라 지음,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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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60

후안 발레라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시기를 살아간 작가이지만, 이 작품은 어느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적 필치와 섬세하며 그윽한 묘사, 그리고 차분하지만 침잠하지 않는 은근한 어조,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작품에 독특한 격조를 더해주고 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돈 루이스,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고자 하는 젊은 미망인 페피타.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어찌 보면 부도덕할 수도 있는 관계의 두 사람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돈 루이스는 성직에 대한 염원과 제어할 수 없는 연정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성(聖)과 속(俗), 천상의 사랑과 지상의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페피타에 대해 돈 루이스의 호기심은 처음엔 아버지가 관심을 두고 있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와 같이 자기를 합리화한다.
“제가 사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그것은 만물이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P.35)

서서히 그의 내면에 갈등이 비롯된다. 그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걱정”을 느낀다.
“모든 곳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감각적인 열락은 제 자신에게서 보다 높은 희구와 열망을 향한 마음을 순간순간 잊게 만들기도 합니다.” (P.35)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 못지않게 신에 대한 사랑의 신학적 문제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영혼이 창조주를 무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바칠 지상의 대상을 발견한지 못했기 때문에 제 자신을 창조한 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확신할 수 있을까요?” (P.31)

돈 루이스의 서신으로 꾸며진 전반부에서 작가는 이렇게 젊은이의 섬세한 내면적 갈등과 서서히 피어오르는 사랑의 싹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매혹시킨 페피타 히메네스는 어떤 인물인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점입니다.” (P.12)
“그녀에게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기운이 풍겼고, 외모에서는 평화가 느껴졌습니다.” (P.25)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P.27)

본당 신부는 그녀를 “성녀”(P.27)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성인”(P.23)으로 지칭하는 것과 절묘하게 들어맞고 있다. 성인과 성녀, 즉 두 사람은 천생연분임을 암시하고 있다.

늙은 남편의 죽음이 일년반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상복을 입고 있던 페피타는 어느 날 갑자기 사교모임을 마련하고 상복을 벗는다. 즉 그녀 내면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페피타에 대한 돈 루이스의 감정의 변화는 나날이 깊이와 강도를 더해간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P.53)로 비교적 담담함을 유지하지만,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염려”(P.66)가 되며,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내면에 토로(“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었구나”(P.67))하는 단계가 된다.

이윽고 페피타와의 숲 속 만남에서 둘 만의 비밀을 갖게 되고 그의 내면은 “경이로운 변화”(P.69)를 겪는다. 그는 사랑을 자각한다.
“이상하게도 페피타의 모습이 제 영혼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제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P.77)

하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오랜 바램과 신에 대한 갈구는 여전히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낳는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 페피타 히메네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떠날 것이며, 그녀를 잊을 것입니다.” (P.79)
“언젠가부터 제 삶은 투쟁이 되었습니다.” (P.91)
“그녀 곁에 있으면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멀리 있으면, 그녀를 증오합니다.” (P.93)

이윽고 페피타의 뜨거운 시선과 미소, 그녀의 집에 들어가면서 인사를 할 때 맞잡는 두 손, 그리고 두 줄기 눈물은 그의 이성과 의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러나 여전히 신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포기하지 않고 떠나려는 그. 이때 페피타의 하인 안토뇨나가 기지와 수고(P.153)를 발휘하여 작별인사차 방문 하도록 승낙하게 만들면서 작품은 최고조에 달한다.

심야의 만남에서 두 사람 만의 진지한 대화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팽팽한 인식 차이도. 돈 루이스의 사랑관은 상상과 이데아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페피타의 현세적, 현실적 사랑관이 힘을 발한다. 그녀의 사랑은 오히려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현대적이다.
“처음 당신을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저는 당신에게 제 깊은 마음의 은밀한 자유의지를 빼앗겼던 것입니다...저의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미 저는 제 안에서 죽었고, 당신 안에서 새로 태어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P.167)

결국 페피타가 이겼다. 아니 두 사람 모두가 승리한 것이다. 이는 인성(人性)에 대한 신성(神性)의 패배를 뜻하지 않는다. 후에 그의 숙부이자 주임신부가 지적했듯이 사제가 되고자 하는 돈 루이스의 신앙은 굳건한 대지가 아니라 시적 공상이라는 모래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신부가 되는 것보다는 제때에 자신의 성향을 깨달아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은 살아가게 되는 편이 훨씬 나은 일”(P.199)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서사 자체보다도 주인공 내면의 심리 변화의 정밀한 묘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세심한 절차탁마가 작품에 단순한 사랑 소설 이상의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 자신도 이를 의식한다.
“환상에서 나온 일화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 하기보다 미세한 상황과 심리를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 흡족함을 느낀다.” (P.153)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인용을 통해 후안 발레라의 문학 특성을 재확인해본다.
“우아한 예술 표현 양식과 스타일, 그리고 섬세한 심리 묘사는 발레라 고유의 문학적 특징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아함과 고상함의 정서는 언어와 표현, 문체와 묘사를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며, 그러한 일관성은 예술에 있어서 형식미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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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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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르헤스와 카사레스가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필명으로 합작 발표한 작품집이다. 이후에도 몇 편을 공동으로 창작한 그들의 관계는 통념적 시각으로 볼 때 매우 독특한 일면이 있다.

보르헤스는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줄거리를 창작해 낼 수 없는 금세기의 전형적인 대중 장르인 탐정 소설은 신비의 베일에 싸인 사건들을 언급한 뒤에 합리적인 사실에 의거하여 그것을 증명하고 보여 줍니다.”

보르헤스의 논평은 비단 <모렐의 발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사레스의 이 작품집 역시 유형상 추리소설 또는 탐정소설에 분류될 수 있다.

주인공 이시드로 파로디는 “범죄 수사를 기록하는 연보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죄수 탐정”(P.17)이다. 그는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감방에 수감되어 보낸 세월로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탐정 소설은 대체로 행동 지향적이다.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의뢰를 받은 후 사건 현장을 살피고 사실 관계를 추적한다. 여기에서 빼어난 추리 능력이 결부되어 명탐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인물들이 그러하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는 주인공을 죄수-273호 감방 안에 갇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돈 이시드로는 죄수가 되어야만 할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카사레스는 <모렐의 발명>과 <러시아 인형>에서 현실을 닮았지만 현실이 아닌 순전한 환상의 시공간을 다루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과 세계는 매우 현실적이지만 순수한 가공품이다. 인간이 살면서 환상, 공상, 꿈을 만들어 내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이성적 두뇌가 방심하고 있을 때이며, 육체적 활동이 정지 상태에 있을 때가 그러하다. 잠잘 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아무 실체적 할 일이 없을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물과 장소적 특성을 감안할 때, 작품 전개의 방식을 대화로 이루어진다. 주로 방문객이나 의뢰인의 긴 설명이 이어지고 며칠 후 주인공이 사건의 전후 진실을 밝히는 형식이다.

의외로 지루하지 않은 것은 사건 의뢰인의 다양한 배경과 그들 언행의 허식적, 위선적 태도와 사건의 기묘성이 흥미로움을 자아내 평면성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서 연유한다.

탐정 소설답게 사건의 진실은 언제나 상식선을 뛰어넘는다. <황도십이궁>에서 신문기자 몰리나리에게 씌워진 혐의는 드루즈 교도들의 기자 희롱과 내분의 절묘한 결합에 따른 결과이다. 삼류배우 몬테네그로(<골리아드킨의 밤>에서)는 팬아메리칸 특급열차에서 남작부인, 젊은 시인, 군인, 유대인과 여정을 같이한다. 그에게 씌워진 유대인 살인 혐의는 다이아몬드에 얽힌 치열한 암투의 결말이었음을 파로디는 명쾌하게 밝혀낸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죽음의 복수, 배신한 아내와 정부(情夫)에 대한 타데오 리마르도의 복수, 중국 한 지방의 도난당한 종교 성물(聖物)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추적의 결말 등 나머지 작품들도 드러난 진실은 통상적 추론을 훌쩍 뛰어넘는다. 사실 이것이 추리소설 또는 탐정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독자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건의 진실이라면 맥 빠지지 않겠는가.

이시드로 파로디는 자신의 추론을 적극적으로 사법당국에 개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밝히길 꺼리는 듯 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죄수 신분이므로 그의 진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돈 이시드로가 무고로 갇힌 것처럼, 당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감의 반영이라고 이해함이 올바르다.

작가가 이시드로 파로디를 죄수로 설정한 것은 또한 두 작가가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공인물의 필명을 사용한 이유와 유사하다. 두 작가는 자신들의 개별적 고유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한 자신들과 작가를 분리함으로써 한결 여유로운 심적 상태로 작품을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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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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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몇몇 드라마나 영화 또는 그 주인공에 열광하는 것은 거기에서 심적 위안과 즐거움을 발견하는데 있다. 그것은 예술과 오락의 미덕이기도 하다.

한편 온라인 게임의 가장 큰 폐해는 게이머가 게임 밖과 게임 안의 공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데 있다. 즉 그는 현실 세상과 사이버 세상을 혼동한다. 그에게 진정한 세상은 괴로운 현실이 아니라 기쁨을 제공하는 사이버 세상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도망범이다. 그는 현실 세계의 누구와도 접촉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아무도 가고자 하지 않는 악명 높은 외딴 섬에 스스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곳. 그런데 일군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떠들썩한 나날을 보내는 바람에 화자는 밀물이 몰려들면 물에 잠기는 저지대에 숨어 그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한 여성을 바라보며 사랑의 감정을 품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대화를 나누려고 하나 반응이 없다. 주위를 지나치는 인물들 모두 그의 존재를 아는 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가 수일 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불현듯 나타난다. “언덕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P.70)

그는 자신이 허상이 아닌 실체로서 존재함을 안다. 코기토 에르고 숨. 그러면 그들은 무엇인가? 작가는 교묘히 암시한다. “그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순전히 헛것일지도 모른다.” (P.38~39)

화자는 그들이 모두 영상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이 모렐의 발명임을 발견한다. 모렐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촬영하고 상영하는 기계를 만들고, 이 무인도에 자신과 화자가 사랑하는 포스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 간 휴가를 보내며 전 과정을 촬영한다. 조수 간만의 차에 의해 발생한 전기를 동력으로 영사기는 영상을 반복하여 무한 상영한다.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동하면 영혼이 나타납니다...마들렌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실제로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P.115)

“나는 그 사람들과 쉬지 않고 반복되는 그들의 행동에 경멸감을 느꼈다. 거의 토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수없이 언덕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공적인 환영들로 가득 찬 섬에 있다는 것이 가장 참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P.121)

모렐이 원한 것은 포스틴과의 불멸성. 인간의 유한한 삶을 떠나 영구히 재생되는 포스틴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그녀에 대한 독점적 소유 그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자신과 그녀, 다른 친구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였다. 그리고 치명적 전염병에 대한 소문으로 “자기가 만들어 낸 기계들과 불멸성을 보호”(P.152)하였다.

“이제 나는 모렐의 행동을 고귀하고 정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P.159)

화자는 이제 모렐을 긍정한다. 화자 역시 포스틴과의 사랑을 이루고 싶어한다. 그는 영상 속에 자신이 들어갈 것을 결심한다. 그가 새로이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는 동안, 그는 서서히 죽어간다. 전염병의 징후 그대로, 하지만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내 영혼은 아직 이 영상으로 옮겨가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고 아마도 포스틴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며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환상 속에서 그녀와 함께 있을 것이다.” (P.165)

이 작품은 까사레스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다. 일찍이 26세인 1940년에, 이러한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선취하였는지를 웅변한다. 보르헤스의 서문에서처럼 당대는 심리 소설과 사실주의 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때 까사레스는 순전한 상상력을 가지고 현실에 기대지 않은 작품을 썼다.

까사레스는 세상을 러시아 인형[마트료쉬카]으로 파악한다. 훗날 그는 작품집으로 표제를 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환상은 막연한 공상이 아니다. “그에게 문학 속의 환상은 단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세계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이다.” (P.172)

문학이 예술로서의 힘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상상력이다. 독자는 문학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와 심리분석서를 기대하지 않는다. 문학에게 그것은 단지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기계문명과 정보화가 인간 세상을 옥죄어가는 당대와 현재, 문학도 점차 건조하여 윤기를 잃고 거칠어가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필두로 한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환상 문학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여기에 멀지 않다.

뒤늦게 찾아 온 까사레스. 그의 이 소설은 함의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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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형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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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15]

[수록작품]
러시아 인형
로취에서의 만남
카토
여행자가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다
우리들의 여행 (일기)
물 아래에서
세 편의 작은 환상
 -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
 - 어떤 냄새
 - 패배한 사랑

환상 문학이 다루는 세계는 현실 세계와는 구분된다. 통상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나 공상의 세계, 현실과 차원을 달리하는 독자적인 세계에서 환상 문학은 헤엄친다. 현실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까사레스는 다른 성향이다. 그의 환상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상 속의 환상. 까사레스의 글은 매우 사실적이다. 플롯 전개도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환상이 개입된다. 너무나 자연스런 개입에 독자는 환상에 의아해 하지 않고 당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나중에 이런 당연함에 스스로가 당혹해한다.

<러시아 인형>에서 마세이라는 환경운동가 샹딸을 위해 대신 호수 아래로 들어간다. 그가 본 것은 거대한 배추벌레가 사람들은 통째로 삼켜버린 장면. 그것은 현실일 수도 아니면 마세이라의 환상일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샹딸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녀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던 한 소녀에서 한 제국의 우두머리이자 오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유일한 주인”(P.45)이 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환상보다도 더 부조리한 현실, 그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로취에서의 만남> 또한 경매 사무소의 농장 판매 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폭우를 무릅쓰고 진흙탕을 운전하는 나, 성자와도 같은 온순한 인상이라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철새 씨라고 불리는 스워베르그의 동행. 나와 철새 씨의 대화는 나의 부아를 더욱 돋우는데, 그만 차는 웅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철새 씨가 자원하여 운전대를 잡는 순간 차는 아무 문제없이 술술술 나아가고 비가 그친 들판에 당도한다. 그리고 눈 깜짝할 순간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작가는 크리스마스와 환상을 결부시킨다.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휴일 또는 축일이 아니다. 종교인의 관점에서 이는 신과 인간이 합일되는 순간이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하는 인간, 이는 현실의 각박함에 인간다움이 매몰됨을 의미한다. 철새 씨는 이를 일깨운다.

사람들은 TV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미지와 배우의 실제를 쉽사리 혼동한다. 악역을 잘 해낸 배우는 무수한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반면 아름다운 역할로 인기를 끈 이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 신드롬이 대표적이다.

카토는 카이사르의 독재적 군주정 시도에 대항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존 인물이다. 자유의 상징이자 반독재의 아이콘.

독재 치하의 아르헨티나. 연극 <카토>는 폭군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덕분에 주연 배우 호르헤 다발도 자유 투사로 추앙받는다.

독재정권 타도 후 새로 권력을 잡은 혁명세력. 호르헤 다발은 일거리가 없다. 사람들에게 그는 혁명가이지 더 이상 배우가 아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지 못하면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다시 무대에 선 작품이 바로 <카토>. 그는 결국 무대에서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카토>는 현실과 무대의 갈등을 다룬다. 무대는 무대일 뿐이지만, 현실적 파급력 때문에 현실 정치인들은 항상 예의주시한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정치의 간섭과 억압이 생기고 어용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이다. 다발의 비극은 사람들이 환상을 현실로 혼동하는 데서 연유한다.

<여행자가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다>에서 나는 인도인이다. 나는 기차칸의 캄보디아 학생을 바라보며 그의 초라함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데 일터인 대사관에 들어갈 때 나는 수위에게 입장을 저지당한다. 잠이 깨어 전철에서 내리다가 거울 앞에서 본 나는 초라한 캄보디아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2면 남짓한 매우 짧은 글이지만 환상을 통해 나와 캄보디아인의 외모가 교차하면서 서양인에 비친 모습은 차이가 없음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의 여행>은 일종의 여행 일기다. 루시오 에레라는 여자친구 까르멘과 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난다. 여자친구는 로마에서는 셀리아, 베로나에서는 삘라르, 파리에서는 후스띠나, 몬세랏의 만레사에서는 루이시따,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는 마르가리따, 다시 파스퇴르호 선상에서는 에밀리아로 바뀐다. 여자친구는 바뀌지만, 루시오와 여자들의 관계는 변함없다. 루시오는 여자친구들의 고집, 경박함, 편견, 어리석음으로 심적인 고통을 겪는다. 루시오를 조문하러 간 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그들을 본다. 이제 “그는 관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것 같았다.”(P.108)

만남, 사랑, 그리고 다툼 등 남녀 간의 관계는 현실을 이루는 토대가 되지만, 한편 그것은 일방의 때로는 양자 간의 철저한 환상에 근거하여 관계가 유지된다. 흔히들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한 콩깍지가 없다면 어찌 될까?

<물 아래에서>는 까사레스의 특징인 현실적인 환상이 절묘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 중반까지는 평범한 연애소설로 흐르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상투적인 줄거리다. 그러다 갑자기 물고기가 된 사람이 등장하며, 평범은 비범으로 돌변한다. 인어가 되어버린 남자친구, 방황하는 플로라.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나, 마르뗄리. 나는 그녀의 요청에 못 이겨 인어가 되는 주사를 맞기로 한다. 사무실에서 급한 업무를 처리한 후 돌아와보니 이미 그녀는 인어가 되어 남자친구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플로라와 란다소가 물 아래에서 아주 다정하게 붙어서 내게 웃으며 인사를 하느라 계속 손을 흔드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분명 즐거워 보였다.” (P.142)

마르뗄리는 행복을 놓쳤다. 그의 지연은 현실 세계와의 단절에 대한 주저와 미련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외피를 뒤집어써야 행복하게 되는 것일까?

<세 편의 작은 환상 작품> 중 <어떤 냄새>가 분량 면이나 그의 특장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다가구 주택 안에 퍼져 있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체 썩는 냄새. 라벤나 교수는 아래층의 광대 베난시오의 주장과 행동을 보고 정신이상자로 취급한다. 이제는 자신이 냄새를 맡게 된다. 냄새는 옥따비오 부인에게 전염되고, 이어서 라이너 박사에게로. 냄새를 맡게 된 이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이성마저 마비될 정도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라벤나 교수가 수중에 넣고 싶어하던 과부 페르난다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찾아온 라이너 박사와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게 된다.

모두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이런 소동과 결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정한 사람만 맡을 수 있는 역겨운 냄새. 그것은 실체가 아닌 점에서 환상이다. 환상은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환상은 사람을 이성의 온전함에서 흐트러뜨린다. 환상을 이성으로 차분히 대처하려던 라벤나 교수는 페르난다를 잃게 된다. 라벤나 교수는 비탄에 잠긴 채 일상에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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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이은진.정윤미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두꺼운 책을 굳이 읽는 연유는 무엇보다도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며, 한국전쟁에 대해서 보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미국과 미군측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복합적인 것이다.

저자 핼버스탬은 일찍이 월남전을 다룬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언론인이라고 한다. 그의 유작이 된 이 책에서 핼버스탬은 소위 ‘잊혀진 전쟁’이 미국에서 철저히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정치, 사회적 맥락과 군사적 실패를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금도 딱딱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솜씨는 과연 능숙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국전쟁을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투현장의 말단 병사의 행동과 목소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미국 행정부 최고위층의 정치 외교적 파워게임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환자재는 글에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어 저자의 주장에 한층 설득력을 높여주고 있다.

이 방대한 저작물을 심도 깊게 검토하고 중점사항을 논의한다면 전문적 연구역량을 필요로 할 것이므로 몇 가지 인상 깊은 대목을 중심으로 간단히 기술하고자 한다.


1. 중공군에 대한 무지와 공포

‘운산에서 얻은 교훈’으로 이 대작을 시작하는 것은 중공군과의 첫 교전과 걷잡을 수 없는 퇴각이 미군에 미친 충격의 강도를 말해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켜 북진을 한 유엔군은 청천강과 압록강 부근에서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당시 중공은 유엔군이 자국의 국경까지 진군할 경우 참전할 것임을 개전 초부터 강하게 천명하였다. 이는 북한군에 대한 원조와 아울러 장제스의 대만을 돕는 미국에 대한 적대적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핼버스탬은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와 전선의 미군지휘체계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의도적인 정보의 왜곡이 개입(P.584)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후, 맥아더는 총사령관이 되어 유엔군을 지휘한다. 지휘관이 전선에서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쟁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맥아더는 전쟁 중 한국에 단 하룻밤도 머물지 않았다(P.28). 동경에서 참모들에 둘러싸여 원격 지휘를 하였다. 전선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맥아더에 대한 재인식이 시작된다.
“한국전쟁에는 단층선이 있었다. 단층선의 한 면은 야전부대가 직면하는 전장의 위험과 현실의 세계고, 다른 면은 안일한 명령만 쏟아내는 도쿄 사령부에 있는 환영의 세계였다.”(P.46)

저자를 포함한 미군사관들은 맥아더의 결정적 오판이 북진에 있다고 한다. 적당한 장소, 예컨대 평양 정도에서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숨고르기를 하지 않고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는 데만 급급하여 전쟁 초기 인민군이 저질렀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였다. 이는 인민군 외에 숨어있는 적은 없다는 오만한 단정에 근거한 것으로 중공군의 존재를 외면 내지 무시하였다.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오판은 단순 시위용 해석 또는 정치적 판단의 가능성을 포괄한다. 당시 미국 정계는 대중국 정책을 놓고 입장이 팽팽하게 갈려 있는 상태였다. 소위 차이나핸즈의 객관적 중국정세와 장제스 측의 차이나로비의 친대만, 반공산 세력으로. 맥아더는 진작부터 차이나로비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인민군을 단숨에 싹쓸어버려 최소한 한반도에서 공산세력을 일소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중공국의 참전 후 만주 폭격 및 핵공격 등 확전을 통해 기회를 틈타 중공과도 전면전을 불사할 의도도 감추지 않았다.

저자는 중공군의 공격방식에 대해서도 참신한 분석을 제시한다. 중공군은 병력 수만 믿고 막무가내로 전진하는 소위 ‘인해전술’로 유명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유엔군에 비해 화기와 장비 면에서 열악하므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철저한 전략을 마련하여 매복전과 심리전으로 상대를 압박하였다. 그런 면에서 유엔군의 북진 후 전면 퇴각은 바로 중공군의 함정에 빠진 결과이다. 중공군은 진즉에 북한에 진주하였지만, 철저한 은폐로 유엔군의 눈을 속이고 그들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중공군]은 북한의 산악 지대에서 남한군과 유엔군 부대가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격하여 이미 무리하게 늘어진 보급선이 더 길어지기를 기다렸다...미군이 북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P.31)
“미군이 덫에 걸려들면 중공군은 바로 전쟁에 뛰어들 게 분명했다. 중공군은 이미 수적으로 열악한 미군과 남한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북진하면 거대한 산악지대에 부딪혀 결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P.33)

청천강과 장진호에서 당한 참패와 치욕, 그리고 뒤이은 걷잡을 수 없는 퇴각으로 미군은 중공군에 대해 공포심에 떨게 되었다. 평지보다 산지를, 낮보다 밤 행군을 선호하며, 종적을 남기지 않고 어느새 후방으로 가서 포위하는 신출귀몰한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 어지간한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병력 등.

저자는 미군이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싸우는 요령을 찾아낸 것을 지평리전투와 원주전투를 계기로 삼고 있다. 아군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막대한 수의 적군에 포위당했다 하더라도 포병의 화력 지원과 공군을 이용한 군수물자의 지속적 공급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미군과 중공군의 전투 양상을 고지를 둘러싼 소위 땅따먹기 형태로 변화한다. 개전 초기 같은 전면적 전진과 후퇴는 더 이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변화된 전투방식은 가장 큰 단점은 무수한 인명을 대가로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전부대원이 전사하는 순간까지 절대 후퇴 없이 적진을 향해 총격을 가해야 겨우 승리를 담보할 수 있었다.


2. 맥아더의 신화 깨뜨리기

우리나라 사람에게 맥아더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한때 월미도의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강력한 역풍은 오히려 그의 존재의 거대함을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맥아더와 트루먼 간의 정치적 대결 상황을 기본적 갈등구조로 삼고 있다. 대통령에게 복종하지 않는 장군의 이미지는 경례를 하지 않은 장면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전쟁의 신화, 맥아더의 참모습은 우리가 알고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저자는 그의 부친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계를 분석하여 그의 명예욕과 권력욕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패퇴하여 호주로 철군하였을 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 초기의 패전은 전적으로 그의 적정에 대한 무지와 인종차별적 편견에 따른 오만의 결과라고 말이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미군 총사령관은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은 물론 그 이후 까지 태평양 지역의 미군을 총괄하였다. 그는 일본제국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그의 명성은 웬만한 정치인을 능가하고 그의 화려한 경력은 대통령보다도 뛰어났다. 그의 자존심과 명예와 경력과 그리고 나이는 그로 하여금 자신이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군인이라는 지위를 망각시켰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일본 동경에서 제왕처럼 군림하였으며, 그 주변에는 자신의 사람들로 장벽을 둘렀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서로를 무시하였으며, 또한 두려워하였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명성과 권위를, 맥아더는 트루먼의 지위를 부러워하였다. 그들의 관계는 총사령관과 군통수권자의 관계를 뛰어넘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해 대통령의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맥아더는 대통령직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적으로 자신의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P.195)

양자가 모두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역사는 맥아더의 과오에 더 비중을 둔다. 어쨌든 그는 상관의 명령과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군인으로서 가장 나쁜 잘못이었다. 맥아더 자신 또한 부하의 명령 불복종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3. 미국과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는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여전히 짙게 배어있다. 이념에 관한 한 우리사회는 아직 닫힌사회다. 그것은 이념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전쟁과 결부된데 연유한다.

그렇다면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무엇인가? 한국전쟁은 월남전과 다르게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어 왔으며 정당성도 취약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도발 이상의 의미였다.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십수 년 동안 쌓였던 내부 분열과 모순 그리고 오랜 정치갈등이 터져 나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P.110)

저자 역시 최근의 역사인식을 따르고 있다. 한국전쟁은 국제전과 내전이 묘하게 결합된 형태로서 외부세력의 영향과 내부적 모순이 증폭작용을 일으켰다고 본다.

미국에게 있어 남한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애치슨라인에서도 남한을 제외한 것인데, 전후 국방예산의 대폭적 삭감과 국방력의 약화를 겪는 미국으로서는 남한에 최소한의 치안유지 병력을 남긴 채 보다 중요한 일본 방어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따라서 공산주의 세력은 미국의 대응을 완전히 오판하였으며,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문제는 미국이 한국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도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거였다.” (P.132) 즉 공산세력의 도발을 방치하면 나치가 슬금슬금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먹어치운 것과 같은 사태가 재발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남침을 저지한 것과 북진은 전혀 다른 사안이었다. 미국은 중공과의 충돌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이는 맥아더가 북진을 주장한 이유와 맥락을 같이한다. 즉 대만에 쫓겨와있던 장제스의 바램대로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필연적으로 장제스 정부가 그토록 원하던 갈등을 유발할 게 분명했다.” (P.481) 장제스와 차이나로비는 중공과의 전면전을 통해 공산세력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서구권에 복귀시키기를 고대하였으며, 맥아더는 이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 중 미군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무모한 북진에 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적군을 추격한 일이었다.” (P.974)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거에 다시금 한강 이남까지 퇴각하면서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장기전이 되었으며, 유엔군을 포함한 미군은 커다란 인명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미국의 시각에 북진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관적 시각에서 북진이 없었다면 그 후 전쟁과 국내외 정치사회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국민의 감성 측면에서도 패퇴한 적을 소탕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북진 자체가 실수가 아니라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외면하고 아무런 대비 없이 무작정 북진한 것이 잘못이라고 보는 게 보다 옳은 논지라고 하겠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아무런 역사적 의의도 갖지 못한 잊혀진 전쟁으로 인식되는 게 타당할까? 저자는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의 정당성을 참전용사의 시각을 빌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민군이 두 번 다시 남한을 넘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정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P.1014)

“어차피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참전하는 것 말고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P.1015)

※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워커의 자취는 광진구 워커힐에 남아있다. 그는 맥아더의 무시와 참모진의 외면, 그리고 열악한 지원에도 꿋꿋이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낙동강 방어전의 성공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반이 되었지만, 생전은 물론 전사 이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지휘했던 월튼 워커는 미군 역사를 통틀어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가장 불운한 사람이 되었다....무기 상태도 엉망이고 병력도 턱없이 부족한 군대를 이끌고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사나운 적의 진격을 막고자 힘겹게 사투를 벌였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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