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와 카사레스가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필명으로 합작 발표한 작품집이다. 이후에도 몇 편을 공동으로 창작한 그들의 관계는 통념적 시각으로 볼 때 매우 독특한 일면이 있다.

보르헤스는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줄거리를 창작해 낼 수 없는 금세기의 전형적인 대중 장르인 탐정 소설은 신비의 베일에 싸인 사건들을 언급한 뒤에 합리적인 사실에 의거하여 그것을 증명하고 보여 줍니다.”

보르헤스의 논평은 비단 <모렐의 발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사레스의 이 작품집 역시 유형상 추리소설 또는 탐정소설에 분류될 수 있다.

주인공 이시드로 파로디는 “범죄 수사를 기록하는 연보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죄수 탐정”(P.17)이다. 그는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감방에 수감되어 보낸 세월로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다.

탐정 소설은 대체로 행동 지향적이다.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의뢰를 받은 후 사건 현장을 살피고 사실 관계를 추적한다. 여기에서 빼어난 추리 능력이 결부되어 명탐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인물들이 그러하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는 주인공을 죄수-273호 감방 안에 갇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돈 이시드로는 죄수가 되어야만 할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카사레스는 <모렐의 발명>과 <러시아 인형>에서 현실을 닮았지만 현실이 아닌 순전한 환상의 시공간을 다루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과 세계는 매우 현실적이지만 순수한 가공품이다. 인간이 살면서 환상, 공상, 꿈을 만들어 내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이성적 두뇌가 방심하고 있을 때이며, 육체적 활동이 정지 상태에 있을 때가 그러하다. 잠잘 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아무 실체적 할 일이 없을 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인물과 장소적 특성을 감안할 때, 작품 전개의 방식을 대화로 이루어진다. 주로 방문객이나 의뢰인의 긴 설명이 이어지고 며칠 후 주인공이 사건의 전후 진실을 밝히는 형식이다.

의외로 지루하지 않은 것은 사건 의뢰인의 다양한 배경과 그들 언행의 허식적, 위선적 태도와 사건의 기묘성이 흥미로움을 자아내 평면성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서 연유한다.

탐정 소설답게 사건의 진실은 언제나 상식선을 뛰어넘는다. <황도십이궁>에서 신문기자 몰리나리에게 씌워진 혐의는 드루즈 교도들의 기자 희롱과 내분의 절묘한 결합에 따른 결과이다. 삼류배우 몬테네그로(<골리아드킨의 밤>에서)는 팬아메리칸 특급열차에서 남작부인, 젊은 시인, 군인, 유대인과 여정을 같이한다. 그에게 씌워진 유대인 살인 혐의는 다이아몬드에 얽힌 치열한 암투의 결말이었음을 파로디는 명쾌하게 밝혀낸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죽음의 복수, 배신한 아내와 정부(情夫)에 대한 타데오 리마르도의 복수, 중국 한 지방의 도난당한 종교 성물(聖物)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추적의 결말 등 나머지 작품들도 드러난 진실은 통상적 추론을 훌쩍 뛰어넘는다. 사실 이것이 추리소설 또는 탐정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독자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건의 진실이라면 맥 빠지지 않겠는가.

이시드로 파로디는 자신의 추론을 적극적으로 사법당국에 개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밝히길 꺼리는 듯 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죄수 신분이므로 그의 진술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돈 이시드로가 무고로 갇힌 것처럼, 당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감의 반영이라고 이해함이 올바르다.

작가가 이시드로 파로디를 죄수로 설정한 것은 또한 두 작가가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공인물의 필명을 사용한 이유와 유사하다. 두 작가는 자신들의 개별적 고유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한 자신들과 작가를 분리함으로써 한결 여유로운 심적 상태로 작품을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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