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피타 히메네스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60
후안 발레라 지음, 박종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평점 :
대산세계문학총서 060
후안 발레라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시기를 살아간 작가이지만, 이 작품은 어느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 개성을 지니고 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적 필치와 섬세하며 그윽한 묘사, 그리고 차분하지만 침잠하지 않는 은근한 어조,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작품에 독특한 격조를 더해주고 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돈 루이스, 그의 아버지가 재혼하고자 하는 젊은 미망인 페피타.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어찌 보면 부도덕할 수도 있는 관계의 두 사람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돈 루이스는 성직에 대한 염원과 제어할 수 없는 연정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성(聖)과 속(俗), 천상의 사랑과 지상의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페피타에 대해 돈 루이스의 호기심은 처음엔 아버지가 관심을 두고 있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와 같이 자기를 합리화한다.
“제가 사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그것은 만물이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P.35)
서서히 그의 내면에 갈등이 비롯된다. 그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걱정”을 느낀다.
“모든 곳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감각적인 열락은 제 자신에게서 보다 높은 희구와 열망을 향한 마음을 순간순간 잊게 만들기도 합니다.” (P.35)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 못지않게 신에 대한 사랑의 신학적 문제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영혼이 창조주를 무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바칠 지상의 대상을 발견한지 못했기 때문에 제 자신을 창조한 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확신할 수 있을까요?” (P.31)
돈 루이스의 서신으로 꾸며진 전반부에서 작가는 이렇게 젊은이의 섬세한 내면적 갈등과 서서히 피어오르는 사랑의 싹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매혹시킨 페피타 히메네스는 어떤 인물인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점입니다.” (P.12)
“그녀에게는 전체적으로 차분한 기운이 풍겼고, 외모에서는 평화가 느껴졌습니다.” (P.25)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P.27)
본당 신부는 그녀를 “성녀”(P.27)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성인”(P.23)으로 지칭하는 것과 절묘하게 들어맞고 있다. 성인과 성녀, 즉 두 사람은 천생연분임을 암시하고 있다.
늙은 남편의 죽음이 일년반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상복을 입고 있던 페피타는 어느 날 갑자기 사교모임을 마련하고 상복을 벗는다. 즉 그녀 내면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페피타에 대한 돈 루이스의 감정의 변화는 나날이 깊이와 강도를 더해간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P.53)로 비교적 담담함을 유지하지만,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염려”(P.66)가 되며,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내면에 토로(“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었구나”(P.67))하는 단계가 된다.
이윽고 페피타와의 숲 속 만남에서 둘 만의 비밀을 갖게 되고 그의 내면은 “경이로운 변화”(P.69)를 겪는다. 그는 사랑을 자각한다.
“이상하게도 페피타의 모습이 제 영혼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제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P.77)
하지만 사제가 되고자 하는 오랜 바램과 신에 대한 갈구는 여전히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낳는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 페피타 히메네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떠날 것이며, 그녀를 잊을 것입니다.” (P.79)
“언젠가부터 제 삶은 투쟁이 되었습니다.” (P.91)
“그녀 곁에 있으면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멀리 있으면, 그녀를 증오합니다.” (P.93)
이윽고 페피타의 뜨거운 시선과 미소, 그녀의 집에 들어가면서 인사를 할 때 맞잡는 두 손, 그리고 두 줄기 눈물은 그의 이성과 의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러나 여전히 신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포기하지 않고 떠나려는 그. 이때 페피타의 하인 안토뇨나가 기지와 수고(P.153)를 발휘하여 작별인사차 방문 하도록 승낙하게 만들면서 작품은 최고조에 달한다.
심야의 만남에서 두 사람 만의 진지한 대화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팽팽한 인식 차이도. 돈 루이스의 사랑관은 상상과 이데아에 근거한다. 여기에서 페피타의 현세적, 현실적 사랑관이 힘을 발한다. 그녀의 사랑은 오히려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현대적이다.
“처음 당신을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저는 당신에게 제 깊은 마음의 은밀한 자유의지를 빼앗겼던 것입니다...저의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미 저는 제 안에서 죽었고, 당신 안에서 새로 태어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P.167)
결국 페피타가 이겼다. 아니 두 사람 모두가 승리한 것이다. 이는 인성(人性)에 대한 신성(神性)의 패배를 뜻하지 않는다. 후에 그의 숙부이자 주임신부가 지적했듯이 사제가 되고자 하는 돈 루이스의 신앙은 굳건한 대지가 아니라 시적 공상이라는 모래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신부가 되는 것보다는 제때에 자신의 성향을 깨달아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은 살아가게 되는 편이 훨씬 나은 일”(P.199)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서사 자체보다도 주인공 내면의 심리 변화의 정밀한 묘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세심한 절차탁마가 작품에 단순한 사랑 소설 이상의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작가 자신도 이를 의식한다.
“환상에서 나온 일화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 하기보다 미세한 상황과 심리를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음에 흡족함을 느낀다.” (P.153)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의 인용을 통해 후안 발레라의 문학 특성을 재확인해본다.
“우아한 예술 표현 양식과 스타일, 그리고 섬세한 심리 묘사는 발레라 고유의 문학적 특징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아함과 고상함의 정서는 언어와 표현, 문체와 묘사를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며, 그러한 일관성은 예술에 있어서 형식미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