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형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대산세계문학총서 015]

[수록작품]
러시아 인형
로취에서의 만남
카토
여행자가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다
우리들의 여행 (일기)
물 아래에서
세 편의 작은 환상
 - 마르가리따 또는 철분 플러스의 힘
 - 어떤 냄새
 - 패배한 사랑

환상 문학이 다루는 세계는 현실 세계와는 구분된다. 통상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나 공상의 세계, 현실과 차원을 달리하는 독자적인 세계에서 환상 문학은 헤엄친다. 현실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까사레스는 다른 성향이다. 그의 환상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상 속의 환상. 까사레스의 글은 매우 사실적이다. 플롯 전개도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환상이 개입된다. 너무나 자연스런 개입에 독자는 환상에 의아해 하지 않고 당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나중에 이런 당연함에 스스로가 당혹해한다.

<러시아 인형>에서 마세이라는 환경운동가 샹딸을 위해 대신 호수 아래로 들어간다. 그가 본 것은 거대한 배추벌레가 사람들은 통째로 삼켜버린 장면. 그것은 현실일 수도 아니면 마세이라의 환상일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샹딸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녀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던 한 소녀에서 한 제국의 우두머리이자 오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유일한 주인”(P.45)이 되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환상보다도 더 부조리한 현실, 그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로취에서의 만남> 또한 경매 사무소의 농장 판매 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폭우를 무릅쓰고 진흙탕을 운전하는 나, 성자와도 같은 온순한 인상이라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철새 씨라고 불리는 스워베르그의 동행. 나와 철새 씨의 대화는 나의 부아를 더욱 돋우는데, 그만 차는 웅덩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철새 씨가 자원하여 운전대를 잡는 순간 차는 아무 문제없이 술술술 나아가고 비가 그친 들판에 당도한다. 그리고 눈 깜짝할 순간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작가는 크리스마스와 환상을 결부시킨다.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휴일 또는 축일이 아니다. 종교인의 관점에서 이는 신과 인간이 합일되는 순간이다.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하는 인간, 이는 현실의 각박함에 인간다움이 매몰됨을 의미한다. 철새 씨는 이를 일깨운다.

사람들은 TV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의 이미지와 배우의 실제를 쉽사리 혼동한다. 악역을 잘 해낸 배우는 무수한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반면 아름다운 역할로 인기를 끈 이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시크릿 가든’의 현빈 신드롬이 대표적이다.

카토는 카이사르의 독재적 군주정 시도에 대항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존 인물이다. 자유의 상징이자 반독재의 아이콘.

독재 치하의 아르헨티나. 연극 <카토>는 폭군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덕분에 주연 배우 호르헤 다발도 자유 투사로 추앙받는다.

독재정권 타도 후 새로 권력을 잡은 혁명세력. 호르헤 다발은 일거리가 없다. 사람들에게 그는 혁명가이지 더 이상 배우가 아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지 못하면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그가 다시 무대에 선 작품이 바로 <카토>. 그는 결국 무대에서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카토>는 현실과 무대의 갈등을 다룬다. 무대는 무대일 뿐이지만, 현실적 파급력 때문에 현실 정치인들은 항상 예의주시한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정치의 간섭과 억압이 생기고 어용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이다. 다발의 비극은 사람들이 환상을 현실로 혼동하는 데서 연유한다.

<여행자가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가다>에서 나는 인도인이다. 나는 기차칸의 캄보디아 학생을 바라보며 그의 초라함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데 일터인 대사관에 들어갈 때 나는 수위에게 입장을 저지당한다. 잠이 깨어 전철에서 내리다가 거울 앞에서 본 나는 초라한 캄보디아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2면 남짓한 매우 짧은 글이지만 환상을 통해 나와 캄보디아인의 외모가 교차하면서 서양인에 비친 모습은 차이가 없음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의 여행>은 일종의 여행 일기다. 루시오 에레라는 여자친구 까르멘과 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난다. 여자친구는 로마에서는 셀리아, 베로나에서는 삘라르, 파리에서는 후스띠나, 몬세랏의 만레사에서는 루이시따,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는 마르가리따, 다시 파스퇴르호 선상에서는 에밀리아로 바뀐다. 여자친구는 바뀌지만, 루시오와 여자들의 관계는 변함없다. 루시오는 여자친구들의 고집, 경박함, 편견, 어리석음으로 심적인 고통을 겪는다. 루시오를 조문하러 간 나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그들을 본다. 이제 “그는 관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것 같았다.”(P.108)

만남, 사랑, 그리고 다툼 등 남녀 간의 관계는 현실을 이루는 토대가 되지만, 한편 그것은 일방의 때로는 양자 간의 철저한 환상에 근거하여 관계가 유지된다. 흔히들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한 콩깍지가 없다면 어찌 될까?

<물 아래에서>는 까사레스의 특징인 현실적인 환상이 절묘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작품 중반까지는 평범한 연애소설로 흐르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상투적인 줄거리다. 그러다 갑자기 물고기가 된 사람이 등장하며, 평범은 비범으로 돌변한다. 인어가 되어버린 남자친구, 방황하는 플로라.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나, 마르뗄리. 나는 그녀의 요청에 못 이겨 인어가 되는 주사를 맞기로 한다. 사무실에서 급한 업무를 처리한 후 돌아와보니 이미 그녀는 인어가 되어 남자친구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플로라와 란다소가 물 아래에서 아주 다정하게 붙어서 내게 웃으며 인사를 하느라 계속 손을 흔드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분명 즐거워 보였다.” (P.142)

마르뗄리는 행복을 놓쳤다. 그의 지연은 현실 세계와의 단절에 대한 주저와 미련을 반영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외피를 뒤집어써야 행복하게 되는 것일까?

<세 편의 작은 환상 작품> 중 <어떤 냄새>가 분량 면이나 그의 특장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다가구 주택 안에 퍼져 있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체 썩는 냄새. 라벤나 교수는 아래층의 광대 베난시오의 주장과 행동을 보고 정신이상자로 취급한다. 이제는 자신이 냄새를 맡게 된다. 냄새는 옥따비오 부인에게 전염되고, 이어서 라이너 박사에게로. 냄새를 맡게 된 이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이성마저 마비될 정도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라벤나 교수가 수중에 넣고 싶어하던 과부 페르난다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찾아온 라이너 박사와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게 된다.

모두가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이런 소동과 결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정한 사람만 맡을 수 있는 역겨운 냄새. 그것은 실체가 아닌 점에서 환상이다. 환상은 급작스럽게 다가온다. 환상은 사람을 이성의 온전함에서 흐트러뜨린다. 환상을 이성으로 차분히 대처하려던 라벤나 교수는 페르난다를 잃게 된다. 라벤나 교수는 비탄에 잠긴 채 일상에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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