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짐 콜린스 & 제리 포라스 지음, 워튼포럼 옮김 / 김영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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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타이틀, 그러나 비전있는 내용]

유사한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의식한 다소 상업성이 강한 타이틀(원제는 Built to Last)을 달고 나온 이 책은 내게는 관심 밖이었다. 아무리 언론에서 평가가 후하게 내려져도. 하지만 얼마전에 후속작인 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고는 상당히 매료되어서 전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 갔었지만, 마침 한권 있던 책의 상태가 불량하여 대출이 안되는 바람에 서점에서 구입하려 했는데, 구판이 절판된 상태라 몇 달을 기다린 후에야 신판을 구입할 수 있었다. 발간순으로는 역순이지만, 에서 저자는 내용상으로는 이 책이 먼저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좋은 기업을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시키기에 앞서 과연 위대한 기업은 무엇이며 그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답이 이 책이다. 여기서는 ‘위대한 기업’을 ‘비전 기업’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물론 반드시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18개의 비전 기업을 선정한 후, 비교 기업군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조목조목 분석해 나가는 방법이 후속작과 매우 유사하다. 여기서 잠시 두 저작의 주요개념을 잠시 열거해 보자.

Good to Great- 단계5의 리더십, 사람먼저 다음에 할일, 냉혹한 사실을 직시하라, 고슴도치 컨셉, 규율의 문화, 기술 가속페달, 플라이휠. Built to Last- 시간을 알려주지 말고 시계를 만들어 주어라, 이윤 추구를 넘어서, 핵심을 보존하고 발전을 자극하라,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 사교같은 기업문화, 많은 것을 시도해서 잘되는 것에 집중하라,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진, 끊임없는 개선 추구. 여러 부분에서 흡사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시계를 만들어 주어라’와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진’은 ‘단계5의 리더십’에 연결된다. 즉, 카리스마적 경영자 한 사람에 의존해서는 결코 위대한(비전) 기업이 되지 못하며, 조직의 가치,비전,사명을 체득한 외부인사가 아닌 내부경영자가 기업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끊임없는 개선 추구’와 ‘핵심을 보존하고 발전을 자극하라’는 ’플라이휠‘ 개념으로 연결된다. 기업의 핵심가치,사명 등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변화를 거부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며 그 틀내에서 발전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한때의 성공에 안주하면 파멸의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와 ‘냉혹한 사실을 직시하라’는 어떠한가. 또한 ’많은 것을 시도해서 잘되는 것에 집중하라‘와 ’고슴도치 컨셉‘도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즉 비전 기업이든지 아니면 위대한 기업이든지 명칭에 관계없이 소위 성공한 기업이 갖추고 있는 모습은 다른 기업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한끗 차이에서 기업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겠다. 이 책은 일반적 경영서와는 달리 통시적 시각에서 다수 기업을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 물거품처럼 명멸하는 수많은 기업체 중에서 장시간을 성공적으로 생존하는 기업을 세우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까하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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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2.12.29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
에르네스트 르낭 지음, 신행선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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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국가, 그리고 국민과 국민국가의 경계]

책세상문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어 보지는 않았다. 굳이 어설픈 변명을 하자면 아직은 국내 사회과학계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개인적 편견 탓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고전의세계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선택이 쉬웠다. 고전이란 용어가 이미 내용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부여하는 데다,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저작을 가볍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르네스트 르낭이 누구인지 표지만으로는 알지 못했다. 약력을 보고서야 <예수의 생애> 저자였음이 어렴풋할 정도이니. 새삼스레 19세기 인물의 글을 시리즈 제1편으로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민족’에 관한 글을. 출판사에서는 아직도 ‘민족’에 관한 르낭의 논의가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가 약화된 요즘, 민족 또는 문명 등의 요소가 글로벌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요소로 부각되는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 아래에서는 간단하나마 르낭의 글에 대한 나름대로의 느낌과 생각을 정리한다.

1. 독일 통일에 대한 프랑스의 부정적 역할-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서 르낭은 소위 보불전쟁을 일으키는데 프랑스의 잘못도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일처럼 문명화되고 지적 정신이 충만한 민족이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함에도 프랑스는 독일에 지속적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프랑스에 적대적 통일분위기가 조성되는 실책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주장이다. 한편 르낭은 독일과 프로이센을 구분하여 비록 프로이센 같은 비독일세력에 의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독일에 의하여 흡수되기를 바라고 있다.

2. 유럽 공동체 개념- 한편 프로이센의 봉건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에 우려를 보내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원만한 관계유지가 문명사회의 진보를 위하여 매우 긴요함을 강조한다. 전쟁중인 양국 관계가 어떤 식으로 종결되더라도 그 파급효과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이러한 갈등과 위협요인을 억제하기 위하여 유럽의 개입 즉, 유럽합중국의 구성과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마치 20세기 후반의 유럽연합을 예견하는 듯하여 놀랍기까지 하다.

3. 민족 개념과 구성원의 의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르낭은 전통적으로 종족, 언어, 종교, 지리 등에 의한 민족 구분 개념을 비판하고, 구성원들의 동의 내지 결집하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민족 개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글의 흐름을 생각해 본다면 매우 타당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언급한 해제를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의아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4. 민족과 국민의 구분- 학교 수업 또는 여러 책들을 통해 파악한 민족의 개념은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것이다. 즉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지니는 인간 집단을 대개 민족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르낭은 구성원의 결합의지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달리 하더라도 결합의지만 존재하면 같은 민족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스위스는 또는 미국은 민족국가인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연방국가이다. 역사서에서는 서양의 근대이후 국가체제를 국민국가로 이해하고 있다. 즉 국가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지방분권적인 봉건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로 넘어간다. 국민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소속의지 또는 결합의지이다.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중국계 미국인은 다른 민족이지만, 같은 국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앞에서 연유한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매우 불명료한 것으로 여겨진다.

5. 생물학적 인종주의 대 문화적 인종주의- 본문에는 없지만 해제에서 르낭의 사상이 갖는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르낭은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인종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생물학적으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는 존재한다. 백인종이 황인종과 흑인종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백인종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유대인은 백인종과 황인종 중간에 위치한다. 르낭은 당시 지성인들처럼 다윈의 진화 개념을 받아들여 이와 같은 개념체계를 정립한 듯싶다. 그러나 르낭이 어떠한 방식으로 문화적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든 결국 근대적 사고체계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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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2.12.31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
매트 리들리 지음, 김윤택 옮김 / 김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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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로 조망하는 성과 인간의 모습]

영화제목에는 ‘누구누구의 XXX’ 라는 유형이 종종 눈에 띈다. 주로 유명한 영화배우가 출연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의 작품성은 별로다. 『붉은 여왕』도 앞에 ‘매트 리들리’라고 저자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일전에 베스트셀러였던 『게놈』의 저자란다. ‘붉은 여왕’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하였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에 빗대어 부제 그대로 인간의 성과 진화를 풀이하고 있다.  

내용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에서는 글자 그대로 ‘성(sex)’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처럼 유전자의 선택과 유전노력이 생물의 성의 존재이유와 양성 구분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는 자신의 우수한 형질을 보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성생식을 통한 번식도 가능하지만, 이는 기생생물(바이러스 및 기타 병균 등)의 생존 위협에 대한 적합한 대책이 되지 않으므로 필요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성생식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저자는 열쇠와 자물쇠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기생생물은 끊임없이 숙주에 침투하려고 시도하는데, 숙주는 이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기생생물의 성공적 침투는 숙주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 그래서 다양한 유전자 조합이라는 자물쇠 장치를 마련하지만, 이는 장기적 효과를 얻지 못한다. 기생생물도 여기에 맞는 열쇠를 지속적으로 개발한다. 결국 ‘붉은 여왕’처럼 기생생물과 숙주의 치열한 전쟁 속에 진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는 때로는 개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진화관과 대비된다고 하겠다.  

후반부에서 매들리는 위의 관점을 인간사회에 적용하고 있다. 인간이란 종도 유인원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남자(수컷)와 여자(암컷)의 본성에 존재하는 차이는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유전자 차원의 본성적 차이로 교육으로 차이가 해소될 수는 없다. 수컷은 유전자 번식의 기회를 증가하기 위하여 가급적 많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려고 한다. 그들은 정자만 제공하면 되는 유리한 입장이다. 반면 암컷은 정자를 받아들이고 새끼를 출산하고 양육하여야 되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이므로 최고의 수컷 유전자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각각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표출된다. 지구상의 많은 민족이 과거에 일부다처제였으며, 현재도 일부는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결코 우연한 현상으로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많은 신기한(적어도 나에게는) 주장을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관점, 근친상간 금기 및 유태성숙, 성적 매력이 있는 아들 이론(피셔 이론)과 건강한 자손 이론(좋은 유전자 이론) 등 예전에 생물교과서를 통해 얻을 수 없는 여러 최신의 다양한 생물학과 유전학 개념이 소개되고 있어 지적 흥미를 끌어당기고 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조작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나도 그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점검해보고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왜 스스로 거부하겠는가.  

마지막으로 한가지 아쉬움을 토로하겠다. 번역의 문제인데, 전체적인 흐름을 보건대 아주 매끄럽게 이어져야 함에도 문장의 호흡이 단절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문장을 알고 내용을 전달하기 보다는 그냥 단어를 옮겨놓는데 불과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좋은 외서는 좋은 번역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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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2.28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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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론물리학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여태껏 읽어본 교양과학서 중에서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주제, 원문, 그리고 번역의 삼박자가 참으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먼저 주제를 보자.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현대 이론물리학의 눈부신 성공과 발전에 전문과학도는 물론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론물리학의 발전은 또한 수학의 복잡성과도 극적으로 비례하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려움도 사실이다. 이러한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바로 교양과학서가 담당한다고 할 때, 브라이언 그린의 이 책은 정말로 뛰어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현대 이론물리학의 세 흐름인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대한 소개와 최근의 초끈이론까지도 담고 있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다음 저자의 매끄러운 필치는 번역을 거치면서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채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어니스트 러더포프의 인용문처럼 어려운 내용을 평이한 언어로 더구나 흥미진진하게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내용을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20세기 전반과 중반을 주도했던 이론이므로 비교적 다양한 입문서를 만나볼 수 있다. 반면에 끈이론 또는 초끈이론은 너무나도 최신이론이어서 전문가들조차도 흐름을 쫓아가기가 어려운 지경이니 어찌 문외한들을 위한 개설서를 기대하겠는가. 하물며 일체의 수학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한편 원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번역에 의해서 생사가 좌우되기 마련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붉은 여왕』도 괜찮은 작품이지만, 번역에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적어도 번역에 의해 내용전달이 왜곡되거나 지장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한가지 초반부에 너무나도 많이 등장하는 옮긴이의 참견은 때로는 성미를 돋구기도 한다는 점에서 제발 개정판이 나오게 되면 빼던가 정 아쉬우면 각주로라도 처리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후로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서도 이 부분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삼박자의 조화에, 깔끔한 편집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과학에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도 자신있게 추천하고픈 그런 책이다. 절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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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2.28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아홉살 인생 - 개정판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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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아홉살 시절이 기억나지 않을까]

역시 우연한 기회에 손에 들어왔는데, 표지에는 느낌표 선정도서라고 자랑스레 적혀있다. 요즘 느낌표에 한번 방영만 되면 소위 대박이 난다고 한다. 진정 바람직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나쁜 일은 아니리라, 어쨌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책을 많이 접하게 하는 계기를 부여하니까. 표지를 벗겨놓고 출퇴근시간에 오가며 읽는데 속표지가 노오란 병아리색이라 제목과 잘 매칭된 셈이지만, 어째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의식되기도 한다. 군데군데 소박한 그림도 들어있어 가볍게 읽을만하다. 하지만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고 아홉 살 된 꼬마가 세상과 인생을 경험하는 과정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일종의 성장기라고나 할까. 너무나 담담하고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어 자칫 꼬마의 삶이 낭만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달동네의 모습이란 결코 환상을 품을게 못됨을 상기한다.

월급기계의 잔혹하지만 당시에는 워낙 일상적인 선생의 모습, 기종이의 엉뚱하지만 진실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움, 우림이와의 풋사과 같은 감정, 그리고 토굴할매와 골방철학자의 슬픈 삶 등, 어찌 보면 꼬마의 나이가 아홉 살이 아니라 적어도 열아홉 살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아심도 생긴다. 작가는 서른의 삶을 아홉 살에 투영하고 있다. 만약 진실로 아홉 살짜리가 이렇다면 세상은 참으로 고달프지 않을까 싶다. 흘러간 과거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련하다. 그것이 기쁜 일이건 아니면 슬픈 추억이든.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나 물건을 보면 왠지 반갑고 정다운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이런 작품이 더더욱 인기를 끄는지도 모르겠다. 중간 중간 나의 아홉 살 시절을 되새겨본다. 착한 학생은 아니었다는 막연한 인상, 그리고 모든 게 뿌연 안개 속에 가려있는 느낌이다. 나는 왜 아홉 살 시절이 기억나지 않을까. 그만큼 현실에 치여 사는데 급급해서 어릴 적 꿈과 동경은 상실하고 말았는가. 한 가지 더, 요즘 아홉 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나날을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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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3.6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