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지만지 희곡선집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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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를링크의 이 희곡은 첫 희곡 <말렌 공주>의 3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어찌 보면 원작보다도 이를 토대로 한 당대 및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더 성가가 높아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쟁쟁한 음악가들이 곡을 썼다. 드뷔시, 포레, 쇤베르크, 시벨리우스가 오페라 및 관현악곡을 썼다. 작곡가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유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더해 상징주의적 희곡으로서의 철두철미한 성격에 기인한다.


하나의 산문 작품에 이렇게 시종일관 다양한 상징과 암시와 뉘앙스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쑤셔 넣은 사례는 문학사상 다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작품을 재독하면서 일독에서 간과했던 문구와 표현들이 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삼독, 사독의 결과는 어떠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플롯 면에서 이 작품은 남편과 젊은 아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아버지가 다른 동생 간의 불륜이 뒤섞인 삼류 드라마에 가깝다. 아내는 남편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동생과 서로 사랑을 느낀다. 남편은 둘 사이를 의심하고 마침내 밀회의 현장에서 동생을 죽인다. 부부의 관계는 상호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엮여져야 하는 게 이론이라면,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그치지 않는 연유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젊은 남녀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에 비례하여 덩치 큰 골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칫 그에 대한 시각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시인처럼 체격에 비해 두뇌는 뒤떨어진다는 인식 말이다. 제1막 제3장에서 주느비에브는 골로를 항상 신중하고 진지하고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한다. 골로는 현실적 인물이다. “사람들은 기쁨이란 것을 매일 누리지는 않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해”(제2막 제2장). 그는 꿈과 상징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냥감을 쫓듯이 실질만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와 멜리장드는 애초부터 부합하지 않는 상대였다.


이 희곡을 실제 연극으로 상연한다면 연출자들은 심대한 고충을 겪지 않을까. 통상적 연극과 같이 접근하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낳게 된다. 대사가 오롯한 대사가 아니다. 대사가 품고 있는 함의를 관객이 이해하려면 음조와 뉘앙스는 물론이고 배경 세팅에도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감추고 혹은 드러내는 상징과 암시들의 일부(그 전모는 오직 작가만이 알 수 있으리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과 문지방, 그리고 하녀들. 

제1막 제1장은 엉뚱하게도 문지기와 하녀들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녀들은 문지방을 닦지만 대홍수의 물을 다 부어도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할 것이라고 문지기와 더불어 중얼거린다. 지워야 되는 흔적이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제3막 제5장에서 이뇰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종종 문 때문에 싸운다고 말한다. 문이 열려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지막 제5막 제2장에서 멜리장드의 죽음이 임박해지자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말없이 벽을 따라 늘어서서 기다리고, 멜리장드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인지한다.


문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다. 안은 이승이며, 밖은 저승이다. 문지방은 곧 차안과 피안의 경계일 것이다. 운명은 문지방을 통해 드나든다. 문이 열려 있으면 운명의 출입이 용이해지며 그만큼 인간에 대한 운명의 개입은 강화된다. 문이 닫혀 있으면 생과 사의 영역이 분명해진다. 더 이상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제4막 제4장에서 문이 모두 닫히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 멜리장드는 차라리 잘됐다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제아무리 내세를 위해 심신을 정화하더라도 원조의 흔적을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하녀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독자와 관객, 등장인물에게 직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 곧 운명의 여신에 가깝다. 제5막 제1장의 대사를 살펴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우린 언제 올라가야 할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이제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해...”


운명의 절대성과 가혹성.

마테를링크의 작품에서는 운명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제아무리 등장인물이 난다 긴다 하여도 결국 운명이 심어놓고 파놓은 함정에 빠져 좋든 싫든 간에 정해진 운명의 길을 따르게 된다. 등장인물 누구도 운명의 힘에 거스르려는 의지를 보인다. 숙명처럼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상대론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타인은 외부에서 관찰하고 지켜보지만 인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의 운명과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늙은 아르켈은 그래서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기만을 주장한다.


사람은 약점과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다. 그는 자신도 길을 잃었음에도 타인을 인도하려고 하며(제1막 제2장), 잔잔한 바다만 보며 나중에 올 폭풍우를 예견하지 못한 채 배를 타고 나간다(제1막 제4장). 어린 이뇰드조차 운명에 대한 인간의 역부족을 양떼를 통해 절감한다. “아! 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군......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목동! 목동! 양들이 어디로 가는 거야?”(제4막 제3장)


이야기가 진행되는 왕국은 결코 태평성대의 낙원이 아니다. 심한 기근이 왕국을 황폐하게 만들어 거지들이 헤매고 있으며, 영역 밖에서는 적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제2막 제3장과 제4장),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제4막 제2장). 왕궁의 토대도 단단하지 않다. 성 전체는 지하 동굴 위에 세워져 있는데, 곳곳에 균열이 생겨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며, 웅덩이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올라온다(제4막 제3장).


행복의 의미.

멜리장드는 자신의 처지와 심적 상태를 행복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작중에서 이 대사는 수차 반복되어 나타난다. 제2막 제2장에서 골로에게 두 번 말하며, 제4막 제2장에서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한 잠시 후, 행복하지 않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외친다. 행복이라는 가치의 연원과 근거는 무엇인가? 물질적 요인의 충족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행복은 영혼과 정신적 차원의 문제다. 


반지의 의미

제2막 제1장에서 멜리장드는 펠레아스와 샘가에서 대화하던 중 반지를 샘에 빠뜨린다. 펠레아스의 주의에도 멜리장드는 반지를 갖고 일부러 위험하게 장난을 친다. 반지의 분실은 곧 그녀의 고의성임을 독자는 알 수 있다. 그녀에게 반지는 골로와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의 올가미였던 것이다. 반면 골로에게 그 반지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몰라. 당신은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 몰라.”(제2막 제2장).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눈물과 떠나려는 의지.

남녀 주인공은 자주 운다. 별다른 외적 이유가 없음에도 그들은 남들과 달리 눈물을 잘 흘린다(제1막 제3장, 제3막 제1장과 제5장). 펠레아스는 계속하여 떠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제1막 제4장). 실제로 그는 떠나려고 하지만 여건상 출발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제2막 제4장. 멜리장드도 왕국에 영구히 정주할 것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어린 이뇰드는 그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골로에게 떠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제2막 제2장).


우는 행위는 통상 슬픔의 발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나날이 슬픈 것인가?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서 운다. 이유 없는 울음은 존재에 대한 본원적 슬픔에 기인한다. 인간의 유한성과불완전성보다 더 큰 눈물의 원천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왜 떠나고자 하는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떠나고자 하지 않는다. 고통과 슬픔이 멈추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떠나고자 한다. 떠나서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목적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길 잃은 존재이며, 운명의 맹목적 인도에 우왕좌왕 휩쓸려 다니는 가련한 양떼다. 떠나는 행위는 외형적인데 국한하지 않는다. 내면에서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 떠남은 여행도, 도망도 될 수 있으며 초월로 이해될 수 있다. 


형제간의 운명적 불행.

골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머리카락으로 서로 유희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펠레아스를 지하 동굴로 데려온다. 펠레아스는 부패한 웅덩이에 빠질 뻔한 위험을 겪는데, 이는 실수와 우연이 아니라 골로의 살해 의도가 깃들여 있음을 짐작케 한다. 골로는 흥분하여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제3막 제3장). 압살롬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윗의 아들이다. 자신의 동복누이를 강간하고 죽인 이복형제를 죽인 후 끝내 다윗에게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골로는 멜리장드에게 폭력을 저지르며 압살롬의 이름을 외친다(제4막 제2장). 형제 살해의 불행한 운명은 이미 예고된 셈이다.


빛(밞음)과 어둠.

이 작품을 연극으로 상연하려면 무대 연출에 세심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특히 빛과 어둠의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궁전의 전체적 이미지는 어둠이다. 지하 동굴은 어둠의 분위기를 배가한다. 인물들은 빛과 어둠을 가지고 다툰다. 밞음을 지향하는 이뇰드와 어둠 속에 있고자 하는 골로(제3막 제5장). 보리수 그늘과 밝은 곳을 엇갈리게 희망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제4막 제4장). 빛과 어둠은 흔히 선과 악으로 해석된다. 또는 생과 사의 세계로도 이해된다. 땅 밑을 사후세계로 보는 관점은 세계 공통이다. 


순수와 진실.

멜리장드의 눈에서 아르켈은 거대한 순수를 발견할 때, 골로는 순수의 순수성을 의심한다(제4막 제2장). 아르켈은 멜리장드에게서 새 시대의 문을 열 사람임을 예상한다. 새 시대는 무슨 의미에서 구 시대와 구별되는가? 그것은 순수함에서이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며, 진실의 절대성이 의심받는 현실, 이것이 구 시대다. 현실과 실제가 존중받는 것은 허위와 몽상이 아닌 순결한 내면과 밝은 이성의 빛이 환하게 비출 때다. 운명의 덫은 사람들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쳤지만 세상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제4막 제4장).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은 계속적으로 진실을 요구한다(제5막 제2장).


현실이 자신을 거부할 때 궁극적 해소책은 결국 떠나는 것이다. 영원한 떠남은 불가피한 동시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된다(제4막 제4장). 정신 부재의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녀는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녀는 이유없이 태어났어요...죽기 위해. 그리고 이유없이 죽는 겁니다...”(제5막 제2장). 멜리장드는 인간 세상이 아닌 숲 속에서 살아야 존재가 아니었을까?


보는 행위와 의미.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사람의 내면을, 물질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고. 작품에서 본다는 의미는 단순한 시각적 기능을 가리키지 않는다. 겉이 아닌 내면을, 현재가 아닌 미래를, 운명을 읽을 때 비로소 본다고 할 수 있다. 골로는 애초부터 보려고 하지 않는다. 늙은 아르켈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제1막 제3장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난 몹시 늙었지만 아직 내 안에서 한순간도 분명하게 본 적이 없구나.”. 


반면 그는 제2막 제4장에서는 펠레아스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난 더 이상 내 스스로 보지는 못하지만, 네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자 하는 날, 너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마.”. 제대로 본 적 없는 이가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현상, 그것이 곧 인간의 모순된 모습이다.


결국 아르켈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멜리장드의 죽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음을 자탄한다(제5막 제2장)


이 희곡이 남녀 간의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면, 펠레아스가 제4막에서 죽임을 당한 후 멜리장드가 같이 죽지 않고 제5막이 덧붙여진 것은 사족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테를링크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골로의 애증 관계를 자신의 상징적 운명극을 구성하기 위한 장치로서만 활용하였다. 이들의 사랑과 고뇌는 주제가 아니라 제재에 불과하다. 제1막 제1장과 제5막 제1장에서 하녀들의 대사를 곱씹어올 필요가 있다. 마테를링크가 고심하여 설계했지만, 드뷔시가 간과한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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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7
모리 오가이 지음, 김용기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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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리 오가이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언급되지 않는데서 이 작품의 한계를 유추할 수 있다. 1910~1911년 발표된 작품으로서 아직 전기의 문학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 당시 오가이의 문학적 장점은 단정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미. 예스러운 멋조차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분위기, 은연중 배어나오는 따스한 휴머니즘과 봉건질서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기성체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순응의 심적 태도.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초기작에 두드러지며 중기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특질이기도 하다.

 

극적인 사건 전개와 구성력에 치중하지 않는 스타일을 보건대 그의 성향은 단편소설에 어울리지 장편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그의 중·단편을 보면 장편으로 쓰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제재를 다루고 있다. 그는 과장과 허세와 요설을 기피한다.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그는 문장의 잡다한 곁가지를 잘라버리고 핵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은 오가이로서는 독특한 유형에 속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해설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에게 자극받아 썼다고 한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점에서 언뜻 <기러기>와 유사하지만, 두 작품이 가는 방향은 너무 멀다. 작가가 되기 위하여 상경한 준이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적 인간관계 및 이성관계를 겪게 된다.

 

세토와 오무라는 정신적, 도덕적 측면에서 정반대의 인물이다. 세토는 지극히 현실적 인물이다. 의대생인 오무라는 폭넓은 교양과 인간에 깊은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다. 준이치와 오무라 간의 철학적 대화를 보게 되면 이십대 젊은이들답지 않은 노숙한 성찰의 면모가 드러난다. 오무라는 준이치에게 정신적 멘토에 가깝다.

 

준이치가 마주치는 두 여성, 오유키와 사카이 부인 또한 상대성이 두드러진다. 처녀 대 미망인, 연하 대 연상, 순결 대 방종(내지 성적 자유), 수줍음 대 당당함, 전통적 대 현대적 등 양자는 대척점에 서 있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진지한 만남을 가진다면 응당 오유키를 택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선(善)을 지향해야 마땅함을 인식하지만, 악과 부패의 유혹을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팜므 파탈에의 경도와 파멸이 현실성을 지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준이치 역시 사카이 부인의 눈을 외면하지 못한다.

 

준이치가 작가를 꿈꾸는 만큼 나쓰메 소세키를 위시한 당대의 문인들이 실명 내지 가명으로 등장하고 언급된다. 모리 오가이조차 준이치에게서 부정적으로 비평받는 점이 흥미롭다. 비록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준이치의 눈을 통해 본 문학계에 대한 인식은 작가 자신의 견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당대 문학사조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자신은 동의하지 않던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개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나는 개인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 형성에 관한 의론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불가피하게 서구의 개인주의의 유입을 동반하였다. 집단문화와 의식이 팽배한 전통 일본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자칫 사회악으로 치부되기 쉽다. 반면 진정한 개인주의의 발흥 없이는 근대화는 공염불이다. 작중 소설가 후세키가 월례 문학회에서 강연하는 주제는 입센의 개인주의다. 준이치와 오무라가 열중하여 <파랑새> 작품을 분석하면서 토론을 하는 주제도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운 개인주의에 대한 것이며, 특히 오무라는 이타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여전히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오가이의 비판이라고 하겠다.

 

준이치는 욕망의 발로에 따라 동정을 잃는다. 그는 사카이 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대우받길 원하지만 부인에게 있어 준이치는 잠시 호기심을 안겨준 청년에 불과하다. 합치할 수 없는 두 남녀 사이의 결별은 불가피적으로 임박해진다. 사랑 없는 육욕의 만족, 찰나가 지나면 여운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청년은 가족이라는 온실을 떠나 세상에 직면한 순간부터 현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창문을 통해 바라 본 환상은 덧없이 깨지고 만다. 안온한 껍질이 깨지는 순간의 의미는 개개인마다 동일하지는 않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만 비로소 소년은 청년이 되며, 청년은 참으로 성인이 될 수 있음이다. 이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영원한 피터 팬과 오스카로 남는 것뿐이다.

 

준이치는 하코네를 떠난다. 하숙집이 있는 도쿄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주저와 퇴행의 길이 아니다. 하코네의 사카이 부인, 도쿄의 세타와 뭇 현실, 이들의 실체를 준이치는 이미 경험하고 발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준이치는 아니다. 그는 글을 쓰고 작가가 될 터이지만 상경하던 시기에 품었던 상념과는 다른 형식, 내용, 차원의 글을 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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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렌 공주 지만지 고전선집 620
모리스 메테르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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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극작가 마테를링크에게 일약 명성을 안겨준 희곡으로 상징주의적 희곡의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당대는 사실주의, 나아가 자연주의가 문단에서 득세하던 시기였다. 소설과 시는 물론이고,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세세한 면을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추악하더라도 가감 없이 기술하고 묘사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자연주의의 약점은 인간 외면의 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고유한 내면세계에 대한 무관심 내지 무능력에 존재한다. 정신과 영혼의 심원하고 미묘한 반짝임을 타인의 눈으로서 관찰하는데 본질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과 극복으로 모색된 흐름이 소위 상징주의라고 하겠으며, 마테를링크는 희곡 장르에서 이를 철저히 구현한 작가라고 하겠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확실히 고전주의부터 리얼리즘에 이르는 극작들과는 차별화됨을 쉽사리 알게 된다.

 

배경 및 무대 설명의 생략. 각 막은 곧바로 인물들의 대화로 시작될 뿐 통상적 희곡의 구구절절하고 글로 그리는 듯한 상세한 무대 장면의 기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 및 무대에 대한 구체성의 결여는 작품에 추상성을 강화하며 작가에게 운신의 폭을 넓히는 재량을 부여한다.

 

사건과 행동에 대한 구체적 묘사의 회피. 얄마르 왕과 마르셀뤼스 왕 간 언쟁의 원인과 내용은 모호하게 언급될 뿐이다. 양국 간 전쟁으로 마르셀뤼스 왕이 죽고 말렌 공주의 나라로 폐허가 된 사실은 사후에 탑에서 탈출한 공주와 유모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다. 안 왕비가 말렌 공주를 교살하는 장면도 독자는 간접적 기술에 의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구체성의 회피와 모호성의 강조는 역시 작품에 비현실성을 부여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태도와 성격, 그리고 작가의 지향점에 대해 통합된 해석을 거부할 수 있게 부추긴다.

 

상징과 암시 장치의 매설. 독자에게 혼란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적 수법은 명확한 인식이 어렵게 사건과 행위에 대해 암시와 상징을 던져주면 된다. 모래사장에서 발이 푹푹 빠져서 전진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는 작가의 장치를 해석하고 되새기기 위하여 주춤거리다가 되돌아가기도 하는 등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양국 간 약혼식 날 장교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혜성과 비, 어두워진 하늘은 파국을 전조한다. 말렌 공주와 얄마르 왕자의 재회 장면에서 연인을 방해하는 부엉이와 두더지, 공주의 갑작스런 코피, 이상하게 울다가 죽는 분수의 물줄기 또한 연인의 재회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공주의 죽음과 관련되어서는 폭풍우와 벼락, 일식, 떨어진 성당의 십자가, 죽은 백조 등의 복선이 깔려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 악역을 도맡는 안 왕비는 유틀란트에서 남편인 늙은 왕을 가두고 폐위시킨 전력이 있다. 그녀가 일흔 살이 넘은 얄마르 왕과 결혼한 목적은 불분명하다. 그녀는 왕을 부추겨 마르셀뤼스 왕과 다투게 하여 왕국을 멸망시키고 약혼을 파혼시킨다. 늙은 왕은 갑작스럽게 심신이 노쇠하기 시작한다. 얄마르 왕자에 대한 안 왕비의 사랑은 일반적 모자(계모와 전처의 아들 사이지만)간의 애정과는 차이가 있음이 곳곳에서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의 딸 위글리안과 왕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무리한 일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인물들의 동일 대사의 반복적 표현. 조금만 이 작품을 읽어보면 표현상의 뚜렷한 특징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인물들은 의사를 주고받을 때 한 번의 대사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번 내지 서너 번씩 반복한다.

 

“얄마르: 그래요! 그래! 그래! 오! 오! (밖으로) 이리 와요! 이리 와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말렌! 말렌! 말렌! 말렌!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오! 오! 오!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5막 4장)

 

위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지만, 작품 전체에 이러한 반복적 대사가 지겨울 정도로 넘쳐난다. 작가의 모종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 반복을 통한 강조 효과 또는 영탄의 증폭으로도, 한 번의 대사로는 소통과 행동 유도가 어려운 부재와 단절의 인간관계의 암시로도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이 무엇인지지 알기 어렵다. 다만 연극으로 실제 상연이 될 때, 배우들이 참으로 고생하겠구나 싶다. 동일한 어조와 감정으로 대사를 반복하면 배우도 관객도 모두 지루하고 따분해 하지 않겠는가.

 

첫 희곡 작품이니만치 후기 이후의 원숙한 필치와 심화된 상징 기법과 구조를 여기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풍성함이 주는 재미는 대가의 세련된 맛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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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교카의 검은 고양이 일본명작총서 13
이즈미 교카 지음, 엄인경 옮김 / 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즈미 교카의 초기 작품을 모은 책이다. <살아있는 인형>은 1893년, <야행순사>와 <검은 고양이>는 1895년 작으로 이십대 초반의 무르익지 않은 풋풋한 교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다.


일단 초기작이므로 잘 짜여진 구조라든지 깊이 있는 통찰 또는 정교한 언어 표현 등에서는 아무래도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열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품 시기 초반의 교카는 다양한 장르 실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괴기와 환상 풍의 이야기, 일본 전통의 제재 등 교카의 트레이드마크는 아직 전형화 되지 못하였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이며, <야행순사>는 관념소설로 분류된다. <검은 고양이> 정도가 훗날 교카의 본령에 가깝다고 하겠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적 관점에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드러난다. 장르적 뿌리가 서구 사회에 기반을 둔만큼 일본 사회의 시각에서는 탐정의 존재와 지위가 애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아카기 저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요괴가 사는 집, 유령집 등의 호칭으로 불린다는 데 있다. 아무리 젊더라도 교카는 교카인 것이다. 


현실과 주인공의 관념이 갈등과 충돌을 빚을 때, 관념과 의지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인물의 말로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대치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살아 있는 인형>의 시즈에도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가출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사명감은 그녀를 아카기의 감금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탐정 다이스케도 시즈에를 구할 것인가 범인을 체포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아, 공무와 인정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정과 공무를 둘 다 받들기는 어렵다. 만약 공무를 택한다면 인정을 버려야 하고, 인정을 따르면 공무를 버리게 된다.” (P.110)


<야행순사>의 핫타 순사가 늙은 인력거꾼과 젖먹이가 딸린 거지 여인에게 대하는 태도를 봐서 공무상 인정을 기대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무를 택한다. 그가 맞닥뜨린 극단적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며 자신의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에도 여전하다. 그의 사후 사람들은 그를 인의롭다고 칭송하지만, 기실 그는 순사로서의 직무상의 책임, 즉 책무에 고지식하게 얽매여 죽음을 자초한 것에 불과하다. 관념은 현실에서 추출하여 현실을 비추는 사고이지 현실을 재단하고 현실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사람들은 곧잘 망각하고는 한다. 이데올로기를 생(生)에 우선시할 때 생기는 병폐가 무엇인지 우리는 역사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검은 고양이>의 어둡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이어지는 플롯은 작가가 단편 속에 서로 엇갈리는 아이디어와 복선을 여럿 삽입한 데서 연유한다. 맹인 도미노이치가 오사요에게 품은 집착에 가까운 사랑, 오사요가 보여주는 검은 고양이 구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갈등 구조이다. 반대편에는 화가 슈잔과 오시마와 오사요 간의 사랑의 삼각관계가 잠복해 있다. 


맹목적 사랑에 인성마저 파멸해가는 맹인과 그의 저주. 검은 고양이 구로의 표변은 저주의 결과로 도미노이치의 악령이 깃든 것인가 아니면 오사요의 변심에 따른 동물적 분노의 단순한 표출인가. 오시마가 도미노이치를 돕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냉혹하며 호탕한 여장부로서의 면모는 자신과 오사요가 사실은 같은 처지임을 깨닫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오히려 맹인에게 애원하는 연약한 장면과 극단적 대조를 보여 실소와 허탈을 자아내기조차 한다.


어쨌든 작중 검은 고양이는 결국 도미노이치의 원혼으로 판정되고 악마의 사자로서 최후의 전력을 다하다가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악역을 맡은 인물과 동물이 모두 사라졌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공인된 커플 오사요와 슈잔은 행복할까? 작가는 살포시 의문을 드리우면서 결말을 맺는다. 


사람들 간에 갈등과 증오가 발생하고 증폭되는 과정에는 사랑과 욕망의 미비와 실패에 따른 왜곡이 개입된다. 적절한 지점에서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은 개인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안녕과 평화의 출발이다. 도미노이치의 오사요에 대한 사랑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지위와 처지를 감안하여 발생 여부를 조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맹인은 사랑을 넘어서 욕망의 실현에 집착하면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핫타 순사의 연인 오코의 큰아버지의 비뚤어진 복수도 결국 사랑의 왜곡에서 출발한다. 


교카는 어린 시절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면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의 상념을 항상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집에 나오지 않지만 교카의 작품세계에는 게이샤가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가 후에 게이샤와 결혼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세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살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은 연약하지만 외부의 물리적 억압과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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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실 기담문학 고딕총서 7
이즈미 교카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수록작>
1. 고야성(高野聖)
2. 외과실
3. 눈썹 없는 혼령
4. 띠가 난 들판

 

2007년 이즈미 교카 작품집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일편으로 나왔으므로 작가의 삼백여 편 중 괴기성과 환상성이 두드러진 작품을 골랐다. 그런 면에서 <외과실>은 기획의도에 썩 부합하지는 않는다.

 

<고야성(高野聖)>은 문학동네 임태균 번역본에 대한 졸평을 참조 바라며 건너뛴다.

 

<외과실>은 <야행순사>와 더불어 1895년에 발표된 교카의 사실상 문단 데뷔작이다. 매우 짤막한 작품으로서 과감한 생략과 함축적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완독 후에도 뉘앙스가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초기작은 관념소설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의 직무와 윤리 등의 관념이 사랑과 현실 등과 충돌을 일으켜 결국 주인공의 죽음 또는 파멸로 이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외과의사 다카미네와 백작부인은 젊은 시절 공원에서 우연히 단 한번 스쳐지나간 적 밖에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람을 움직인다는” 말과 같이 한 번의 조우만으로 그들의 내심에는 상대에 대한 강한 연모의 정이 뿌리박혔다. 자식과 남편이 있음에도 연모의 마음을 놓지 않은 백작부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밀한 언사를 드러낼까봐 절체절명의 수술에서 마취를 거부한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 (백작부인)
“잊지 않았습니다.” (다카미네)

 

두 사람의 세상에는 오직 둘만이 존재하였다.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날 세상을 떠났다.

 

<띠가 난 들판>은 1911년 중기의 작품이다. 수년 전 시리즈로 나왔던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극중 주인공은 운명에 의해 죽음이 예정되었다. 제아무리 회피하고 저항하려고 발버둥 쳐 봤자 맹목적인 운명의 무자비한 힘은 그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더위에 지쳐 새벽에 깨어난 다다키치가 이야기를 나누게 된 빈집인 뒷집의 여인이 그렇다. 만삭인 그녀는 정원 산책 중 넘어져 사산을 하고 자신도 몸이 불편하게 된다. 이때부터 꽹과리를 치는 약장수 중이 기분 나쁘고 집요하게 그녀 주위를 배회한다,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병원에서는 죽음의 망령이 침대 옆 공중에서 그녀를 지켜본다. 그녀에게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망령은 잠시 그녀를 떠나는 듯하지만 종내 다시 돌아온다.

 

“너 참 끈질기구나, …… 우선 다른 데로 가겠다.”
“너, 아무래도 다시 왔어…….”

 

그 섬뜩한 커다랗고 검은 손은 다다키치 보는 앞에서 드디어 목적을 달성한다. 여인의 운명은 결국 그리될 것으로 정해졌던 것이었다.

 

<눈썹 없는 혼령>은 1924년 작으로 후기작 중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서두가 <초롱불 노래>와 마찬가지로 짓펜샤 잇쿠의 <도카이도 도보 여행기>를 인용하며 시작하여 흥미롭다. 주인공 사카이가 나라이에서 묶는 동안 일본의 여관 생활과 문화의 멋과 재미를 잔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들려주고 있다.

 

사카이와 여관 주방장의 대화는 신비와 기이에 대한 작가 자신의 의견이나 진배없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암시다.
“이 심산유곡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못 미치지요.”

 

아무도 없는 여관 별채 목욕탕에서 낯선 여자의 목욕소리가 잇달아 들린다. 방에서 눈썹을 민 낯선 여인의 혼령이 화장을 하는 장면을 비몽사몽간에 목도한다. 이후 소설은 여관 주방장의 이야기로 묘하게 진행된다. 화가의 간통 사건이 벌어지면서 도라지 연못의 눈썹 없는 혼령과, 화가를 찾아온 정부 오츠야의 이미지는 중첩된다. 화장을 마친 오츠야의 모습은 도라지 연못의 여인과 자매간으로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두 여인은 화장 후 “어울립니까?”하고 묻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여관방에서 사카이가 마주친 것은 도라지 연못의 혼령인가 아니면 마물로 오인 받아 총에 맞은 오츠야의 원혼인가? 전자와 후자는 상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동일한 현상의 발현인가? 여기서 작가는 혼령과 여인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뒤엉키게 제시하여 독자를 혼란 속으로 의도적으로 몰고 간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목격한 오츠야와 초롱을 든 주방장 자신이 다가오는 장면과 역시 “어울립니까?”하는 섬뜩한 물음은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의 등골마저 오싹 전율하게 만든다.

 

어쨌든 나름대로 교카의 판타지풍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시기별로 적절히 안분하여 수록작을 고심하여 선별한 투가 역력하다. 하지만 천려일실(千慮一失)! 교카 소개를 위하여 고른 배분에 주력하다 보니 <고야성>을 제외하면 그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성의 소설을 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온라인서점의 서평의 엇갈린 평점은 이를 말해 준다. 출간에 대한 찬사와 작품 선정에 대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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