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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렌 공주 ㅣ 지만지 고전선집 620
모리스 메테르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청년 극작가 마테를링크에게 일약 명성을 안겨준 희곡으로 상징주의적 희곡의 하나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당대는 사실주의, 나아가 자연주의가 문단에서 득세하던 시기였다. 소설과 시는 물론이고,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세세한 면을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추악하더라도 가감 없이 기술하고 묘사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자연주의의 약점은 인간 외면의 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인간의 고유한 내면세계에 대한 무관심 내지 무능력에 존재한다. 정신과 영혼의 심원하고 미묘한 반짝임을 타인의 눈으로서 관찰하는데 본질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과 극복으로 모색된 흐름이 소위 상징주의라고 하겠으며, 마테를링크는 희곡 장르에서 이를 철저히 구현한 작가라고 하겠다. 이 작품을 읽어 보면 확실히 고전주의부터 리얼리즘에 이르는 극작들과는 차별화됨을 쉽사리 알게 된다.
배경 및 무대 설명의 생략. 각 막은 곧바로 인물들의 대화로 시작될 뿐 통상적 희곡의 구구절절하고 글로 그리는 듯한 상세한 무대 장면의 기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경 및 무대에 대한 구체성의 결여는 작품에 추상성을 강화하며 작가에게 운신의 폭을 넓히는 재량을 부여한다.
사건과 행동에 대한 구체적 묘사의 회피. 얄마르 왕과 마르셀뤼스 왕 간 언쟁의 원인과 내용은 모호하게 언급될 뿐이다. 양국 간 전쟁으로 마르셀뤼스 왕이 죽고 말렌 공주의 나라로 폐허가 된 사실은 사후에 탑에서 탈출한 공주와 유모에 의해 비로소 드러난다. 안 왕비가 말렌 공주를 교살하는 장면도 독자는 간접적 기술에 의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구체성의 회피와 모호성의 강조는 역시 작품에 비현실성을 부여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태도와 성격, 그리고 작가의 지향점에 대해 통합된 해석을 거부할 수 있게 부추긴다.
상징과 암시 장치의 매설. 독자에게 혼란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적 수법은 명확한 인식이 어렵게 사건과 행위에 대해 암시와 상징을 던져주면 된다. 모래사장에서 발이 푹푹 빠져서 전진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는 작가의 장치를 해석하고 되새기기 위하여 주춤거리다가 되돌아가기도 하는 등 과감히 떨치지 못한다. 양국 간 약혼식 날 장교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혜성과 비, 어두워진 하늘은 파국을 전조한다. 말렌 공주와 얄마르 왕자의 재회 장면에서 연인을 방해하는 부엉이와 두더지, 공주의 갑작스런 코피, 이상하게 울다가 죽는 분수의 물줄기 또한 연인의 재회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공주의 죽음과 관련되어서는 폭풍우와 벼락, 일식, 떨어진 성당의 십자가, 죽은 백조 등의 복선이 깔려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인물. 악역을 도맡는 안 왕비는 유틀란트에서 남편인 늙은 왕을 가두고 폐위시킨 전력이 있다. 그녀가 일흔 살이 넘은 얄마르 왕과 결혼한 목적은 불분명하다. 그녀는 왕을 부추겨 마르셀뤼스 왕과 다투게 하여 왕국을 멸망시키고 약혼을 파혼시킨다. 늙은 왕은 갑작스럽게 심신이 노쇠하기 시작한다. 얄마르 왕자에 대한 안 왕비의 사랑은 일반적 모자(계모와 전처의 아들 사이지만)간의 애정과는 차이가 있음이 곳곳에서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의 딸 위글리안과 왕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무리한 일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인물들의 동일 대사의 반복적 표현. 조금만 이 작품을 읽어보면 표현상의 뚜렷한 특징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인물들은 의사를 주고받을 때 한 번의 대사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번 내지 서너 번씩 반복한다.
“얄마르: 그래요! 그래! 그래! 오! 오! (밖으로) 이리 와요! 이리 와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말렌! 말렌! 말렌! 말렌!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오! 오! 오!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목이 졸렸어요!” (5막 4장)
위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지만, 작품 전체에 이러한 반복적 대사가 지겨울 정도로 넘쳐난다. 작가의 모종의 의도가 개입된 결과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 반복을 통한 강조 효과 또는 영탄의 증폭으로도, 한 번의 대사로는 소통과 행동 유도가 어려운 부재와 단절의 인간관계의 암시로도 추론이 가능하다. 그것이 무엇인지지 알기 어렵다. 다만 연극으로 실제 상연이 될 때, 배우들이 참으로 고생하겠구나 싶다. 동일한 어조와 감정으로 대사를 반복하면 배우도 관객도 모두 지루하고 따분해 하지 않겠는가.
첫 희곡 작품이니만치 후기 이후의 원숙한 필치와 심화된 상징 기법과 구조를 여기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재료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풍성함이 주는 재미는 대가의 세련된 맛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