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 교카의 검은 고양이 일본명작총서 13
이즈미 교카 지음, 엄인경 옮김 / 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즈미 교카의 초기 작품을 모은 책이다. <살아있는 인형>은 1893년, <야행순사>와 <검은 고양이>는 1895년 작으로 이십대 초반의 무르익지 않은 풋풋한 교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다.


일단 초기작이므로 잘 짜여진 구조라든지 깊이 있는 통찰 또는 정교한 언어 표현 등에서는 아무래도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열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품 시기 초반의 교카는 다양한 장르 실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괴기와 환상 풍의 이야기, 일본 전통의 제재 등 교카의 트레이드마크는 아직 전형화 되지 못하였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이며, <야행순사>는 관념소설로 분류된다. <검은 고양이> 정도가 훗날 교카의 본령에 가깝다고 하겠다.


<살아 있는 인형>은 탐정소설적 관점에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드러난다. 장르적 뿌리가 서구 사회에 기반을 둔만큼 일본 사회의 시각에서는 탐정의 존재와 지위가 애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아카기 저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요괴가 사는 집, 유령집 등의 호칭으로 불린다는 데 있다. 아무리 젊더라도 교카는 교카인 것이다. 


현실과 주인공의 관념이 갈등과 충돌을 빚을 때, 관념과 의지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인물의 말로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대치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살아 있는 인형>의 시즈에도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가출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사명감은 그녀를 아카기의 감금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탐정 다이스케도 시즈에를 구할 것인가 범인을 체포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한다.


“아아, 공무와 인정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정과 공무를 둘 다 받들기는 어렵다. 만약 공무를 택한다면 인정을 버려야 하고, 인정을 따르면 공무를 버리게 된다.” (P.110)


<야행순사>의 핫타 순사가 늙은 인력거꾼과 젖먹이가 딸린 거지 여인에게 대하는 태도를 봐서 공무상 인정을 기대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공무를 택한다. 그가 맞닥뜨린 극단적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며 자신의 육체적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에도 여전하다. 그의 사후 사람들은 그를 인의롭다고 칭송하지만, 기실 그는 순사로서의 직무상의 책임, 즉 책무에 고지식하게 얽매여 죽음을 자초한 것에 불과하다. 관념은 현실에서 추출하여 현실을 비추는 사고이지 현실을 재단하고 현실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사람들은 곧잘 망각하고는 한다. 이데올로기를 생(生)에 우선시할 때 생기는 병폐가 무엇인지 우리는 역사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검은 고양이>의 어둡고 괴기스러운 분위기와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이어지는 플롯은 작가가 단편 속에 서로 엇갈리는 아이디어와 복선을 여럿 삽입한 데서 연유한다. 맹인 도미노이치가 오사요에게 품은 집착에 가까운 사랑, 오사요가 보여주는 검은 고양이 구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갈등 구조이다. 반대편에는 화가 슈잔과 오시마와 오사요 간의 사랑의 삼각관계가 잠복해 있다. 


맹목적 사랑에 인성마저 파멸해가는 맹인과 그의 저주. 검은 고양이 구로의 표변은 저주의 결과로 도미노이치의 악령이 깃든 것인가 아니면 오사요의 변심에 따른 동물적 분노의 단순한 표출인가. 오시마가 도미노이치를 돕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냉혹하며 호탕한 여장부로서의 면모는 자신과 오사요가 사실은 같은 처지임을 깨닫는 순간 허물어지면서 오히려 맹인에게 애원하는 연약한 장면과 극단적 대조를 보여 실소와 허탈을 자아내기조차 한다.


어쨌든 작중 검은 고양이는 결국 도미노이치의 원혼으로 판정되고 악마의 사자로서 최후의 전력을 다하다가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악역을 맡은 인물과 동물이 모두 사라졌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공인된 커플 오사요와 슈잔은 행복할까? 작가는 살포시 의문을 드리우면서 결말을 맺는다. 


사람들 간에 갈등과 증오가 발생하고 증폭되는 과정에는 사랑과 욕망의 미비와 실패에 따른 왜곡이 개입된다. 적절한 지점에서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은 개인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안녕과 평화의 출발이다. 도미노이치의 오사요에 대한 사랑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지위와 처지를 감안하여 발생 여부를 조절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맹인은 사랑을 넘어서 욕망의 실현에 집착하면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핫타 순사의 연인 오코의 큰아버지의 비뚤어진 복수도 결국 사랑의 왜곡에서 출발한다. 


교카는 어린 시절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면서 모성에 대한 그리움의 상념을 항상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집에 나오지 않지만 교카의 작품세계에는 게이샤가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가 후에 게이샤와 결혼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세 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살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은 연약하지만 외부의 물리적 억압과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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