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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아스와 멜리장드 ㅣ 지만지 희곡선집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이용복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테를링크의 이 희곡은 첫 희곡 <말렌 공주>의 3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다. 어찌 보면 원작보다도 이를 토대로 한 당대 및 후대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더 성가가 높아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쟁쟁한 음악가들이 곡을 썼다. 드뷔시, 포레, 쇤베르크, 시벨리우스가 오페라 및 관현악곡을 썼다. 작곡가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던 연유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더해 상징주의적 희곡으로서의 철두철미한 성격에 기인한다.
하나의 산문 작품에 이렇게 시종일관 다양한 상징과 암시와 뉘앙스를 무지막지할 정도로 쑤셔 넣은 사례는 문학사상 다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작품을 재독하면서 일독에서 간과했던 문구와 표현들이 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경우가 많았다. 삼독, 사독의 결과는 어떠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플롯 면에서 이 작품은 남편과 젊은 아내, 그리고 남편의 젊은 아버지가 다른 동생 간의 불륜이 뒤섞인 삼류 드라마에 가깝다. 아내는 남편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동생과 서로 사랑을 느낀다. 남편은 둘 사이를 의심하고 마침내 밀회의 현장에서 동생을 죽인다. 부부의 관계는 상호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엮여져야 하는 게 이론이라면,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그치지 않는 연유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젊은 남녀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에 비례하여 덩치 큰 골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칫 그에 대한 시각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다. 원시인처럼 체격에 비해 두뇌는 뒤떨어진다는 인식 말이다. 제1막 제3장에서 주느비에브는 골로를 항상 신중하고 진지하고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한다. 골로는 현실적 인물이다. “사람들은 기쁨이란 것을 매일 누리지는 않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해”(제2막 제2장). 그는 꿈과 상징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냥감을 쫓듯이 실질만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와 멜리장드는 애초부터 부합하지 않는 상대였다.
이 희곡을 실제 연극으로 상연한다면 연출자들은 심대한 고충을 겪지 않을까. 통상적 연극과 같이 접근하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낳게 된다. 대사가 오롯한 대사가 아니다. 대사가 품고 있는 함의를 관객이 이해하려면 음조와 뉘앙스는 물론이고 배경 세팅에도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감추고 혹은 드러내는 상징과 암시들의 일부(그 전모는 오직 작가만이 알 수 있으리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문과 문지방, 그리고 하녀들.
제1막 제1장은 엉뚱하게도 문지기와 하녀들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녀들은 문지방을 닦지만 대홍수의 물을 다 부어도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할 것이라고 문지기와 더불어 중얼거린다. 지워야 되는 흔적이 무엇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제3막 제5장에서 이뇰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종종 문 때문에 싸운다고 말한다. 문이 열려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지막 제5막 제2장에서 멜리장드의 죽음이 임박해지자 하녀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말없이 벽을 따라 늘어서서 기다리고, 멜리장드의 죽음을 가장 먼저 인지한다.
문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다. 안은 이승이며, 밖은 저승이다. 문지방은 곧 차안과 피안의 경계일 것이다. 운명은 문지방을 통해 드나든다. 문이 열려 있으면 운명의 출입이 용이해지며 그만큼 인간에 대한 운명의 개입은 강화된다. 문이 닫혀 있으면 생과 사의 영역이 분명해진다. 더 이상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제4막 제4장에서 문이 모두 닫히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 멜리장드는 차라리 잘됐다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제아무리 내세를 위해 심신을 정화하더라도 원조의 흔적을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하녀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독자와 관객, 등장인물에게 직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 곧 운명의 여신에 가깝다. 제5막 제1장의 대사를 살펴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우린 언제 올라가야 할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이제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해...”
운명의 절대성과 가혹성.
마테를링크의 작품에서는 운명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제아무리 등장인물이 난다 긴다 하여도 결국 운명이 심어놓고 파놓은 함정에 빠져 좋든 싫든 간에 정해진 운명의 길을 따르게 된다. 등장인물 누구도 운명의 힘에 거스르려는 의지를 보인다. 숙명처럼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상대론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타인은 외부에서 관찰하고 지켜보지만 인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의 운명과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늙은 아르켈은 그래서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기만을 주장한다.
사람은 약점과 한계를 지닌 유한한 존재다. 그는 자신도 길을 잃었음에도 타인을 인도하려고 하며(제1막 제2장), 잔잔한 바다만 보며 나중에 올 폭풍우를 예견하지 못한 채 배를 타고 나간다(제1막 제4장). 어린 이뇰드조차 운명에 대한 인간의 역부족을 양떼를 통해 절감한다. “아! 아!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군......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목동! 목동! 양들이 어디로 가는 거야?”(제4막 제3장)
이야기가 진행되는 왕국은 결코 태평성대의 낙원이 아니다. 심한 기근이 왕국을 황폐하게 만들어 거지들이 헤매고 있으며, 영역 밖에서는 적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제2막 제3장과 제4장),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제4막 제2장). 왕궁의 토대도 단단하지 않다. 성 전체는 지하 동굴 위에 세워져 있는데, 곳곳에 균열이 생겨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며, 웅덩이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올라온다(제4막 제3장).
행복의 의미.
멜리장드는 자신의 처지와 심적 상태를 행복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작중에서 이 대사는 수차 반복되어 나타난다. 제2막 제2장에서 골로에게 두 번 말하며, 제4막 제2장에서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한 잠시 후, 행복하지 않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외친다. 행복이라는 가치의 연원과 근거는 무엇인가? 물질적 요인의 충족을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행복은 영혼과 정신적 차원의 문제다.
반지의 의미
제2막 제1장에서 멜리장드는 펠레아스와 샘가에서 대화하던 중 반지를 샘에 빠뜨린다. 펠레아스의 주의에도 멜리장드는 반지를 갖고 일부러 위험하게 장난을 친다. 반지의 분실은 곧 그녀의 고의성임을 독자는 알 수 있다. 그녀에게 반지는 골로와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의 올가미였던 것이다. 반면 골로에게 그 반지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것이다. “당신은 그게 어떤 것인지 몰라. 당신은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 몰라.”(제2막 제2장).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눈물과 떠나려는 의지.
남녀 주인공은 자주 운다. 별다른 외적 이유가 없음에도 그들은 남들과 달리 눈물을 잘 흘린다(제1막 제3장, 제3막 제1장과 제5장). 펠레아스는 계속하여 떠난다는 말을 되풀이한다(제1막 제4장). 실제로 그는 떠나려고 하지만 여건상 출발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제2막 제4장. 멜리장드도 왕국에 영구히 정주할 것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어린 이뇰드는 그것을 직감한다. 그녀는 골로에게 떠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제2막 제2장).
우는 행위는 통상 슬픔의 발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나날이 슬픈 것인가?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서 운다. 이유 없는 울음은 존재에 대한 본원적 슬픔에 기인한다. 인간의 유한성과불완전성보다 더 큰 눈물의 원천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왜 떠나고자 하는가?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떠나고자 하지 않는다. 고통과 슬픔이 멈추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떠나고자 한다. 떠나서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목적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길 잃은 존재이며, 운명의 맹목적 인도에 우왕좌왕 휩쓸려 다니는 가련한 양떼다. 떠나는 행위는 외형적인데 국한하지 않는다. 내면에서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 떠남은 여행도, 도망도 될 수 있으며 초월로 이해될 수 있다.
형제간의 운명적 불행.
골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머리카락으로 서로 유희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펠레아스를 지하 동굴로 데려온다. 펠레아스는 부패한 웅덩이에 빠질 뻔한 위험을 겪는데, 이는 실수와 우연이 아니라 골로의 살해 의도가 깃들여 있음을 짐작케 한다. 골로는 흥분하여 목소리가 떨릴 지경이었다(제3막 제3장). 압살롬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윗의 아들이다. 자신의 동복누이를 강간하고 죽인 이복형제를 죽인 후 끝내 다윗에게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골로는 멜리장드에게 폭력을 저지르며 압살롬의 이름을 외친다(제4막 제2장). 형제 살해의 불행한 운명은 이미 예고된 셈이다.
빛(밞음)과 어둠.
이 작품을 연극으로 상연하려면 무대 연출에 세심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특히 빛과 어둠의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궁전의 전체적 이미지는 어둠이다. 지하 동굴은 어둠의 분위기를 배가한다. 인물들은 빛과 어둠을 가지고 다툰다. 밞음을 지향하는 이뇰드와 어둠 속에 있고자 하는 골로(제3막 제5장). 보리수 그늘과 밝은 곳을 엇갈리게 희망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제4막 제4장). 빛과 어둠은 흔히 선과 악으로 해석된다. 또는 생과 사의 세계로도 이해된다. 땅 밑을 사후세계로 보는 관점은 세계 공통이다.
순수와 진실.
멜리장드의 눈에서 아르켈은 거대한 순수를 발견할 때, 골로는 순수의 순수성을 의심한다(제4막 제2장). 아르켈은 멜리장드에게서 새 시대의 문을 열 사람임을 예상한다. 새 시대는 무슨 의미에서 구 시대와 구별되는가? 그것은 순수함에서이다.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며, 진실의 절대성이 의심받는 현실, 이것이 구 시대다. 현실과 실제가 존중받는 것은 허위와 몽상이 아닌 순결한 내면과 밝은 이성의 빛이 환하게 비출 때다. 운명의 덫은 사람들의 순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쳤지만 세상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제4막 제4장).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은 계속적으로 진실을 요구한다(제5막 제2장).
현실이 자신을 거부할 때 궁극적 해소책은 결국 떠나는 것이다. 영원한 떠남은 불가피한 동시에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역설적으로 표현된다(제4막 제4장). 정신 부재의 현실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녀는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녀는 이유없이 태어났어요...죽기 위해. 그리고 이유없이 죽는 겁니다...”(제5막 제2장). 멜리장드는 인간 세상이 아닌 숲 속에서 살아야 존재가 아니었을까?
보는 행위와 의미.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사람의 내면을, 물질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고. 작품에서 본다는 의미는 단순한 시각적 기능을 가리키지 않는다. 겉이 아닌 내면을, 현재가 아닌 미래를, 운명을 읽을 때 비로소 본다고 할 수 있다. 골로는 애초부터 보려고 하지 않는다. 늙은 아르켈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제1막 제3장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한다. “난 몹시 늙었지만 아직 내 안에서 한순간도 분명하게 본 적이 없구나.”.
반면 그는 제2막 제4장에서는 펠레아스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난 더 이상 내 스스로 보지는 못하지만, 네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자 하는 날, 너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마.”. 제대로 본 적 없는 이가 보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현상, 그것이 곧 인간의 모순된 모습이다.
결국 아르켈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멜리장드의 죽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음을 자탄한다(제5막 제2장)
이 희곡이 남녀 간의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면, 펠레아스가 제4막에서 죽임을 당한 후 멜리장드가 같이 죽지 않고 제5막이 덧붙여진 것은 사족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테를링크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골로의 애증 관계를 자신의 상징적 운명극을 구성하기 위한 장치로서만 활용하였다. 이들의 사랑과 고뇌는 주제가 아니라 제재에 불과하다. 제1막 제1장과 제5막 제1장에서 하녀들의 대사를 곱씹어올 필요가 있다. 마테를링크가 고심하여 설계했지만, 드뷔시가 간과한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